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정자 만들기
“라우터, 이 새끼야! 지금 뭐 하는 거야? 죽고 싶어? 당장 저놈을 죽이라고. 감히 주인이 위협받고 있는데, 기사란 놈이 공격을 머뭇거려? 공격하지 않고 뭐 하는 거야? 정신 차려, 이 새끼야! 지금 당장 저놈을 죽이지 않으면 이 죄를 물어 너와 네놈의 부모까지 모두 죽이겠다! 특히 네놈의 부모는 산 채로 사지를 말에 묶어 갈기갈기 찢어 죽일 것이다. 당장 저놈을 죽이지 못해!”
라우터는 나바론의 말에 마음이 크게 상했다.
알리사 기사 중에 그를 지키기 위해 나선 이는 자신뿐이었다.
모두 자포리자의 눈치를 봤다.
제 목숨을 건사하기 위해 땅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그에게 욕을 하며 부모의 목숨까지 위협했다.
라우터의 부모는 스타테인가의 하인이었다.
대대로 스타테인가를 모셨다.
평생 그들을 위해 헌신했다.
하인의 아들로 태어난 자신도 하인이 되어 스타테인가를 위해 봉사해야 했다.
나바론은 외아들이었다.
스타테인가의 혈통을 이을 단 하나뿐인 소중한 자식이었다.
나바론의 부모는 외아들인 그를 금지옥엽으로 귀하게 키웠다.
일찍이 스타테인가의 후계자로 책정된 그는 거칠 것이 없었다.
과도한 자존감이 하늘을 찔렀다.
지금 누리는 부와 특권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남들이 자신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오히려 영광스러운 일이라 생각했다.
누구도 싫은 소리를 할 수 없었고, 그의 행동을 저지하지 않았다.
타인을 억압하며 그들의 위에 군림하는 것을 즐겼다.
매년 스탄다비아를 협박하고 돈을 뺏어 온 것도 그에게는 하나의 유희였다.
경제력이나, 군사력이나 어느 것 하나 자신의 영지와 비교조차 되지 않는 스탄다비아는, 그에게 좋은 먹잇감이었다.
라우터는 나바론과 나이가 비슷해 어릴 때부터 그의 수발을 드는 하인이 되었다.
어린 시절, 나바론은 잔인한 성품을 그의 바로 옆에 있는 라우터에게 가장 먼저 발휘했다.
나바론과 같이 자라며 그의 온갖 폭력과 행패를 몸으로 견뎌야 했다.
고통의 나날이 이어지던 중, 그의 재능을 스타테인가의 기사 중 한 명이 우연히 알아보고 병사로 키워지게 되었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라우터는 각고의 노력 끝에 기사의 자리까지 올랐다.
기사가 된 그는 기뻤다.
이제는 자신의 인생이 달라질 것이라 생각했다.
기사의 위치는 절대 낮지 않았다.
마나를 깨우친 기사는 어떤 영지에서도 소중한 전력으로 대우받았다.
스타테인가의 하인으로 평생 고생만 한 부모님도 이제부터는 편하게 모실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기사가 된 건 또 다른 시련의 문을 연 것과 다름없었다.
그는 나바론의 호위 기사로 임명이 되었다.
기사가 됐지만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나바론의 눈에 라우터는 기사가 아닌 어릴 때 자신이 가지고 노는 한 마리 벌레일 뿐이었다.
자신의 부모님은 여전히 스타테인가의 하인으로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귀족들의 멸시와 천대를 버티며 온갖 허드렛일을 다해야 했다.
이런 삶을 원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운명의 굴레가 이렇게 씌워진 이상, 자신의 힘으로 벗어나긴 불가능했다.
하늘이 자신을 가엽게 여겼는지 지금 그 기회가 왔다.
영지전의 승자가 자신에게 이 굴레를 벗겨 준다고 말하고 있었다.
승자는 패자의 모든 것을 갖는다.
이젠 자신에 대한 것은 자포리자가 결정권을 가지고 있다.
그런 그가 자신을 놓아주려 하고 있다.
라우터는 이대로 떠나 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을 데리고 떠나면 자유는 얻겠지만, 늙으신 부모님이 새로운 곳에서 적응하는 건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다른 곳이라고 해서 팍팍한 삶이 나아진다는 보장도 없었다.
무엇보다 지금까지 기사로서 쌓아 온 게 너무 아까웠다.
자신도 자신을 아껴 주는 주군을 만나 진정한 기사의 삶을 한 번 살아 보고 싶었다.
라우터는 자포리자를 떨리는 눈으로 한 번 바라봤다.
그리고 그의 옆에 서 있는 기사들을 봤다.
마지막으로 병사와 영지민들까지.
모두 좋은 눈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은 빛이 났다.
부모님과 같이 죽어 있는 눈빛이 아니라 삶의 희망이 가득 차 있는 살아 있는 눈빛이었다.
이런 희망을 준 사람은 자신의 눈앞에 늠름하게 서 있는 자포리자일 것이다.
라우터의 손에서 검이 미끄러져 내렸다.
