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치유의 죽
“아저씨?”
경일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에 막 잠에서 깼는지 잠에 취한 목소리로 수아가 그를 불렀다.
“수아야, 아저씨가 좋은 거 가지고 왔거든. 힘들더라도 이거 먹고 자자.”
경일은 수아가 누워 있는 침대의 머리맡에 앉자마자 일단 비후초가 듬뿍 들어간 죽부터 꺼냈다.
“배가 안 고파요. 그냥 더 잘래요.”
아직 잠에서 완전히 깨지 않았는지 수아는 잠투정을 부렸다.
“안 돼, 이건 꼭 먹어야 해. 이거 먹으면 안 아플 거라고 아저씨가 약속할게.”
“진짜요?”
고통이 줄어든다는 말에 수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잠이 그득했던 눈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초롱초롱 빛났다.
‘얼마나 아팠으면.’
경일은 연민이 가득한 눈으로 수아를 바라봤다.
“그럼, 아저씨가 수아에게 거짓말한 적 있었어? 오늘 이 죽 다 먹으면 아픈 건 많이 줄어들 거야. 그럼 수아도 많이 편해질 거고. 힘들겠지만 아저씨 말 믿고 한 번 먹어 보자.”
경일은 수아의 몸을 조심히 부축했다.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 보지만, 피부가 괴사한 곳이 많아 손이 닿지 않을 수가 없었다.
수아는 경일이 민망하지 않게 최대한 고통을 참는 모습이었다.
비명이 나오려는 작은 입을 앙다물며 참아 보려고 하지만, 고통으로 얼굴이 찡그려지는 것까지는 어쩔 수가 없었다.
수아의 등을 푹신한 베게에 조심히 받쳤다.
새털처럼 가벼운 몸이었는데도 수아를 부축하는 경일의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준비해 온 작은 숟가락에 죽을 떠 수아의 입으로 가져갔다.
수아의 입이 벌어지자 천천히 죽을 먹였다.
“음음음.”
수아는 작은 입을 오물거리며 죽을 먹었다.
“아저씨, 평소에 먹는 죽이랑 다른 맛이 나요. 한 번도 안 먹어 본 맛이에요. 약간 쓴맛도 나는 거 같고.”
“맛이 없어도 먹어야 해.”
“아니에요. 맛있어요. 이상하게 계속 먹고 싶은 맛이에요.”
던전병에 걸린 몸이 비후초를 원하고 있는 듯했다.
“그래, 많이 먹어. 꾸준히 먹으면 아픈 몸도 조금씩 나아질 거야. 아저씨가 반드시 수아의 병을 낫게 해 줄 테니까 부지런히 죽을 먹어야 해. 약속할 수 있지?”
“네. 죽이 맛있어서 계속 먹을 수 있을 거 같아요.”
“그래, 우리 수아 씩씩하네.”
“아저씨, 몸이 조금 덜 아파요.”
몇 번 먹지도 않았는데, 벌써 비후초의 효과가 나타났다.
“그것 봐. 아저씨 말이 맞았지. 죽을 먹을수록 괜찮아질 테니 어서 먹자.”
수아는 비후초의 효과로 평소보다 거의 두 배의 양을 먹었다.
생기라곤 전혀 없던 볼에 희미하게라도 붉은 기운이 돌았다.
갈수록 식사량이 줄어서 걱정이었는데, 늦지 않게 비후초를 찾아 정말 다행이었다.
비후초를 찾지 못했으면 아마 수아는 한 달을 넘기기 힘들었을 것이다.
마음속에 큰 짐을 하나 덜어 낸 기분이었다.
이제 시간을 벌었으니 수아의 치료에 필요한 불비네라 불리는 던전 고유 식물을 찾기만 하면 됐다.
경일은 농사일을 줄이더라도 던전 고유 식물을 찾는 일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수아는 죽을 다 먹고는 곧바로 잠에 빠져들었다.
얼굴이 한결 편안해 보였다.
경일은 수아의 볼을 살짝 쓰다듬어 주었다.
약간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보육원을 나설 수 있었다.
창을 통해 들어온 햇빛이 어두웠던 방안을 가득 채웠다.
새로운 하루가 막 시작되려고 하고 있었다.
“으차!”
경일이 누운 자세 그대로 길게 기지개를 켜며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셨다.
싱그러운 나무 냄새가 한가득 코로 들어왔다.
“너무 잘 잤어.”
그를 힘들게 했던 일이 어느 정도 안정기에 들어간 덕에 오래간만에 마음 편하게 단잠을 잤다.
파이프를 타고 흐르는 계곡물에 대충 씻고는 출근 준비를 했다.
경일의 아침은 늘 바빴다.
가장 먼저 고물상에 들러 고철을 사고 시장의 정육점에 들렀다.
