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오늘을 기억해 주면 좋겠어
“크~”
오래간만에 마신 소주에 절로 인상이 찡그려졌다.
쓴맛과 함께 찾아오는 약간의 단맛.
어른의 맛인 소주와 함께 쏘가리 매운탕을 입속에 넣었다.
쏘가리의 살을 씹는 순간, 살이 이빨을 밀어냈다.
쫄깃한 식감과 담백한 살이 얼떨떨할 정도로 맛있었다.
깊고 얼큰한 국물과 쏘가리 살의 합주에 그동안의 힘들었던 모든 게 녹아내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고생했다고 자신에게 주는 상 같았다.
“이거 정말 맛있구나. 무슨 음식이 이렇게 맛있지?”
쏘가리 매운탕의 맛에 게이트가 열리기 전 어릴 때 함께했던 아버지와의 추억이 떠올랐다.
‘그때는 참 행복했지. 개울가에서 아버지랑 같이 물고기도 잡고, 잡은 물고기로 이렇게 맛있는 매운탕도 먹고는 했지. 게이트가 열리기 전의 세상은 참 좋았는데. 그래도 오늘 아들에게 그때의 맛을 맛보여 줄 수 있어서 기분이 좋네. 수한이가 커서 내가 아버지를 그리워하듯이 나와 같이한 오늘의 순간을 기억해 주면 좋겠다.’
아들과 함께하는 이 순간이 무척이나 좋았다.
두툼한 쏘가리 살은 아들과 아버지가 먹기에도 충분한 양이었다.
이길호는 아들과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는 지금이 근래 들어 가장 행복했다.
그러면서 마음 한구석이 싸하게 아파 왔다.
자신의 목숨보다 사랑하는 아내도 같이할 수 있다면 영혼을 팔아도 아깝지 않을 거 같았다.
“엄마도 같이 먹었으면 좋았겠다.”
수한이도 같은 마음이었다.
이길호는 그런 아들을 꼭 안아 주었다.
아들은 아버지의 따뜻한 체온에, 아버지는 아들의 따뜻한 체온에 서로가 위로받았다.
“걱정하지 마. 아빠가 약속할게. 엄마는 꼭 다시 건강해질 거야. 조금 힘들더라도 엄마를 위해 조금만 더 노력하자.”
“아빠, 나는 하나도 힘들지 않아요.”
이길호는 듬직한 아들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주었다.
이에 수한이가 방긋 웃었다.
경일이 무슨 마법을 부리듯 다섯 개의 쏘가리 매운탕을 뚝딱 만들어 냈다.
손님들이 기대감에 들떠 포장된 쏘가리 매운탕을 가지고 나갔다.
“어떻게, 입에 맞으세요?”
던전에서 이미 여러 번의 연습을 거쳐 최고의 맛을 만들었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막상 손님에게 내놓고 나니, 반응이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너무 맛있습니다, 사장님. 언젠가 한 번 가 본 최고급 횟집에서 나온 매운탕보다 백배는 더 맛있습니다.”
손님에게 칭찬을 받자 어깨가 살짝 올라갔다.
자신이 너무 자랑스럽다는 듯이.
“그런데, 이렇게 싸게 팔아서 유지가 되겠습니까? 저로서는 싸서 좋기는 한데, 사장님 같은 분이 동네에 오래 있는 게 아이들이나 동네 사람들에게 좋지 않겠습니까? 이미 아이들에게 거의 공짜로 음식을 나누어 주고 계신데, 어른들 음식까지 이렇게 싸게 받다가 여기 문 닫는 거 아닐까 걱정됩니다.”
이길호는 심각한 얼굴로 경일을 걱정했다.
그로서는 아들과 친구가 되어 준 경일은 은인이나 다름없었다.
얼마 전, 아내의 병세가 급격하게 악화됐다.
아내는 피부가 딱딱하게 굳어 가는 던전병에 걸렸다.
제대로 치료를 하지 못하면 심장이나, 폐 같은 장기까지 굳어 결국에는 사망하게 되는 무서운 병이었다.
이길호는 아내의 던전병 진행을 막으려 최대한 노력했다.
하지만 스캐빈저인 그의 능력으로는 분명 한계가 있었다.
아내의 병은 불치병이 아니었다.
돈만 있으면 나을 수 있었다.
아내가 앓고 있는 던전병은 세상에 알려진 지 벌써 15년이 넘었다.
효과가 좋은 던전 식물도 이미 알려져 있었다.
황룡초라고 불리는 던전 식물을 꾸준히 장복하면 나을 수 있었다.
문제는 비싼 가격이었다.
그의 능력으로는 한 달에 한 번 황룡초를 사기에도 버거웠다.
