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절대 죽을 수 없어!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졌다.
강력한 이빨이 이길호의 몸 대신 그의 배낭을 물어뜯었다.
가방을 통해 간접적이나마 지옥개의 거대한 힘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
자신 정도는 아주 가볍게 던져 버릴 수 있을 거 같은 힘.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던 힘에 놀란 이길호는 재빨리 배낭을 벗어 던졌다.
지옥개는 배낭을 입에 물고는 거침없이 좌우로 흔들었다.
찌이익!
스캐빈저 전용으로 나온 질기디질긴 배낭이 종이처럼 너무나 쉽게 찢겨 버렸다.
배낭 속 몬스터 사채와 함께 소중히 종이에 싸 두었던 비후초가 하늘로 흩날려 날아갔다.
지옥개는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한쪽 발로 배낭을 밟고서는 계속해서 이빨로 물어뜯었다.
배낭의 형태가 사라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잘게 찢긴 배낭에 흥미를 잃자 지옥개는 다음 목표를 찾았다.
지옥개는 빠르게 도망가는 이길호를 향해 달렸다.
“제기랄!”
이길호는 죽을힘을 다해 달렸다.
그가 디뎠을 때는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았던 단단한 땅이, 지옥개가 발을 디딜 때마다 발자국이 진흙을 밟은 것처럼 그대로 찍혔다.
근육질의 다리로 땅을 강하게 박차며 달리자, 제법 벌어졌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 들었다.
등 뒤로 지옥개의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이길호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지고, 숨을 쉬는 것이 힘들어졌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안 돼, 내 가족을 이대로 남겨 두고는 절대 죽을 수 없어.”
스피드로는 도저히 지옥개를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이길호는 한 손에 칼을 쥐고 암벽을 타고 올랐다.
지옥개가 암벽을 타고 올라가는 이길호를 향해 도약했다.
딱!
지옥개의 이빨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이길호의 다리가 있던 곳을 지옥개가 문 것이다.
0.1초라도 다리를 드는 것이 늦었다면, 이길호의 다리에 지옥개의 어금니가 박혀 들었을 것이다.
유려한 동작으로 땅에 착지한 지옥개가 분한 듯 으르렁거리며 이길호를 노려봤다.
지옥개는 그 뒤로도 몇 번 더 그를 향해 도약해 보지만 높이가 모자랐다.
약이 빠짝 오른 지옥개가 이길호를 노려보며 입맛을 다졌다.
입에서 넘쳐흐른 붉은 침이 바닥을 적셨다.
이길호는 암벽에 매달린 채 창백해진 얼굴로 식은땀을 흘렸다.
조금이라도 늦었으면 산 채로 지옥개의 이빨에 갈가리 찢길 뻔했다.
지옥개가 더 이상 뛰어오르지 않자 조금이나마 마음이 가라앉았다.
이제야 자신이 던전 고유 식물을 찾는다고 공략대가 지나간 길을 너무 많이 벗어난 걸 알았다.
F급 던전에서도 위험한 행동을 자신도 모르게 D급 던전에서 하고야 말았다.
황룡초를 찾은 순간, 너무 기쁜 나머지 주위를 경계하는 것을 잊었다.
조금만 침착하게 주위를 살폈다면 지옥개의 존재를 먼저 알아차렸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후회가 물밀 듯이 밀려들었지만, 이미 늦어 버렸다.
그렇게 지옥개와의 대치가 시작됐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던전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땀이 식어 몸이 차가워졌다.
“어떻게 하지? 시간은 얼마나 남았지?”
시간은 이길호의 편이 아니었다.
이대로 게이트가 사라지기라도 한다면 자신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몰랐다.
인류는 게이트가 닫친 던전에 남아 있던 사람이 어떻게 되는지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게이트와 함께 던전 자체가 사라지는지, 아니면 게이트만 사라지고 던전은 또 다른 차원에서 유지될지, 그건 신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길호는 초조해져 갔다.
그와 상관없이 지옥개는 처음과 다르게 편한 자세로 바닥에 누워 먹이가 내려오기만을 기다렸다.
초조한 한 명의 남자와 느긋한 몬스터와의 미묘한 대치가 이어졌다.
“가! 이 새끼야 가라고! 제발 좀 가라고, 이 징그러운 몬스터 새끼야!”
마음이 급해진 이길호가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지옥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길호를 보고 한 번씩 하품을 늘어지게 할 뿐이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지옥개는 자는 듯 눈이 감겼다.
이길호는 그 모습을 확인하자 조심히 암벽을 내려왔다.
‘눈 뜨지 마라. 눈 뜨지 마라. 제발 이렇게 빌 테니, 눈 뜨지 마.’
