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새로운 사실
처음 보는 사람이 분명한데, 그런 사람의 입에서 나온 정보라고 해 봐야 별것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특히 분식점을 열고 난 뒤에는 누군가에게 눈에 띌 행동 자체를 한 적이 없었다.
매일 분식점과 던전만 오가는데, 무슨 일이 생길 건덕지가 없지 않은가.
경일이 흥미를 잃어 가는 모습에 남자는 다급해졌다.
“누가 당신을 찾고 있어. 그것도 아주 필사적으로!”
일단 경일이 흥미를 잃지 않게 알고 있는 사실의 일부분을 말했다.
하지만 그의 의도와 다르게 경일의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여전히 그렇게 궁금해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경일은 한 번도 숨은 적이 없었다.
살던 곳도 몇 년 전부터 살던 옥탑방에 계속 머물고 있었고, 동네에서도 유명한 분식점을 하고 있지 않은가.
자신을 아는 사람이라면 자신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나를 다른 사람과 착각한 거 같네. 난 요 몇 년간 지금 사는 곳에서 떠난 적이 없어. 누군가가 나를 찾고자 했으면 금방 찾을 수 있었을걸? 그리고 살아오면서 원수진 적도 없고. 난 너희 같은 쓰레기와는 다르게 살았거든.”
남자는 답답했다.
지금까지 한 말만 해도 아는 것의 반을 이야기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아는 건, 길드장이 사과 장수를 찾고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곽마권이 알려 주지 않았으니, 왜 찾는지에 대한 이유는 몰랐다.
하지만 자신의 길드장이 어떤 인물인가.
이 동네에서 유명한 악인이 아닌가.
아무것도 없는 맨몸으로 이 동네에서 알아주는 길드를 만든 사람이었다.
지금까지 그의 손에 병신이 되거나, 죽어 나간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런 사람이 필사적으로 찾는 것만 해도 충분한 정보의 값어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보아하니, 여기서 벗어나려고 잔머리를 굴린 것 같은데. 넌 내 시간을 뺏은 만큼 더 오랜 시간 일을 해야겠다. 그럼 잘 가라.”
남자는 자신의 몸이 발끝부터 희미해져 사라져 가는 것이 보였다.
“잠깐만, 잠깐만, 모두 말할 테니 제발 살려 줘! 아니, 죽여도 돼. 대신 이런 방식으로 죽고 싶지 않아! 차라리 날 때려죽이란 말이야!”
남자는 거의 절규하듯 소리 질렀다.
그의 간절한 소망이 통했는지 그의 몸에 색깔이 돌아왔다.
“헉헉헉헉! 모두 다 말하겠어. 대신 평범하게 날 죽여 줘. 내 동료와 같은 죽음은 절대 안 된다고, 제발!”
남자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빌었다.
얼마나 겁을 먹었는지 충혈된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살짝 건들기만 해도 무너질 거 같은 모습이었다.
‘난 그 사람들을 죽였다고 말한 적이 없는데… 그들이 던전으로 가는 모습을 보고 제대로 겁을 먹은 거군. 어쩐지 다른 사람을 죽인 사실을 생각보다 쉽게 털어놓더라. 뭐, 혼자 오해한 모양인데, 오히려 잘됐지.’
경일은 혼자 착각 속에 빠진 남자를 보자 웃음이 삐져나오려고 했다.
“아는 걸 모두 말하면 살려 주지.”
“분명 살려 준다고 약속했어.”
남자의 하얀 얼굴에 핏기가 돌아왔다.
때려 죽여준다고 해도 기뻐할 판국에 살려 준다고 했으니 얼마나 기쁘겠는가.
“맹세라도 해야 하나? 난 당신을 죽이지 않을 것을 하느님께 맹세합니다. 됐냐?”
장난스럽게 맹세하는 경일의 태도에 일순 짜증이 일었다.
하지만 남자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짜증 난 걸 혹시 경일이 보지 않았나 하는 걱정이 들 정도였다.
그의 마음이 변하지 않기만을 빌며 남자가 입을 열었다.
“아까 내가 신화 길드라고 했지.”
“그래, 신화 길드.”
“우리 길드장님이 너를 찾고 있어.”
“왜? 너희 길드장이 누군데?”
“곽마권이라고, 진짜 몰라?”
“신화 길드도 모르는데, 내가 너희 길드장을 어떻게 알아?”
경일이 살짝 짜증을 내자 남자는 다급하게 말했다.
“아니야, 너 사과 장수 맞잖아.”
“그래, 내가 한때 사과를 판 적이 있어.”
“역시 내 눈이 틀리지 않았어. 몽타주의 인물이 맞았어.”
남자는 지금까지 있던 일을 모두 설명했다.
