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마나 연공법
스탄다비아의 철보다 몇 배나 더 높은 강도를 가진 갑옷은 고블린의 공격쯤은 가볍게 막아 주었다.
플레이트 아머의 효과는 대단했다.
병사는 플레이트 아머를 믿고 평소보다 훨씬 더 적극적인 공격을 할 수 있었고, 목숨을 노리는 고블린의 공격에도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었다.
몸의 긴장감이 낮아지자, 훈련 때와 같은 자연스러운 동작을 취할 수 있었다.
이것은 체력을 보존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예전이라면 벌써 지쳤을 테지만, 아직 체력이 많이 남아 있었다.
신이 났다.
가장 두려워했고, 가장 미워하던 상대를 도륙할 수 있다는 건 엄청난 쾌감이었다.
플레이트 아머의 효과는 이에 그치지 않았다.
병사들의 가슴에 대단한 자부심이 깃들었다.
기사들만의 전유물이라고 여겨지던 플레이트 아머를 지급받았다.
그것도 기존의 플레이트 아머와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몇 배는 더 단단한 최고의 갑옷을.
“난 영주님에게 인정받았다. 베르아스 왕국에서 나보다 실력이 좋은 병사는 많을지 몰라도, 나보다 영주님께 사랑받는 병사는 없다. 난 스탄다비아의 병사인 게 자랑스럽고, 자포리자 영주님의 병사인 것이 내 일생일대의 최고의 영광이다!”
병사들의 사기가 하늘을 찔렀다.
온통 새하얗던 세상이 고블린의 붉은 피와 만나 절묘한 대비를 이루었다.
휘어지지도, 쉽게 물러지지도 않는 무기와 고블린의 공격을 막아 주는 방어구는 병사들의 생명을 지켜 주었고, 고블린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보장했다.
고블린과의 전투에서 자신감이 넘치던 일부 병사들의 무기에서 엷은 파란색이 보였다.
마나였다.
믿을 수 없게도 병사 중에서 마나를 깨우친 자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자포리자는 알리사와의 영지전에서 승리했지만, 결과적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할 정도의 커다란 문제를 떠안아야 했다.
나바론의 압박에 어쩔 수 없이 그와 싸웠고, 승리했다.
하지만 그가 퍼질러 놓은 똥이 너무 거대해서 스탄다비아까지 무너질 뻔한 위기를 맞았다
그렇다고 이번 영지전에서 성과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누구나 탐내고 갖고 싶어 하는 아주 귀중한 전리품을 얻었다.
그건 바로 마나 연공법이었다.
마나 연공법은 왕국에서도 일부 귀족 가문만 가지고 있을 정도로 귀한 존재였던 것이었다.
마나를 깨우치는 데에는 마나 연공법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어마어마했다.
향락에 젖어 제대로 훈련조차 하지 않았던 나바론이,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수련하고 평생을 몬스터와 싸웠던 자포리자와 같은 중급 오러 유저이던 이유가 마나 연공법의 유무 때문이었다.
나바론의 가문은 직계 가족이 아닌 이상, 마나 연공법을 전수하지 않았다.
이건 이 시대의 당연한 상식이었다.
자자손손 귀족의 우월한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아주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자포리자도 경일과 만나지 않았으면 이 시대의 상식에 맞게 자신만 수련했을 것이다.
하지만 경일로 인해 생각이 트이자, 그는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충성스러운 기사와 병사들에게 마나 연공법을 전수한 것이다.
이건 이 시대의 상식을 뒤집는 엄청난 파격이었다.
이것으로 인해 앞으로 다가올 부작용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 짐작하지만, 그는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마나 연공법을 독점해 혼자서만 강해지는 것보다, 다 같이 강해지는 것을 선택했다.
이곳은 왕국의 어떤 곳보다 일당백의 병사가 필요한 곳이었다.
스탄다비아가 영구히 잘살기 위해서는 몬스터에게 뺏긴 조상들의 비옥한 토지를 되찾아 와야 했다.
자포리자는 자신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남들과 다른 피나는 노력을 선택했다.
충성스러운 기사와 병사들에게 동등한 기회를 주더라도 그는 최고의 자리에 설 자신이 있었다.
자신이 강해야 기사와 병사들이 믿고 따를 것이며, 그의 권위가 설 것이었다.
어쩌면 자신보다 강한 사람이 나올 수도 있겠지만,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그의 충성심을 받아 낼 자신이 있었다.
“와아아아아아!”
“우와와와와와!”
마나를 깨우친 병사도, 그것을 본 다른 병사들도 크게 함성을 질렀다.
