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질문 값
정부는 부족한 국고를 채우기 위해 헌터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매겼다.
많은 헌터가 세금을 피해 암시장을 이용했다.
시세보다 싸게 팔아도 세금을 생각하면 그 편이 훨씬 이득이었다.
암시장의 물건들은 기업과 개인에게 팔려 나갔다.
정부는 최대한 단속을 시행하고 있지만,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오늘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이미 트럭도 한 대 빌려 놓았다.
미스릴이 든 배낭을 메고, 모자와 안경을 쓰고, 거리에 늘 보이는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으로 꾸몄다.
암시장이라고 해서 특별히 다른 점은 없었다.
겉모습은 일반 시장과 같았다.
암시장의 상인들이라고 불법적인 거래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정상적인 거래를 위주로 하면서 뒤에서는 암거래를 했다.
단속을 피하고자 대부분 단골이나, 신원이 확실한 사람들하고만 거래했다.
경일은 소개해 줄 사람도 없었고, 거래처도 없으니 미스릴을 파는 일이 쉽지가 않았다.
더군다나 오늘 가지고 온 미스릴이 1㎏이었다.
시세로 1억이나 되는 큰 거래였다.
물론 시세대로 다 받지는 못하겠지만, 개인이 하는 거래치고는 꽤 금액이 큰 편이었다.
처음에는 조금씩 나누어 팔아 보려 했으나, 스탄다비아의 사정도 급했고, 자신도 시간이 없었다.
조금 무리하긴 했지만, 이 정도는 충분히 팔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아침 시간이지만, 암시장엔 바쁘게 돌아다니는 헌터들이 제법 보였다.
아마 던전에 들어가기 전에 필요한 물건을 사거나 팔러 온 듯했다.
헌터들의 물품을 거래하는 곳은 많았다.
전문적으로 한 종류만 취급하는 상점도 있었고, 잡화처럼 여러 개의 헌터 관련 용품을 한꺼번에 취급하는 상점도 많았다.
‘이건 뭐, 어느 상점에 들어가야 하는지 알 수가 없으니. 무턱대고 들어가서 사 달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잘못하다가 신고라도 당하면 큰일이지.’
경일은 헌터증이 없었다.
몬스터를 잡으러 던전에 들어갈 일이 없으니 아예 헌터 등록을 하지 않은 것이다.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헌터 등록을 해서 활동을 좀 하는 게 나았으려나? 그럼 암시장 정보도 좀 얻고 할 텐데. 아니지. 내가 헌터라도 이 정도 물건을 정상적으로 팔 수는 없어. 분명 누군가의 의심을 살 수밖에 없을게 빤해. 뭐, 사실 헌터증은 별 의미가 없지. 괜히 귀찮은 일만 생길 테고.’
헌터로 이름이 올라간 순간부터 헌터 협회에서 관리가 들어갔다.
괜한 시선을 끌 수도 있으니 헌터 등록을 하지 않는 게 편했다.
자신의 성장 배경이 알려져서 좋을 게 없었다.
경일은 최대한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시장을 둘러보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의 눈엔 그렇게 보이지 않은 듯했다.
누군가 경일의 옆으로 슬쩍 다가왔다.
“물건 팔러 온 거죠? 좋은 값을 쳐 줄 테니 같이 갑시다.”
경일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남자를 봤다.
“누가 봐도 암시장에 물건 팔러 온 거처럼 계속 돌아다니던데, 그렇게 계속 시선을 끌어 봐야 좋을 게 없습니다. 그러다 단속이라도 당하면 그쪽만 손해니까, 나한테 얼른 물건 팔고 가는 게 나을 겁니다.”
남자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가벼운 말투에 건들거리는 느낌이 묻어 있는 게 꼭 단란주점의 삐끼 같은 느낌이었다.
남자는 경일의 대답도 듣지 않고 앞장서서 걸었다.
마치 당연히 따라올 거처럼.
이런 모습을 보니 오히려 안심되는 부분도 있었다.
호객 행위를 제법 잘하는 게 뒤에 확실한 상점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저 사람 말대로 내가 티가 많이 났나 보네. 이거 어떻게 해야 하나? 에잇, 모르겠다. 일단 따라가 보자. 나 혼자 헤맨다고 해결될 거 같지도 않고. 어느 정도 손해는 볼 수밖에 없을 거야. 뭐, 손해를 보더라도 거래처만 잡을 수 있으면 오히려 나한테는 이득이지.’