이길호는 한 발 한 발 조심히 암벽을 디뎠다.
후두득!
이길호가 디딘 암벽이 그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작은 돌멩이가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 순간, 자고 있던 지옥개의 눈이 번쩍 떠졌다.
“크아앙!”
지옥개는 던전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고 곧바로 이길호를 향해 날아올랐다.
이길호는 도로 암벽을 타고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제기랄, 이러면 안 되는데.”
입이 바싹 말라 왔다.
온몸의 수분이 빠져나가 그대로 쪼그라드는 거 같았다.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지옥개도 먹이가 도망갈 수 있다는 생각에 더는 잠자지 않았다.
이길호의 작은 움직임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며 틈을 노렸다.
“어떻게 해야 하지? 제발 그냥 가 줘. 가 달라고.”
초조함과 공포로 커진 동공이 사정없이 떨렸다.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지옥개는 그런 이길호를 비웃듯 한 번씩 뛰어올랐다.
벌어진 입에서 날카롭게 솟아 있는 어금니를 볼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내와 수한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
시간은 이길호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던전에 진동이 일었다.
평화롭기만 했던 던전의 모든 것이 떨리기 시작했다.
이길호는 순간 놀라 잡고 있던 암벽을 놓칠 뻔했다.
이건 게이트가 얼마 뒤에 사라진다는 경고였다.
진동이 심해질수록 게이트가 사라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여기에서 게이트까지 갈려면 최소 한 시간은 필요했다.
이제 자신에게 남은 시간은 게이트로 가는 시간을 제외하면 얼마 남지 않았을 거라는 것을 경험으로 알았다.
“씨발,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허무하게 죽을 수는 없어. 내가 여기서 죽으면 남은 가족들은 어떡하라고. 아픈 아내며, 어린 수한이는 누가 돌봐 주냐고. 절대 죽을 수 없어.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단 말이야!”
이길호의 혼잣말이 뒤로 갈수록 커지더니 마지막에 가서는 거의 발악하듯 온 힘을 다해 소리를 질렀다.
지옥개가 깜짝 놀라 이길호를 보고 낮은 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이길호도 지지 않고 지옥개를 마주 노려봤다.
“크아아아아앙!”
먹이의 반항에 화가 났는지 이길호의 머리쯤은 한입에 넣고도 남을 만큼 크게 벌어진 입에서 던전이 떠나갈 것 같은 거대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날카롭게 빛나는 송곳니는 자신의 뼈 정도는 가볍게 씹어 먹을 것 같았다.
“이야야야얍! 난 기죽지 않아. 나는 수한이의 아빠 이길호라고, 이길호!”
이길호는 지옥개를 향해 아랫배에 힘을 주고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기합을 질렀다.
지옥개의 울부짖음과 이길호의 기합 소리가 공중에서 맞부딪쳤다.
게이트가 사라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을수록 지옥개에 대한 두려움이 희석되어 갔다.
이길호는 목숨을 건 마지막 몸부림을 선택했다.
던전에 갇혀서 죽으나, 지옥개에게 죽으나, 죽는 건 어차피 마찬가지였다.
공포로 질려 있던 표정이 점점 사라지며 무덤덤한 얼굴로 변해 갔다.
무언가 결심한 듯 이길호가 느리지만 자신 있는 움직임으로 암벽을 타고 내려갔다.
지옥개는 그에 맞춰 언제든지 뛰어오를 수 있게 근육질의 뒷다리로 단단히 땅을 디뎠다.
어깨를 가볍게 숙이고, 이길호의 작은 움직임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형형한 붉은 빛의 눈으로 노려봤다.
어느 정도 선까지 이길호가 내려오자 지옥개는 망설이지 않고 그를 향해 도약했다.
이길호는 단단한 눈빛으로 지옥개를 노려보며 오른손에 들린 칼을 힘 있게 거머쥐었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지옥개에 맞춰 칼을 앞으로 내밀었다.
지옥개는 이길호의 행동을 무시했다.
이길호는 보는 것만으로도 침이 흐르게 하는 맛있게 생긴 먹이일 뿐이었다.
본능적으로 그가 얼마나 약한지 알고 있었다.
이길호가 공격해 본들 자신의 질긴 가죽을 뚫을 수 없음을 알았다.
드디어 먹이를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지옥개의 눈이 기쁜 듯 호선으로 휘었다.
“케갱갱갱갱갱!”
“아아악!”
두 가지 비명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이길호의 칼이 지옥개의 오른쪽 눈에 정확히 박혔고, 지옥개의 송곳니가 이길호의 허벅지를 뜯으며 지나갔다.
