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몽타주
경일이 아무 말도 없이 허공을 보며 한참을 조용히 서 있자, 남자는 조금이나마 정신을 차렸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동료들과 같이 자신도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수도 있었다.
‘어떻게 사람의 몸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가 있지? 몸이 그대로 분해가 됐어. 죽은 건가? 아마 죽었겠지? 세포 단위로 몸이 쪼개져서 죽다니… 세상에 이런 잔혹한 죽음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 세포 하나하나마다 고통이 그대로 느껴지겠지. 무서워, 너무도 무서워서 미쳐버리겠어.’
자신이 아는 죽음에 이런 것은 없었다.
몇백 배는 더 무서웠다.
방심을 틈타 한번 덤벼 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곧 머리를 흔들었다.
자신과 같은 헌터 열 명이 덤벼들어도 도저히 이길 수 있을 거 같지가 않았다.
‘저렇게 죽기는 죽어도 싫어.’
남자는 지금의 마음 같아서는 검에 찔려 죽을 수만 있다면, 오히려 웃으며 죽을 수도 있을 거 같았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살아남아야 했다.
처음 느껴 보는 미지의 공포는 그에게 용기를 주었다.
그는 최선을 다해 방법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남자가 선택한 건 협박이었다.
지금의 상황에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고, 의외로 잘 통하는 경우가 많았다.
“난 신화 길드 소속이다. 이 동네 헌터라면 우리 길드가 얼마나 강하고 악랄한지 잘 알고 있을 거야. 나를 어떻게 해볼 거면 다시 한번 생각을 해 보는 게 좋을 거야. 우리는 절대 당하고 있지 않아. 복수를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서슴없이 저지를 수 있는 게 우리라는 것을 명심해.”
남자가 ‘무슨 짓’이라는 단어에 특히 힘을 주며 말했다.
이건 꼭 경일만을 노린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경일에게 고통을 줄 수 있는 일이라면 어떤 일이라도 하겠다는 의미였다.
“나 참, 이거 황당한 새끼네. 너 바보야? 네 동료가 이미 나한테 당했는데, 지금 그 말을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어? 말하려면 미리 말했어야지.”
경일의 말에 남자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커졌다.
커진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움직였다.
급한 마음에 이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일단 지르고 봤던 것이다.
“그 사람들은 신화 길드 소속이 아니야. 내가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들이야. 난 그냥 용돈이나 벌려고 낀 거뿐이야. 그러니 그 사람들이랑은 아무 상관이 없어.”
남자가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경일이 그런 남자를 한심한 듯 바라보자 남자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신화 길드?”
당황한 그를 보며 경일이 물었다.
“그래, 신화 길드.”
남자는 경일이 드디어 자신이 속한 길드에 반응을 보이자 얼굴에 희색이 감돌았다.
경일은 몰랐지만, 신화 길드가 자신을 얼마나 집요하게 찾고 있는 줄 알았으면 절대 이곳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것이다.
[상대에 대한 지배력이 약해졌습니다. 광산으로 이동시킬 수 없습니다.]
메시지가 남자의 현재 상태를 알려 주었다.
“신화 길드? 난 신화 길드 모르는데?”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너 정도 되는 헌터가 신화 길드를 모른다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남자는 소속 길드를 믿고 오히려 큰소리를 쳤다.
“모른다고, 이 새끼야. 모른다는 데 왜 계속 지랄이야? 좆밥 새끼가 어디서 허세를 떨어. 난 너 같은 놈이 제일 꼴 보기 싫어. 혼자서는 아무것도 아닌 놈이 뒷배만 믿고 설치는 놈이 제일 짜증 나. 쪽팔리는 줄도 모르고 말이야. 내가 이전에 회사를 다녔을 때, 딱 너 같은 돼지 새끼 한 마리가 있었어. 아무것도 아닌 놈이 아버지가 사장이라고 얼마나 설치고 다니든지.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내가 이가 갈리는 사람이야.”
남자의 말은 던전을 만나기 전 다니던 직장에서 사장 아들에게 당했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대못으로 복수를 해 주긴 했지만, 그때 다친 마음의 상처는 작지 않았다.
‘이거 아무래도 제대로 미친놈에게 걸린 거 같은데…….’
경일이 이상한 말을 하며 크게 화를 내자 남자는 겁이 덜컥 났다.
“그리고 ‘무슨 짓’이라도 한다고 했지? 그게 무슨 말이야? 지금 내 주위 사람들을 건들겠다는 거야?”
말하는 경일의 얼굴이 종이보다 더 쉽게 구겨졌다.
터지기 직전의 풍선처럼 위험해 보였다.
