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전용 자리
“우리는 정당방위를 행사한 거뿐이야. 안 그래?”
“맞습니다, 길드장님.”
문태범이 맞장구를 치며 곽마권의 옆으로 와서 섰다.
“저놈은 제가 상대해도 되겠습니까?”
문태범은 엄덕구가 너무 쉽게 항복해 버리자 아쉬워하던 차였다.
“그래, 저놈이랑 부길드장은 은퇴시켜 줘. 저 둘은 필요 없어.”
“알겠습니다.”
문태범이 성큼 앞으로 나섰다.
“감히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수 있을 거 같아? 조금 있으면 너희와 앙숙인 대복 길드에서 달려올 거야. 후회할 짓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김일제가 대복 길드를 믿고 큰소리쳤다.
신화 길드가 대복 길드를 어찌할 방법은 없었다.
하지만 대복 길드도 신화 길드를 어찌할 방법이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두 길드 간에 전력이 비슷하기도 했고, 곽마권과 대복 길드 길드장 손필견도 실력이 비슷했다.
만약 둘이 싸우게 된다면 공멸할 가능성이 컸다.
신화 길드가 전력이 약해졌다고는 하지만, 곽마권이 존재하고 있는 이상, 득보다 실이 훨씬 컸다.
“후회? 그래, 후회 한 번 해 보자. 그게 뭐 대단한 거라고. 그런데 말이야, 지금은 당장 네놈 목숨부터 걱정해야 할 거야.”
문태범이 살기를 뿌리고 김일제에게 다가갔다.
“이런!”
김일제는 당황하긴 했어도 물러나지는 않았다.
자신도 한 길드를 이끄는 수장이었다.
여기서 약한 모습을 보여 주는 순간, 벵갈 길드는 끝장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시간을 끌어야 했다.
대복 길드가 올 때까지만 버티면 자신들은 살 수 있었다.
선공은 김일제가 먼저 했다.
그는 몸을 날려 온몸의 체중을 실어 문태범의 정수리를 향해 육중한 검을 내리그었다.
김일제는 힘에 특화된 헌터답게 첫 수는 늘 자신의 힘을 과시한 공격으로 시작했다.
공격이 실패하더라도 자신의 힘을 본 상대는 겁을 먹는 경우가 많았다.
채앵!
그의 검이 문태범의 검에 부딪히며 막혔다.
두 개의 검이 서로 얽혔다.
“제법이네. 어디서 덩치 큰 멧돼지가 부딪쳐 오는 줄 알았어. 근데 나도 힘은 자신 있거든. 어디 한 번 붙어 보자고!”
문태범이 김일제와 힘을 겨루면서도 말을 했다.
이건 그의 힘이 더 뛰어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김일제는 지지 싫어 뭐라고 한마디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밀리지 않으려고 힘을 쓰는 것만으로도 벅찬 상태였다.
‘이런, 큰일 났다.’
김일제는 똥줄이 탔다.
자신의 필승 공식이 막혀 버리자,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는 힘이 강한 대신 느렸다.
그 말인즉슨, 상대가 자신의 힘을 넘어선다면 자신이 이 싸움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말과 같았다.
“여차!”
문태범이 힘을 쓰며 검을 밀어내자 김일제는 맥없이 뒤로 밀려났다.
“이제 내 차례지. 어디 한 번 잘 막아 봐라.”
능글맞은 웃음을 입가에 띠우고 문태범이 달려들었다.
후웅!
그의 검이 공기를 무겁게 가로질러 왔다.
김일제는 검을 들어 올려 급하게 막아 봤지만, 제대로 자세를 잡기 전에 문태범의 검이 자신의 검을 때렸다.
“크윽!”
커다란 덩치의 김일제가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날아가 흙바닥을 뒹굴었다.
힘과 스피드, 모두 자신은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이번 한 수로 자신은 잠시의 시간도 끌 수 없음을 깨달았다.
살아남으려면 대복 길드가 올 때까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시간을 끌어야 했다.
“공격해.”
꼭 시간을 자신이 끌라는 법은 없었다.
김일제는 길드원들에게 공격을 명령했다.
하지만 움직이는 길드원은 아무도 없었다.
이미 길드장이 처참하게 땅바닥에 뒹구는 모습을 봤는데, 누가 쉽사리 덤벼들겠는가.
더군다나 이곳에는 신화 길드의 정예가 포진하고 있었다.
“이럴 수가…….”
그는 자신의 명령을 거부하는 길드원들의 모습에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이 새끼들아, 뭐 하는 거야! 전부 공격하라고!”
