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다시 태어난 기분
단지 비누를 팔 생각만 했지 그게 위협으로 다가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그만큼 비누의 시장가치가 높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자포리자는 에바돈이 판 비누의 가격을 알고 있었다.
비누의 생산지가 스탄다비아라고 소문을 내면서 에바돈이 팔았던 비누의 가격까지 모두 조사를 해 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스탄다비아서 쫓겨난 뒤로 에바돈의 소식을 들은 것이 없구나. 나름 우리를 위해서 많은 수고를 해 줬는데 말이야. 하하하.’
자포리자는 알지 못했지만, 그는 비누를 미끼로 많은 돈을 투자받았고 여러 거래를 맺었다.
비누를 더 이상 구하지 못하게 된 지금, 그는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로 큰 곤경에 빠져 있었다.
자포리자는 순간 떠오른 에바돈을 머릿속에서 털어 버리고, 체이슨의 조건에 대해 생각했다.
객관적으로 그의 조건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아주 좋은 조건이었다.
하지만 자포리자에게는 크게 와닿지 않았다.
스탄다비아는 경일의 지원을 등에 업고 짧은 기간 큰 발전을 했다.
그중 가장 빠르게 발전한 것이 무력이었다.
이 시대에서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강철의 유입으로 병사들은 몬스터와의 실전을 겪으며 일당백의 병사로 성장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마나 연공법이라는 거름은 병사들의 성장에 촉진제 역할을 톡톡히 할 것이었다.
어떠한 적이 쳐들어와도 스탄다비아는 피하지 않고 용맹하게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남은 건 돈을 융통하는 것인데, 이 또한 크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시대의 이자율은 지나치게 높았다.
돈이 있는 자가 폭리를 취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사회였다.
원금을 갚지 못하고, 담보를 뺏기는 일은 허다하게 벌어졌다.
기존의 이자율이 너무 높아 이자를 싸게 해 준다고 해도 갚기 힘든 건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이건 코트리옹 상단에 큰 도움이 될 거래였다.
금고에 잠자고 있는 여유분의 돈을 비누라는 확실한 담보를 잡고 돈놀이를 할 수 있으니, 그들로서는 비누와 이자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는 것과 같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돈을 빌리는 순간부터 스탄다비아는 그들의 입김을 무시하지 못할 것이었다.
스탄다비아에 다른 세력이 끼어드는 것은 결단코 용납할 수 없었다.
경일이라는 신과 같은 전지전능한 인물이 바로 자신의 등 뒤에 있지 않은가.
순수한 의도를 가진 무리라 해도 받아들일 생각이 없는데, 이익만을 추구하는 상인들을 받아들인다는 건 더욱 말이 되지 않았다.
“뭐, 당장을 생각하면 나쁘지 않은 조건이군. 하지만 우리가 진정 바라는 건 스탄다비아의 자립이라서 말이야. 지금 힘들다고 스탄다비아의 미래에 영향을 끼칠 일은 되도록 안 하고 싶군. 내 말이 무슨 말인지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잘 알아들었다고 생각하겠네.”
체이슨은 티를 내지 않았지만, 자포리자의 말에 적잖이 당황했다.
지금 제시한 조건은 자포리자가 절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라고 생각했다.
이 제안은 그냥 나온 것이 아니었다.
스탄다비아의 정세를 정확히 분석해서 나온 계획이었다.
대화할수록 체이슨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자포리자라는 사람을 도저히 파악할 수가 없던 것이다.
이건 어찌 보면 당연하였다.
자포리자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그의 뒤에 있는 경일의 존재와 그가 한 일을 알아야 했는데, 그건 애당초 불가능했다.
‘현실을 모르는 몽상가인가?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데… 아니면 가진 그릇이 너무 큰 사람이라 내 수준으론 판단이 불가능한 사람이었던가?’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기사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이었다.
가지고 온 계획이 모두 통하지 않는다면 다른 방법으로 접근해야 했다.
체이슨의 머리가 빠르게 움직였다.
“그럼 독점 계약은 아무래도 어렵겠군요. 그럴 일은 당연히 없겠지만, 만약 이곳의 영지가 다른 곳의 침입을 받기라도 한다면… 그런 위험부담을 안고 독점 계약을 할 수 없다는 건 영주님께서 이해를 해 주실 거라 생각합니다. 저희가 스탄다비아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는데,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는 게 지금의 솔직한 제 심정입니다.”
체이슨은 자포리자의 입장에서 말하지 않았다.