사기가 급격하게 올라갔다.
오로지 살육의 본능만이 남아 있던 고블린이 순간 멈칫할 정도였다.
자포리자는 그 모습을 자랑스럽게 바라봤다.
그도 지지 않으려는 듯 긴 팔을 쭉 뻗으며 자신의 롱소드를 크게 휘둘렀다.
롱소드의 사정거리 안에 있던 열 마리의 고블린이 두 동강 났다.
발밑으로 잘린 고블린의 몸에서 나온 시뻘건 피가 흘러내렸다.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찐득거리는 고블린의 피를 아무렇지 않게 밟고서는 남아 있는 고블린을 향해 롱소드를 찔렀다.
긴 팔과 롱소드의 길이가 합쳐져 닿을 수 없다고 생각한 거리를 좁히며 정확하게 고블린의 머리를 박살 냈다.
지금껏 볼 수 없던 대단한 모습이었다.
마나 연공법을 누구보다 열심히 수련했고, 매일 같이 몬스터와 싸웠다.
그는 누구보다 빨리 오러 유저 중급에서 오러 유저 상급으로 올라서는 기염을 토했다.
“자, 모두 힘을 내라. 이제 몇 마리 남지 않았다. 얼른 싸움을 끝내고 가족들이 기다리는 따뜻한 집으로 돌아가자!”
“와아아아아아!”
자포리자의 외침에 병사들은 함성으로 대답했다.
그들의 발밑으로 고블린의 시체가 차곡차곡 쌓여 갔다.
대승이었다.
드디어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비누를 사기 위한 상단이 스탄다비아에 도착했다.
집사의 안내를 받은 한 남자가 자포리자의 집무실로 들어왔다.
“반갑습니다. 저는 코트리옹 상단의 제5지부장 체이슨 밀러입니다.”
체이슨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가 자포리자를 향해 고개를 깊게 숙였다.
그는 시원하게 잘생긴 얼굴에 탐스러운 금발을 가지고 있었다.
안정되게 가라앉은 중저음의 톤은 듣는 이로 하여금 신뢰감을 주었다.
“반갑다. 나는 스탄다비아의 영주 자포리자 보일이다.”
“이 일대에서 소문이 자자하신 대단한 분을 직접 보게 되어 영광입니다.”
체이슨은 자포리자를 칭찬하며 분위기를 띄웠다.
그러고는 비굴하지 않게 적당한 웃음을 띠고 자포리자를 면밀히 관찰했다.
상인으로 거래의 상대를 파악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자포리자는 큰 키와 커다란 덩치를 가졌지만, 결코 둔해 보이지 않았다.
오크 정도는 가볍게 두 동강을 낼 것 같은 강인함을 풍겼는데, 이건 전형적인 기사의 모습이었다.
그가 풍기는 분위기나 체형을 보면 이건 당연한 추론이었다.
“일단 자리에 앉지”
자포리자의 안내에 체이슨은 의자에 앉았다.
“그래, 이곳에 온 이유가?”
그는 여유 있는 태도를 견지했다.
상인이 온 것이 무척 반가웠지만, 그의 앞에서 굳이 티를 내거나 하지는 않았다.
체이슨은 자포리자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처음과 같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영주님, 저는 이곳에서 비누를 생산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소문이 사실이라면 저희 상단과의 거래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체이슨은 그의 얼굴처럼 호감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우리가 비누를 생산하고 있지.”
자포리자는 체이슨이 가장 궁금해하는 이야기부터 먼저 확인해 주었다.
그러자 체이슨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반신반의하면서 이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헛걸음이 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우리가 맞게 찾아왔군요. 먼저 코트리옹 상단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코트리옹 상단은 왕국의 5대 상단에는 아직 들어가지 못했지만, 10대 상단에는 이름을 올리고 있습니다. 30개의 지부가 전국에 퍼져 있어 왕국의 모든 지역에서 장사가 가능한 조직입니다. 100년의 역사를 이어 온 만큼, 신용은 어느 상단도 쫓아오지 못할 정도로 탄탄한 상단입니다. 영주님께서 저희와 비누를 거래하신다면 절대 후회되지 않을 겁니다. 어느 상단보다 더 많은 비누를 팔 것을 약속드리겠습니다.”
상단의 인물답게 체이슨의 혀는 매끄럽게 움직였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의 말에 충분히 설득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포리자는 체이슨의 말에 별다른 감흥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가 말하는 조건이 하나도 만족스럽지 않았기 때문이다.
체이슨은 자신이 속한 상단의 신용과 전국의 유통망을 내세워 비누의 판매를 강조했다.
