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반대로 생각하면…
수한이 나이 때쯤에 부모님을 잃은 경일은 누구보다 수한이의 걱정스러운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부모님은 어린 경일을 지키기 위해 몬스터를 유인하다 돌아가셨다.
경일을 숨겨 놓고 떠나기 직전에 자신을 바라보던 부모님의 애잔하던 눈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었다.
애써 웃음 지으며 곧 돌아올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이 유언이 되었다.
몇 날 며칠을 부모님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어린 나이였지만 그때의 아픔이 너무 짙어서 지금도 생생히 기억이 났다.
제발 수한이는 자신과 같은 고통을 겪지 않기를 바랐다.
어깨가 축 처져서 땅만 보고 걸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이 너무 안타까워 경일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다음 날,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한 수한이가 달려왔다.
“아저씨, 아빠한테 연락이 왔어요!”
수한이는 얼마나 급한지 저 멀리서부터 경일을 보고 소리 질렀다.
경일은 수한이의 다급한 목소리에 걱정부터 앞섰다.
분명 무소식보다는 연락 온 것이 다행이지만, 수한이의 얼굴을 보니 만만치 않게 큰일이 일어난 듯했다.
“아저씨, 큰일 났어요! 허헉, 허헉, 병원이라는데… 아빠가 많이 다친 거 같아요… 허헉, 도와주세요. 허억.”
수한이는 거친 숨을 내쉬며 경일에게 도움을 청했다.
집에서 연락을 받은 즉시 분식점까지 한 번도 안 쉬고 뛰어온 듯했다.
어린 수한이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어른은 자신뿐이었으리라.
병원에서 온 전화를 받고 어린 수한이와 아픈 선호연이 얼마나 놀랐을까라는 생각에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선호연의 가슴은 아마 무너져 내렸으리라.
자신을 대신해 뛰어가는 어린 아들의 뒷모습을 보고 자신의 처지를 얼마나 원망했을까.
경일은 어릴 때 자신의 모습이 수한이에게 오버랩 됐다.
자신도 겪어 본 일이라 수한의 아픔이 마음속 깊이 느껴졌다.
한 가지 차이점은 도움을 요청한 경일은 도와준 어른은 한 명도 없었다는 점이다.
던전 브레이크로 사회에 무너졌을 때라 지금은 이해가 되지만, 그때는 어린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다.
수한이에게 그런 지독한 아픔을 주고 싶지 않았다.
“수한아, 잠시만 기다려.”
경일은 앞치마를 벗으며 분식점 안으로 들어갔다.
“주아 씨, 일이 생겨 오늘 장사는 이만 마쳐야겠어. 더 이상 손님 받지 말고, 입구에 사정이 생겨서 오늘 장사는 이만한다고 좀 적어 줘. 미안하지만, 식당 마무리 좀 부탁할게.”
“아니에요, 사장님. 가게 걱정은 마시고 얼른 가 보세요.”
“고마워, 수아 씨.”
경일은 곧바로 뛰어나갔다.
수한이와 함께 이길호가 있다는 병원으로 갔다.
이길호는 중환자실 침대에 힘겹게 누워 있었다.
다행히 의식을 회복한 상태였다.
하지만 한눈에 보기에도 상태가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몸 여기저기에 쓸린 상처가 가득했고, 얼굴엔 핏기 하나 없었다.
힘없이 축 쳐진 몸의 한쪽 허벅지엔 붕대가 칭칭 감겨 고정되어 있었다.
“수한…이 왔어?”
이길호는 아들을 보고 씩씩하게 말해 보려 했지만, 힘겨운 듯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아빠!”
하얗게 질린 수한이의 얼굴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얼마나 놀랐는지 아이는 동상처럼 굳어 있었다.
“수한아, 아빠 괜찮아. 걱정하지 마. 하룻밤만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거니까, 하나도 걱정하지 않아도 돼. 엄마는 괜찮아?”
이길호는 힘겨워하면서도 최대한 또박또박 말하려 노력했다.
자신의 몸보다 어린 아들과 아내가 더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경일은 가족 간의 상봉에 방해되지 않게 조용히 중환자실을 나왔다.
일단 어떻게 된 일인지부터 알아볼 생각으로 간호사에게 다가갔다.
“저기, 이길호 씨 보호자인데요.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을까요?”
“네, 잠시만요.”