자신이 말한 정보의 무게를 높이려면 곽마권이 어떤 인물인지 아주 세세하게 설명해야 했다.
그가 얼마나 지독하고 악독한 인물인지.
얼마나 필사적으로 사과 장수를 찾아왔는지를.
얼마나 많은 사람이 동원됐는지, 얼마나 많은 시장을 돌았는지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말해 주었다.
그 때문에 길드가 한번 무너질 뻔했던 일도.
경일이 이유를 물었지만, 아는 것이 없어 대답을 해 줄 수는 없었다.
차근차근 남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잊고 있던 한 가지 일이 떠올랐다.
던전 사과를 팔러 시장에 나간 날, 어떤 아줌마가 이상한 소리를 해서 도망치듯이 시장을 벗어난 일이 기억났다.
그리고 얼마 뒤, 다른 시장에서 자신을 찾고 있던 헌터 무리가 떠올랐다.
‘이들이 나를 찾기 시작한 게, 내가 사과 장수를 그만둔 때와 거의 일치해. 누군가가 던전 사과인 걸 눈치챈 게 틀림없어. 휴~ 그때 돈 욕심에 사과를 계속 팔았으면 큰일 날 뻔했네. 그때 아줌마가 분명 나를 계속 찾았다고 했었지. 아마 아줌마와 관련된 일 같은데. 근데 아줌마랑 신화 길드장이랑은 또 무슨 사이지? 오래돼서 얼굴은 기억이 나진 않지만, 분명 평범한 주부였던 거 같은데.’
심각해진 경일의 얼굴을 보고 남자는 조금 안심했다.
경일이 자신의 말을 믿기 시작한 게 틀림없었다.
그는 조금씩, 조금씩 경일의 눈을 피해 문 쪽으로 몸을 옮겼다.
겨우 1m도 되지 않는 거리인데, 100m를 전력 질주하는 것처럼 힘들었다.
드디어 문에 도착해 뛰어나가려는 순간, 그의 뒷목을 뻣뻣하게 만드는 목소리가 들렸다.
“너 한 발짝만 더 움직이면 진짜 죽는다.”
남자는 한쪽 다리를 든 그대로 동상처럼 굳어 버렸다.
“정말 잠시도 방심할 틈을 안 주는구나. 그런 정신으로 열심히 살았으면 이런 나쁜 짓을 하지 않고도 잘 살았겠다.”
경일은 생각을 멈추었다.
남자도 곽마권이 자신을 찾고 있다는 사실밖에 몰랐다.
그 이유에 관해 아는 것이 없으니 더 생각해 봐야 알 수 있는 게 없었다.
‘하여간 좋은 기분은 아니네. 누군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나를 그렇게 필사적으로 찾고 있다니. 이건 던전 사과가 목적이 아닐 거야. 던전 사과만으로는 그 사람의 놀라울 정도의 집요함이 설명되지 않아. 분명 내가 가진 던전을 뺏으려고 하는 거겠지. 길드원이란 새끼들도 강도질에 살인까지 하고 있고. 말만 길드지 이건 뭐, 인간쓰레기 집합소구먼. 이런 놈들은 사회를 위해서도 한 20년 아니지, 살인까지 한 놈들이니까 한 50년 동안 광산에 처박아 놔야 하는데. 이미 가진 것도 많은 새끼가 도대체 얼마나 더 가지려고. 배고플 때 언제든지 국밥 한 그릇을 사 먹을 수 있는 인생이면 나름 괜찮은 인생 아닌가? 돈이 없어 쫄쫄 굶어 봐야 정신을 차리지. 뭐, 사과 장수도 그만뒀고, 시장에 나갈 일이 없으니 나를 찾을 방법은 없을 거야. 이 남자도 처음부터 내가 사과 장수인 것을 알아본 것도 아니고. 일단 조심은 하되, 이 일로 너무 스트레스는 받지 말자. 그때는 일반인과 다를 바 없는 헌터였지만, 지금은 내 한 몸 지킬 힘은 생겼잖아.’
경일은 그다지 크게 걱정하지 않으려 했다.
남자의 말에 의하면 그들이 알고 있는 건, 변장한 자신의 모습을 그린 몽타주 한 장뿐이었다.
상식적으로 그 정도로 자신을 찾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앞으로 이런 식으로 변장을 하지 않으면 더욱 찾기 힘들 것이다.
그리고 조금 전 헌터들과의 싸움에서 자신감도 얻었고.
혹시나 누군가가 잡으러 온다면 도망가면 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헌터의 세계를 모르는 경일은 길드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이때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미리 걱정하지 말자. 그 일이 아니라도 걱정스러운 일이 한가득이니까. 안 그래도 힘든데, 이 일 때문에 더 힘들어하면 나만 손해야. 어쨌든 좋은 정보를 얻은 것은 사실이네.’