자포리자는 비누의 판매에 대한 걱정은 일절 하고 있지 않았다.
굳이 상단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시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알아서 잘 팔려 나갈 물건이었다.
비누의 가격에 관한 이야기는 하나도 없이 그저 많이 팔 수 있다는 말에 코트리옹 상단이 생산자보다 자신의 이득을 더 중요시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익 단체인 상단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말이었겠지만, 비누라는 대단한 제품에 대한 대접으로는 그렇게 마음에 썩 와닿지는 않았다.
“그래, 그쪽이 제시하는 조건은 어찌 되는가?
자포리자는 쓸데없는 미사여구는 제쳐 두고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는 상대의 패를 먼저 요구했다.
보통의 거래에서는 파는 쪽이 먼저 가격을 제시하고 흥정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굳이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는 상단의 사람이 찾아왔을 때부터 뒤로 한 발짝 물러나 있었다.
너희가 비누를 더 원하지 않느냐? 라는 분위기를 은근히 내비쳤다.
노련한 장사꾼인 체이슨이 자포리자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그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이런, 덩치는 곰인데 하는 짓은 여우보다 더 교활하구나. 몬스터와 싸움이나 할 줄 아는 촌구석의 영주인 줄 알았더니, 제법 매운맛이 있네. 그렇다고 상인인 내가 질 수는 없지. 일개 촌구석의 영주에게 밀린다면 다른 놈들이 얼마나 나를 비웃겠어?’
머릿속은 누구보다 복잡하게 돌아갔지만, 그의 표정은 처음과 같이 은은한 웃음을 띤 채 아무런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체이슨은 일단 이곳에 오기 전에 미리 정해 두었던 가격을 말했다.
“저희가 생각하는 가격은 개당 80페니입니다. 비누는 최소 5,000개 이상을 원하고 있습니다.”
자포리자는 실망스러웠다.
자신이 생각했던 가격과 너무도 차이가 났다.
처음 비누를 사러 왔던 에바돈보다 나은 조건이긴 했지만, 그렇게 큰 차이가 느껴지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많은 수량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렇게 기다렸던 상단인데, 한참 기대에 못 미치는 조건에 씁쓸한 미소가 지어졌다.
자포리자의 분위기를 읽은 체이슨이 급하게 입을 열었다.
“비누의 가격이 마음에 안 드시면 이건 어떻습니까?”
체이슨은 곧바로 말을 이어 가지 않고 한 템포를 쉬었다.
다음 말이 궁금했던 자포리자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에게 집중됐다.
자포리자의 모습을 확인한 체이슨은 말을 이었다.
“저희와 독점 계약을 맺으시면 비누 하나에 120페니, 즉 1골드로 맞추어 드리겠습니다. 이 정도면 저희 상단에서도 최고의 성의를 보였다고 생각합니다.”
체이슨은 얼굴에서 웃음기를 거두고 결연한 어조로 말했다.
처음 제시했던 조건보다 무려 3분의 1이나 상승한 가격이었다.
그러나 자포리자는 그가 제시한 가격을 듣고도 처음과 같이 덤덤한 표정을 유지했다.
모르긴 몰라도 처음에 80페니를 이야기한 건, 아마 독점 계약을 하려는 준비 작업으로 보였다.
체이슨은 이 금액이면 자포리자가 만족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의 예상과는 다르게 변화 없는 그의 표정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는 마음속으로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빠르게 마음을 가다듬었다.
아직 준비한 건 많이 남아 있었다.
체이슨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영주님, 우리 상단은 왕국 전체를 누비고 다니는 터라 몬스터나 강도의 습격에 대비해 강력한 자체 호위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스탄다비아가 비누의 생산지라는 것이 알려지면, 앞으로 많은 세력이 눈독 들일 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저희 상단에서 영지의 방어에 확실한 도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곳에 와서 보니, 두 영지의 주민을 합치는 바람에 상황이 어려운 거로 알고 있습니다. 많은 돈이 필요하실 건데, 독점 계약이 맺어지면 기존의 이자보다 낮은 이자로 영주님이 필요하신 돈을 대출해 드리겠습니다. 솔직히 이 정도 조건이면 영주님의 입장에서도 결코 손해가 아니실 겁니다. 이건 단지 비누를 거래하는 것을 넘어 스탄다비아와 코트리옹 상단이 친구가 된다는 것과 같습니다. 든든한 친구가 있으면 분명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자포리자는 누군가가 스탄다비아를 노릴 거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몬스터와 일 년 내내 싸우고, 농사도 잘 안 되는 땅을 미치지 않고서야 누가 관심이나 가지겠는가.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