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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74화 (74/300)

[74화] 수아

“어휴~ 이건 뭐, 할 말이 없는 맛이네. 지금까지 먹은 음식도 맛있었는데, 한 번에 몇 단계를 뛰어넘었네요. 국물이 입에 짝짝 달라붙는데요? 왜 이렇게 맛있지? 사장님, 그거 알아요? 내가 생선을 잘 못 먹는 거? 여기엔 슬픈 사연이 있어요.”

이미순은 술을 마시며 특유의 수다를 이어 갔다.

“어릴 때부터 우리 집은 찢어지게 가난했거든요. 언니가 죽을 고생을 하며 모은 돈으로 미용실을 하면서 지금은 좀 나아졌지만요. 그러다 보니 생선을 먹어 볼 기회가 별로 없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언니가 월급 받은 돈으로 시장에서 생선을 사서 온 거예요. 퇴근길에 시장을 지나가는데 어떤 할머니가 생선을 되게 싸게 팔더래요. 그래서 동생들 생각해서 사 가지고 왔는데 이게 너무 맛이 없는 거예요. 알고 봤더니, 그게 개도 안 먹는다는 여름 숭어였어요. 오래됐는지 비리고, 살도 맹맹해서 무슨 맛인지 하나도 모르겠고. 언니가 사 온 성의가 있는데, 안 먹기가 그래서 억지로 다 먹었거든요. 그때의 맛없던 생선의 기억 때문인지 그 뒤로 생선이 싫더라고요. 그런데 오늘 생선의 맛에 새롭게 눈을 뜬 기분이에요. 아~ 오늘따라 내가 무식한 게 너무 아쉽다. 이 맛에 대한 표현을 멋있게 한 번 해 보고 싶은데, 머리가 나빠서 그런지 제대로 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요.”

“미순아, 그러게 내가 학교 다닐 때 놀지만 말고 공부 열심히 하라고 했잖아.”

미순의 친구 박혜순이 조용히 그녀를 구박한다.

“흥~ 내가 놀 때 늘 옆에 있던 게 너거든? 누가 보면 나 혼자만 논 줄 알겠어. 이런, 이년아, 적당히 먹어. 나보다 더 말 많은 게 어쩐지 아까부터 말도 몇 마디 안 하고 조용하더라. 나한테 말 시켜 놓고 지는 먹고만 있었네!”

“들켰네, 헤헤. 그런데 이거 너무 맛있다. 사장님, 한동안 우리 계속 볼 거 같아요.”

박혜순이 경일을 향해 눈을 찡긋거렸다.

“이년이, 어디서 지금 꼬리 치는 거야. 너 그러다 여기 못 오는 수가 있어. 이 동네에 사장님 노리는 사람이 한둘인 줄 알아? 그런데 지금까지 사장님 애인이 없는 게 왜인 줄 알아? 누군가가 꼬리 친다는 소문이 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이거야, 이거.”

이미순이 엄지로 자신의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그러니까 너도 정신 차리고 끼 부리지 말아. 미호 언니 알지?”

“그 언니가 왜?”

박혜순이 미호 언니란 단어에 눈이 커졌다.

최미호는 이들의 고등학교 선배였다.

“그 언니가 선포했거든. 페어플레이 하자고. 선택은 사장님이 하는 거로 다들 합의 봤으니, 너도 룰을 지켜라.”

“어쩐지. 저렇게 잘생긴 사장님이 왜 애인이 없나 했네. 하~ 이거 경쟁자가 한둘이 아니겠네. 이대로 포기해야 하나.”

“이년아, 이런 맛있는 음식으로 만족이 안 되냐? 난 여기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해. 내가 요즘 하루 세 끼를 대부분 여기서 먹잖아. 옛날에 다정 분식에서 먹을 때는 피부 트러블도 올라오고 소화가 잘 안 되고 그랬는데, 요즘은 그런 게 전혀 없어. 내 피부 보이지. 얼마나 뽀얀지 거울 볼 때마다 내가 깜짝깜짝 놀란다니까.”

“난 미자 언니가 좋은 화장품이라도 줘서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네!”

“우리 언니가 얼마나 짠돌인데, 좋은 화장품은 무슨. 그렇게 월급 올려 달라고 징징거려도 눈 하나 깜박 안 하는 언니인데.”

“그래도 넌 좋겠다. 난 직장이 이 동네가 아니라서 여기서 먹을 일이 별로 없잖아. 나도 이 동네에서 일하고 싶다. 월급은 쥐꼬리만 한데, 교통비에 식대를 제하고 나면 아무리 아껴도 남는 게 별로 없어. 이 동네에서 일하면 차비도 아끼고, 남는 시간에 취미 생활도 할 수 있고.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싸게 먹을 수 있는데.”

