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기사의 명예
진정한 광기에 물든 몬스터와의 전투에서 잔뼈가 굵은 이들은 알리사 병사의 기세에 전혀 밀리지 않았다.
더군다나 자신들의 앞에서 보병들이 진을 짜서 적을 막고 있었다.
겁이 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그저 적을 향해 열심히 창을 뻗으면 되는 일이었다.
강철 창은 절대 부서지지 않았다.
자신이 스탄다비아의 영지민이자, 영주가 자포리자라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넘쳐흘렀다.
제대로 된 훈련을 받은 적은 없었지만, 몬스터와의 전투에서 자연스레 익힌 창술을 알리사 병사들을 상대로 마음껏 펼쳤다.
알리사 병사들은 덫에 갇혀 마지막 발악을 하는 사냥감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이 죽을힘을 다해 몸부림쳐 보지만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그들이 당황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럴수록 더 신이 났다.
스탄다비아 영지민들은 그동안 참고 참았던 울분을 담아 한 번이라도 더 공격하려고 노력했다.
기울어진 승부의 추는 알리사 병사들의 정신과 체력을 급속도로 빼앗아 갔다.
몸이 한계에 다다르자 실수는 점점 잦아졌다.
“아아악!”
“크아아아악!”
“우욱!”
비명이 들렸다.
화음이 쌓이듯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알리사는 빠르게 무너져 내렸다.
자포리자와 그의 기사단은 자신들을 향해 달려오는 알리사 기사단을 노려봤다.
“돌격!”
그는 명령을 내림과 동시에 가장 먼저 앞으로 달려 나갔다.
기사단이 그의 뒤를 따랐다.
적의 기사단의 숫자가 더 많았지만, 진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손에 쥐고 있는 롱소드는 끊임없이 힘을 주었다.
선인이 자신의 등 뒤에 있기에 무서울 게 없었다.
휘잉!
자포리자는 크게 반원을 그리며 가장 앞에서 달려오는 알리사 기사를 향해 롱소드를 휘둘렀다.
“이런!”
알리사 기사는 생각보다 멀리서 날아오는 공격에 순간 놀랐다.
급하게 말고삐를 당겨 보지만, 말은 달려가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급하게 롱소드를 막아 보려고 검을 앞으로 내밀었다.
파랗게 빛이 나는 롱소드는 그의 검을 자르고, 말의 목을 지나쳐 자신의 허리를 반으로 갈라 버렸다.
그의 상체는 말의 목과 함께 뒤로 날아갔다.
허리에서 느껴지는 끔찍한 고통과 함께 몸이 떠오르는 부유감이 느껴졌다.
그 순간, 두 눈이 경악으로 물들어 부릅떠졌다.
말은 목이 사라진 것도 모른 채 자신의 하체와 함께 앞으로 달려 나가는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
알리사 기사단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이건 오러 유저 중급이 하기엔 불가능한 묘기였다.
이번 공격이 얼마나 강렬했는지 불명예를 무릅써서라도 도망치려는 알리사 기사가 몇 명이 보일 정도였다.
“썅! 이 새끼들아 쫄지 마! 숫자는 우리가 더 많아!”
제법 대가 센 알리사 선임 기사의 외침이 자포리자의 귀에 들렸다.
그는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저런 자를 내버려 두면 적의 사기가 올라갈 수도 있었다.
먼저 죽여서 적의 사기를 꺾을 필요가 있었다.
“이런 제기랄! 죽어, 이 새끼야!”
선임 기사가 자신을 향해 빠르게 창을 찔러 오는 것이 보였다.
공기를 가르며 찔러 오는 창은 제법 위력적이었다.
‘큰소리칠 만한 실력이군.’
흔들리는 말 위에서도 마치 땅을 밟고 서 있는 듯이 안정적으로 창을 뻗어 왔다.
자포리자는 피하지 않았다.
이 중에서 누구보다 무(武)에 진심인 사람이 자신이라 확신했다.
스탄다비아가 어려움에 벗어나기 위해서는 누구보다 자신이 먼저 노력하고 강해져야 했다.
어릴 때부터 검술을 쉬지 않고 수련했고, 몬스터와 끊임없이 싸워 왔다.
몸속의 마나가 부족할 뿐, 실력 면에서는 누구보다 자신이 있었다.
그는 거대한 롱소드를 마치 단검 다루듯 가볍게 움직여 창을 쳐 냈다.
놀라운 기술이었다.
“헉!”
알리사 기사는 자신의 창이 순식간에 방향을 바꿔 엉뚱한 곳으로 뻗어 가자, 말이 달리는 방향을 바꾸려고 고삐를 급하게 당겼다.
하지만 이미 창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다 보니 그의 시도는 쓸모없는 짓이었다.