재료 대부분은 던전에서 구할 수 있었지만, 고기만큼은 어쩔 수가 없었다.
시장을 다녀온 뒤, 분식점을 열었다.
재료를 씻고 손질하며 장사 준비에 돌입했다.
다닥닥닥닥!
화려한 칼질이 시작됐다.
눈으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의 속도로 채소가 잘려 나갔다.
헌터의 놀라운 신체 능력이 작은 도마 위에서 펼쳐졌다.
채소는 순식간에 잘게 다져져 있었다.
동네 아이들이 원한 만두를 만드는 과정이었다.
이왕 만드는 거 좋은 재료로 만들자 싶어서, 돼지고기와 소고기를 간 것을 반반 섞었다.
약간의 당면과 숙주, 배추, 부추, 두부, 파, 참기름, 마늘, 생강까지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었다.
맛술과 진간장, 소금, 감칠맛을 위해 굴 소스로 양념을 만들었다.
경일은 순식간에 재료 준비를 마치고 만두를 빚기 시작했다.
고기가 아낌없이 들어간 진정한 고기만두의 탄생이었다.
만두를 찜기에 찌고 있으니 손주아가 출근했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주어 씨, 어서 와.”
손주아에게 편하게 말을 놓을 수 있을 정도로 둘의 사이는 가까워졌다.
“와~ 사장님, 대단하시다. 이 많은 걸 혼자서 다하신 거예요? 볼 때마다 느끼지만 진짜 요리를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아요.”
“하하하, 하다 보면 요령도 생기고 해서 금방 해. 매일 하는 거라 그렇게 힘들지도 않고.”
손주아는 어제 마치고 바닥 청소를 하기 위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던 의자부터 내렸다.
홀 정리가 끝나자 한 명 두 명 손님이 들어왔다.
“주아야, 언니 왔다.”
늘 해맑은 얼굴로 들어오는 사람은 이미순이었다.
“야, 생일도 나보다 느린 게 언니라니.”
“어허, 손님한테 반말을. 너 사장님한테 이른다.”
경일에게 이른다는 말에 손주아는 이미순과의 말싸움에서 늘 질 수밖에 없었다.
“어휴, 얄미워. 네, 손님. 어떤 걸 드시겠어요.”
손주아가 이미순을 향해 눈을 흘겼다.
“그래. 웨이러~ 오늘의 추천 요리는 뭐지?”
이미순은 혀에 버터를 바른 듯 발음을 굴리며 손주아를 놀렸다.
“오늘의 추천 요리는 김치찌개입니다. 돼지고기가 좋은 게 들어왔거든요, 손님.”
이미순은 손주아를 볼 때마다 놀려 댔고, 손주아는 그녀의 놀림을 마다하지 않고 매번 맞장구를 쳐주었다.
“음~”
이미순은 귀여운 얼굴과 어울리지 않게 근엄한 표정으로 고민했다.
“그럼 김치찌개로 하지. 주방장님께 귀한 손님이 왔으니 특별히 요리에 신경 써 달라고 전하게. 에헴.”
“네, 손님.”
한껏 거드름을 피우는 모습에도 손주아는 끝까지 맞장구를 쳐주고는 경일에게 말했다.
“사장님, 초딩이 김치찌개를 해 달라네요.”
“뭐, 초딩? 이게 죽으려고.”
손주아보다 한참 키가 작은 이미순이 발끈했다.
경일은 둘이 노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입가에 저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점심이 살짝 지난 시간의 분식점은 동네 아이들의 차지였다.
오늘의 안주는 저녁 시간에만 파는 거라 낮에는 그나마 한산한 편이었다.
“아저씨, 나는 떡볶이 국물에 군만두를 비벼서 주세요.”
경일이 만든 만두는 인기 폭발이었다.
한 입 깨물면 진한 육즙이 흘러나왔다.
고기를 아끼지 않고 듬뿍 넣었더니 아이들이 특히 더 좋아했다.
경일은 빠르게 만두를 튀기고, 떡볶이 국물을 부어 주었다.
“만두가 뜨거우니까 식혀서 먹어. 급하게 먹다가 입천장 다 까진다.”
“네!”
수한이가 오늘도 동네 아이들을 우르르 끌고 오는 것이 보였다.
“아저씨!”
수한이가 멀리서부터 손을 흔들며 반갑게 인사했다.
“그래, 수한아, 어서 와.”
경일도 같이 손을 흔들어 주었다.
이게 바로 일상의 행복이었다.
손님이 자신의 음식을 맛있게 먹고, 평상시와 같이 이미순과 손주아가 투덕대며 장난을 치고, 아이들이 자신을 향해 환하게 웃어 주고, 이런 게 좋았다.
한동안 스탄다비아의 위기에 아슬아슬한 생활을 이어 간 터라 오늘의 행복은 더욱 마음속 깊이 찾아 왔다.
