[63화] 영지전 (2)
“좋아. 아주 좋은 의견이군. 자포리자의 왼팔을 자르는 것으로 하지. 평생 치욕을 안고, 몬스터나 막으며 죽어 가는 꼴을 보는 것이 훨씬 재밌겠군. 보름 뒤, 영지의 경계선에 있는 스칸디아 평원에서 싸우기로 했다. 그때까지 준비를 끝내 놓도록. 영지전을 끝낸 뒤 스탄다비아에서 돈이 될 만한 건 모두 긁어 와. 제대로 빈털터리로 만들어 놔야 객기 부린 것을 평생 후회하겠지. 병신 같은 새끼. 계란으로 바위를 깨려 하다니. 그놈이 영지민들을 그리 사랑한다고 하는데, 평생 그들의 원망을 듣게 하여 주지. 하하하하하하!”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좋은지 나바론은 통쾌하게 웃었다.
보름 뒤.
인적이 드문 스칸디아 평원에 많은 사람이 들어찼다.
두 영지의 군대가 스칸디아 평원의 한쪽 끝을 차지한 채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알리사 병사들에겐 확실히 여유가 느껴졌다.
그에 반해 스탄다비아 병사들에겐 비장함이 엿보였다.
스탄다비아의 병력은 총 300명이었다.
병사 100명과 영지민 20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상대 쪽에 서 있는 알리사 측의 병력 역시 300명이었다.
하지만 순수 병사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군대의 질로 따지면 알리사 쪽이 훨씬 높을 수밖에 없었다.
영지민과 달리 병사들은 월급을 받으며 전쟁을 대비하기 위해 전문적으로 길러진 집단이었다.
“흥!”
나바론이 더운 콧김을 내뿜었다.
“병사들의 숫자가 안 되니 영지민을 끌고 왔구나. 병사들은 가죽 갑옷이라도 걸치고 있는데, 영지민은 평상시 입던 옷을 그대로 입고 나왔군. 영지민을 그리 위한다는 인간이 갑옷도 주지 않고 이런 지옥으로 끌고 오다니. 하여간, 평소 온갖 잘난 척하고 설치던 놈들이 막상 위기가 오면 그 더러운 본성이 그대로 표출된다니까. 얼마나 그들의 생명을 우습게 봤으면… 쯧쯧쯧.”
나바론은 스탄다비아 군대를 보고 마음껏 비웃었다.
그도 그럴 것이, 병사와 영지민은 확연히 구분되었다.
이건 전투에서 엄청난 마이너스였다.
영지민이 병사와 같은 복장을 갖추었다면, 최소한 적의 비웃음을 사지는 않았을 것이다.
막 농사짓다 온 거 같은 옷차림을 한 그들을 하찮게 여기는 것은 당연했다.
“그나마 빈손이 아닌 게 다행인가? 허~ 참, 내가 오히려 적을 걱정하고 있다니. 웃기지도 않는군.”
영지민이 들고 있는 것은 모두 창으로 보였다.
이 시대의 창은 대부분 단단한 나무 끝에 창날만 철로 만들어 끼워 넣었다.
창은 훈련받지 않은 사람들이 쓰기에 가장 좋은 무기였다.
간단한 찌르기 동작만 익혀도 전투에 투입될 수 있었으니까.
사정거리가 긴 만큼, 단지 앞으로 내밀기만 해도 적에게 위협을 줄 수 있었다.
하지만 정식으로 훈련을 받은 병사들과 부딪치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훈련받은 병사들이 창을 뚫고 거리를 좁히는 건 별로 어렵지 않았다.
마나를 지닌 그들은 그만한 힘과 전투 기술이 있었다.
“죽으려면 혼자서 죽지. 자기 죽음에 애꿎은 영지민을 데려가려 하고 있군. 용감한 척은 다 하더니, 도대체 저게 무슨 꼴이야? 설마? 이곳에 영지민을 끌고 온 게 스탄다비아를 일부러 멸망시키려고 한 것인가? 여기 끌려온 젊은 남자들이 모두 죽어 나간다면, 스탄다비아는 멸망했다고 보는 게 맞겠지. 그럼 몬스터들이 이곳까지 들이닥칠 것이고. 악독한 놈. 영지민을 모두 희생시켜 나에게 복수를 할 생각을 하다니. 영주란 놈이… 참으로 지독하구나. 칼라일의 말을 듣길 잘했네. 하마터면 저놈의 계략에 넘어갈 뻔했어. 나도 성질을 좀 줄여야겠군.”
나바론은 자포리자의 의중을 완전히 꿰뚫어 본 자신이 뿌듯했다.
스탄다비아의 군대를 계속 보고 있자니 이제는 한심해서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칼라일에게 모두 맡길 걸, 괜히 이곳에 나왔나?”
