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88화 (88/300)

[88화] 비후초

스탄다비아의 영지에 적잖은 수의 상단이 들어왔다.

늘 파리만 날리던 여관이 호황을 맞이했다.

자포리자는 각 상단과의 대화를 이어 가다 이대로는 결론이 날 거 같지가 않아 모든 상단의 대표자들을 불렀다.

그날 저녁.

자포리자의 집무실에 열 명의 상단 대표자들이 테이블을 둘러싸고 앉아 있었다.

“일단 비누를 사기 위해 먼 길을 찾아온 상단들에 감사의 인사를 전하겠네. 오늘 거래에 성공하지 못한 상단은 차후에 다시 스탄다비아랑 거래를 할 생각이 있다면 더욱 신경을 쓸 것을 영주로서 약속하지.”

자포리자의 정중한 말에도 상단 대표자들의 표정은 펴지지 않았다.

자신들이 귀족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사회적 지휘는 절대 낮지 않았다.

오히려 이 중의 몇 명은 자포리자와 같은 자작 정도는 신경도 쓰지 않을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들이 이렇게 기분이 나쁜 것은 상단의 대표들을 한곳으로 불러 모았다는 점 때문이다

1대1로 거래하는 것은 기본이자 예의였다.

이런 식의 거래는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상단을 무시하고 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안 올 수 있는 자리도 아니었기에 이래저래 심경이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여러분들을 부른 이유는 이대로 결론이 안 날 거 같아서이다. 다들 바쁜 사람들인데, 언제까지 이곳에 매여 있을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내 사정이 급하다는 건 모두 잘 알고 있을 거고. 여러분들의 조건은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모두 비슷하더군. 그래서 내가 그 조건과 내가 원하는 조건을 취합해 비누의 판매 가격을 결정했네.”

상단 대표자들의 시선이 자포리자에게 모였다.

불쾌한 건 불쾌한 거고, 장사는 장사였다.

자포리자는 이들 모두에게 비누를 선물했고, 다들 몸을 깨끗이 씻는다는 것이 얼마나 개운한 것인지 알아 버렸다.

이들은 비누가 없이는 살 수 없는 몸이 되어 있었다.

“지금까지 만들어 놓은 비누의 개수를 파악해 보니 거의 5만 개 정도더군. 수량은 충분하니 공평하게 비누 하나에 1골드 60페니로 해서 각 상단에 5,000개씩 나누어 판매할 생각이야.”

자포리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사람들의 희비가 엇갈렸다.

조금 전에 불쾌했던 감정이 순식간에 사라질 만큼 상인들은 바빠졌다.

보통은 한 상단과 계약을 맺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설마 자포리자가 비누를 쪼개서 팔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실망한 상인들은 독점 계약을 노리고 있던 큰 상단들이었다.

그들은 며칠간 자포리자를 상대해 본 결과, 자신의 말을 쉽게 뒤집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독점 계약이 물 건너갔다면 조금이라도 자신의 상단에 더 많은 수의 비누를 배정받을 수 있도록 그를 설득해야만 했다.

“영주님. 제가 한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이곳에 모인 상단 중에 가장 규모가 큰 자일라 상단의 대표가 일어나 말했다.

“말해 보게나.”

“영주님이 한 상단과 계약하지 않고 이곳에 모인 상단 모두와 계약한다는 뜻은 존중하겠습니다. 비누의 수량이 많으니 영주님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이해가 가능한 부분입니다. 하지만 각 상단에 5,000개씩 같은 수로 나눈다는 것이 언뜻 보기에 공평해 보이나, 상단의 규모를 생각하면 이건 불합리하다고 생각됩니다. 최소한 상단의 규모를 생각해서 분배를 결정해 주십시오.”

자일라 상단의 대표는 자포리자의 의중을 거스르지 않고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려 했다.

짧은 시간에 이런 생각을 해내다니, 괜히 큰 상단의 대표가 아니었다.

대단한 말솜씨였다.

“자일라 상단의 말은 틀렸습니다. 우리도 같은 가격으로 사 가는 건데, 상단의 규모는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5,000개씩 나누겠다는 영주님의 생각이 옳습니다.”

규모가 작은 하일라 상단의 대표가 발끈하며 즉시 반격에 나섰다.

자포리자의 말을 빌려 말하는 그도 만만치 않았다.

“그건 아니지요. 판매하는 속도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같은 시간에 훨씬 더 많이 팔 수가 있습니다.”

“비누는 상단의 규모랑 큰 상관이 없는 물건입니다. 이건 충분히 알아서 잘 팔릴 물건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상단의 규모랑은 상관이 없습니다.”