“…….”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가 원한 건 이런 게 아니었다.
괜한 말을 하는 바람에 경일의 노여움만 더욱 크게 산 거 같아 후회가 밀려들었다.
“이것들이, 보통 악독한 놈들이 아니었네. 기가 산 거 같으니 일단 좀 맞자.”
경일의 손에 들린 몽둥이가 천장으로 올라갔다.
“잠깐만요!”
남자는 곧바로 겁먹은 개처럼 꼬리를 말았다.
[상대가 완전히 굴복했습니다. 광산으로 이동을 원하십니까? (Y / N)]
눈앞에 다시 떠오른 메시지를 무시했다.
한번 개겼으니 그만큼의 응징을 가할 생각이었다.
어설픈 협박에 잊고 살았던 기분 나쁜 기억이 떠오른 것도 불쾌했고.
‘근데 헌터는 처음 보내는데. 이것들이 힘세다고 일은 안 하고 탈출하려고 하는 거 아냐?’
[광산에서는 마나의 사용이 금지됩니다.]
곧바로 떠오른 메시지에 경일의 걱정이 시원하게 해결이 됐다.
‘역시 던전은 내 마음을 정확히 알아준다니까. 마치 살아 있는 거 같잖아.’
남자는 네 명 중 가장 많이 맞았다.
그런 다음, 그에게 암시장에 대한 여러 가지 정보를 얻었다.
광산으로 보내려는 순간, 방 한구석에 덩그러니 놓인 금고가 눈에 들어왔다.
경일은 망설이지 않고 금고로 향했다.
“야, 비밀번호 뭐야?”
“저는 모릅니다.”
“모른다고?”
경일의 눈초리가 위로 올라가며 사나워졌다.
“정말 모릅니다. 제가 여기서 막내였다고요. 제가 왜 밖에서 먹잇감을 데리고 왔겠습니까?”
“먹잇감?”
“아, 그게 아니고… 손님을 데리고…….”
“알았어. 금고 안에는 뭐가 들어 있지?”
“…….”
“3초 준다.”
경일이 몽둥이로 자신의 손바닥을 탁탁 소리 나게 쳤다.
“현금이랑 무기가 들어 있습니다.”
“헌터들에게 뺏은 걸 보관했나 보군.”
그는 기대하며 인벤토리에서 작은 단도를 꺼냈다.
날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 게 강철도 가볍게 벨 거 같은 예기가 흘렀다.
“잘리려나?”
경일은 금고의 틈에 단도를 힘껏 찔러 넣었다.
헌터의 마나와 만난 미스릴은 확실히 날카로웠다.
금고의 문 사이의 좁은 틈을 파고 들어갔다.
“좀 빡빡하네.”
몽둥이로 단도의 칼자루를 때리자 단도가 조금씩 깊게 박혔다.
틈에 들어간 단도의 등을 몽둥이로 내리쳤다.
단도가 금고의 틈을 따라 내려가자, 어느 순간 자물쇠 핀이 잘리는 느낌이 났다.
경일이 금고의 손잡이를 잡고 당기니 부드럽게 열렸다.
“와~ 이 새끼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강도질을 한 거야?”
금고 속에는 제법 많은 현금과 검 한 자루가 보였다.
“현금은 내가 좋은 곳에 쓸 거니 억울해하지 말고. 아! 네놈 돈도 아니니 이런 말을 할 필요가 없구나.”
금고 속의 현금을 챙기고 검을 꺼냈다.
검 손잡이를 잡는데 손에 찐득한 느낌이 들었다.
피였다.
손바닥에 말라비틀어진 피가 한가득 묻어났다.
“이 새끼들 설마?”
검 손잡이를 감은 가죽이 어두운색이라 몰랐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피에 절어 있었다.
“너희 설마 사람까지 죽인 거야?”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우리는 그냥 암시장에 오는 초짜들을 유인해 물건만 뺏었을 뿐입니다. 믿어 주십시오. 우리는 절대 그런 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남자가 펄쩍 뛰며 절대 아니라고 딱 잡아뗐다.
오히려 저런 모습을 보니 더 의심스러웠다.
경일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남자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자, 그는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그럼 검 손잡이에 묻은 이 많은 피는 뭐야?”
“그, 그게 저, 저도 잘 모, 모릅니다.”
“네놈이 죽인 게 확실하네. 네놈이 아니라고 말해도 난 그렇게 생각하고, 그에 준하는 고통을 줄 거야. 만약 이 자리에서 사실을 말하면 정상참작을 해 주지. 다시 한번 묻는다. 마지막 기회니 잘 생각해.”
남자는 혼란스러웠다.