이길호는 거의 7m가 넘는 높이에서 떨어졌다.
오른쪽 다리에서 밀려드는 화끈한 고통에 그는 제대로 된 착지를 못 하고 바닥을 굴렀다.
그는 바닥에서 벌떡 일어났다.
허벅지에서 흘러내린 피가 다리를 타고 신발 안으로 들어왔으나, 그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지옥개에게 최대한 빨리 멀어져야 했다.
그는 허벅지 상처를 지혈조차 하지 못하고 쩔뚝거리며 게이트를 향해 뛰었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게이트가 닫힐 수도 있었다.
얼마 달리지 않았는데도 벌써 몸에 힘이 빠지고 어지러웠다.
피로 젖은 운동화가 뛸 때마다 질퍽거렸다.
던전의 진동이 더 심해졌다.
거인이 나무를 쥐고 흔드는 듯 큰 나무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땅도 하늘도 자신의 몸도 사정없이 흔들렸다.
몸이 휘청거렸다.
어지러워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지금 가는 방향이 맞는지도 알 수가 없다.
눈앞이 침침해 잘 보이지가 않았다.
땅이 울려 제대로 달릴 수가 없다.
정신을 놓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었다.
기억이 중간중간 끊겼다.
그는 달리는 사이사이에 기절했다.
아니, 이미 기절했는지도 몰랐다.
뛰고 있다고 느끼는 건 자신의 강렬한 염원이 만들어 낸 환상일 수도 있었다.
꿈이든 환상이든 뛰었다.
무조건 뛰었다.
이길호를 이렇게 뛰게 만드는 건 아내와 아들의 얼굴이었다.
가족에 대한 강렬한 염원이 다친 다리를 끊임없이 움직이게 했다.
그의 등 뒤로 몬스터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잔뜩 화가 나 있는 그 소리가 이길호의 뒤통수에 박혔다.
소리가 조금씩 가까워졌다.
이길호는 너무 힘들어 차라리 이대로 모든 걸 포기하고 싶었다.
꽤 오랫동안 뛴 거 같았다.
아마 평생 뛴 걸 합쳐도 지금이 더 많이 뛴 거 같았다.
이제는 뛰는 이유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냥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눈앞에 흐릿한 빛이 보였다.
일그러진 원이 빛을 내고 있었다.
이길호는 빛을 쫓는 불나방처럼 일그러진 원 안에 몸을 집어넣었다.
그의 손엔 끝까지 놓지 않았던 황룡초의 흔적만이 남아 있었다.
“크아아아아앙앙앙!”
그 순간, 바로 뒤에서 커다란 짐승의 울부짖음이 터져 나왔다.
지옥개였다.
오른쪽 눈에 깊숙하게 칼이 박힌 지옥개가 억울한 듯이 크게 울부짖었다.
그러고는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졌다.
지옥개의 등 뒤로 피의 길이 기다랗게 나 있었다.
눈에서 피를 흘리며 고통을 참고 복수를 위해 죽을힘을 다해 쫓아왔지만, 약간의 차이로 놓쳐 버렸다.
지옥개는 허망함을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졌다.
이길호의 칼을 눈에 꽂은 채 몸의 움직임이 조금씩 사라져 갔다.
수한이는 걱정이 태산이었다.
아빠가 연락도 없이 3일째 집에 오지 않았다.
동네 어귀에 서서 아빠가 올까 봐 아침부터 밤까지 기다려 보지만, 오늘도 아빠는 보이지 않았다.
힘없이 걸어가는 수한을 경일이 불렀다.
“수한아, 걱정하지 마. 아빠는 강한 분이시니까 분명히 돌아오실 거야. 그러니 수한이가 힘을 내야 해. 수한이가 이렇게 축 처져 있으면 아빠 마음이 슬플 거야. 아픈 엄마를 생각해서라도 수한이가 씩씩해져야지. 알았지?”
경일이 수한이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수한이는 이틀 전, 경일에게 죽을 가지러 오면서 아빠가 아직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이야기했다.
그 뒤로 수한이와 같이 걱정을 하면서 이길호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자, 이거. 죽은 엄마 드리고 수한이는 이거 먹어. 오늘은 수한이 힘내라고 아저씨가 고기 듬뿍 넣은 볶음밥을 만들었거든. 이거 다 먹고 힘내서 엄마도 돌봐 드리자. 아빠는 금방 돌아오실 거니까 우리 같이 힘을 내자.”
“네, 아저씨.”
수한이가 경일의 말에 조금이라도 웃어 보이려 했다.
그 웃음이 무척이나 쓸쓸하게 다가와 마음이 아팠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