경일은 조용히 남자의 뒤를 따라붙었다.
남자는 건물 사이의 작은 골목으로 들어갔다.
골목은 꽤 깊고 복잡했다.
누군가가 버린 쓰레기와 오줌 냄새가 진동했다.
낮인데도 골목엔 인적이 없었다.
제법 음침한 게, 여기가 숨겨진 진정한 암시장이 아닐까 하는 느낌을 물씬 풍겼다.
한참 골목을 돌아다니던 남자가 어떤 단층집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벽 군데군데에 페인트가 벗겨져 있었고, 이끼까지 낀 걸 보니 버려진 집 같았다.
음습한 게 마약 거래라도 이루어지고 있을 거 같은 집이었다.
‘이거, 나도 모르게 대단한 곳에 온 거 같은데. 어떤 조직의 은밀하게 숨겨진 상점 같잖아.’
분위기만으로도 사람을 충분히 위축시키는 곳이었다.
‘괜히 따라왔나?’
살짝 후회가 밀려들었다.
거래도 하기 전에 상대의 기부터 꺾어 놓으려는 의도였다면 확실히 성공했다.
남자는 녹이 슨 대문을 정해 놓은 암호인 듯 리듬감 있게 노크했다.
대문의 녹이 우수수 떨어지며 굳게 닫혀 있던 대문이 열렸다.
“들어가시죠.”
남자가 입구에서 비켜서서 공간을 만들었다.
전등이 꺼져 있어 그런지, 집 안이 잘 보이지 않았다.
약간 망설여졌으나, 이왕 내친걸음이었다.
경일은 남자의 옆을 스치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이쪽으로.”
곧바로 따라 들어온 남자가 자신의 오른쪽 방문을 열고 경일에게 들어가라는 듯 눈짓을 보냈다.
남자가 경일을 향해 한 번 히쭉 웃어 보였다.
방으로 들어가니 방 가운데에 테이블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방은 제법 넓었다.
벽 쪽으로 오래된 가구의 문 하나가 금방 떨어질 거처럼 아슬아슬하게 달려 있었다.
방바닥엔 먹다 버린 음식 봉지와 쓰레기가 같이 굴러다녔다.
오래된 장판에 여기저기 새까맣게 때가 탄 모습이 보였다.
이들은 이런 더러운 방에서 음식을 먹고 지내는 듯했다.
불결한 모습에 거부감이 밀려들었다.
테이블을 중심으로 세 명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앉으세요.”
세 명의 남자 중 한 명이 자리를 권했다.
경일이 순순히 의자에 앉자 우두머리로 보이는 남자가 입을 열었다.
볼에 긴 흉터가 있는 것이 제법 위협적이었다.
“뭘 팔러 왔습니까?”
남자가 입을 열 때마다 볼의 흉터가 지렁이처럼 꿈틀거렸다.
“물건을 팔러 온 건 아니고, 암시장 미스릴 시세를 알아보러 왔습니다.”
경일은 일단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물고기 창자 같이 가늘고 긴 미로 같은 골목을 지나온 거나, 버려진 집을 거래 장소로 이용하는 것을 봐서 그렇게 느낌이 좋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여기까지 안내해 준 남자가 방금 보여 준 웃음이 마음에 걸렸다.
그럴 확률이 커 보이지는 않았지만, 단속반의 함정일 수도 있었다.
하여간 조심하는 게 나을 것이다.
“미스릴 100g에 얼마입니까?”
경일이 물었다.
“순도에 따라 다르지요.”
남자가 경일을 향해 상체를 살짝 숙이며 대답했다.
미스릴이라는 말에 급 관심을 드러냈다.
“100%면 얼마입니까?”
남자는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지금 시세가 100g에 천만 원인 건 잘 아실 거고. 구백만 원 드리죠. 이 정도면 아주 후한 가격입니다. 얼마나 가지고 있습니까?”
남자의 말은 사실이었다.
자신들도 물건을 되팔아야 하니, 저 가격이면 이윤이 남지 않을 수도 있는 가격이었다.
하지만 경일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래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암시장에 처음 거래를 하는 거지만, 상식적으로 너무 후한 가격은 충분히 의심스러웠다.
아마 보통의 경우라면, 백이면 백 모두 돈 욕심에 물건을 꺼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서 제일 부자일 수도 있는 경일에겐 별다른 감흥을 주지는 못했다.