“걱정하지 마. 내가 네 몫까지 모두 먹어 줄 테니. 어머 이 튼실한 살 좀 봐. 무슨 생선이 살도 많고 맛은 또 왜 이리 좋아. 배가 부른데도 계속 들어가네. 사장님, 여기 소주 한 병 더 주세요.”

이미순의 앞에 소주병 하나가 탁 하고 기분 나쁘게 놓였다.

손주아가 못마땅한 얼굴로 그녀를 향해 눈을 흘기며 한마디 했다.

“야, 사장님 바쁘신 거 안 보이냐? 넌 가만히 보면 꼭 바쁜 사장님한테만 주문하더라.”

“너, 내가 여기 취직시켜 줬는데, 이렇게 배신 때리기야?”

“흥~ 취직을 미끼로 내가 제일 아끼는 가방 가지고 갔잖아. 난 너에게 줄 거 다 줬거든. 그리고 적당히 좀 먹어라. 내일 출근 안 할 거야? 벌써 둘이서 네 병이나 먹었어.”

“하하하, 걱정하지 마. 넌 여기서 일하면서 아직 몰랐어? 사장님 음식이랑 같이 술 먹으면 다음 날 숙취가 거의 없어. 몸도 가볍고. 하긴, 넌 술을 별로 안 먹으니 몰랐겠구나. 여기 음식은 보약이야. 그러니 너도 기회 있을 때 많이 먹어 둬라.”

“먼저 알았다고 잘난 척은. 여기 일하는 내가 그걸 왜 모르겠냐? 사장님이 일 열심히 한다고 반찬이랑 이거저거 많이 싸 주시거든? 난 메뉴에 없는 음식도 많이 먹어 봤지~ 얼마나 맛있는데.”

“헉! 부럽다. 미용실 관두고 내가 취직할걸.”

경일은 그녀들이 편하게 수다를 떨면서 술을 마시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저런 모습을 볼 때마다 다찌를 만들길 잘한 것 같았다.

한참 바쁘던 분식점도 밤이 깊어지자 손님들이 하나둘 자리를 떴다.

“사장님, 잘 먹었습니다.”

“네, 안녕히 가세요.”

마지막 손님이 돌아가며 오늘의 장사가 끝이 났다.

분식점을 닫고 경일은 바쁜 듯 부지런히 길을 걸었다.

그가 걸어가는 길은 다른 곳보다 훨씬 어두웠다.

길을 밝히는 가로등 하나 없고 오래된 도로는 여기저기 파여 생살을 드러냈다.

길을 걸어갈수록 길옆으로 낡은 건물이 더 많아졌다.

사람이 살지 않는지 닫힌 대문 앞에는 여러 쓰레기가 쌓여 있었다.

경일의 인기척에 놀라 쓰레기를 뒤지다 도망가는 고양이가 낸 소음만이 이 거리에서 나는 유일한 소리였다.

오늘따라 달도 구름에 숨어 버렸는지 거리는 더욱 어두웠다.

“여기에 가로등도 좀 세워 주고 하면 얼마나 좋아.”

경일의 희망과는 달리 사람이 많이 살지 않는 이곳까지 가로등이 들어오는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가끔 철없는 아이들이 버려진 건물에 모여 술을 마시고 행패를 부리는 경우도 많았다.

다른 곳이면 아마 무시하겠지만, 여기서는 그럴 수 없었다.

경일은 그들에게 따끔한 훈계를 내려 주었다.

이럴 때는 자신이 헌터라는 게 다행이었다.

소문이 났는지 더는 아이들이 찾아오지 않았다.

“이야옹~”

고양이 두 마리가 울음소리를 내며 경일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고양이는 다른 고양이를 보고 잘 울지 않는다.

고양이가 울음소리를 내는 경우는 대부분 사람에게 무언가 바라는 것이 있을 때가 대부분이었다.

경일이 멈춰 서자 한 마리는 바닥에 누워 배를 내보이며 뒹굴뒹굴했고, 한 마리는 그의 다리에 몸을 비볐다.

“휜둥이, 검둥이. 잘 있었어?”

자주 마주치자 고양이 몸 색깔에 맞춰 이름도 지어 줬다.

처음 봤을 때는 예민하고 털도 푸석푸석한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두 마리다 털에 윤기가 자르르 흐르고 있었다.

“야옹!”

고양이들이 경일을 향해 눈빛을 반짝였다.

길을 오가며 마주칠 때마다 피라미 몇 마리를 던져 주었더니, 어느 날부터 그가 나타나면 발 앞에서 아예 배를 내보이며 누워 버렸다.

“어휴, 귀여운 것들.”

경일은 고양이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고는 피라미 몇 마리를 꺼내 주었다.

고양이가 눈을 빛내더니 서로 먹겠다고 달려들었다.

