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광대
알리사 영지민들이 이주해 오면서 급하게 돈이 들어갈 곳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번만 특별히 에바돈과 거래를 해서 어느 정도의 돈을 조달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에바돈은 겁도 없이 오히려 비누의 가격을 후려치고 있었다.
이번에도 자포리자를 제대로 읽지 못한 그는 마지막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고 있었다.
자포리자는 얼굴을 굳힌 채 에바돈의 질문에 가타부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에바돈은 자포리자의 얼굴이 굳어진 채 도무지 펴지지 않는 걸 보고 작은 후회가 밀려들었다.
‘이런, 괜히 가격에 대해 이야기했나? 사실 지금의 가격도 충분히 싸긴 하지. 누가 위인지 알려 주려다가 상대의 심기를 제대로 건든 건가? 원래 멍청한 놈들이 앞뒤 가리지 않고 고집을 피우면 더 피곤한 법인데. 한 곳의 영지민을 모두 이주시킬 정도의 행동력이 있는 사람인데, 그를 너무 가볍게 생각했나?’
비누는 최고의 제품이었다.
귀족들의 반응은 그야말로 폭발적이었다.
에바돈은 비누를 무려 열 배의 가격으로 팔았다.
그런 비싼 가격인데도 귀족들은 선수금을 맡기며 자신에게 먼저 달라고 난리였다.
어떤 귀족은 선수금뿐만 아니라 알아서 비누의 가격을 올려 줄 정도였다.
모든 게 자포리자의 예상대로 흘러갔다.
선수금까지 받았는데 약속한 비누를 공급하지 못하면 상단의 신용은 바닥을 길 것이다.
그리고 에바돈이 그 돈을 그대로 가지고 있을 확률도 낮아 보였다.
그의 옷차림과 행동을 보면 상당 부분 미리 돈을 쓴 게 틀림없어 보였다.
자포리자의 짐작보다 에바돈의 욕심은 훨씬 컸다.
그는 비누를 더 크게 이용했다.
비누와의 거래를 미끼로 여러 사람에게 투자를 끌어냈다.
비누를 이용해 헬리어스 상단의 규모로는 따낼 수 없는 계약도 따내며 순식간에 세를 불렸다.
비누는 이 모든 것이 가능하게 한 자신에게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존재였다.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지만, 만약 비누를 가지고 돌아가지 못하면 자신의 상단은 망한다.
아니, 망하는 것이 아니라 파멸이었다.
귀족들에게 선수금을 받은 것뿐만 아니라 비누를 미끼로 많은 돈을 투자받았고, 여러 계약도 맺었다.
비누가 없다는 것이 알려지는 순간, 자신의 목숨뿐만 아니라 가족 모두의 목숨이 위험해질 것이다.
“흠흠, 하지만 영주님과의 의리도 있으니 기존의 가격으로 거래를 하겠습니다. 대신 이번에는 저번에 하다 말았던 20년간 생산되는 비누의 독점 계약을 마무리했으면 합니다.”
에바돈은 자신의 실수를 마치 자포리자를 위하는 척하며 교묘한 말로 바로잡았다.
자포리자는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
돈이 아무리 급해도 이런 비열한 놈과 거래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무리 돈이 급하다고 해도, 상종하지 못할 인간인 걸 알면서도, 이 자리에 나온 자신을 탓했다.
자포리자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 나갔다.
이제는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 화가 치밀어 오를 지경이었다.
“아니, 영주님! 지금 대화 중인데, 어딜 가는 겁니까? 당장 돌아오세요. 얼마나 중요한 자리인데, 이런 무례한 행동을 하는 겁니까? 내가 누군지 몰라요? 비누의 유통을 책임지는 유일한 상단의 주인입니다!”
당황한 에바돈이 자포리자의 뒤통수에 대고 급하게 따지듯이 말했다.
그 순간 그의 목덜미가 시원해졌다.
그의 목이 날카로운 검날과 맞닿아 있었다.
“이런 건방진 새끼가 감히 어디서 입을 함부로 놀리는 것이냐? 주제도 모르는 어리석은 광대 놈이. 죽고 싶냐?”
기사 칼튼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군을 무시한 에바돈의 행동에 머리끝까지 화가 났지만, 주군의 앞에서 큰 소리를 내는 불충을 저지를 수는 없었다.
대신 그의 두 눈에서 독사 같은 독기가 일렁였다.
그의 검이 에바돈의 목을 파고들었다.
“헤엑!”
놀란 에바돈이 비명을 질렀다.
검에 베인 목의 상처에서 흐른 피가 검을 타고 흘렀다.
“아닙니다. 잘… 잘못했습니다. 살… 살려 주십시오.”
에바돈의 방금 행동은 아무리 급해도 평민인 자신이 귀족에게 해서는 안 될 행동이었다.