매입 가격이 너무 싼 것도 문제겠지만, 너무 후한 것도 충분히 의심스러웠다.
오히려 싸게 불렀으면 흥정이라도 시도했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그럼 다음에 미스릴이 생기면 팔러 오겠습니다.”
경일이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순간, 그를 안내했던 남자가 문을 막고 섰다.
안내할 때의 친절한 표정은 없었다.
경일을 겁주기 위해 위협적으로 눈을 부라리며 내려다봤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싸하게 가라앉았다.
“어이~ 아직 내 말이 안 끝났거든. 좋은 말로 할 때 자리에 앉지?”
우두머리 남자는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의지를 확실히 드러냈다.
“질문한 값은 내놓고 가야지. 우리가 시간이 남아도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그게 당연한 거 아니겠어?”
조금 전의 친절한 목소리가 그의 것이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그의 말투에는 날이 서 있었다.
“질문한 값이 얼마입니까?”
경일이 물었다.
“네 배낭. 배낭만 놓고 나가면 돼.”
남자는 자신의 말만 따르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듯이 가볍게 얘기했다.
경일은 남자의 이야기에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지폐 한 장을 테이블에 올렸다.
“여기 만 원이 있습니다. 이거면 질문 값으로 충분할 겁니다.”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만원을 보자 남자들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이 새끼가 분위기 파악이 안 되는 거야? 죽고 싶어? 여기에서 너 하나쯤 사라져도 아무도 몰라. 시체 치우기 귀찮으니까 좋은 말 할 때 배낭 올려놓고 조용히 나가라.”
네 명의 남자가 피워 올린 기세 때문에 경일의 피부가 따끔거렸다.
‘이 사람들 헌터구나. 하긴, 여기서 강도질을 하려면 당연히 헌터야겠지.’
경일은 망설이지 않았다.
몸을 돌려 문을 막고 있던 남자를 향해 천천히 주먹을 휘둘렀다.
“병신.”
남자가 가볍게 욕을 흘렸다.
그가 서 있는 위치는 경일의 주먹이 닿을 거리가 아니었다.
퍼억!
그런데도 타격음이 들렸다.
그것도 주먹으로 때렸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묵직한 소리가 났다.
“뭐야?”
우두머리 남자가 놀라 소리쳤다.
경일의 손에는 어느새 1m 정도 길이의 몽둥이가 쥐어져 있었다.
순도 100%의 미스릴 몽둥이가 문을 막고 있던 남자의 머리를 사정없이 후려쳤다.
“아악!”
남자는 짧은 비명과 함께 그대로 앞으로 꼬꾸라졌다.
그와 함께 바닥의 오래된 먼지가 피어올랐다.
“인벤토리 능력자?”
“아니야. 인벤토리에서 저렇게 빨리 무기를 빼낼 수는 없어.”
“저 새끼가 등을 돌리고 있었으니, 순간적으로 무기가 나타난 것이라 보일 수도 있어.”
남자들의 놀란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의 상황이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모습이었다.
“병신 새끼들아,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우두머리 남자가 그들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내 인벤토리 스킬이 남들과 많이 다른가 보군. 저들이 저렇게 놀라는 걸 보니, 내 스킬이 대단한 모양이야. 역시 던전이 주는 건 뭐가 달라도 달라.’
경일은 조금 전까지 나빴던 기분이 좋아졌다.
벼룩시장에서 멋진 그림을 샀는데, 알고 보니 유명 화가의 작품으로 밝혀졌다고나 할까.
하여간 내가 가진 게 남들보다 우월하다는 사실에 어깨가 우쭐거렸다.
“씨발, 너 누구야? 인벤토리를 가지고 있는 헌터가 초보자처럼 이곳을 온 이유가 뭐지? 누가 보낸 거야? 우리를 노리는 곳이 어디지?”
우두머리 남자가 바짝 긴장한 채로 경일에게 물었다.
귀한 힐러만큼 대접을 받는 게, 인벤토리 스킬을 가진 헌터였다.
그런 헌터가 시장에 온 초보들 등이나 치는 자신들에게 올 이유가 없었다.
이건 틀림없이 다른 길드에서 자신들을 노리고 한 행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자신들을 시작으로 길드와의 전쟁이 시작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보통 이럴 경우, 살아날 가능성은 아주 낮다고 생각해야 했다.
운이 좋으면 선전포고를 길드에 전달하기 위해 한 명 정도는 병신으로 살아남을 수도 있었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