“흰둥이, 검둥이, 스톱. 하여간 맛있는 건 알아서.”

흰둥이는 남겨 두고 검둥이를 안아 들었다.

검둥이를 흰둥이와 떨어뜨려 놓고서는 피라미 몇 마리를 꺼내 주었다.

고양이들은 피라미를 먹는다고 바빴다.

“던전 물고기가 맛있긴 하나 보네. 고양이도 정신을 못 차리는 걸 보면.”

고양이를 남겨 두고 길을 재촉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가려던 목적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경일의 눈에 들어온 건 보육원이었다.

보육원은 이 동네에서도 가장 구석진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인벤토리에서 음식을 꺼내 보육원으로 들어갔다.

그를 맞이해 준 건 이해인 수녀와 아이들이었다.

“어서 오세요.”

그녀가 경일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오늘도 고맙습니다.”

한창 놀던 아이들이 경일을 보고 뛰어오더니 깍듯하게 인사를 했다.

“어, 그래.”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를 받았다.

그는 왠지 이런 순간이 늘 부끄러웠다.

“늘 감사합니다. 사장님.”

이해인 수녀는 경일을 볼 때마다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오랫동안 입었는지 빛바랜 수녀복이 오히려 그녀의 품격을 더욱 두드러져 보이게 했다.

작은 체구에 고생을 많이 한 듯 주름진 얼굴이지만 눈만은 누구보다 순수하고 맑았다.

“수녀님, 이거.”

경일이 내민 음식을 아이들을 돌보다 거칠어진 손으로 받았다.

“감사합니다. 안으로 들어가 차 한잔하세요.”

“아닙니다. 저는 수아 얼굴만 잠깐 보고 돌아가겠습니다. 수녀님은 저 신경 쓰지 마시고 아이들을 챙겨 주세요.”

경일은 수녀님께 인사를 하고 허름한 건물로 향했다.

끼익 하는 문소리와 함께 건물로 들어섰다.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복도의 오래된 나무 바닥이 삐걱거렸다.

경일은 작은 한숨과 함께 세월이 느껴지는 빛바랜 문 앞에 섰다.

작게 노크를 하고 조심히 문을 열고 들어가자 색색거리는 작은 숨소리가 들렸다.

“아저씨.”

수아는 경일이 방 안으로 들어오는 걸 보고 그를 반갑게 불렀다.

최대한 씩씩하게 말하려고 했지만, 몸에 힘이 없어 그런지 짧은 단어임에도 뒤로 갈수록 목소리가 작아졌다.

아이는 겨우 여덟 살이었다.

한창 뛰어놀아야 할 나이지만, 아파서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래 수아야, 오늘은 좀 어때?”

“괜찮아요.”

경일은 수아가 누워 있는 침대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아픈 수아의 손이라도 한 번 잡아 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아저씨가 수아 먹으라고 맛있는 죽을 가져왔거든. 힘들더라도 앉아 볼까?”

“네.”

경일은 작은 새를 만지듯 조심스럽게 수아의 몸을 부축했다.

아이가 아프지 않게 하려고 최대한 노력했다.

수아는 던전병에 걸렸다.

그것도 아주 고약한.

온몸의 피부가 이유 없이 괴사해 떨어져 나가는 아주 악랄한 증상이 나타났다.

아이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피부가 벗겨져 울긋불긋했다.

두피 역시 일부분이 그대로 떨어져 나가 군데군데가 비어 있었다.

아직은 머리카락이 많이 남아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머리카락이 빈 곳이 늘어날 것이다.

‘얼마나 아플까?’

수아를 볼 때마다 누군가가 자신의 가슴을 찢어 짜는 듯이 아파 왔다.

상상조차 안 되는 고통을 겪고 있을 것이다.

아이를 조심히 앉히고 죽을 먹였다.

“맛있어요.”

자신을 향해 힘겹게 웃어 주는 수아가 안쓰러웠다.

“그래, 많이 먹어.”

던전병이 걸리고 음식을 거의 못 먹는다는 이야기를 수녀님께 전해 듣고서는 혹시 던전 작물로 만든 음식은 먹지 않을까 해서 죽을 끓여 가지고 왔다.

다행히 수아는 죽을 잘 먹었다.

그 뒤로는 보육원 아이들의 간식뿐만 아니라 수아의 죽도 잊지 않고 챙겼다.

분식점을 연 첫날, 남은 떡볶이와 어묵탕을 들고 보육원에 왔을 때 가장 먼저 반겨 준 이가 수아였다.

“안녕하세요. 전 박수아입니다.”

머리에 커다란 분홍 리본을 묶은 수아가 먼저 달려와 꾸벅 인사를 했다.

“어, 안녕.”

경일은 자신을 향해 해맑게 웃어 주는 모습에 그대로 무장해제를 당했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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