거래에서 상대의 의도대로 끌려가는 건 절대 하지 말아야 하는 행동 중의 하나였다.
어디까지나 좋은 조건으로 독점 계약을 제시한 것은 코트리옹 상단이 커다란 호의를 보인 것이고, 그것을 거절한 것은 자포리자임을 확실히 주지시켰다.
자포리자에게 일종의 빚을 하나 지운 셈이었다.
“그래. 그쪽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여길 수도 있겠군. 스탄다비아를 그렇게까지 생각해 준 점에 대해서는 감사를 표시하지. 그럼 이제 다른 조건을 들어 보지.”
하지만 자포리자는 그의 생각과 다르게 너무 편하게 이 상황을 넘겨 버렸다.
보통의 귀족은 체면상 자신보다 신분이 낮은 이의 의견을 잘 인정하지 않았다.
알아도 모른 척하고 넘어가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당연히 여느 귀족과 같이 자포리자도 자신에게 불리한 이야기는 대충 넘길 거라 생각했다.
그에게 빚을 지웠고, 이것이 그의 의중에 남아 다음 행동에 지장을 끼치도록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생각 외로 너무 쉽게 감사를 표하며 빚을 털어 버리자, 오히려 자신이 얼떨떨해질 지경이었다.
거래는 무척 힘들었다.
상대의 의중을 전혀 읽지 못하니 시간이 흐를수록 등에 땀이 맺혀 갔다.
거래란 기본적으로 상대의 조건과 자신의 조건을 서로 조율해 가면서 하는 것이다.
하지만 자포리자는 자신의 조건을 전혀 말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자신의 패만 까라고 말하고 있었다.
왕국의 10대 상단인 자신들을 너무 무시하는 형태라 자존심이 상했다.
다른 때였다면 자리를 박차고 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체이슨은 그러지 않았다.
보통의 거래에서 갑은 자신들이었다.
상대가 무리한 조건을 이야기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대안을 찾으면 됐다.
코트리옹 상단은 그만한 조직과 힘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비누는 대안이 없었다.
이곳이 아니면 구할 수가 없다.
더군다나 비누는 소문만 듣고 이 변방의 영지까지 자신을 찾아오게 할 정도로 대단한 제품이지 않은가.
체이슨도 만만한 자가 아니었다.
장사로 잔뼈가 굵어진 지 오래였다.
이 거래에 막대한 돈이 걸려 있는데, 거래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자존심 따위는 진즉에 내려놓았다.
“지금 보유하고 있는 비누를 모두 코트리옹 상단에서 매입하겠습니다. 상단이 제시한 독점 계약의 조건을 받아들이시지 않으셨지만, 그렇다고 비누의 가격을 낮추지는 않겠습니다. 가격은 독점 계약 때의 가격인 1골드를 드리겠습니다. 이건 코트리옹 상단이 자존심을 버려 가면서까지 영지님과 비누의 거래를 하고 싶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봐주십시오.”
체이슨이 자포리자의 눈을 똑바로 마주 봤다.
상인이지만 기사와 같은 기운이 느껴졌다.
그의 진심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
하지만 이미 5골드로 팔린 사실을 알고 있는 자포리자의 입장에서는 아직도 많이 부족한 가격이었다.
물론 에바돈이 가져간 비누의 개수가 소량이라 대량으로 풀리면 가격이 내려갈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도 1골드로는 자포리자의 성에 차지 않았다.
“코트리옹 상단이 나를 충분히 예우해 준 것에 대한 감사의 인사를 전하지. 하지만 작은 거래가 아니다 보니 지금 당장 결정을 내리기는 힘들 거 같군. 그리고 자네가 왔으면 다른 상단도 오고 있다는 이야기니깐, 다른 이의 조건도 들어 보고 결정을 하겠네. 그리고 다른 상단이 들어오면 그쪽의 조건도 변할 수도 있지 않겠나?”
체이슨은 등에 식은땀이 맺혔다.
이렇게 어려운 거래는 처음이었다.
최고의 조건을 걸었음에도 상대는 만족하지 않았다.
말도 되지 않는 이유로 자신을 몰아붙였다면 포기하고 돌아갔을 터인데, 자포리자는 나름 합당한 이유를 댔다.
자신의 물건을 더 좋은 조건에 팔고 싶은 건 당연했다.
“영주님, 그럼 하나만 대답해 주십시오.”
체이슨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 자네가 진심으로 상대해 왔는데, 나도 그에 맞는 대접을 해야지. 물어보게.”
