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78화 (78/300)

[78화] 이주

‘거리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돌아다니는 데도 그렇게 복잡하다는 생각은 안 들어. 스탄다비아와 알리사는 인구에 비해 땅이 너무 넓어. 만약 두 곳의 인구를 한 지역에 몰아넣는다면? 음, 그렇게 해도 생활하는데 그리 크게 불편함을 느끼지는 않을 거야. 치안을 유지하는 면에서도 훨씬 도움이 될 거고. 알리사도 농사가 잘되는 편이 아니니, 영지민들의 반발도 그리 크지 않을 거야. 문제는 알리사의 주민들이 이주한 뒤, 그들이 먹고 살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는 것인데… 몬스터를 몰아내고 확보한 땅을 개간하면 될 거야. 기존의 지력을 잃은 땅보다는 훨씬 나을 거고. 퇴비를 뿌려 가며 농사를 짓는다면, 지금보다 훨씬 많은 농작물을 수확할 수 있을 테지. 이번의 힘든 고비만 넘기면 앞으로는 훨씬 나아질 거야. 어차피 알리사의 영지민들도 자포리자 영주님의 휘하에 들어갔으니, 싫든 좋든 두 지역의 사람들은 서로 화합을 해야 해. 시간이 지날수록 이 계획을 실행하는 것이 더 힘들어지겠지. 자포리자 영주님의 힘이 영지민들에게 가장 가깝게 느껴지는 지금이, 가장 적기일 수밖에 없어.’

경일은 자신의 생각을 적은 메모를 자포리자에게 보냈다.

‘엄청난 계획인 만큼 앞으로 많은 어려운 일이 일어나겠지. 지금부터라도 철저히 대비해야 해. 이번 결정은 앞으로의 내 삶에도 많은 영향을 끼칠 게 틀림없어.’

좋든 싫든 지금의 삶에 변화가 일어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예기치 못한 일이 늘 일어나는 게 인생 아니겠는가.

그렇게 겁이 나거나 하진 않았다.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잘 헤쳐 나갈 자신도 있었다.

‘나도 자포리자 영주님을 만난 뒤로 스케일이 제법 커졌어.’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걷는 게 제법 좋았다.

과일 안주나 소시지를 시켜 시원한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이 보였다.

다들 밝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게, 오늘 하루가 꽤 괜찮았던 모양이다.

스탄다비아나 알리사 영지민들에게도 이들과 같이 최소한의 여유를 누릴 수 있는 삶을 선물하고 싶었다.

분명 같은 사람인데, 너무 불공평해 보였다.

그들이라고 그곳에 태어나고 싶던 게 아니었을 텐데.

선택을 할 수 있었다면 훨씬 좋은 사회에서 태어나고 싶었겠지.

그나마 자포리자라는 훌륭한 영주를 만난 것으로 그 시대의 다른 사람들보다 운이 좋다고 해야 하나.

복잡한 머릿속을 비워 내고 던전으로 향했다.

경일은 지금 눈앞에 놓인 일부터 열심히 할 생각이었다.

* * *

자포리자는 경일의 메모를 읽었다.

“역시 선인님은 대단하구나.”

현실적으로 두 영지를 오가며 경영하기가 싶지 않을 거란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많은 고민을 하고 있던 것이고.

알리사 영지민들을 스탄다비아로 이주시킨다는 건 생각의 범위를 벗어난 일이었다.

머릿속에 단단히 굳어 있던 벽이 하나 허물어지는 느낌을 받을 만큼 대단한 생각이었다.

경일이 알려 주는 지식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었고, 늘 옳았다.

다음 날, 자포리자는 각 마을의 촌장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새로운 영주의 명령에 촌장들은 열 일을 제쳐 두고 성으로 모여들었다.

촌장들은 안 그래도 자신의 영주였던 나바론을 이긴 이가 궁금하던 참이었다.

스무 개 마을의 촌장들이 연병장에서 대기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자포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커다란 체격의 사내가 늠름한 모습으로 걸어왔다.

이곳에 있는 누구보다 컸지만, 비율 좋은 몸 때문인지 하나도 어색해 보이지 않았다.