간호사는 컴퓨터를 조작하더니 전화기를 들었다.
“선생님, 이길호 환자분 보호자가 오셨는데요.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간호사가 경일에게 말했다.
“담당 선생님이 지금 내려오신다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알겠습니다.”
10분 정도 지나자 담당으로 보이는 의사가 경일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이길호 환자분 보호자?”
“아, 네, 제가 보호잡니다.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있을까요?”
“네. 이길호 환자분은 4일 전에 응급으로 들어왔습니다. 119 구조대원 말로는 D급 던전에서 몬스터에게 허벅지에 심한 상처를 입었다고 합니다. 피를 많이 흘리는 바람에 병원에 들어올 때부터 의식이 없었습니다. 곧바로 수혈을 실시했고, 허벅지의 자상도 치료가 끝났습니다. 가장 문제가 의식이었는데, 다행히 의식은 회복하셨습니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까?”
경일은 긴장되는지 주먹을 말아 쥐었다가 풀었다.
“네. 지금은 고비를 넘기셨습니다. 일반인분이라면 과다 출혈로 돌아가셔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는데, 헌터분이라 그런지 확실히 체력이 좋으시더군요. 오늘까지만 중환자실에 계시고, 내일은 일반 병실로 옮길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네, 그럼 이만.”
경일은 의사의 말을 들으니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중환자실로 돌아가니 이길호는 많이 힘든지 기절하듯 잠들어 있었다.
그런 이길호의 손을 수한이 꼭 쥐고 있다.
“수한아, 아빠는 하룻밤만 자면 나아질 거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편히 주무시게 우리는 나가 있자.”
“네.”
경일의 말에 수한이 쭈뼛거리며 일어났다.
내일이면 괜찮아진다는 말에 아이의 얼굴이 한결 편안해 보였다.
경일은 수한이의 식사를 챙기고 늦은 밤까지 같이 병원에 있어 주었다.
이길호는 잠깐잠깐 깨어날 때마다 경일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경일은 잠든 수한이를 집으로 데려다주었다.
다음 날도 경일은 분식점을 열지 않았다.
어려운 이웃을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수한이는 가족이나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음식을 가장 처음 맛있다고 말해 준 동네 분식의 소중한 1호 단골이다.
수한이를 통해 받은 기쁨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급하게 만든 죽을 가지고 수한이를 데리러 갔다.
이날 경일은 수한이 엄마를 처음 봤다.
선호연은 힘들게 자리에서 일어나서 경일을 맞았다.
“감.사.합.니.다. 평.소.에 우.리 아.들.이.랑 남.편.에.게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베.풀.어 주.신 은.혜.는 늘 가.슴 깊.숙.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잘 움직이지 않는 입을 억지로 움직이며 경일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억양이 없는 말과 무표정한 표정이었지만, 그녀의 마음만은 충분히 전달이 되었다.
“아닙니다. 저도 어렵게 자라면서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때 받은 은혜를 갚는 거니, 저한테 감사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어제 병원에서 얘기 들은 걸로는 이제 회복할 일만 남았다고 하니,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사실 고아가 되고 크게 도움받은 기억은 없었지만, 선호연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기 위해 적당히 둘러댔다.
“감.사.합.니.다.”
힘겹게 고개를 숙이는 그녀에게 죽을 건네주고 수한이를 데리고 병원으로 갔다.
일반 병실로 옮겨진 이길호의 상태는 어제와 비교하면 훨씬 나아 보였다.
“사장님, 정말 감사합니다. 저희 가족 때문에 장사도 못 하시고.”
“아닙니다. 이웃끼리 돕고 사는 거죠. 더군다나 수한이랑 저랑 친구 사이인데, 당연한 일을 하는 겁니다. 수한이 아버님은 몸조리 잘하시고, 얼른 자리를 털고 일어나시기만 하면 됩니다. 수한이가 걱정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걱정할 일은 없을 테니까 힘을 내세요.”
“정말 감사합니다.”
경일은 수한이와 오랫동안 병원에 머물렀다.
이번 일로 수한이가 많이 놀랐는지, 이길호의 옆에 꼭 붙어 앉아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이길호는 수한이를 따뜻하게 안아 주었다.
늦은 밤잠을 자려는 이길호의 머릿속에 앞으로 걱정할 일이 없을 거라는 경일의 말이 맴돌았다.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지금 겪고 있는 모든 걱정이 사라질 것 같았다.