“물론 그런 면도 있지만, 우리는 한 번에 많은 지역에서 팔 수 있는 루트가 있습니다. 그러니 상단의 크기에 맞춰 나눠야 합니다.”

“아닙니다. 비누는 크기도 작고 보존 시간도 무척 깁니다. 작은 인력으로도 충분히 팔 수가 있으니, 우리도 많은 지역에서의 판매가 가능합니다.”

규모가 큰 상단과 작은 상단끼리 치열한 대화가 오갔다.

그들로서는 비누를 하나라도 더 확보해야 했다.

급기야 고성이 오가려 하자, 자포리자가 상황을 정리했다.

“잠시만. 아직 내 조건을 다 말하지 않았어.”

자포리자의 말에 사람들이 입을 다물고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내 조건은 간단하다. 비누 값은 돈으로 받지 않겠어. 비누 값은 식량과 생필품으로 받도록 하지. 기한은 최소 한 달. 불가능한 상단의 물량은 가능한 상단에게 모두 밀어주겠다.”

조금 전까지 싸우던 상단 대표들은 모두 입을 닫았다.

각자 상단의 현재 역량을 계산하고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의 얼굴은 밝았지만, 그렇지 못한 상단 대표도 있었다.

식량을 구할 자신이 없던 상단 대표가 웃돈을 얹어 비누를 사겠다고 했지만, 자포리자는 일거에 거절했다.

자포리자가 건 조건은 쉽지 않았다.

지금은 겨울이다 보니 물건을 구하는 것도 문제고, 운송도 힘들었다.

“이번에 비누를 거래하지 못한 상단은 다가오는 봄에 할 비누 거래에 관한 우선권을 주지. 그때도 대금은 지금과 같이 식량과 생필품으로 받을 거니, 미리 준비할 수 있을 거야.”

당장 식량을 구할 여력이 없는 상단도 다음 거래를 약속받았으니 그리 나쁜 조건은 아니었다.

오히려 더 나을 수도 있었다.

그때쯤 되면 왕국에서 비누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테니, 판매가 더 쉬울 수도 있었다.

비누를 쥐고 있는 자포리자가 절대 갑이었지만, 상단에게 무리한 조건은 걸지 않았다.

상단도 앞으로 비누를 팔아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세 개의 상단이 다음의 거래를 약속받고 물러났다.

나머지 상단들이 남은 비누를 공평하게 나누고 거래가 끝이 났다.

상단들은 자포리자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한 달이 되기 전에 스탄다비아로 수레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들어왔다.

이번의 비누 거래로 자포리자는 급한 불을 끄는데 성공했다.

* * *

경일은 미스릴 판매를 중지했다.

미스릴을 파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의 뒤통수가 근질거렸다.

분명 누군가는 눈치를 채고 자신을 찾고 있을 수도 있었다.

이미 신화 길드에서 자신을 노리고 있지 않은가.

정상적인 거래를 제안하는 이도 있겠지만, 열에서 아홉은 분명 강탈하려고 할 것이다.

그를 지켜주는 든든한 조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일개 분식점 사장이라는 것을 알고 나면 분명 숨겨진 이빨을 드러낼 것이었다.

다행히 아무런 사건이 터지기 전에 미스릴 판매를 멈췄으니, 큰 걱정거리를 하나 던 셈이었다.

“휴~ 별일 없이 지나가서 다행이야. 그나저나 자포리자 영주님은 볼수록 대단한 사람이네. 이번 어려움을 극복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여전히 힘든 일은 많이 남아 있지만, 이번 겨울만 잘 넘기면 스탄다비아도 안정을 되찾을 수 있을 거야.”

던전에 새로운 장비가 하나 들어왔다.

부앙앙!

산악 오토바이가 거친 배기음을 내뱉으며 산을 달렸다.

쥐 죽은 듯이 조용했던 산이 오토바이가 내는 거친 배기음으로 뒤덮였다.

오토바이를 사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마지막으로 미스릴 거래를 한 번 더 했다.

그만큼 오토바이는 경일에게 꼭 필요한 장비였다.

경일은 스탄다비아의 이주민들을 돕기 위해 멈추었던 던전 고유 식물 탐색을 다시 시작했다.

“이야~ 이거 되게 재밌0는데? 아무도 없는 곳이라 눈치 볼 필요도 없고.”

경일은 헬멧과 고글까지 끼고 신나게 산을 달리고 있었다.