자포리자의 롱소드가 자신의 몸을 베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커다랗게 뜬 그의 눈동자엔 자신의 몸이 잘려 나가는 순간이 그대로 박제되었다.
늑대 떼에 한 마리 성난 사자가 뛰어들었다.
늑대는 사자의 강력한 발톱이 자신의 몸을 헤집을 때마다 신음했다.
날카로운 어금니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목줄을 물어뜯었다.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단말마의 비명을 질렀다.
늑대들이 사자의 목을 뜯으려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하지만 사자는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늑대의 공격을 무력화시켰다.
늑대들은 사자의 힘에 주눅이 들었다.
자신의 상대가 아님을 깨달았다.
신음을 내며 낑낑거렸다.
늑대의 눈초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더 이상의 싸움은 의미가 없음을 깨달았다.
“무기를 버려라. 무기를 버리고 바닥에 엎드린 자는 살려 준다!”
자포리자의 묵직한 목소리가 전장을 뒤덮었다.
여기저기서 병사들이 자신의 무기를 버리고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기세에 눌린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목숨 앞에서는 명예도 하찮았다.
무기를 던지고 바닥에 엎드렸다.
살아 있는 알리사의 모든 사람이 항복을 선언했다.
“안 돼! 일어서! 싸우란 말이다! 지금 항복하는 놈들은 그 가족까지 모두 죽여 버리겠다! 당장 일어나서 싸워! 싸우라고!”
나바론이 발악하듯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이곳엔 그의 명령에 귀 기울이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이미 승패가 난 전쟁에서 패장의 말에 목숨을 걸 만큼 그에게 충성하는 기사와 병사는 없었다.
대패였다.
베르아스 왕국 영지전의 역사에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을 정도의 대패였다.
나바론은 도저히 이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건 사기야… 자포리자가 금단의 수를 자신뿐만 아니라 군대에도 쓴 거라고. 이런 비겁한 새끼. 명예가 뭔지도 모르는 쓰레기 같은 새끼.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어떤 전투보다 정정당당해야 할 영지전에서 금단의 비술을 가지고 오다니. 난 더러운 수작에 당한 거야.”
같은 왕국에 속해 있는 만큼 영지전은 순수한 힘과 힘이 부딪쳐 승부를 가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나바론은 진정 화를 내며 억울해하고 있었다.
자포리자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궁지에 몰리자 누구보다 큰소리로 귀족의 명예를 따지고 있지만, 평소 전혀 신경 쓰지 않았던 게 그였다.
상대에게 온갖 모욕과 치욕을 주며 즐기던 게 바로 나바론이었다.
귀족은 서로 존중하며 최소한의 명예는 보장해 주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요 몇 년간, 자포리자의 명예를 잔인하게 짓밟았다.
스탄다비아가 자신보다 약하다는 이유로 매년 엄청난 돈을 뜯어 왔다.
영지민들을 개돼지 취급하며 온갖 패악을 부렸다.
나바론은 스탄다비아가 자력으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길을 막고서는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그들의 피를 빨았다.
그런 그가 귀족의 명예를 따지다니, 아주 같잖았다.
자포리자가 휘하의 기사들과 병사를 이끌고 천천히 나바론의 앞으로 다가갔다.
거인의 발걸음과 같이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었다.
나바론의 눈에는 자포리자의 모습이 그 무엇보다 오만해 보였다.
그는 이미 자신의 운명을 예감한 듯 파리하게 질려 있었다.
말에서 내린 자포리자가 나바론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멈추시오.”
나바론의 호위 기사 중 한 명이 급하게 자포리자의 앞을 막아섰다.
알리사의 모든 사람이 항복했는데, 유일하게 항복하지 않은 이였다.
죽음을 각오하고 주군을 지키기 위한 기사로서의 마지막 사명을 실행 중이었다.
자포리자가 그런 기사의 얼굴을 담담히 바라봤다.
“알리사에는 모두 비열한 자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그대 같은 기사도 있었군. 하지만 아무리 충직한 기사라도 주군의 잘못된 행동을 그대로 방치한 것도 죄라면 죄. 기사의 자세를 존중해, 그 죄를 내가 직접 묻겠다.”
자포리자가 위엄을 담아 알리사의 기사에게 말했다.
그의 기상은 일국의 왕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드높았다.
“감사합니다.”
알리사의 기사는 자신의 명예를 지켜 준 자포리자에게 당당하게 인사를 건네며 검을 빼 들었다.
그의 검에 오러가 서리며 파란빛을 내뿜었다.