그리고 그는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고 자포리자에게 고개를 숙였다.
기사는 오로지 자신의 주군 앞에서만 무릎을 꿇는다.
이건 라우터가 자신의 주군으로 자포리자를 선택했다는 말이었다.
“이 결정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자포리자가 엄숙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도 라우터의 지금 결심이 얼마나 큰지 잘 알고 있었다.
“후회하지 않겠습니다. 대신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말하라.”
“저의 부모님은 평생 스타테인가의 하인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런 부모님에게 이제는 자유를 주고 싶습니다.”
라우터의 말에 자포리자는 감동했다.
자신의 영달이 아닌 부모님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그가 마음에 들었다.
“부모님은 당연히 그대와 함께 살 것이다.”
“감사합니다.”
라우터의 목소리가 감격으로 떨렸다.
부모님의 남은 삶은 당신만을 위해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이런 미친 새끼가. 감히 주인을 눈앞에 두고 다른 주인으로 갈아타다니. 너 같은 쓰레기는 당장 죽여주마. 여봐라, 저 쓰레기의 목을 지금 당장 베어라!”
나바론이 목줄이 풀린 투견처럼 흥분해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그의 명령에 움직이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오히려 분위기 파악을 못 하는 그를 한심한 듯 바라볼 뿐이었다.
“칼튼.”
“충!”
“나바론과 그를 따르는 기사들을 모두 죽여라.”
“충!”
칼튼이 자포리자의 명을 받들었다.
“이런 제기랄, 분명 항복하면 살려 준다고 하지 않았나?”
알리사 기사가 억울한 듯 따지고 들었다.
“흥! 기사로서의 기본적인 명예도 모르는 너희는 살 가치가 없다.”
칼튼이 가소로운 눈빛으로 기사들을 노려봤다.
“씨발, 우리가 이대로 죽을 거 같아?”
핏발 선 눈으로 소리쳐 보지만, 그의 다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모두 나를 따라 이 쓰레기들을 섬멸한다.”
“와아아아아!”
칼튼이 소리를 지르자 병사들의 우렁찬 함성이 스칸디아 평원에서 쩌렁쩌렁 울렸다.
그날, 나바론과 그의 기사들은 모두 목이 떨어졌다.
자포리자가 경일의 도움을 받아 그의 웅지를 펼친 첫 번째 사건이었다.
그는 가슴속 깊이 이 모든 일에 대한 감사와 함께 경일을 찬양했다.
* * *
던전의 자연은 늘 눈가를 미소 짓게 하고 절로 존중하고 싶을 만큼 대단한 자태를 뽐냈다.
“멋지다. 이건 한 폭의 그림이네.”
저 멀리 보이는 산은 단풍이 한창인 듯 형형색색의 물감으로 뒤덮인 듯했다.
볼을 간질이 듯 불어오는 미풍은, 잠시나마 경일을 고민을 깨끗이 씻겨 주는 느낌이었다.
오늘도 그는 농사일에 바빴다.
일부 작물을 수확하고 밭을 정리한 다음 새롭게 씨앗을 뿌렸다.
적당하게 흙을 덮어 주고 물을 뿌려 주었다.
한창 일하고 있는 그의 눈앞에 여러 메시지가 떠올랐다.
별다르게 신경을 쓰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가 이렇게 덤덤한 건, 헌터로서 별다른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농사를 열심히 짓고 있지만, 예전처럼 신체 능력이 강해질 때마다 늘이던 농지를 더는 늘이지 않았다.
아무리 던전이 흙이 비옥해 작물이 잘 자란다고 해도 혼자 하는 농사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농사는 분식점에서 쓰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스탄다비아에 지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스탄다비아의 시간이 이곳보다 훨씬 빠르게 흘러가니, 아무리 작물이 잘 자란다고 해도 한계가 있구나. 반대로 스탄다비아의 시간이 이곳보다 느리게 흘렀다면 많은 도움이 됐을 건데, 안타깝네. 눈앞에 보물이 굴러다니는데도 활용을 못 하고 있으니 답답해 죽겠네. 이걸로 돈을 벌어 스탄다비아로 보내면 굶는 사람이 사라질 텐데. 그래도 이번에 광산에서 채굴한 게 큰 도움이 돼서 다행이야. 그렇게 속을 긁던 양아치들이 아주 큰 역할을 했어.”
던전의 자원을 팔면 쉽고 빠르게 엄청난 돈을 벌 수 있었다.
지구에서 식량을 사서 스탄다비아로 보내는 게 지금보다 훨씬 효율적일 것이다.
하지만 지킬 힘이 없는 보물은 불행의 씨앗이 될 수밖에 없었다.
스탄다비아를 보고 있노라면 늘 자신을 반성하게 된다.
그들의 힘든 삶과 비교하면 자신은 천국의 삶을 영유하고 있는 것과 같았다.
그런데도 만족하지 못하고 불평불만을 늘어놓다니.
가끔 말도 안 되는 사건이 터지긴 하지만, 원래 인생이 그런 거였다.