김일제가 길드원들에게 향해 바락바락 악을 썼다.
하지만 그의 바람과 다르게 움직이는 헌터는 없었다.
“이 새끼야, 그만해.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꼬리 만 개처럼 숨는 놈의 말을 누가 따르겠어. 너같이 한심한 놈이 한 길드의 수장이라니. 최소한 최선을 다하는 모습 정도는 보여 줘야 길드원들이 따르지 않겠냐? 대가리에 총 맞은 놈이 아닌 이상, 아무도 나서지 않는 게 당연하지. 넌 헌터의 자격이 없다. 어디 조용한 동네에 짱 박혀 작은 슈퍼나 하면서 살아라.”
문태범이 김일제에게 다가가 그의 다리를 후려 찼다.
그의 몸이 90도 넘게 회전하면서 머리부터 땅으로 떨어졌다.
머리에서 오는 강한 충격에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하지만 진짜는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빠지지직!
뼈가 으스러지는 기분 나쁜 소리가 공터를 채웠다.
문태범이 그의 다리를 밟아 짓이긴 것이다.
그와 함께 김일제의 날카로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아아아악! 뭐 해? 뭐 하냐고! 이 새끼들아 공격해!”
고통으로 인해 눈물을 흘리며 길드원들을 재촉해 보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대복 길드는 뱅갈 길드에서 온 한 통의 전화로 비상이 걸렸다.
자신들에게 상납하는 길드인 만큼 위험에 처했을 때 도와주어야 했다.
부길드장 하지환이 길드원들을 데리고 급하게 달려갔다.
하지만 공터에 도착했을 때는 벵갈 길드 헌터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길드장과 부길드장이 다리가 꺾여서는 안 되는 방향으로 꺾인 채 입에 거품을 물고 기절해 있었다.
“어떤 개새끼가 이런 짓을 한 거야?”
하지환이 공터 한쪽에 모여 있는 헌터 무리를 향해 소리치며 다가갔다.
“감히 이런 짓을 하고도 살기를 원하는 건 아니겠지?”
그는 이를 빠드득 갈며 길드원들을 이끌고 앞으로 나아갔다.
대복 길드 헌터들이 흉흉한 기세를 뿌렸다.
순식간에 주변의 온도가 내려앉았다.
폭탄이 터지기 일보 직전의 긴장감이 흘렀다.
그런 하지환을 맞이한 건 곽마권이었다.
“이런 씨발.”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등장하자 그의 걸음이 멈췄다.
“지금 이건 무슨 뜻입니까? 설마 우리와 전쟁을 하자는 겁니까?”
하지환이 곽마권을 향해 사나운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오래간만에 만났는데 인사부터 하는 게 예의지. 안 본 사이에 많이 컸군.”
서늘한 하지환의 음성에도 아무렇지 않은 듯 곽마권은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
“지금 서로 인사를 나눌 상황입니까? 벵갈 길드의 뒤에 우리 대복 길드가 있는 걸 빤히 알면서도 이런 짓을 벌였다는 건, 선전포고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하여간 성질 급한 건 여전하군. 우리는 대복 길드와 싸울 생각이 전혀 없어. 이건 순전히 벵갈 길드가 우리를 협박해서 일어난 일이거든.”
“그게 무슨 말입니까? 소형 길드인 벵갈 길드가 어떻게 신화 길드를 협박한다는 말입니까?”
곽마권이 눈치를 주자, 이성호가 나서서 지금까지 일어난 일에 관해 이야기했다.
“지금 그 말을 믿으라는 겁니까? 누가 봐도 수작을 부린 게 빤한데?”
“수작이라니? 증거 있어? 우리는 대복 길드와 싸울 생각이 전혀 없어. 단지 당한 것을 갚아 준 거뿐이야.”
누가 봐도 빤한 수작임이 보였지만, 당장 여기서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자신이 아무리 부길드장이라고 해도 신화 길드와의 전면전을 결정할 수는 없었다.
‘하필 이럴 때 해외여행을 떠나신 거야.’
답답한 마음에 손필견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곧바로 안내 멘트로 넘어갔다.
몇 번 더 시도해 보지만, 여전히 안내 멘트만 들릴 뿐이었다.
그 모습에 곽마권이 미소 지었다.
자신의 계획대로 모든 일이 돌아가니 짜릿한 쾌감이 온몸을 감쌌다.
“빌어먹을!”
전화가 연결되지 않자 화가 난 하지환이 핸드폰을 바닥에 집어 던졌고, 애꿎은 핸드폰만 박살이 났다.