남자는 자신의 몸이 또다시 희미해지는 것을 보고 절망적으로 소리쳤다.
“이 빌어먹을 새끼야! 분명 살려 준다고 약속했잖아! 맹세까지 해 놓고 이게 무슨 짓이야! 이러면 안 된다고, 이건 공평하지 않아…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데! 몽타주의 인물인 것도 알아내고, 길드장이 노리는 것도 알려 주고, 이렇게까지 했는데 죽인다고? 이 잔인한 새끼야! 이럴 거면 애초에 살려 준다고 말을 하지 않았어도 됐잖아. 굳이 그러지 않았어도 네가 원하는 건 모두 들을 수 있었잖아! 사람을 이렇게까지 지독하게 가지고 놀 수도 있는 거야? 이건 너무하잖아! 차라리 지금이라도 칼로 내 심장을 찔러, 제발!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잖아. 아니야, 말이 헛 나왔어. 살려 줘. 제발, 살려 달라고. 약속대로 살려 달라고! 난 죽고 싶지 않아, 죽고 싶지 않다고!”
남자는 지금까지 보여 준 모습대로 끝까지 끈질겼다.
정말이지 그렇게 처절할 수 없는 표정을 남기고 광산으로 사라졌다.
혹시나 심장마비로 죽었을까 봐 걱정이 될 정도였다.
광산 관리 스킬을 실행하니 남자는 문제없이 광산에 잘 도착해 있었다.
지금쯤 동료와 재회를 했을 것이다.
죽지 않은 걸 깨달은 지금, 또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했다.
“어떤 의미로는 오늘 정말 대단한 인물을 만난 기분이네. 그 정도로 끈질긴 성격이면 광산에서도 잘 생활하겠다.”
살인까지 한 이들이라 양아치 3인방과 같이 광산에서의 생활이 아주 어려워지도록 설정했다.
오랫동안 지구에서 그들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게 될 것이다.
경일은 인벤토리에서 새로운 옷을 꺼내 갈아입었다.
안경을 벗고 완전 다른 디자인의 모자를 썼다.
거울 앞에 조금 전과 완전 다른 느낌의 사람이 서 있었다.
경일은 현금만 챙기고 자신의 흔적을 지우고 자리를 떴다.
혹시 몰라 빈집의 담을 넘어 이동하며 자신의 존재 자체를 완전히 지워 버렸다.
‘역시 우리 동네가 최고구나. 아이들도 귀엽고, 사람들 간의 정도 많고. 못 사는 동네라 저런 쓰레기 같은 놈들이 올 일도 없고. 가난한 게 다행스럽기는 또 처음이네. 시내에서 가게를 열었으면 얼마나 많은 거머리가 달라붙었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
골목을 빠져나온 경일은 빠르게 걸었다.
그가 도착한 곳은 대흥 상회라는 간판이 붙어 있는 헌터 물품을 파는 가게였다.
경일은 망설이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한 남자가 싹싹하게 인사를 하며 다가왔다.
“손님, 어떤 걸 찾으시나요?”
“김호중 씨를 찾아왔습니다.”
경일은 직원의 물음을 무시하고 자기 할 말만 했다.
친절하게 웃던 직원의 얼굴에 살짝 경계심이 떠올랐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직원이 가게 안쪽으로 들어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와 같이 나왔다.
“처음 보는 분인 거 같은데… 나를 찾으셨다고요?”
김호중은 웃는 얼굴로 부드럽게 말했다.
그의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날카롭게 경일을 탐색했다.
“팔광이 소개로 왔습니다.”
팔광은 조금 전 광산으로 끌려간 신화 길드 헌터의 이름이었다.
이곳은 그에게서 들은 여러 암거래를 하는 가게 중의 하나였다.
여기서 김호중을 찾은 뒤, 자신의 이름을 대면 괜찮은 가격으로 물건을 팔 수 있을 거라 했다.
김호중은 경일의 입에서 팔광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눈에서 경계심이 사라졌다.
“팔광이 소개로 오셨군요. 이쪽으로 오시죠.”
김호중은 살짝 허리를 숙이고 경일을 안내했다.
경일은 가게 안쪽의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차는 어떤 거로 드시겠습니까? 커피?”
“차는 시간이 없어서 다음에 마시는 거로 하겠습니다. 바로 거래를 하고 싶은데요.”
“아, 네. 바쁘시면 당연히 그렇게 하셔도 됩니다.”
김호중은 차를 가지러 가려고 뗏던 엉덩이를 다시 의자에 붙이고 앉았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