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지원
“어떤 걸 팔러 오셨습니까?”
경일은 배낭에서 미스릴괴 하나를 꺼내 보여 주었다.
“역시, 팔광이 소개로 오신 손님이라 그런지 물건이 다르군요.”
김호중은 돋보기로 미스릴을 자세히 살펴보고는 무게를 쟀다.
“53g이군요. 암시장 시세로 매입가가 10g당 70만 원인데, 팔광이 소개로 오셨으니 75만 원까지 쳐 드리겠습니다.
이 금액이면 절대 섭섭하지 않으실 겁니다.”
경일이 생각해도 나쁘지 않은 금액이었다.
합법적으로 거래하면 10g당 백만 원을 받을 수 있었지만, 세금이 40%였기에 실제 손에 쥘 수 있는 돈은 60만 원이다보니 그로서도 충분히 만족했다.
정상적인 루트로 팔 수 있는 것이 아니기도 했고.
경일이 고개를 끄떡이며 가방에서 미스릴괴를 꺼냈다.
테이블에 미스릴괴가 하나씩 올라올 때마다 김호중의 얼굴이 밝아졌다.
오래간만에 온 큰손님이었기 때문이다.
미스릴은 없어서 못 파는 물건이었다.
매입가가 높긴 했지만, 대신 그만큼 자신의 주머니에 남는 돈도 많아졌다.
이 정도 양이면 웃돈을 얹어 팔아도 서로 살려고 할 것이다.
김호중은 경일이 꺼낸 미스릴괴의 무게를 전부 쟀다.
“전부 다 해서 1,090g입니다. 계산하기 쉽게 1,100g으로 계산해 드리지요. 대신 다음에도 거래를 꼭 부탁드리겠습니다.”
김호중이 기분 좋은 얼굴로 경일에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다음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경일의 대답에 만족한 듯 김호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돈을 가지고 오겠습니다.”
김호중이 방을 나간 지 10분 정도 지나자 다시 들어왔다.
그는 들고 온 가방을 열었다.
가방 안에는 5만 원짜리 묶음으로, 손때가 묻은 돈이 들어 있었다.
‘제법 철저하구나.’
경일이 감탄하는 사이 김호중이 말했다.
“팔천이백오십만 원입니다. 확인하시지요.”
“네.”
경일은 배낭에 돈 묶음을 하나씩 넣으며 확인했다.
“좋은 거래였습니다.”
액수를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김호중이 90도로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다음에도 저를 꼭 찾아 주십시오.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경일은 김호중을 뒤로하고 가게를 나왔다.
암시장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왔으나 생각 외로 일이 잘 풀렸다.
약간의 우여곡절이 있긴 했지만, 그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정보도 얻고, 광부도 네 명이나 생겼으니 충분히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었다.
거기다가 금고에서 챙긴 돈도 제법 되었다.
농작물을 수확한 듯한 뿌듯한 기분으로 트럭을 몰았다.
도시를 벗어나자 시야가 확 트였다.
평일 낮이라 그런지 도로는 한가했다.
창문을 조금 내려 바람을 맞았다.
오래간만에 한 운전이라 그런지, 재미있으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그가 트럭을 몰고 간 곳은 한 지방의 쌀 조합 공동 사업 법인이었다.
쌀을 도정해 포장까지 하는 곳으로, 가장 싸게 쌀을 구할 수 있는 곳이었다.
쌀 조합 측에서도 경일과의 거래를 환영했다.
그와 거래하는 액수가 큰 것도 있었지만, 그것보다 무자료거래라 그들이 더욱 좋아했다.
그날 경일은 트럭에 쌀을 가득 싣고 40번을 왕복했다.
인벤토리에 쌀을 넣는 모습을 보일 순 없기에 적당한 곳을 왕복해야만 했다.
늦은 밤이 돼서야 사들인 쌀을 모두 인벤토리에 넣을 수 있었다.
스탄다비아의 사람들을 도울 수 있어 그의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 * *
바람이 제법 찼다.
자포리자는 찬바람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으며 성벽 위에 서 있었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흐트러졌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동상처럼 단단히 서서 한 곳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머문 곳은 스탄다비아로 들어올 때 꼭 거쳐야 하는 도로였다.
자포리자는 상단이 오기를 간절히 바랐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지만, 그가 기다리는 상단은 아직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영주님 그만 들어가시지요. 혹시나 몸이라도 상하실까 봐 걱정입니다.”
카스만이 안타까운 얼굴로 자포리자에게 말했다.