대화 중에 귀족이 먼저 일어났다고 감히 평민인 자신이 따지고 들다니.
이미 그의 뇌리에 자포리자는 멍청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너무 깊게 박혀 있었다.
더군다나 몇 달간 자작 정도는 가볍게 무시할 만큼 그와 그의 상단은 대단한 발전을 한 상태였다.
그러다 보니 상황이 급해지자 자신도 모르게 본심이 튀어나왔던 것이다.
“여봐라.”
자포리자가 소리치자 병사 몇 명이 집무실로 들어왔다.
“이놈을 귀족 모욕죄로 태형 50대를 쳐서 영지 밖으로 내쫓아라.”
에바돈의 안색이 잿빛으로 변하다 못해 하얗게 질렸다.
태형 50대는 맞다가 죽을 수도 있을 정도로 강력한 형벌이었다.
자신의 나이에 이런 형벌을 받았다가는 남은 평생을 똥오줌도 못 가릴 수도 있었다.
당장은 비누의 거래가 아니라 자신의 목숨을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잘못했습니다, 살려 주십시오! 영주님, 제가 순간 눈이 뒤집혀서 실수했습니다! 제가 비누 하나에 1골드, 아니, 2골드로 사 가겠습니다! 그러니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에바돈도 대단한 상인인 게 이 상황에서도 끝까지 마진을 크게 남길 수 있는 액수를 불렀다.
그는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며 빌고 또 빌었다.
하지만 자포리자에겐 어떠한 말도 들을 수가 없었다.
“영주님! 제발, 제발 살려 주세요!”
병사들에게 질질 끌려 나가는 순간까지도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빌었다.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 봤지만, 자포리자는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에바돈은 그대로 영주의 집무실 밖으로 쫓겨났다.
“큰일 났다.”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최악의 일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그는 급하게 행정관을 찾았다.
이 사태를 해결할 가능성이 있는 이는 뇌물을 먹인 행정관뿐이었다.
“네밀 행정관을 불러 주게. 내가 급하게 찾는다고 말을 전해 주고.”
에바돈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네밀에게 무려 500골드나 되는 뇌물을 먹여 놨다.
그와 이미 한배를 탄 몸이니, 절대 자신을 외면하지 못할 것이다.
이번 일로 또다시 뇌물을 먹여야 할 테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아직 끝난 게 아니야. 태형은 대신 맞을 사람을 구하면 돼. 그리고 네밀 행정관이 있으니 다시 비누에 관한 계약을 할 수 있을 거야. 자포리자의 최측근이니, 설득하는 게 어렵지는 않겠지. 그럼 모든 것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거야. 실수로 돈이 좀 나가겠지만, 앞으로 비누로 벌어들일 수입을 생각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에바돈의 급한 마음과 달리 병사들은 미동조차 없었다.
“아니, 지금 뭐 하는 거야? 네밀 행정관을 데려오라는데, 왜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 것이냐?”
에바돈은 버럭 화를 내며 병사들을 다그쳤다.
일개 병사가 행정관을 무시하다니,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쯧쯧,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군. 상인이라고 해서 대단한 사람들인 줄 알았더니, 아무것도 아니었네. 어이, 멍청한 양반아. 당신이 찾는 네밀 행정관은 이미 죽은 지 오래됐어.”
“죽, 죽, 죽다니 그… 그게 무, 무슨 말이야?”
에바돈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급히 눈을 깜빡거렸다.
몸에 한기가 밀려들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거리자 병사들이 급하게 그의 팔을 잡았다.
“당신이 떠난 다음 날 목숨이 날아갔어. 그의 가족들은 모두 영지에서 쫓겨나고 말이야. 영주님은 그날 네놈의 수작을 모두 파악하셨어. 정말 대단하시다니까. 그리고 네밀 행정관의 재산은 모두 깡그리 압수당했지. 당신이 먹인 뇌물도 말이야.”
갑자기 눈앞이 깜깜해졌다.
‘설마 진짜 멍청한 놈은 나였단 말인가? 계약할 듯하다 가문의 가훈이니 하는 소리를 하면서 오히려 나를 가지고 논 거라니… 내가 지금껏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만나 왔는데… 이런 변방의 작은 영주가 이렇게 쉽게 나를 속였다고?’
마음속을 가득 채우던 장밋빛 미래가 와르르 무너지면서 온몸에서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듯한 분노에 잠식됐다.
‘알리사 영지민을 받아들인 건 멍청한 행동이 아니었어. 오히려 그의 배포가 너무 커서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생각으론 상상조차 할 수 없던 거였어.’
그는 한 마리의 용이었다.
웅지를 펼칠 날만을 기다리고 있는.