자포리자와 같은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나쁠 만큼 철저히 그를 무시하고 우습게 봤다.
알리사 병사들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그들의 눈에도 스탄다비아 군대의 모습은 하찮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한 가지 이상한 건, 스탄다비아 영지민이 들고 있는 창이 자루까지 모두 새까맣게 칠해져 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새까맣게 칠해진 창을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생각할수록 짜증 나는군. 저런 한심한 놈이 감히 나와 영지전을 벌일 생각을 하다니. 이럴 줄 알았으면 더욱 철저히 짓밟았어야 했어. 이게 다 내가 마음이 약해서 어중간하게 밟았기 때문이야. 이 영지전이 끝나면 제대로 된 지옥을 보여 주지. 자포리자, 각오하라고.”
나바론은 얼른 자신의 짜증을 풀고 싶었다.
그러려면 이 하찮은 싸움을 빨리 끝내야 했다.
자포리자가 죽기 위해 만든 싸움에 동조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칼라일.”
나바론의 부름에 칼라일이 즉시 말을 몰고 다가왔다.
“충!”
칼라일이 오른 주먹을 가슴에 대고 절도 있게 경례했다.
“자포리자의 팔을 자르고, 이 무의미한 전투를 끝내도록.”
“알겠습니다.”
칼라일이 힘 있게 대답하고는 말을 타고 앞으로 나아갔다.
“자포리자는 들어라!”
칼라일이 스탄다비아 군대를 향해 소리쳤다.
“그대가 스탄다비아에서 가장 강하다고 들었다. 나와 겨루어 누가 진정한 강자인지 승부를 내자!”
칼라일이 위엄 있는 말투로 일기토를 신청했다.
“좋다. 승부를 보자.”
자포리자는 당연하다는 듯이 싸움을 받아들였다.
그는 맞서 오는 적에게 한 번도 등을 보인 적이 없었다.
앞으로 나가려는 순간, 기사 블라도가 급히 그의 앞을 막았다.
“영주님, 안 됩니다. 저자는 오러 유저 상급의 실력자입니다. 차라리 제가 대신해 싸우겠습니다.”
그는 자신이 죽을 걸 알면서도 자포리자를 대신에 일기토에 나서려 했다.
자포리자와 블라도는 모두 오러 유저 중급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들 중 누구도 오러 유저 상급인 칼라일과 싸워서 이길 수는 없었다.
“그대의 충성심은 이미 알고 있다. 블라도, 나를 믿어라. 내가 아무런 생각 없이 이 영지전을 수락한 것이 아니다.”
자포리자는 블라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곤 말을 타고 앞으로 나갔다.
두 영지의 병사들이 이 싸움에 집중했다.
이 싸움의 결과가 승패에 엄청난 영향을 끼칠 거라는 건, 양쪽 진영 모두 잘 알고 있었다.
알리사 병사들의 표정은 여유롭지만, 스탄다비아 병사들의 얼굴엔 근심이 가득해 보였다.
그들도 칼라일이 얼마나 강한지 소문으로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칼라일이 말의 옆구리를 차자 울음소리와 함께 말은 빠르게 앞으로 달려 나갔다.
손에 든 칼을 앞으로 쭉 내밀고 가슴을 활짝 폈다.
여유가 넘치는 모습이었다.
그의 검이 파랗게 빛을 내기 시작했다.
마나였다.
마나를 깨우친 기사답게 검에서 마나의 빛이 발현되었다.
“와아아아아아!”
“칼라일!”
“칼라일!”
“칼라일!”
알리사 병사들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칼라일은 병사들의 함성에 상기되어 온몸으로 자신감을 내뿜었다.
그 모습에 병사들의 사기가 하늘을 찔렀다.
자포리자 역시 말을 빠르게 몰아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도 자신의 롱소드를 앞으로 내밀었다.
하지만 롱소드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스탄다비아 병사들의 안타까운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명색이 영주란 작자가 기사들의 싸움도 제대로 모르나? 격돌하기 전 미리 마나를 운용하는 것은 당연한 상식이거늘. 공격과 동시에 마나를 운용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다분히 실수할 확률도 분명 존재한다. 특히 네놈 같이 오러 유저 중급이면 그 확률은 더욱 높아지지. 목숨을 건 싸움에서 작은 실수로 목숨을 잃는 건 부지기수다. 음, 설마 누구나 알고 있는 이런 기본적인 것도 모를까? 역시 죽을 자리를 찾아 나온 게 확실하군. 흥! 절대 네놈의 뜻대로 해 줄 수는 없지. 남은 생은 벌레같이 비참하게 살아가라.’
