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제안
“훌륭한데? 앞으로 여기서 휴식도 하고, 밥도 먹고, 낮잠도 자고 하면 되겠어.”
초보자가 만든 정자라 어설픈 곳이 많았다.
하지만 경일의 눈에는 그 어떤 정자보다 멋있게 보였다.
던전에 직접 만든 것이 하나씩 늘 때마다 던전이 더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분식점의 아침은 여느 날과 같이 평온했다.
자신을 괴롭히던 사람들을 모두 광산으로 보내고 나자, 더는 시끄러울 일이 없었다.
손님 대부분이 단골이어서 트러블이 일어날 일이 없었다.
가끔 뜨내기들이 쓸데없는 트집을 잡아 시비를 걸면 음식값을 받지 않고 그대로 내쫓아 버렸다.
이럴 땐 음식값이 싼 게 도움이 되었다.
한참 점심 장사를 끝내고 조금 한가해질 무렵, 나이가 지긋한 아주머니가 분식점으로 찾아왔다.
박월순은 자신의 소개부터 했다.
“나는 다정 분식이 있던 건물 주인입니다. 바쁘신 거 같은데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지요. 혹시 가게를 옮길 생각 없습니까?”
경일은 박월순의 의외의 이야기에 아무런 반응을 못 했다.
가게를 옮긴다는 건, 아직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얼마 전 다정 분식을 하던 사장님의 가족들이 찾아와서 계약관계를 모두 정리했습니다. 사정이 힘들다고 애원을 하더군요. 아직 임대 기간이 끝나지 않았지만, 그분들 뜻대로 정리했습니다. 망해서 나간 사람에게 계속 세를 받으려니 마음이 좀 불편하기도 하고. 임대를 놓았는데 생각보다 보러 오는 사람이 몇 명 없더군요. 그게 이상해서 알아봤더니 동네 분식 때문이더군요. 동네 사람들에게 여기가 싸고 맛있다고 칭송이 자자합니다. 다들 여기랑 경쟁할 자신이 없는지, 가게가 계속 놀고 있습니다. 잠깐 봤는데도 여기 손님이 아주 많더군요. 사장님도 이 정도 평수로는 모든 손님을 받기 힘들지 않습니까? 기다리다 지쳐 돌아가는 손님도 제법 많은 거 같던데.”
경일은 박월순의 말에 빠져들었다.
그녀의 말은 정확했다.
장사가 잘된 뒤, 가장 큰 고민거리가 자리가 없어 손님이 그대로 돌아가는 경우였다.
특히 단골들이 한참 기다리다 음식을 먹지 못하고 돌아갈 때는 마음이 안 좋았다.
“다정 분식 자리가 여기보다 네 배 정도 크니, 오는 손님 모두를 받을 수 있을 거예요. 동네 사람들도 그 자리를 모두 알고 있으니 분식점을 이사한다고 해도 손님이 찾아오는 건 크게 문제가 없을 겁니다. 손님 입장에서도 이곳보다는 그곳이 찾아가기 더 편할 거고. 사장님한테도 큰 기회가 될 수 있을 겁니다. 물 들어왔을 때 노 저어야죠. 이 정도로 동네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있으니, 옮기더라도 장사가 더 잘되면 잘됐지 안 될 건 없지 않을까요? 저로서도 가게를 안 놀려도 되고. 오래 장사하실 분이 들어오는 게 더 좋거든요. 솔직히 사장님 분식점이 너무 세서 앞으로도 얼마나 가게를 놀려야 할지도 모르고요. 그러니 우리 둘 다 좋은 방향으로 가요. 아무래도 넓은 데로 이사하려면 돈이 많이 들 테니, 첫 1년간은 집세를 30% 깎아 드릴게요. 어떠세요?”
경일은 생각도 못 한 그녀의 제안에 얼떨떨했다.
“저기… 생각할 시간을 좀 주시겠습니까? 지금 당장 대답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그럼요. 여기 제 전화번호니까, 언제든지 전화 주세요. 좋은 결과 기다릴게요. 아 참, 그리고 다정 분식이 급하게 나가는 바람에 설비는 대부분 그대로 남아 있어요. 인테리어도 크게 손보지 않아도 될 겁니다.”
“아, 네. 알겠습니다.”
“그럼 수고하세요.”
“네, 안녕히 가세요.”
경일은 박월순이 돌아가고 생각에 잠겼다.
‘이거, 생각도 못 한 제안이라 얼떨떨하네. 나한테도 큰 기회가 될 수 있을 거 같은데? 확실히 요즘은 여기가 너무 좁다는 느낌이 많이 들긴 해. 시도해 보고 싶은 게 많긴 한데… 여기가 너무 좁아서 힘든 것도 사실이고.’