그제야 집무실에서 자신의 목에 검을 겨눈 기사의 말이 이해가 되었다.
그의 말대로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는 광대였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럴 수는 없어… 이럴 수는 없다고! 어떻게 잡은 기회인데, 이렇게 무너질 수는 없어! 내가 평생에 꿈꾸던 순간이 바로 코앞에 있는데… 비누의 가치를 가장 먼저 꿰뚫어 본 건 바로 나였어. 그렇기에 분명 나에게도 비누에 대한 지분이 있다고. 이대로 끝내기엔 너무 억울해. 이런 건 공평하지 않다고!”
자포리자에 대한 증오심으로 치켜 올라간 눈이 가늘게 떨렸다.
에바돈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의 감정은 갈피를 못 잡고 널을 뛰듯 솟구쳤다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이 새끼야, 조용히 해. 영주님을 속이려 했던 놈이 어디서 개소리를 하는 거야? 네놈의 엉덩이는 내가 직접 때리겠어. 내 어깨가 빠지는 한이 있더라도 있는 힘껏 내려쳐 주지. 단단히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병사 중 한 명이 화를 내며 에바돈의 팔을 비틀었다.
팔이 꺾이는 고통에 정신이 들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앞으로 다가올 끔찍한 미래가 두려워 미칠 지경이었다.
에바돈은 스탄다비아에서 쫓겨났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와 같이 사지가 멀쩡한 채로.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는 태형을 맞지는 않았다.
단지 그의 주머니가 텅텅 비었을 뿐.
태형을 맞을 자신이 없던 그는 자신을 대신해 태형을 맞을 사람을 사려 했다.
자포리자는 비누를 거래하지 않고도 돈을 벌 기회라 여기고 모른 척했다.
에바돈은 무려 500골드나 되는 돈을 내고서야 자신을 대신해 태형을 맞을 사람을 구했다.
이렇게 많은 돈을 들여 사람을 구할 수밖에 없던 건 자포리자가 뒤에 있었기 때문이다.
에바돈이 아무리 뛰어난 상인이라 해도 손발이 다 묶인 이 상황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흥정을 끌어낼 수는 없었다.
주머니에 먼지만 남기고 가진 돈 모두를 토해 내야 했다.
에바돈은 자포리자를 만만하게 보다 자발적으로 비누 광고만 한 셈이었다.
무려 1000골드라는 큰돈까지 뜯기고.
헬리어스 상단은 망했다.
그 뒤로 에바돈의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그에게 돈을 투자한 사람만이 알 수 있을 것이었다.
* * *
경일은 고민에 빠졌다.
스탄다비아는 큰 어려움에 빠져 있었다.
힘든 일이 많을 거라고 막연히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현실이 되자 그 충격이 상당했다.
크고 작은 문제들이 끊임없이 터져 나왔다.
알리사 영지민들은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폭정이 사라진 것만으로 행복해하는 모습이 보였다.
앞으로 더 나은 삶이 살 수 있다는 희망이 그들을 지탱하고 있었다.
하지만 맨땅에서 새로 시작하는 게 쉬울 리가 없었다.
자포리자가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지만, 필요한 물자가 너무 많았다.
그라고 해서 없는 돈을 만들어 낼 재주는 없었다.
어떻게든 도움을 주고 싶었다.
일이 이렇게 된 건 자신의 책임도 컸다.
이건 모두 자신의 아이디어였으니.
‘그래. 이대로 있을 수는 없어. 지금도 많은 사람이 식량이 떨어져 굶고 있는데, 나 하나의 안전 때문에 모른 척 할 수 없지. 이미 내 의견을 영주님께 전달할 때 각오한 일이잖아.’
경일이 마음만 먹으면 큰돈을 만들 수 있었다.
인벤토리에는 광부들이 캔 던전 금속이 매일 매일 쌓이고 있었다.
평균 광부 한 사람이 하루에 평균 800g 정도의 던전 금속을 캤다.
광산에서 나오는 던전 금속은 미스릴이었다.
미스릴은 100g에 천만 원으로 시세가 형성되어 있었다.
다섯 명의 광부가 하루에 캐는 미스릴은 4,200g이었고 하루 4억이 넘는 돈이 들어오는 것과 같았다.
경일은 던전에 만들어 놓은 화덕의 무쇠 솥에 광석을 넣고 열을 가했다.
녹는점이 낮은 미스릴이 얼마 지나지 않아 액체 상태로 변했다.
경일은 조심히 액체 상태의 미스릴을 만들어 놓은 틀에 부었다.
액체 상태의 미스릴이 식어 금괴 모양의 순수 미스릴괴가 만들어 졌다.
무게는 대략 하나에 50g 정도였다.
경일은 스무 개의 미스릴괴를 가지고 암시장으로 향했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