“이대로 넘어가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환은 이를 갈면서도 어쩔 수 없이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길드장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그 사이, 곽마권은 곧바로 벵갈 길드를 손에 넣었다.
벵갈 길드의 헌터들은 순수히 계약서에 사인했다.
이미 길드장과 부길드장이 사라져 버렸고, 중형 길드에서 활동하는 게 자신들에게 더 유리했다.
드디어 기다리던 손필견이 귀국했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그는 대노했다.
하지만 이미 상황이 끝난 뒤였다.
남은 선택은 오로지 전면전 하나였다.
하지만 전면전은 공멸을 각오하지 않고는 행하기 힘든 선택이었다.
결국, 곽마권은 자신의 계획대로 안전하게 벵갈 길드를 손에 넣었다.
그는 이번 작전으로 길드를 안정시키는데 성공했고, 헌터 협회의 불이익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옛날처럼 길드는 잘 돌아갈 것이다.
‘기다려라. 이제 너에게 갈 일만 남았다. 난 절대 포기하지 않아. 내가 바로 곽마권이라고.’
사과 장수는 그가 평생 꿈꿔 왔던 엘도라도로 가는 티켓이었다.
그를 찾는 일이 어느새 인생의 목표가 되어 있었다.
탐욕으로 가득 찬 곽마권의 눈빛이 섬찟하게 번득였다.
* * *
경일의 눈앞에 여러 메시지가 떠올랐다.
[힘이 5 올랐습니다.]
[민첩이 5 올랐습니다.]
[체력이 5 올랐습니다.]
[마나가 5 올랐습니다.]
[스탄다비아 영주 자포리자가 진심을 담은 감사의 마음을 전해 왔습니다. 스탄다비아와의 유대가 더욱 깊어져 기존보다 신체 능력이 더 빨리 강화됩니다.]
‘대단한데? 처음 봤을 때부터 범상치 않은 인물이란 생각이 들긴 했지만, 볼수록 더 대단한 사람 같아. 그를 보는 것만으로 나라는 사람이 더욱 깊어지고 발전하는 느낌이야. 이 인연의 끝이 어디인지 모르지만, 당신과 당신의 고장을 도울 기회를 준 것에 대해 내가 더 감사드립니다.’
경일은 스킬 스탄다비아 현황 관찰을 통해 자포리자의 활약을 모두 보았다.
그를 보고 있노라면 와신상담이라는 고사성어가 저절로 머릿속에 떠올랐다.
영주전에서의 그의 늠름한 모습과 진심으로 인재를 아끼고 모든 걸 포용하는 넓은 마음을 보자, 자신의 마음도 웅대해지는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포리자라는 인간의 매력에 깊이 빠져들었다.
스탄다비아는 현존하는 어떤 책보다 재미있고, 안타깝고, 아슬아슬하고, 배울 게 많은, 자신에게 최고의 스승이나 마찬가지였다.
다찌는 인기 폭발이었다.
오늘의 안주와 함께 동네 어른들의 기분 좋은 휴식처가 되었다.
“역시 사장님! 난 사장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진작부터 알고 있었어요. 음식 맛도 대단하긴 하지만, 사장님의 인간성이 더 훌륭합니다.”
이미순이 친구와 함께 다찌에 앉아 경일을 연신 칭찬했다.
오늘의 안주는 이길호의 말대로 순식간에 소문이 퍼져 나갔다.
어느 순간부터 분식점엔 동네 사람보다 외지인들이 더 많았다.
동네 사람들은 분식점을 이용하지 못하고 돌아가거나, 오랜 시간 줄을 서야만 했다.
이 모습은 경일이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동네 사람들을 위한 음식인데, 여유가 있는 외지인들이 분식점 자리를 모두 차지하는 건 곤란했다.
경일은 주객이 전도되지 않게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동네 분식 입구에 커다란 종이가 붙었다.
[동네 분식의 가게 확장은 모두 동네 주민들의 성원에 의한 것입니다. 이를 보답고자 만든 게 ‘오늘의 안주’입니다. 동네 분식 홀의 테이블 절반과 다찌석은 동네 주민들의 전용 자리입니다. 멀리서 와 주신 손님들은 이에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 덕에 동네 주민들은 기다리지 않고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일부 항의하는 손님들이 있었으나, 주인이 그렇게 한다는데 그들이 어찌하겠는가.
더군다나 오늘의 안주는 누가 봐도 말도 안 되는 싼 가격이라 더욱 할 말이 없었다.
욕을 하면서 그대로 돌아가는 사람도 있었고, 기다려서 포장해 가는 사람도 있었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