그녀의 제안은 생각하면 할수록 괜찮게 다가왔다.
“어, 사장님, 전 순두부찌개 주문했는데요.”
“이런, 죄송합니다. 다시 해 드리겠습니다.”
경일은 손님 테이블에 놓인 된장찌개를 보고 사과했다.
“바쁘니까 그냥 주세요. 사장님 오늘 좀 이상하시네. 꼭 넋이 나간 사람 같이.”
“생각할 게 좀 있어서요. 제가 사과의 의미로 계란프라이를 해 드리겠습니다.”
박월순이 다녀간 뒤로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몰랐다.
평소에 하지 않은 실수를 연발하며 손님들에게 사과하기 바빴다.
경일은 장사를 마치고 다정 분식으로 갔다.
위치는 알고 있었지만,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은 없었다.
입구에서 박월순에게 전화를 했다.
같은 건물에 사는 듯 그녀는 10분 만에 내려왔다.
“사장님, 제가 가게를 한 번 봐도 될까요?”
“그럼요. 당연히 물건부터 보고 결정해야죠.”
박월순은 웃으며 다정 분식의 자물쇠를 열었다.
가게는 경일의 생각보다 더 괜찮았다.
반듯한 가게라 입구도 넓었고, 대부분의 설비도 남아 있었다.
특히 널찍한 홀이 마음에 들었다.
약간의 손만 보면 바로 장사가 가능할 듯했다.
경일은 가게를 옮기는 쪽으로 자신의 마음이 급속도로 기우는 것이 느껴졌다.
“잘 봤습니다, 사장님. 며칠 안으로 결정해서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좋은 결과 기다릴게요.”
경일은 그녀에게 인사 후 가게를 나왔다.
가게를 보고 나니 더 욕심이 났다.
던전으로 가는 길에도 방금 본 가게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는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박월순이 최대한 편의를 봐준다고 했으니, 돈은 크게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됐다.
뭐, 장사야 당연히 잘될 거니, 금방 벌어서 메꿀 자신이 있었다.
‘평수가 넓으니 한쪽 벽은 사람들이 간단하게 술을 즐길 수 있는 장소로 만드는 것도 괜찮을 거 같아. 스트레스도 풀고 늘 편하게 쉬어 갈 수 있는 그런 공간으로 말이지. 손님들과 같이 살아가는 이야기도 나누고. 이거 생각만 해도 너무 좋은데?’
살면서 그런 생각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는데, 분식점을 하면서 자신이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번 기회에 분식점을 메인으로 간단한 안주와 술도 팔 계획을 세웠다.
기존의 가게처럼 밖에서 먹을 수 있는 매대를 만들고, 매대와 연결되는 다찌도 만들 생각이었다.
동네 사람들이 밥만 먹고 가는 곳이 아닌, 식사와 술을 즐길 수 있는 곳으로 만들고 싶었다.
낮에는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고, 밤에는 힘든 어른들이 쉬어 갈 수 있는 그런 소박한 곳이 되고 싶었다.
경일은 다음 날 출근하자마자 박월순에게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어머, 사장님. 전화가 빠른 거 보니 좋은 결정을 하신 거 같은데, 맞나요?”
“네, 사장님. 가게를 옮기기로 했습니다.”
“호호, 젊어서 그런지 결정이 빨라서 좋군요.”
“그런데 사장님, 한 가지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뭔가요? 부담 없이 얘기하셔도 됩니다.”
“네. 제가 어제 계산을 해 보니 보증금이 조금 모자라서요. 가겟세를 조금 올리시고 보증금을 조금 낮춰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장사가 잘되면 깎은 보증금부터 올려 드리겠습니다.”
“집세를 더 받을 수 있으면 나야 좋죠. 그럼 계약은 언제 할까요?”
“일단 여기에 들어올 사람이 정해지면 곧바로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가게가 나가면 곧바로 연락해 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경일은 전화를 끊고 곧바로 부동산에 분식점을 내놓았다.
다행히 분식점은 금방 나갔다.
아이들이 많이 모이는 것을 본 누군가가 작은 공부방을 열 생각인 듯했다.
그는 분식점을 비워 줘야 할 날이 정해지자, 본격적으로 인테리어에 들어갔다.
한 달 뒤, 다정 분식 간판이 내려가고, 그 자리에 동네 분식 간판이 설치됐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기분이 이상했다.
‘이 기분을 뭐라고 말해야 하나? 악당을 몰아내고 적의 진지를 점령한 기분? 갑자기 인생이 한 번에 몇 단계로 업그레이드된 듯한 기분? 하여간 나쁘지는 않네.’