사실을 고백해야 할지 아니면 끝까지 잡아떼야 할지 고민했다.
자신들이 검의 주인을 죽인 게 맞았다.
검을 놓고 갔으면 굳이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자신의 검을 뺏기지 않으려고 반항을 했다.
남자는 끈질겼다.
4대1의 싸움에서도 끝까지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그의 검은 자신의 피로 물들어 갔다.
결국, 남자는 죽어서 이 집 뒤뜰에 묻혔다.
“그게… 고의가 아니라 사고였어요.”
남자는 경일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인정을 하고 말았다.
“역시 네놈들이 죽인 게 맞았네. 사고? 오늘 너희가 하는 짓을 모두 봤는데 사고라니. 하여간 악독한 놈들이 뻔뻔하기까지 하네.”
“잠, 잠깐만! 제발 잠깐만요!”
남자는 마음이 급했다.
경일의 저 말이 끝나는 순간, 자신이 어떻게 될지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자신의 동료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지 않았는가.
그건 형언할 수 없는 공포였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도, 실제로 본 적도 없는 새로운 죽음의 공포에 그는 너무나 두려웠다.
‘뭐라도 해야 해. 내 몸이 공기처럼 사라지는 건 말도 안 돼. 차라리 몽둥이에 맞아 죽으면 죽었지, 저렇게는 절대 죽고 싶지 않아.’
남자는 살 수 있는 방법, 아니, 죽더라도 자신이 아는 방법으로 죽고 싶었다.
경일은 남자의 너무나 절박한 목소리에 놀라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 순간, 남자의 머리에 무언가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건 하나의 몽타주였다.
그동안 지겹도록 봐 왔던.
‘설마 그 사과 장수? 그러고 보니 키랑 체형, 쓰고 있는 모자까지 모두 비슷하잖아. 저 얼굴로 몽타주를 그리면… 그래, 엄청 비슷해. 아니, 똑같아! 어쩐지 시장에서 처음 봤을 때부터 낯이 익는 거 같더니.’
레벨이 낮은 그는 사과 장수를 찾기 위해 시장에 가장 많이 동원된 헌터였다.
시장에 나갈 때마다 곽마권은 매번 몽타주를 나누어 주었고, 몽타주에 그려진 얼굴을 지겹도록 봐 왔다.
지금 몽타주의 인물이 자신의 눈앞에 있었다.
이건 자신을 수렁에서 건져 줄 동아줄이 될 수도 있었다.
경일은 몰랐지만, 오늘 낀 안경이나, 모자, 그리고 옷차림은 그가 신화 길드 5팀장 와이프를 만났을 때의 모습이었다.
변장할 때 그가 가장 많이 애용하던 모습이라 자신도 모르게 그때의 모습으로 변장하고 오늘 암시장을 찾은 것이었다.
“당신은 사과 장수, 분명 사과 장수가 틀림없어.”
얼굴에 땀까지 흘리며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골똘히 생각하던 남자가 갑자기 급발진하자 당황스러웠다.
“뭐야? 왜 이러는 거야. 사과 장수라니?”
“아니야. 거짓말하지 마. 당신은 사과 장수가 틀림없어.”
“사과 장수?”
갑작스러운 남자의 말에 경일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래, 내가 사과를 팔기는 했었지. 그런데 처음 보는 사람이 나를 보고 사과 장수라니? 혹시 그때 사과를 사 간 손님이었나?’
남자는 잔뜩 상기된 얼굴로 소리쳤다.
“나는 당신과 관련된 아주 중요한 정보를 가지고 있어. 내 목숨을 살려 주면 나도 그 정보를 넘겨주지.”
경일은 호기심이 일었다.
처음 보는 남자가 자신이 예전에 했던 일을 알고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중요한 정보를 알려 준다고 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궁금해하는 경일의 모습을 보고 남자는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는지 조금 전과 다르게 차분하게 말했다.
“이건 아주 중요한 정보야. 당신의 목숨을 살릴 수도 있는 정보라고. 분명 약속하지. 내 목숨과 견주어도 전혀 아깝지 않을 거야.”
“중요하다라~ 난 그쪽을 처음 보는데. 뭐, 어쨌든 궁금하기는 하네. 어디 한 번 이야기 해 봐.”
“내가 바본 줄 알아. 여기서 이야기했다가 당신이 약속을 안 지키면?”
“그래? 그럼 어떻게 하고 싶은데.”
“나를 놓아주면 이야기해 주지.”
“글쎄, 내가 왜 그래야 하지?”
경일이 느긋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사실 남자의 말이 궁금하긴 했으나, 남자를 놓아줄 만큼 궁금하진 않았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