아내의 호흡이 힘들어지자 그는 24시간 동안 던전을 돌아다녔다.
위험한 곳이든, 아니든 기회가 있으면 무조건 던전에 들어가 돈을 벌었다.
돈이 될 만한 건 무엇이든 챙겼다.
대부분은 공략대가 가죽을 벗기고 간 몬스터 사체의 팔이나, 발 부분 등, 가죽이 남아 있는 부분을 잘라 팔았다.
그의 몸에서는 몬스터의 피 냄새가 가실 날이 없었다.
한 달을 넘게 노력한 덕에 황룡초를 살 수 있었다.
위험한 고비를 겨우 넘겼다.
문제는 수한이었다.
한 달 동안 수한이를 챙겨 줄 사람이 없었다.
힘든 티를 내지 않았지만, 어린아이가 힘들지 않을 리가 없었다.
던전을 돌다 집으로 돌아오면 피곤에 절어 그대로 잠들기 일쑤였다.
나가기 전, 잠깐 얼굴을 볼 때마다 수한이의 얼굴은 어두웠다.
아들을 챙기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어쩔 수가 없었다.
집을 나서는 이길호는 커다란 바위가 얹힌 듯 마음이 무거웠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아들의 얼굴에 웃음이 되살아났다.
그리고 그 이유가 동네 분식 사장님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평소 동네 아이들에게 잘해 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생판 남인데도 이렇게 살뜰하게 챙겨 줄지는 몰랐다.
아들은 단지 배를 채울 음식만 먹고 온 것이 아니었다.
수한이의 마음에 사랑과 행복까지 채워 주었다.
“하하, 아닙니다. 친한 친구가 쏘가리 양식장을 하는 덕에 도매가로 사 올 수 있었습니다. 오늘의 안주는 가게 확장을 할 수 있게 해 준 단골들에게 드리는 선물 같은 겁니다. 마진은 없지만, 손해도 없습니다. 술에서 적당히 남으니 괜찮습니다.”
“대단하시네요. 오늘부터라도 부지런히 먹어 둬야겠습니다. 이 정도로 맛있으니 분명 한 번 먹어 본 사람들은 계속 올 겁니다. 기회가 있을 때 많이 먹어 둬야지요.”
“안 그래도 고민 중입니다. 이 동네 단골들을 보고하는 장사인데, 외지인 손님들이 느는 게 저도 썩 반갑지는 않거든요. 돈도 많은 사람은 좀 안 왔으면 하는데… 그렇다고 오는 손님을 쫓아낼 수도 없고.”
“역시 사장님은 이 동네의 천사십니다. 다들 먹고 살기 어려워 팍팍한 동네에 사장님 같은 분이 들어올 줄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동네 주민들도 사장님이 아이들을 챙겨 줘서 다들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무슨 천사씩이나… 절대 아닙니다. 떡볶이, 어묵 몇 개 더 준 거뿐인데요. 이런, 설거지 거리가 많이 밀려서. 많이 드시고 가세요!”
경일은 부끄러워 손사래를 치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설거지를 하는 그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 * *
신화 길드의 분위기는 최악이었다.
곽마권은 길드장실에서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저번 길드원의 습격 사건으로 느낀 것이 많았다.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화가 나는 일이었지만, 분명 건진 것도 많았다.
가장 큰 수확은 사과 장수가 시장을 떠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길드의 분위기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이대로는 안 돼. 내가 힘으로 찍어 누르는 것도 한계가 있어. 이러다가 제2, 제3의 습격이 일어날 수도 있어. 씨발, 지금까지 내가 해 준 게 얼만데, 은혜도 모르는 양아치 새끼들.’
곽마권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습격이 무서운 것이 아니었다.
문제는 이겨도 손해란 것이다.
길드원들만 잃는 이런 결과는 지금으로서는 가장 피하고 싶었다.
며칠간 고민 후,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헌터들의 계약을 원래대로 돌리는 일이었다.
습격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이런 식이면 앞으로 그 어떤 일도 실행하기 힘들 것이었다.
만약 다른 길드와의 전쟁이라도 나면 오히려 길드원의 칼끝이 자신을 향할 수도 있었다.
최소한 길드원들의 불만은 가라앉혀야 무슨 일이든 도모할 수 있었다.
계약만 원상태로 돌렸는데, 길드의 분위기가 확 살아났다.
그리고 사과 장수를 수색하는 일도 중단시켰다.
어차피 누구 하나 열심히 찾는 사람이 없는데, 그럴 바에야 안 하는 게 나았다.