스탄다비아를 알고 난 뒤부터 남들도 다 겪는 그런 시련에 크게 투정 부리지 않았다.
경일은 한창 떡메를 내려치고 있었다.
그는 떡볶이 떡을 만드는 중이었다.
요즘 단골들의 건강이 눈에 띄게 좋아진 게 보였다.
아이들은 잔병치레가 없어지고 더욱 활기차졌다.
어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모습에 분식점에서 들어가는 재료 모두를 자신의 손으로 만들고 싶었다.
“휴~ 잠깐 쉬었다 하자.”
이마에 흐르는 땀을 수건으로 훔치고 적당히 평평한 바닥에 앉았다.
“이럴 때는 정자가 하나 있으면 좋겠는데. 햇빛도 가려 주고, 일하다 쉴 수도 있고.”
일하는 도중 집으로 왔다 갔다 하기가 너무 불편했다.
정자는 농사짓는 중간에 아무렇게나 쉴 수 있고, 편하게 밥을 먹을 수도 있고, 여러모로 편리한 공간이 될 터였다.
“그래, 생각난 김에 정자를 짓는 거야. 잘 만들지는 못하겠지만, 튼튼하게만 만들자.”
대충 종이에 설계도를 그렸다.
보기에도 허접해 보였으나, 그의 실력으로는 이게 최선이었다.
“음, 크기는 내 한 몸 눕힐 수 있을 정도면 되겠지? 아니면 이왕 만드는 거 조금 더 크게 만들어 볼까? 그럼 대충 가로세로 3m로 가자.”
가장 중요한 정자의 크기를 결정했다.
이제 본격적인 노동이 시작되었다.
정자가 세워질 곳의 땅을 평평하게 다듬었다.
그리고 개울가에서 모래를 가져와 땅을 개간할 때 모아 둔 작은 돌과 함께 시멘트를 넣어 섞었다.
확실히 인벤토리가 생긴 이후로 일이 편해졌다.
지구의 재료를 손쉽게 던전으로 가지고 올 수 있으니 공사가 쉬울 수밖에 없었다.
네모난 시멘트 바닥이 완성되었다.
이제는 기둥을 세울 차례였다.
미리 파둔 구멍에 다듬은 나무를 세우고 돌과 시멘트를 부어 고정했다.
“이야~ 시멘트는 마법의 재료네. 시멘트 하나 있다고 일이 이렇게 쉬워지냐? 역시 과학은 좋은 것이여.”
경일은 기분 좋게 네 개의 기둥을 세우고 마룻바닥이 될 나무를 준비했다.
오래간만에 마나 엔진 톱이 자신의 존재감을 알렸다.
“없는 돈에 비싼 걸 하나 사 두었더니 값어치를 톡톡히 하는구나. 전기도 없는 이곳에서는 이만한 공구가 없지.”
경일은 마나 엔진 톱을 메고 산으로 들어갔다.
웽~ 웽~ 웨에에에에에에엥!
마나 엔진 톱이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나무 밑동이 잘려 나갔다.
쿵!
나무가 쓰러지며 나는 바닥의 진동에 살짝 몸이 뜨는 느낌이 들었다.
“휴, 크긴 크네. 이 나무 하나면 정자 마루를 다 깔고도 남겠는걸.”
경일은 설계도의 치수대로 나무를 토막 냈다.
토막 낸 나무를 가공해 한 면을 반듯하게 만들었다.
“이거 만드는데 하루가 다 갔네. 뭐, 그래도 옛날에 비하면 빨라지긴 했네.”
경일은 가공한 나무를 인벤토리에 담았다.
“역시 인벤토리가 열 사람 몫을 하는구나!”
하룻밤을 자고 일어난 경일은 세워 둔 기둥에 긴 나무를 모두 연결했다.
사각의 골조 위에 어제 준비한 나무 끝에 홈을 내어 일렬로 가지런히 놓았다.
마루의 중간중간 짧은 기둥을 받쳐 체중이 실려도 무너지지 않게 튼튼하게 만들었다.
어설프지만 정자 마루가 완성됐다.
“좋은데? 이 정도면 충분하지!”
나무의 높낮이가 맞지 않아 마루가 울퉁불퉁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이제 지붕을 만들 차례였다.
네 개의 기둥을 긴 나무로 연결하고, 중간에 짧은 기둥 두 개를 세웠다.
짧은 기둥을 긴 나무로 연결해 낮은 삼각형 모양의 지붕 골조를 완성했다.
치수에 맞게 가공한 나무를 비스듬히 연결하자, 볼품없지만 정감 가는 정자가 완성됐다.
“됐다. 마지막으로 비 올 때를 대비해서 천막만 씌우면 되겠어.”
경일은 지붕에 씌울 파란색 천막과 나무에 칠할 페인트를 사 왔다.
지붕에 천막을 씌우고 사포로 일일이 나무를 문질러 매끄럽게 다듬었다.
맨질맨질해진 나무에 페인트를 칠하니 정자 공사가 모두 끝이 났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