깍두기 모양의 타이어 트레이드가 흙바닥을 단단히 움켜쥐고 오토바이를 밀어 올렸다.

뛰어난 신체 능력은 일반인이라면 불가능한 묘기와 같은 주행을 가능하게 해 주었다.

경일은 강렬한 스릴을 만끽하고 오토바이를 몰았다.

오토바이 덕분에 한 번도 가 보지 못했던 던전의 깊숙한 곳까지 갈 수 있었다.

험준한 절벽, 오래된 나무 밑동에 뒤덮인 이끼, 산을 타고 시원하게 흘러내리는 계곡물 등 던전의 자연은 어딜 가나 개성 있고, 아름다웠다.

던전에 밤이 찾아오면 적당한 곳에 텐트를 쳤다.

어둠 속의 고요함은 내면을 돌아보는 기회가 됐고, 푸른 숲의 싱그러운 냄새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동안 쌓였던 스트레스가 눈 녹듯이 씻겨 나가는 기분이었다.

“좋구나. 이런 평화로운 시간은 정말 오래간만이야. 이번 일을 한번 겪어 보니 걱정 없이 보내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겠어.”

마음이 편안하니 모든 게 좋았다.

이틀을 더 헤맨 뒤, 드디어 첫 던전 고유 식물을 발견했다.

비후초였다.

던전병 치료에 쓰이는 식물이었다.

모든 던전병의 진행을 늦춰 주고 고통을 덜어 주었다.

약간이지만 던전병을 치료하는 효과까지 있어 쓰임이 많은 식물이었다.

경일은 기쁜 마음으로 조심히 캐서 인벤토리에 넣었다.

실물 비후초가 눈에 익자 그동안 보이지 않던 비후초가 여기저기서 보였다.

이곳은 비후초가 자라는 군락이었다.

인벤토리의 한구석에서 조용히 잠을 자고 있던 호미가 바빠졌다.

“룰루랄라~”

노력의 성과를 얻는 것은 늘 기분 좋은 일이었다.

경일은 비후초가 자라는 지형의 특성을 잘 기억했다.

“한 번 찾았으니 다음에는 더 쉽겠지.”

경일은 비후초를 뽑은 자리의 구멍을 메워 원상으로 복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다음에 또 올 테니, 잘 자라고 있어 줘.”

경일이 던전의 집으로 돌아가려는 순간,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식물 찾기 레벨이 올랐습니다. 한 번 찾은 던전 고유 식물을 다시 찾을 확률이 높아집니다.]

메시지의 내용을 곧바로 이해했다.

지구의 식물을 찾을 때는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어디 있는지 느낌이 왔다.

대신 자신이 직접 가 본 곳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단서가 붙었다.

하지만 던전 고유 식물은 일단 먼저 찾아야 식물 찾기 스킬을 쓸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조건이 이전보다 까다롭긴 하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비후초는 앞으로 계속 찾을 수 있다는 이야기잖아. 이것만으로도 크게 도움이 될 거야.”

경일은 스킬을 발동시키자 어디 있는지 느낌이 왔다.

모두 자신이 한 번 거쳤던 곳이었다.

“이번 스킬도 내가 가 본 곳에서만 찾을 수 있는 거네. 아, 저긴 내가 정말 열심히 찾았던 곳인데. 조금만 더 노력했다면 훨씬 더 일찍 찾을 수 있었구나. 아쉽긴 하지만 지금이라도 찾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하자.”

다음 날, 경일은 눈뜨자마자 분식점으로 향했다.

평소보다 한 시간 빠른 출근이었다.

그만큼 마음이 급했다.

비후초를 구했으니 오늘 분식점을 마치면 곧바로 수아를 만나러 보육원에 갈 생각이었다.

오늘따라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온종일 실수의 연속이었다.

신체 능력이 늘은 뒤, 칼질을 하면서 손이 베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정신이 가출했는지 두 번이나 손을 베고 말았다.

분식점을 마치자 경일은 뛰다시피 보육원으로 향했다.

그동안 던전 고유 식물을 찾지 못할 때마다 수아를 생각하면 늘 마음이 아팠다.

특히 이번에 스탄다비아 일로 던전 고유 식물을 찾는 일에 손을 떼다시피 해서 그런지 마음 한쪽이 늘 무거웠다.

“어서 오세요.”

오늘도 이해인 수녀가 경일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수녀님, 이거 얘들 주세요. 전 수아에게 먼저 가 보겠습니다.”

경일은 급한 마음에 이해인 수녀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곧바로 걸음을 옮겼다.

빨리 비후초를 먹여 던전병의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고 싶었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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