칼라일은 비웃음을 흘리며 말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말이 더욱 빠르게 앞으로 달려 나갔다.
자포리자와의 거리가 10m도 남지 않았다.
이제 눈 깜짝할 사이에 목숨을 걸 승부가 시작될 터였다.
“응?”
일기토에 집중하고 있던 나바론의 입에서 의아함이 튀어나왔다.
자포리자의 롱소드가 갑자기 파랗게 빛을 내는 것이 보였다.
오러 유저 중급으로 알려진 그의 롱소드가 마나의 빛을 발현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가 의아함을 느낀 건, 자포리자의 롱소드에 서린 마나의 빛이 칼라일의 칼에 서린 마나의 빛보다 훨씬 선명했기 때문이다.
믿기 싫었지만, 그도 오러 유저인 만큼 자포리자의 롱소드에 실린 마나의 빛이 더 진하다는 걸 분명히 볼 수 있었다.
순간, 그의 뇌리에 왠지 모를 불길한 예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안 돼!”
당장이라도 일기토를 말려 보려 큰소리를 질렀지만, 이미 늦어 버렸다.
싸움은 벌어졌다.
칼라일은 자포리자가 마나를 일으키는 모습에 크게 코웃음을 쳤다.
‘흥! 막상 죽으려니 겁을 먹은 거야? 참으로 치졸한 작자군. 귀족이란 사람이 도대체 저게 무슨 꼴이야? 마음 같아서는 한칼에 죽여 버리고 싶군.’
그는 여전히 여유로웠다.
자포리자는 자신보다 낮은 오러 유저 중급이었다.
한 단계 차이지만, 그 차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존재했다.
오러 유저 중급이 상급을 이기려면 최소 다섯 명은 필요했다.
자포리자가 늦게라도 마나를 표출했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두 개의 검이 서로의 목숨을 노리고 휘둘러졌다.
공중에서 검이 맞부딪치는 순간, 이변이 일어났다.
서걱!
분명 검끼리 부딪쳤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소리가 들렸다.
몬스터의 목을 베는 듯한 소리가 난 것이다.
그의 검이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고 반으로 잘렸다.
칼라일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자 크게 당황했다.
입이 쩍 벌어지고, 숨이 턱 하고 막혀 왔다.
“말도 안 돼!”
자신이 잘랐으면 잘랐지, 자신의 검이 잘리면 안 되는 것이었다.
마나의 이해도가 훨씬 낮은 자포리자가 자신의 검을 자르는 건 불가능했다.
분명 자포리자에게 느껴지는 마나는 오러 유저 중급이 맞았다.
다만, 한 가지 이상한 건 있었다.
그의 롱소드에서 발현된 마나의 빛이 점점 진해진다는 것이다.
그 순간, 이 상황이 가능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설마, 자포리자의 롱소드가 왕국에 몇 자루 존재하지 않는 전설의 금속으로 만든 것이란 말인가!’
전설의 금속은 마나를 강하게 결집하는 기능이 있었다.
기존의 어떤 금속보다 더 많은 마나를 받아들였고, 단단하게 뭉쳐 최상의 병기로 탈바꿈했다.
지지리도 가난한 스탄다비아의 영주가 왕국의 최고위급 귀족도 가지기 힘들다는 검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었다.
스탄다비아 영지 모두를 팔아도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자신의 검이 잘린 것도 사실이었다.
검이 잘린 짧은 순간, 수많은 의문이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칼라일의 의문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자포리자의 롱소드가 자신의 검을 반 토막 내고도 속도가 전혀 떨어지지 않은 채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목에서 끔찍한 고통이 느껴졌다.
단 한 수였다.
한 수 만에 이 근처 지역에서 가장 강하다고 알려진 칼라일은 자포리자에게 죽임을 당했다.
등을 누르고 있는 무게가 사라진 말은 거침없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칼라일은 목과 몸이 분리된 채 무성한 잡초 사이로 서로 떨어져 뒹굴었다.
감지 못한 그의 눈에는 수많은 의문이 맺혀 있었다.
칼라일의 짐작이 모두 틀린 건 아니었다.
자포리자의 롱소드는 그가 생각하는 전설의 금속이 맞았다.
물론 자포리자가 전설의 금속을 살 돈은 당연히 없었다.
하지만 그의 뒤에는 경일이 있었다.
왕국의 왕보다 몇백 배는 더 강력한 뒷배가 든든하게 버티고 있는 것이다.
경일은 던전에 생긴 광산에 광부들이 처음으로 캔 금속을 자포리자에게 보냈다.
던전 금속은 철보다 훨씬 가공이 쉬웠다.
순식간에 그의 롱소드를 만들 수 있었다.
양쪽의 사기가 극명하게 갈렸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