“아닙니다. 전 여기 조금 더 있겠습니다. 카스만 경이야말로 몸 상하시겠습니다. 칼튼, 어서 카스만 경을 안으로 모셔라.”
“네. 카스만 경, 이만 들어가시지요. 영주님은 제가 보필하겠습니다.”
카스만은 전대부터 보일가를 모신 가신이었다.
이미 은퇴를 해도 벌써 했어야 하는 나이였지만, 자포리자의 간곡한 부탁으로 영지의 여러 일을 도맡고 있었다.
칼튼 기사가 카스만을 데리고 들어가자, 자포리자의 시선은 다시 도로로 향했다.
지금 그가 돈을 마련할 방법은 비누를 파는 것밖에 없었다.
이곳으로 이주한 사람들이 가진 식량이 넉넉지 않은 상황이었다.
짓던 농사도 포기하고 거의 빈손으로 스탄다비아로 이주한 터라, 자포리자는 어떻게든 그들에게 식량을 공급해야 했다.
상단과 비누의 계약이 오늘 끝난다고 해도 그들이 식량을 구해 오기까지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마음이 급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에바돈, 그놈과 거래를 했어야 했나?’
자포리자는 자신의 신념이 흔들릴 정도로 애가 탔다.
그런 와중에 인벤토리에 엄청난 식량이 도착했다.
어두웠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지어졌고, 기대감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는 즉시 인벤토리에서 식량을 꺼내었다.
알 수 없는 글자가 적힌 종이를 찢자, 새하얀 쌀이 쏟아져 내렸다.
이렇게 깨끗이 도정된 쌀은 자신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새하얀 쌀에서 나는 냄새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선인이시여,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갚을 길이 없어 안타까운 마음뿐입니다. 만약 기회가 생긴다면 이 몸이 가루가 되어 사라질지언정 은혜를 갚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자포리자는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렸다.
각 마을의 입구에 커다란 솥이 걸렸다.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에 올려진 솥에서 쌀 특유의 냄새가 났다.
솥에는 죽이 한가득 끓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많은 사람들에게 배급하기 위해서는 죽으로 만드는 것이 최선이었다.
배를 곪고 있던 영지민들은 자포리자의 은혜에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지금껏 수탈해 가는 영주만 겪어 봤지 무언가를 베풀어 주는 영주는 일평생 이번이 처음이었다.
더군다나 그가 배급해 준 죽은 입안에서 고소하게 살살 녹는 게,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천국의 맛이었다.
혀끝에 남는 고급스러운 단맛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이 시대에는 도정 기술이라고 불릴 게 없었으니 당연했다.
쌀의 겨를 깎는 기술이 없으니 거친 식감의 쌀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오래 보관하기 위해 햇볕에 쌀을 말리다 보니 밥맛은 더욱 떨어졌다.
그나마 그런 쌀이라도 먹어 본 사람이 얼마 되지 않을 정도였다.
자포리자는 경일이 쌀을 보내 준 덕에 사람들에게 두터운 신임을 얻을 수 있었다.
* * *
경일은 스탄다비아의 현황을 매일 살피고 있었다.
자신이 구할 수 있는 최대한의 쌀을 보내긴 했지만, 상황이 드라마틱하게 좋아진 건 아니었다.
무려 3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먹여야 했다.
아껴 먹어도 5일이 한계였다.
더군다나 하루가 지날수록 기온이 뚝뚝 떨어졌다.
사람들의 옷이 두꺼워지는 게, 겨울이 머지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이곳의 겨울은 혹독했다.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이주민들에게 이번 겨울은 더욱 가혹할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이주는 무리한 계획이었나?’
경일은 자신이 낸 의견에 후회가 밀려왔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봐도 당시의 상황에서는 똑같은 의견을 낼 수밖에 없었다.
알리사의 주민들은 거의 산소호흡기를 떼기 일보 직전이었다.
나바론은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영지민들을 수탈했고, 그들은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상황이었다.
농사는 흉작이라 수확할 수 있는 양이 얼마 되지 않았다.
그 얼마 되지 않는 곡식도 각종 세금을 핑계로 대부분 가져갔다.
만약 이주를 선택하지 않았으면 겨우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을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더욱이 자포리자의 현재의 여력으로는 두 지역을 돌보는 건 불가능했다.
이 모든 사실을 가장 잘 아는 건 자포리자 본인이었고, 그도 경일의 의견에 곧바로 동조했었다.
