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상인
“우리가 스탄다비아로 이주하면 몬스터와도 싸워야 하는 겁니까?”
“그건 개인의 의사를 존중해 주지. 아마 스탄다비아로 오면 내가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싸우고 싶어 하는 이들이 많아질 거야. 뭐, 지금은 이해가 안 되겠지만, 하여간 최대한 개인의 의사를 존중해 주지. 영지가 위험할 정도의 일이 아니고서는 굳이 싸울 필요는 없을 것이다.”
자포리자가 이런 말을 하는 건 비누의 존재 때문이었다.
그는 더 많은 비누를 만들어 팔 계획이었다.
고블린 지방을 수집하는 일에 동원된 영지민들에게 일당을 나누어 줄 생각이었다.
스탄다비아에 농사가 아닌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 내고, 비누의 수익이 영지민들에게 자연스럽게 돌아가도록 하면 그들의 삶이 좀 더 나아질 것이다.
촌장들은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지금까지 그들이 생각하는 최악의 땅이 스탄다비아였다.
몬스터의 숲과 경계를 맞대고 있으니 당연했다.
가장 큰 걱정거리 중 하나가 몬스터와의 전투였는데, 개인의 의사를 존중해 준다고 하니 다행이었다.
촌장들의 질문은 밤늦도록 이어졌다.
자포리자는 인상 한 번 쓰지 않고 모든 질문에 최대한 설명을 해 주었다.
촌장들이 돌아가고, 자포리자는 그들의 결정을 기다렸다.
이주를 선택한 영지민은 거의 90%가 넘었다.
자포리자는 남은 이들의 선택을 존중해 약속대로 그들의 세금을 면제해 주고 아무런 불이익도 주지 않았다.
그렇게 대규모의 이주가 시작되었다.
스탄다비아가 깨어났다.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영지에 들어오자 자연히 시끄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자포리자는 기존의 영지민들에게 차별을 하지 말 것을 단단히 일러두었다.
충성심이 높은 영지민들은 그의 말을 잘 따라 주었다.
농사를 지을 땅을 개간하고, 새롭게 집이 지어졌다.
자포리자는 기존의 방식대로 집을 짓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엔 경일이 알려준 지식이 있었다.
바둑판처럼 반듯한 도로를 만들었고, 도로를 따라 집을 지었다.
그들에게 나누어 준 땅도 사각형으로 잘라 정확하게 분배해 주었다.
돈이 들어갈 일은 끝이 없었다.
스탄다비아의 기존 인구보다 더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들어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치안을 위해 더 많은 병사를 뽑아야 했고, 새로운 공공시설을 건설해야 했다.
알리사의 영지민들은 지금까지 워낙 심한 수탈을 당한 터라 가진 재산이 많지 않았다.
그들이 가지고 온 식량은 금방 떨어졌다.
자포리자는 그들이 굶어 죽지 않게 최소한의 식량을 공급해야 했다.
알리사에서 얻은 전리품으로 만든 돈으론 턱도 없었다.
지금껏 모은 재물을 모두 쏟아부어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그런 와중에 영지에 손님이 왔다.
처음 비누를 사간 헬리어스 상단의 에바돈 칼슨이었다.
“영주님, 오래간만입니다.”
에바돈은 정중하게 자포리자에게 인사를 건넸다.
몇 개월 전에 본 그와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있었고, 행동에 품격이 녹아 있었다.
짧은 기간에 비해 엄청난 발전이었다.
이 모든 것이 비누로 인한 것임을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래, 오래간만이군. 얼굴도 좋고 옷차림도 달라진 게, 그동안 돈을 많이 번 모양이군.”
“네. 이번에 새롭게 시작한 사업들의 성과가 아주 좋았습니다. 여기에 좀 더 빨리 오고 싶었는데, 너무 바빠서 늦어졌습니다.”
에바돈은 자신과 상단의 발전이 비누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속이 빤히 보이는 대답이었지만, 굳이 티를 내지는 않았다.
“그래, 무슨 일로 왔는가?”
그는 에바돈의 얼굴도 보지 않고 질문을 던졌다.
그의 눈은 어느새 책상 위의 서류로 돌아가 있었다.
자리를 권하지도 않았다.
에바돈은 자포리자의 불퉁스러운 말투와 함께 뜬금없는 질문에 적잖이 당황했다.
분명 자신을 하찮게 여기고 있는 느낌이었다.