“대단하군. 나이도 많아 보이지 않는데, 벌써 이 정도 경지라니. 나바론, 너는 진정으로 멍청하구나. 칼라일과 이 정도의 기사를 옆에 두고 기껏 하는 짓이 그런 짓이라니. 너무나 천박해서 너의 조상이 무덤 속에서 피눈물을 흘리겠구나!”
자포리자는 숫제 얼음 덩어리가 된 것처럼 싸늘하게 나바론을 노려봤다.
“흥! 네놈이 감히 나의 명예를 비웃을 자격이 있는가. 너야말로 금단의 수를 써서 이 전투에서 승리하지 않았는가. 지금이야 당장 큰소리치겠지만, 금단의 수를 쓴 만큼 너도 영지민도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아직 진정한 승부는 끝나지 않았다. 이 영지전은 금단의 수를 쓴 부작용으로 비참하게 죽어 갈 너희의 패배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나바론은 증오심으로 치켜 올라간 눈으로 자포리자를 강렬하게 쏘아보았다.
그의 목소리에는 자신이 말한 바를 믿어 의심치 않는 확신이 녹아 있었다.
한 점의 의심 없이 그리 될 거라 믿었다.
그만큼 이 전투는 말이 되지 않았다.
도저히 지려고 해도 질 수 없는 전쟁에서 패한 것이다.
“멍청한 놈. 네놈이 패배한 이유가 내가 흑마법을 썼기 때문이라 생각하느냐? 잘 보아라. 내가 흑마법을 썼으면 내 눈이 붉어졌을 것이다. 네놈이 보기에 내 눈이 붉은 거로 보이느냐?”
자포리자가 두 눈을 크게 뜨고 나바론을 노려보았다.
나바론은 밝게 빛나는 그의 눈을 봤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눈이 붉은 이는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흑마법을 썼다면 그 여파로 눈이 붉어져야 했다.
하지만 이들의 눈은 맑고 초롱초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 아니야… 이건 말도 안 돼… 믿을 수가 없어. 이럴 수는 없다고. 제기랄, 이게 말이 되냐고?”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가장 무시하던 상대에게 일말의 변명의 여지도 없이 철저히 패한 것이다.
나바론은 괴로워하며 머리를 감싸 안았다.
그의 얼굴엔 깊은 절망이 서렸다.
다리에 힘이 풀려 서 있는 것조차 힘들었다.
자포리자가 나바론에게 다가가려 하자, 좀 전의 기사가 다시 한번 막아섰다.
그는 여전히 굳은 의지를 온몸으로 내뿜었다.
알리사 영주인 나바론이 패배를 받아들였는데도 끝까지 기사의 명예를 지키려는 모습에 자포리자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정말 용기가 대단하구나. 진정한 기사의 명예를 알고 있군. 너의 의기는 충분히 존중한다. 하지만 여기서 너의 목숨을 취하고 싶지 않은 게 나의 솔직한 심정이다. 이런 하찮은 놈을 위해 죽기에는 너무 아까운 목숨이다. 이대로 이곳을 떠나 이제는 너의 명예를 위해 살아라. 이것이 진정한 기사에게 보내는 나의 마지막 배려다.”
자포리자의 앞을 막은 알리사 기사의 눈에 심한 동요가 일었다.
조금 전까지 굳은 의지를 표현했던, 누구보다도 단단했던 그의 마음이 자포리자의 한마디에 거친 풍랑을 만난 나룻배처럼 거침없이 흔들렸다.
평생 단 한 번이라도 듣고 싶은 말을 적장에게 듣다니.
콧날이 시큰해졌다.
그토록 노력한 자신의 인생이 너무 허무하게 다가왔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눈물을 참았다.
자신의 주군은 그의 기사다운 모습을 오히려 비웃었다.
“이런 눈치 없는 새끼.”
“멍청한 새끼.”
“뻣뻣하기만 한 저 새끼 좀 어떻게 해 봐.”
“천민의 자식이 어디서 건방지게 입바른 소리를 하는 것이냐? 저놈의 부모를 3일 동안 굶겨라.”
매번 다른 사람들 앞에서 웃음거리로 만들고, 그의 최소한의 명예를 더럽히는 일을 서슴없이 저질렀다.
자신의 바라보던 나바론의 눈빛엔 늘 경멸이 서려 있었다.
좋은 주군을 만나고 싶지 않은 게 아니었다.
이런 삶을 살고 싶어서 그토록 노력한 게 아니었다.
운명은 자신을 철저히 짓밟았다.
어쩔 수 없이 나바론의 기사가 되어야 했다.
맹세한 만큼 기사의 명예를 지키고 살아야 했다.
그런데 지금 그의 주군을 꺾은 이가 자신을 놓아 주려고 하고 있다.
이건 자신의 정신과 육신을 꽁꽁 묶고 있는 두꺼운 사슬을 끊을 마지막 기회였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