“아저씨, 나도 왔어요.”
“잘생긴 한수야, 어서 와.”
“나도 나도.”
“그래, 귀여운 진수도 반가워.”
“아저씨, 아저씨.”
“우리 이쁜 수아 공주님도 오셨네.”
경일이 한 명 한 명 이름을 불러 줄 때마다 아이들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가득 차올랐다.
아이들 앞으로 빠르게 앞 접시를 놓아 주었다.
가게가 크니 확실히 이런 점이 좋았다.
이전 가게는 입구가 좁다 보니 못 먹고 기다리는 아이가 생기곤 했는데, 이전한 뒤로는 그럴 일이 없었다.
앞 접시에 아이들이 주문한 음식을 놓아 주었다.
오늘의 가장 인기 메뉴는 군만두였다.
“아, 뜨거워.”
진수가 뜨거운 만두를 급하게 먹다 소리를 질렀다.
경일이 얼른 찬물을 주었다.
뜨겁다고 충분히 주의를 주어도 아이들은 참지 못하고 빨리 먹는 경우가 많았다.
“여기 찬물 마셔.”
진수가 찬물을 마시고 입을 진정시키자 경일이 엄한 표정을 지으며 말았다.
“만두가 뜨거운데 자꾸 빨리 먹으려고 하면 아저씨가 메뉴에서 빼 버린다. 만두 먹다가 입을 데면 부모님이 얼마나 걱정하시겠어.”
“진수야, 천천히 먹어. 모두 기다리고 있는데, 왜 너 혼자 빨리 먹고 그래.”
골목대장답게 수한이가 진수에게 의젓한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
“미안.”
“다음부터는 천천히 먹어. 알았지?”
“그래.”
어떤 때는 경일의 말보다 수한이의 말이 더 잘 통하는 경우도 많았다.
“화이야야야쿠와와하하하, 만두야 빨리 식어라.”
수아가 심각해진 얼굴로 만두를 향해 손바닥을 내밀고 주문을 외웠다.
경일은 너무도 귀여운 모습에 깨물어 주고 싶었다.
“됐다.”
주문 탓인지, 적당히 식은 만두를 보고 수아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아이들이 서로 만두를 식혀 가며 우물우물 먹는 모습이 참 귀여웠다.
“와~ 만두 안이 전부 고기야. 나 고기 좋아하는데, 엄마가 자주 안 해 줘. 매일 여기서 배부르게 먹어서 너무 좋아. 엄마가 요즘 내 얼굴에서 광이 난데.”
“나도 고기 좋아. 맨날 먹어도 안 질려.”
아이들은 서로 조잘거리며 잘도 먹었다.
아무리 많이 먹어도 떡볶이 두 개랑 만두 세 개면 다들 배불러 했다.
“아저씨, 잘 먹었습니다.”
수한이가 1,000원을 내밀자 동네 아이들도 다 같이 1,000원을 내밀었다.
“맛있었어?”
“네!”
아이들이 만족한 표정으로 합창하듯이 대답했다.
“참, 수한아, 이거 엄마 갖다 드려. 이건 엄마 식사니까 꼭 드시라고 해.”
경일이 비후초가 들어간 죽을 담은 쇼핑백을 수한이에게 내밀었다.
“놀러 가기 전에 엄마한테 꼭 먼저 가져다줘야 해. 수한이는 효자니까 어머니가 먹기 힘들어하시면 수한이가 꼭 먹여 드려. 알았지?”
“네.”
수한이는 경일이 챙겨 준 쇼핑백을 들고 곧바로 집으로 갔다.
한창 힘들 때 친구가 되어 준 경일이라 그런지, 수한이는 그의 말을 철석같이 들었다.
“엄마, 엄마!”
신발을 대충 벗어 놓고는 수한이는 엄마를 부르며 안방으로 들어갔다.
방에는 수한이의 엄마 선호연이 누워 있었다.
그녀는 사랑하는 아들의 목소리에 피부가 굳어 잘 움직이지 않는 몸을 일으켜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부가 접힐 때마다 끔찍한 고통이 일었지만, 아들 앞에서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선호연에게 가장 힘든 건 던전병의 고통이 아니었다.
사랑하는 아들을 향해 한껏 웃음 지어 주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이 그녀의 가슴을 가장 아프게 했다.
“우…리… 아…들.”
굳어서 잘 움직이지 않는 혀를 억지로 움직여 한자씩 천천히 말했다.
긴 머리에 착해 보이는 눈을 가진 순한 인상의 그녀였지만, 표정을 지을 수 없으니 그저 무심해 보일 뿐이었다.
“엄마!”
수한이는 웃으며 대답했다.
선호연의 얼굴은 표정을 담을 수 없었지만, 수한이는 그녀의 숨겨진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 자신을 사랑하고, 마음속으로나마 향상 자신을 향해 웃어 주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