자포리자의 반응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정반대였다.
에바돈은 자포리자가 자신을 무척 반길 거라고 생각했다.
돈을 싫어하는 인간은 아직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이건 그가 생각했던 상황이 아니었다.
이곳엔 온 이유는 당연히 비누 때문이었다.
자포리자도 자신이 여기 온 이유가 비누를 사기 위해 왔다는 것을 빤히 알 것이다.
그런데 돌아온 건 푸대접이었기에, 에바돈은 기분이 확 상했다.
“그야 당연히 비누를 사러 왔습니다.”
에바돈은 노련한 상인답게 일단 표정을 숨기며 얼굴에 미소를 띠고 말했다.
“그런가? 그래, 비누의 반응은 어떻던가?”
에바돈은 잠시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뭐, 나쁘지 않았습니다만… 솔직히 제품이야 좋죠.”
에바돈이 말끝을 살짝 흐렸다.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듯이.
“제품이 좋다면서 무슨 문제가 있다는 건가?”
“비누야 좋긴 한데, 한 가지 작은 문제가…….”
“말끝을 흐리지 말고 확실히 얘기해 보게.”
“아무래도 가격이 조금 비싼 면이 있습니다. 비누가 오래 쓸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보니… 그러니 조금 가격을 내려서 더 많은 사람에게 파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자포리자의 얼굴이 티가 나게 확 굳었다.
누가 봐도 그가 언짢아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이런, 괜히 가격에 관한 얘기를 했나? 겨우 몇 푼 깎자고 상대의 심기를 건든 건가? 아니지. 지금 이 자리에서 칼자루를 쥔 게 누군지 똑똑히 확인시켜 줘야 해. 괜히 기를 세워 주면 나중에 더 피곤해질 거야. 내가 아니면 어디에다가 비누를 팔겠어. 하여간 멍청한 놈이 사람을 뭘로 보고 말이야.’
에바돈이 세운 계획은 원래 이런 것이 아니었다.
자포리자의 비위를 대충 마쳐 처음과 같은 가격으로 저번에 실패한 독점 계약을 맺으려는 게 그의 목표였다.
하지만 자포리자의 불퉁한 반응에 화가 났다.
비누를 유통한 후, 에바돈의 사회적 지위는 큰 폭으로 뛰어올랐다.
비누라는 제품은 그야말로 귀족 사회에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그 중심엔 자신이 있었다.
이전의 작은 상단의 주인이 아닌 상계에 신흥 강자로 우뚝 섰다.
어디를 가더라도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고위급 귀족들이 그를 만나기 위해 줄을 설 정도였다.
큰돈이 보이는 비누 사업에 눈독을 들이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젠 자작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는 이미 거대 상단의 주인이라도 된 듯한 자만심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런 그가 일개 변방의 영주 따위에게 무시를 당하자 상당히 기분이 나빴다.
‘감히 큰돈을 벌게 해 줄 나를 이렇게 무시하다니. 난 이 영지에 찾아온 최고의 귀인이라고. 짜증 나는군. 이런 촌구석의 자작이 무슨 큰 벼슬인 줄 알아. 왕국에서 자작은 조금 보태서 말하면 길 가다 발에 채일 정도로 많아. 아무리 세상 물정을 모르는 촌놈이라고 하지만, 한 번씩 예상 밖의 멍청한 짓을 하니 상대하기가 너무 힘들어. 이번에 비누의 구매 가격을 깎은 돈으로 나도 자작 자리 하나 사야겠어. 에바돈 칼슨 자작이라… 좋군. 다음에 만날 때는 서로의 자리가 바뀌어 있을 거야. 내가 상석에 앉아서 돈의 힘이 얼마나 큰지 확실히 보여 주지.’
에바돈의 머릿속 자포리자는 비누를 운 좋게 개발한 촌구석의 멍청한 영주로 각인되어 있었다.
첫 거래에서 그는 행정관에게 뇌물을 먹여 자신에게 유리한 거래를 이끌어 냈다.
자포리자에게 여러 상단 중에 자신의 상단이 비누의 가격을 가장 잘 쳐 준 사실을 확실히 주지시켰고, 자포리자는 그 사실을 철석같이 믿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무려 20년간의 비누에 대한 독점 계약이 성사될 뻔했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보다 더 멍청한 자포리자가 엉뚱한 소리를 하며 결정적인 순간에 계약서를 고쳤다.