‘길드원의 숫자가 너무 적어. 이런 식으로 계속 흘러가면 결국 스스로 망하거나, 다른 놈들한테 잡아먹히고 말 거야. 사과 장수를 찾기도 전에 내가 먼저 무너지겠어. 이 시점에서 뭔가 돌파구를 찾아야 해. 부족해진 자금도 해결하고, 길드의 덩치도 키우고, 길드가 안고 있는 문제까지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획기적인 방법이 없을까?’
곽마권은 2팀장이 친 사고에 분을 이기지 못하고 모두 병신을 만들어 길드에서 내쫓아 버렸다.
거기에 이번 습격에 죽인 헌터까지.
길드원의 숫자가 3분의 1이나 줄어들었다.
중소 길드로 불리던 신화 길드가 소형 길드로 전락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중소 길드라서 받는 혜택이 모두 날아가 버린다.
그럼 더 이상 길드원들을 잡아 놓을 수 있는 명분조차 사라질 판이었다.
‘길이 없으면 만들어야지. 나, 곽마권이야. 이보다 훨씬 더 어려운 상황은 수없이 겪어 봤어. 이 정도는 위기도 아니야.’
한참 고민하던 곽마권은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부 길드장, 부 길드장!”
이성호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짜증을 삼키고 길드장실에 들어갔다.
“1팀장은 어딨어?”
“본부에서 대기 중입니다.”
“그래, 지금 보자고 전해.”
“네.”
이성호는 길드장실을 나갔다.
“자기가 직접 전화하면 될 걸, 꼭 날 시키더라. 내가 무슨 종도 아니고.”
이성호는 투덜대면 1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10분 뒤, 길드장실에 이성호와 1팀장 문태범이 자리했다.
“벵갈 길드라고 알지?”
곽마권이 말했다.
“부민 암시장 관리하는 얘들 말씀하시는 겁니까?”
문태범이 대답했다.
“그래, 잘 알고 있네. 내가 벵갈 길드를 먹을 생각이야.”
“네? 거기는 왜?”
이성호가 곽마권의 뜬금없는 소리에 놀랐다.
길드 사정이 가뜩이나 안 좋은데, 새로운 일을 벌이려는 그가 이해되지 않았다.
“지금 우리 사정이 안 좋잖아. 이대로 가서는 안 될 거 같아. 이대로 가다 길드 등급이라도 떨어지면 큰일이잖아. 안 그래도 던전 입찰도 여전히 힘들고. 하여간 헌터 협회도 적당히 좀 하지.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난 것도 아니고, 이 정도 불이익을 줬으면 됐잖아. 도대체 언제까지 우리를 힘들게 할 건지. 흠~ 말이 옆으로 샜는데, 어쨌든 내가 생각한 건 벵갈 길드를 우리가 먹고, 한동안 벵갈 길드 이름으로 던전을 입찰할 거야.”
“벵갈 길드는 소형 길드인데, 오히려 입찰할 때 불리한 거 아닙니까?”
1팀장 문태범이 물었다.
“아주 좋은 질문이야. 벵갈 길드를 먹고, 우리 헌터들 소속을 전부 그쪽으로 옮길 거야. 걔들 인원이랑 합치는 거지. 그럼 한 번에 이전처럼 길드 덩치를 키울 수 있어. 그리고 던전 협회에 길드 등급 심사를 다시 받을 거야. 그럼 중소 길드 혜택을 받을 수 있어. 벵갈 길드 이름으로 던전 입찰을 하면 던전 수주도 이전처럼 쉬워질 거고. 그럼 헌터들 수입도 늘어날 테니, 모든 불만이 사라질 거 아냐. 그리고 2팀장이 친 사건이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힐 무렵에 다시 신화 길드로 이름을 바꿀 거야.”
“길드장님은 역시 대단하십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길드가 안고 있는 문제가 한 번에 해결되겠군요. 제가 얘들 데리고 가서 쓸어 버리겠습니다.”
문태범이 명령만 떨어지면 언제든지 출동하겠다는 듯이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오래간만의 싸움에 신이 나는 모습이었다.
“가만히 좀 있어. 무슨 성격이 그리 급해. 우리가 양아치도 아닌데, 그냥 막 쳐들어가서 전쟁을 할 수는 없어. 명분이 있어야 우리가 벵갈 길드를 먹어도 뒷말이 안 나올 거 아냐.”
“벵갈 길드 뒤에는 대복 길드가 있지 않습니까?”
이성호는 문태범과 다르게 길드장이 말한 계획의 문제를 정확히 지적했다.
“그래, 그게 문제야. 우리가 벵갈 길드를 칠 때, 대복 길드가 못 움직이게 해야 해.”
대복 길드와 신화 길드는 누구나 아는 유명한 앙숙이었다.
앙숙을 넘어 같은 하늘을 지고 살 수 없는 원수 사이였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