그의 맑은 눈빛을 보자 마음속에 큰 걱정이 하나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세금을 내려 준 일로 새로운 영주에게 호감이 컸는데, 그의 모습을 실제로 보니 최소한 전 영주처럼 패악을 부리지는 않을 거 같았다.

“다들 바쁠 텐데, 나의 부름에 응해 줘서 고맙다. 난 여러분들과 진지한 토론을 해 보고자 한다. 일단 토론의 주제를 먼저 이야기하겠다.”

자포리자의 말에 촌장들은 다들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의 말을 못 알아들은 것은 아니었다.

귀족이, 그것도 이 지역을 다스리는 영주가 자신들과 의견을 나눈다는 것이 생소할 뿐이었다.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을 만큼, 오랜 인생을 살아왔는데 지금 같은 경우는 또 처음이었다.

자포리자도 경일을 만나기 이전이었다면 이런 자리를 마련할 거란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자신이 아무리 사고가 트인 사람이라고 해도 이 시대를 크게 앞서갈 수는 없었다.

경일은 자포리자에게 고철과 농산물, 그리고 영지민들에게 도움이 될 지식만 보낸 게 아니었다.

어느 날, 고철을 사러 간 고물상에서 한 권의 책을 주웠다.

옛 성인의 말을 알기 쉽게 풀이해 놓은 책이었다.

던전의 밤에 읽을 생각으로 챙겨 왔는데, 가끔 가슴을 울리는 에피소드나 좋은 글 등을 메모해 자포리자에게 보내곤 했다.

자포리자는 경일이 보내오는 글이 무척 좋았다.

짧은 글이었지만, 그 속에 적힌 내용은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는 글을 읽으며 자신의 사고가 얼마나 편협하고 부족한지, 자신이 사는 시대의 상식이 얼마나 비합리적인지 깨달아 가고 있었다.

경일이 보낸 글 중에 이 시대가 받아들이기엔 불가능한 것도 있었지만, 언젠가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세상이 올 것이라 굳게 믿었다.

경일로 인해 자포리자는 이 시대의 선각자가 되어 갔다.

알리사 영지민의 이주를 일방적으로 명령하지 않은 것도 이런 이유였다.

“오늘 여러분을 부른 이유는 알리사의 모든 영지민을 스탄다비아로 이주하는 문제를 토론하기 위해서이다.”

자포리자의 한마디에 이곳의 모인 촌장들의 입이 쩍 벌어졌다.

처음 경일의 메모를 읽었을 때 그도 매우 놀랐는데, 이들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건 당연했다.

촌장들은 자포리자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었는지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이었다.

한마디 말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모든 시선을 자포리자에게 고정했다.

“일단 내가 먼저 말을 꺼냈으니 내 의견부터 밝히겠다. 지금 알리사를 위해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지만, 솔직히 영지민들의 삶이 나아진다는 보장을 못 하겠다. 나바론이 영지의 돈을 너무 많이 낭비하는 바람에 지금 가진 돈으로는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다. 땅은 넓은데 병사를 운용할 돈이 턱없이 부족하다. 치안도 문제지만, 역시 가장 큰 문제는 농사겠지. 들어 보니 옛날과 달리 농사가 잘 안 된다고 들었다. 지금은 가뭄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전에도 흉년이었다고. 그럼 가뭄이 끝나도 농사가 잘 안 될 확률이 높다. 더군다나 내가 여기에만 붙어 있을 수 있는 몸도 아니고, 몬스터의 침입을 막기 위해 곧 떠나야 한다. 내가 자리를 비운다면 더 많은 문제가 발생하겠지. 솔직하게 말해 이 땅에서의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나의 휘하에 들어온 사람들을 외면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생각한 게 스탄다비아로 이주다. 스탄다비아는 이곳의 영지민을 모두 받아들여도 충분할 만큼 땅이 넓다. 미래를 생각한다고 해도 두 지역의 영지민들이 서로 합치는 게 맞다. 이주가 필요한 이유를 이야기하라면 밤새도록 할 수도 있겠지만, 일단 이 정도로 해 두고 그대들의 의견을 듣고 싶다. 질문도 좋고, 자신의 생각을 밝혀도 좋다. 이 자리에서 한 발언은 절대 문제 삼지 않을 것이다. 부담 없이 말해 보도록.”