“그래, 자네가 진심으로 상대해 왔는데 나도 그에 맞는 대접을 해야지. 물어보게”
“1년 동안 생산 가능한 비누의 개수가 몇 개인지 말씀해주실 수 있습니까?”
“그런 거야 굳이 숨길 이유도 없지. 아마 5만 개는 무난히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하네.”
체이슨은 자포리자의 대답에 평정심을 유지하려 노력했지만,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런 대단한 물건을 5만 개나 만들 수 있다니… 이건 엄청난 기회야! 보통 매입가의 세 배의 가격으로 판매를 하니, 단수 계산으로도 10만 골드 이상이 남잖아. 두 눈으로 직접 본 비누의 인기라면 네 배의 가격도 가능할 터. 이 정도의 이윤을 남길 수 있는 거래는 상단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어. 더군다나 비누는 소모품이잖아. 매년 그만큼의 이익이 들어온다는 건데… 휴우~ 내가 지금껏 잘못 생각했군. 무슨 짓을 해서라도 이 거래를 성사시켜야 해! 이건 상단 역사에 남을 최고의 거래가 될 거야!’
이건 황금알을 낳는 거위나 마찬가지였다.
만약 이 거래를 독점할 수 있다면 코트리옹 상단은 제2의 도약을 기대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군침을 흘릴 사람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다행히 다른 상단이 도착하지 않았어. 지금 기회에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은 바로 나다. 가진 정보도, 생각할 시간도 내가 가장 많고. 비누의 생산량에 맞게 새로운 계획을 세워야 해.’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비누를 노리는 사람은 눈덩이 굴러가듯 순식간에 늘어날 것이었다.
비누는 제반 비용이 크게 들지 않는 것도 큰 매력이었다.
부피가 작아 운반이 편리했고, 보존 기간도 길었다.
상단 입장에서는 최고의 제품일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상단과 의논해서 최고의 조건을 가지고 오겠습니다.”
“아, 잠깐만.”
물러서는 체이슨을 자포리자가 잡았다.
“자네, 비누를 써 본 적은 있는가?”
“죄송합니다, 영주님. 미리 사용을 해 보고 왔어야 했는데, 비누를 구할 길이 없어 사용해 본 적은 없습니다. 이거 상인으로서 매우 부끄럽습니다.”
체이슨은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집사.”
“네, 영주님.”
“이자에게 비누 다섯 개를 주도록.”
“알겠습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그럼 영주님, 다음에 뵙겠습니다.”
체이슨은 자포리자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서는 집사를 따라 집무실을 나갔다.
집사는 손바닥 반만 한 사각형의 비누를 챙겨 주었다.
소문으로만 듣던 비누를 받자 기대감에 살짝 심장이 두근거렸다
‘한 개도 아닌 다섯 개나 한 번에 주다니. 제법 통이 큰 사람이군. 이런 변두리에 저 정도의 인물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 이건 무슨 깊은 숲속에 잠들어 있다는 전설의 용을 만난 기분이군.’
자신이 선물을 챙겨 와야 하는 입장인데, 오히려 선물을 받았다.
그는 숙소로 돌아가 곧바로 목욕물을 준비하라 일렀다.
소문만으로 들었던 비누를 직접 써 볼 기회라 마음이 급했다.
목욕을 끝낸 그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깨끗했던 욕조의 물이 시꺼멓게 변해 있었다.
상인인지라 나름 신경을 쓰고 다녔는데도 몸에서 나온 때가 엄청났다.
‘하~ 대단하구나. 이렇게 상쾌하다니. 목욕이라는 것이 이렇게 기분 좋은 거였구나. 이건 마치 다시 태어난 기분이야. 한 번 써 보고 나니 이제 비누가 없는 삶은 상상이 안 될 정도야. 어떻게 이런 물건이 나올 수가 있는 거지?’
에바돈은 비누에 대한 찬양이 절로 나왔다
‘거기다가 소모품이라 계속해서 수요가 일어날 거고, 높은 생산량을 가지고 있어 공급에도 문제가 없을 거야. 운반도 쉽고, 보존 기간도 기니깐. 이건… 완벽히 상인을 위해 태어난 최고의 제품이야! 하지만… 어떤 조건을 내세워야 계약할 수 있을지 감조차 오지 않아. 만약 거래가 실패한다면 개인적으로라도 사서 돌아가야겠어.’
비누에 감동한 만큼 그의 고심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