“이미 벌어진 일, 쓸데없는 후회로 약해지지 말자.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는 거야.”
경일은 위험을 무릅쓰고 미스릴을 팔러 다녔다.
지금은 자신의 안위를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그의 손에 무려 3만 명의 목숨이 달려 있었다.
처음 암시장에 온 날 만났던 신화 길드 헌터에게 들은 정보를 이용해 최대한 여러 암시장을 돌아다니며 미스릴을 팔았다.
분식점의 영업시간을 줄여 가며 전국을 돌며 쌀을 사러 다녔다.
하지만 아무리 조심한다 해도 대량의 미스릴을 팔러 다니다 보면 언젠가는 소문이 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는 최대한 소문을 늦추기 위해 더욱 철저히 변장하고 여러 암시장을 전전했다.
* * *
스탄다비아에 혹독한 겨울이 왔다.
하늘에서 내린 굵은 눈은 모든 것을 하얗게 덮어 버렸다.
이주민들이 급하게 지은 집도, 개간한 농지도 모두 흰색의 감옥에 갇혔다.
바람이 불 때마다 눈이 흩날렸다.
그나마 다행인 건, 몬스터의 숲과 마주한 스탄다비아 특성상 울창한 숲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알리사 영지에 비해 풍부한 산림을 자랑했다.
이주민들은 배가 고플지언정 알리사에 머물 때만큼 춥지는 않았다.
매년 이 시기에 가장 많은 영지민들이 죽어 나갔다.
누구는 얼어 죽고, 누구는 굶어 죽고, 누구는 병에 걸려 죽었다.
하지만 이번 겨울에는 아직 죽은 사람이 없었다.
경일이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방증이었다.
배가 부른 사람은 없었지만, 최소한 굶어 죽을 만큼 배를 곯은 사람은 없었다.
겨울이라는 힘든 계절이 왔지만, 고블린의 침공은 끝이 없었다.
녀석들은 계절에 상관없이 끊임없이 덤벼들었다.
“모두 힘을 내라. 이제 곧 싸움이 끝이 난다. 끝까지 방심하지 말고, 우리가 포식자임을 확실히 보여 주자!”
성벽 위로 자포리자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병사들은 그의 목소리에 힘을 얻었다.
살이 에이도록 추웠지만, 최선을 다해 고블린을 향해 창을 뻗었다.
“케엑!”
창이 고블린의 목을 정확히 뚫고 들어갔다.
병사가 빠르게 창을 당기자, 고블린은 힘없이 허물어지면 성벽 밖으로 떨어졌다.
고블린의 전략은 단 하나, 숫자를 믿고 끊임없이 덤벼들었다.
고블린 세 마리가 병사를 에워싸고 녹슨 칼을 휘둘렀다.
병사가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고블린 세 마리의 공격을 모두 막는 건 불가능했다.
어쩔 수 없이 일부의 공격은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정면에서 달려드는 고블린 한 마리의 가슴에 창을 박는 데는 성공했다.
하지만 나머지 두 마리의 공격은 피할 수 없었다.
생명이 지척에 달린 상황이었지만, 병사의 눈은 의외로 침착했다.
텅! 텅!
분명 고블린의 녹슨 칼이 병사에 몸을 베었지만, 들려오는 소리가 이상했다.
큰 부상을 입거나 죽었어야 할 병사가 창을 버리고 허리에 차고 있는 검을 쥐고 침착하게 휘둘렀다.
서걱! 서걱!
병사가 휘두른 검이 고블린의 목을 베고 지나갔다.
칼을 맞고도 살아날 수 있던 것은 그가 입고 있던 방어구 덕분이었다.
믿을 수 없게도 일개 병사가 기사들만 입는다는 플레이트 아머를 입고 있었다.
자포리자는 영지가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부닥쳤어도 경일이 보내 준 고철을 절대 팔지 않았다.
만약 고철로 무기를 만들어 팔았으면 알리사 영지민의 이주로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만큼 경일이 보내 준 물건은 어느 것 하나 대단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가 전해 준 지식과 사상은 몇 세대를 넘어설 만큼 대단했고, 보내 주는 물건은 실제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을 만큼 놀라웠다.
그런 귀한 물건들을 절대 팔고 싶지 않았다.
더군다나 무기는 더욱 팔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판 무기가 되돌아와 자신을 찌를 수도 있었으니까.
자포리자는 자신을 믿고 따르는 기사와 병사들에게 플레이트 아머를 만들어 주었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