촌장들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일단 그들에게 이런 분위기는 너무 생소했다.

인생을 오래 산 사람들인 만큼 더욱 조심스러웠다.

처음 겪어 보는 상황에 먼저 말을 하는 것이 큰 부담이 되기도 했고, 현명한 처세가 아니라는 것쯤은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리고 스케일이 너무 큰 이야기라 제대론 된 생각이 떠오르지 않은 것도 하나의 이유였다.

자포리자는 조용히 앉아 그들의 의견을 기다려 주었다.

“저기, 영주님.”

촌장 중에 가장 생각이 많아 보이던 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무조건 떠나야 하는 겁니까?”

그는 자포리자의 눈을 회피하며 움츠러드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다. 무조건 떠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떠나고 안 떠나고의 결정은 여러분들이 하지 않는다. 모든 결정은 개인이 한다. 촌장의 의견이 마을 주민들의 의견이 돼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지?”

촌장들은 자포리자의 입에서 나온 말 한마디 한마디가 너무나 생소했다.

개인의 결정이라니.

그런 건 지금껏 들어 본 적도 없었다.

자포리자의 말이 생소하기는 했으나, 못 알아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땅과 집을 가진 이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이주하는 곳에서 땅과 집을 가질 수 있습니까? 스탄다비아는 몬스터의 침입 때문에 농사지을 땅이 많지 않은 거로 알고 있습니다.”

첫 질문을 성의껏 대답해 주자 촌장들은 용기를 내어 가장 궁금한 걸 물었다.

“얼마 전까지 몬스터의 침입으로 안정적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이 얼마 없었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영지전의 승리를 누가 가져갔는지 보지 않았느냐. 스탄다비아는 더 이상 몬스터에게 휘둘리는 곳이 아니다. 지금은 효과적으로 몬스터를 막고 있고,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이 늘어났다. 이주를 한 사람들에게는 정착하는 구역의 땅을 공평하게 나누어 주도록 하겠다.”

“땅이 없는 사람도 땅을 준다는 이야기인가요?”

“새롭게 시작하는 곳이니… 난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기회를 줄 생각이다.”

“그럼 기존의 땅을 가진 이들이 억울해하지 않을까요?”

촌장 한 명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이건 자신의 이익을 더 가져가기 위한 질문이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이곳에 모인 촌장들이 마을에서 가장 부자 중에 한 명일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이곳에 남으면 된다. 내가 그들에게 더 많은 땅을 챙겨 줄 이유가 전혀 없다. 많은 사람이 이주하고 나면 이곳의 땅의 가치는 더욱 떨어지게 될 것이다. 스탄다비아에서 받는 땅이 훨씬 이득일 수 있지.”

“만약에 이곳에 남은 사람들이 도움을 요청하면 도와주실 겁니까?”

이 질문은 아주 중요했다.

만약 도와주지 않는다면 자신의 목숨은 자신이 지켜야 한다는 얘기니까.

영주의 보호막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아주 컸다.

아무리 악덕 영주라도 영주의 밑에 있는 게 여러모로 안전했다.

“애초에 그럴 여력이 있었다면, 굳이 이 무리를 하면서까지 스탄다비아로 이주를 할 이유가 없겠지. 두 영지를 관리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므로 이주를 선택한 것이다. 대신 그들은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 그럼 나를 원망할 일도 없겠지.”

촌장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건 공식적으로 알리사 지역을 포기한다는 뜻이었다.

“혹시 이곳을 떠나지 않고 살다가 나중에 이주해도 되는 겁니까?”

“된다. 하지만 처음과 같은 혜택은 없을 것이다.”

촌장들은 생각이 많아졌다.

그들로서는 조상 대대로 살던 곳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간다는 것은 싶지 않은 결정이었다.

조상의 묘도 이곳에 있고, 모든 재산도 이곳에 있다.

자포리자 성주가 영지민을 위해 노력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들의 족쇄와 같던 세금을 반 이상 낮춰줬으니.

하지만 그를 겪어 본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아직은 서로 간의 신뢰가 쌓이기엔 부족한 시간이었다.

그런 그를 전적으로 믿고 삶의 터전을 버리고 이주한다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스탄다비아는 몬스터의 침공이 일 년 내내 일어나는 곳이지 않은가.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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