새 간판을 보고 감상에 빠져 있는데, 누군가가 옆으로 와서 섰다.
“와~ 사장님, 가게 너무 좋은데요? 특히 다찌가 무척 마음에 들어요. 이제는 술도 파시는 거예요?”
이미순이 지나가다 경일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
“하하, 거창하게는 아니고요. 간단하게 한잔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들려고요.”
“어머, 그럼 새로운 메뉴도 생기겠네요?”
“그게, 아직 요리 실력이 안 돼서 한동안은 정해진 메뉴 없이 그날 들어온 재료로 만들어 안주를 내려고요.”
“오, 그럼 매일 달라진다는 이야기잖아요. 분식도 이렇게 맛있는데, 안주는 또 얼마나 맛있으려나. 여기서 밥도 먹고, 술도 먹으면 사장님이랑 정이 더 깊어지겠는데요?”
이미순이 경일을 향해 윙크를 날렸다.
“하하하…….”
경일은 그저 민망한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런데 언제 오픈하세요?”
“정확하게 정해지진 않았는데, 대충 3일 뒤에 열 생각입니다.”
“이 넓은 가게를 사장님 혼자 하실 건 아닐 테고, 아르바이트생은 구하셨어요?”
“아르바이트생요?”
경일은 이미순의 물음에 순간 움찔했다.
그도 그럴 것이, 누군가를 고용한다는 건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막연히 저번처럼 혼자서 하면 되겠지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음, 셀프로 운영한다고 해도 사장님 혼자서는 힘들 거 같지 않으세요? 테이블도 많고, 다찌에 앉은 손님들까지 생각한다면 아무래도 아르바이트생이 필요하지 않겠어요?”
“그렇네요. 이거, 내가 하고 싶은 것만 생각했지, 가게 운영에는 전혀 신경을 못 썼네요. 내일이라도 아르바이트 구한다고 붙여 놔야겠어요. 미순 씨가 말하지 않았다면 큰일 날 뻔했네요.”
“그럼, 사장님. 아르바이트 구하실 거면 제 친구 중에 괜찮은 사람 있는데, 어때요? 얘가 키도 크고, 얼굴도 예쁘고, 되게 싹싹해서 손님들도 좋아할 거예요.”
“그런 분이 이런 곳에서 일하려고 할까요? 그 정도면 충분히 더 좋은 곳에서 일할 수 있을 거 같은데.”
“사장님 가게가 어때서요. 여기는 동네 사람들이 전부 좋아하는 곳인데. 그리고 친구도 노는 것보다 일하는 게 훨씬 더 좋을 거예요. 사장님은 당장 사람이 급하고, 그 친구는 일할 곳이 생기고, 그럼 둘 다 좋잖아요. 이왕 사람 구하는 거, 제 친구 면접이라도 한 번 보세요.”
“그럼 저야 좋죠.”
“그럼 내일 여기로 보낼게요. 시간은 언제가 좋으세요?”
“아무 때나 오시면 됩니다. 내일 가게 뒷정리한다고 온종일 여기 있을 거니까, 편한 시간에 오세요.”
“알겠습니다, 사장님! 마음에 안 드시면 안 쓰셔도 되니까 부담 느끼지 마시고요. 사장님이 제 친구를 안 뽑는다고 제가 삐지고 할 그런 속 좁은 여자는 아니거든요. 그럼, 전 이만 갈게요~”
“네, 안녕히 가세요.”
이미순은 귀엽게 협박을 하고 돌아갔다.
다음 날.
한창 일하고 있는 도중에 한 사람이 가게로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경일은 곧바로 인사를 했다.
분식점을 하면서 가게로 들어오는 사람에게 무조건 인사하는 습관이 생겼다.
“안녕하세요. 저는 미순이 소개로 온 손주아라고 합니다.”
그녀는 환한 표정으로 양손을 배꼽에 올리고 경일의 눈을 맞추며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단정하게 묶은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이미순의 말대로 거리에서 한 번 스치면 다시 돌아보고 싶을 정도의 상당한 미인이었다.
‘인사성은 참 밝은 사람이네.’
해맑은 목소리까지 호감이 가는 사람이었다.
검정 재킷에 흰색 블라우스, 무릎 중간을 덮을 정도의 치마를 입은 그녀는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고 서 있었다.
과하지 않은 화장에 단정한 몸가짐.
무슨 대기업에 면접 보러 온 사람 같았다.
분식점에서 하는 간단한 면접에서 입기엔 과한 클래식 한 정장을 입고서는 긴장된 모습을 보였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