비누가 잘 팔릴지 확실하지도 않은데, 생산된 비누 전량에 대한 독점 계약을 맺으면 헬리어스 상단에 큰 폐를 끼칠 수 있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면서.
가문의 신조가 ‘다른 이에게 민폐를 끼치지 말자’라는 이딴 개소리를 할 때는 정말 한 대만 때릴 수 있다면 소원이 없을 정도로 속이 답답했다.
이건 뭐, 쥐가 고양이 생각해 주는 것도 아니고.
자포리자의 멍청함에 어쩔 수 없이 천 개의 비누만 사서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때의 당혹스러움이란 지금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였다.
에바돈은 스탄다비아에 들어서면서 영지전과 알리사 영지민들을 이주시킨 이야기를 들었다.
그의 생각으로는 이건 아주 바보 같은 결정이었다.
스스로 자신의 발목에 커다란 족쇄를 채운 것과 같았다.
‘멍청한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멍청할 줄이야. 이렇게 엄청난 짓을 서슴없이 저지르다니… 너무 멍청하니 오히려 대단해 보일 지경이야. 이 결정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돈이 필요할지… 어휴~ 이건 뭐, 계산 자체가 되지 않네. 한 곳이 썩었으면 과감히 도려내야 하거늘. 양쪽을 모두 살리려다 오히려 멀쩡한 부위까지 썩게 될 거야.’
에바돈이 자포리자가 돈이 급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당연했다.
그가 이런 얄팍한 짓을 거침없이 저지를 수 있는 이유 중에 하나기도 했다.
‘나를 무시한 벌을 톡톡히 갚아 주지.’
화풀이로 비누 가격을 깎아서 독점 계약을 맺을 생각이었다.
에바돈은 비누의 첫 거래에서 행정관을 매수한 사실과 비누 가격을 후려친 것을 자포리자가 알고 있을 거라는 건 꿈에도 몰랐다.
이 순간에도 그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사실 자포리자는 에바돈의 행실에 화가 나 첫 거래도 할 생각이 없었다.
그가 책정한 40페니는 원가를 계산하면 그리 크게 남는 가격도 아니었다.
목숨을 걸고 싸워 몬스터를 죽이고, 그 사체에서 일일이 지방을 떼어 내고, 또다시 가공을 거쳐야 비누가 탄생했다.
만약 몬스터의 침공이 없는 곳에서 비누를 만든다고 생각하면 몬스터의 지방을 사서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용병을 사서 몬스터를 사냥해야 했고, 그 비용이 비누의 원가에 들어가는 건 당연했다.
자포리자가 생각을 바꾸어 에바돈과 비누 거래를 한 이유는 왕국에 비누를 알리려는 광고 개념이었다.
그와 함께 에바돈의 행실이 괘씸해서 그의 목숨과도 같은 상단의 신용도 크게 깎을 생각이었다.
‘에바돈은 분명 비누의 선주문을 받았을 것이다. 비누를 한 번이라도 써 본 사람이라면 계속해서 비누를 찾을 건 당연해. 상인이 돈을 벌 기회를 외면할 리가 없지. 그런데 더 이상 비누 거래를 하지 않는다면 상단은 무척 곤란한 지경에 처하게 되겠지. 비누 광고가 확실히 된 듯하니, 내가 손해를 본 건 없어. 비누를 알리기 위해 일정 수량을 공짜로 뿌렸을 것이니, 생각보다 큰돈을 벌긴 힘들었을 거야. 행정관에게 준 뇌물도 적지 않은 액수고.’
이래저래 들어간 비용을 제하면 비누 천 개로 번 돈은 얼마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헬리어스 상단이 큰 발전을 했다는 에바돈의 말에 비추어 볼 때, 비누를 미끼로 미리 큰돈을 당겼을 거라는 것을 유추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자포리자는 애초에 에바돈과 만날 생각 자체가 없었다.
비누는 에바돈 덕에 왕국에 알려졌을 것이고, 이제 다른 상단이 오기만을 기다리면 되었다.
에바돈은 몰랐지만, 그는 이미 몇몇 사람을 주요 도시에 보내 비누의 생산지가 스탄다비아라는 것을 알리고 있었다.
이제 뿌려 둔 미끼를 물고 다른 상단이 오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됐다.
하지만 생각을 바꿔 지금 그를 만나고 있는 이유는 영지의 사정이 급변했기 때문이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