이길호는 진짜 그런 일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빌었다.
확실히 헌터라 그런지 회복이 빨랐다.
이길호는 하루하루 나아지는 모습이 보일 정도였다.
그는 병원비가 걱정되어 일정보다 더 빨리 퇴원을 결정했다.
아내를 약값이 자신의 병원비로 모두 사라져 버렸다.
‘안 그래도 돈이 모자란 판에 오히려 까먹다니…….’
몸은 나았으나, 집으로 돌아가는 그의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지옥개와 대치할 때는 다시 한번 이 길을 걸을 수 있게 해 달라고 그렇게 바랐는데, 막상 현실이 된 지금 그의 발걸음은 모래주머니를 발목에 찬 듯 무겁기만 했다.
급한 마음에 다시 던전에 들어가려는 이길호를 선호연과 수한이가 온몸으로 막았다.
더군다나 아내는 이 모든 게 자신 때문이라면서 너무나 괴로워했다.
이길호는 절대 아니라고, 그런 거 아니라고 오열하는 아내를 달랬다.
아내의 발작이 가까워지자 이길호와 수한이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어린 수한이도 아픈 엄마가 약을 먹지 못하면 큰일이 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아내의 발작일에 맞춰 비후초를 못 구한 적도 몇 번 있었다.
어느 날부터 선호연은 가족들에게 아픈 모습을 보여 주기 싫어 방으로 들어가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방문을 잠갔다.
죽음보다 더한 고통에 비명을 지르지 않게 입에 수건을 물고 홀로 사흘을 버텼다.
죽고 싶을 만큼 아팠지만, 남편과 아들을 생각하면 절대 고통에 질 수는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길호는 초조해졌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인 거 같았다.
아무리 자책해 본들 현실이 바뀔 리가 없었다.
수한이 앞에서만은 웃는 얼굴을 보여 주려고 노력해 보지만, 아들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다.
단란했던 가족의 집이 초상집 같았다.
하루가 지났다.
그리고 또 하루가 지났다.
‘이번에는 발작이 조금 늦게 시작되는 건가?’
어차피 아파야 하는 거면 오히려 하루라도 빨리 오는 게 나을 거란 생각이 들었지만,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저 고통이 조금이라도 작기를 빌었다.
또 하루가 지났다.
이길호는 일부러 수한이를 집에 두지 않았다.
어린 수한이가 굳이 이 고통을 같이 겪을 이유는 없었다.
아내는 수한이가 집에 올 때마다 가져다주는 죽으로 끼니를 해결하며 발작을 기다렸다.
또 하루가 지났다.
예정일보다 4일이나 지나갔다.
이때쯤 되니 혹시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설마? 아닐 거야. 약을 먹지 않았는데도 발작이 없었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어. 그나저나 이번 발작은 정말 지독하구나. 시작하기 전부터 하루하루 피 말리는 게 정말… 지옥개를 만나질 않나, 하나 남은 칼도 잃어버리지 않나. 휴~ 나쁜 일은 한꺼번에 온다더니… 그나저나 나도 이렇게 힘든데, 아내는 얼마나 힘들까? 이놈의 던전병, 정말 지긋지긋하구나.’
걱정과 두려움 속에 또다시 하루가 지났다.
가장 먼저 이상함을 알아낸 건 선호연이었다.
“여.보 이.번.에.는 발.작.이 안 오.고 지.나.간 거 같.아.요. 확.실.히 이.전.에. 발.작 올 때.랑 비.교.하.면 몸 상.태.가 좋.아.요. 말.도 좀 더 쉽.게 나.오.고요.”
“다행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너무 마음 놓지는 말자고.”
이길호는 아내의 말에 작은 희망이 생겼지만, 아직은 발작에 대한 걱정이 더 컸다.
다음 날이 되어도 아내는 평소와 같았다.
아니, 평소에 비하면 컨디션이 훨씬 좋았다.
자신이 입원하기 전보다 더 나아 보였다.
그제야 이길호는 이번에는 발작이 오지 않고 지나갔다는 걸 인정했다.
그러고 보니 나쁜 일이 겹쳐서 일어난 게 아니었다.
다르게 생각하니 자신은 무려 D급 던전 몬스터를 만나고도 던전에서 살아나왔다.
그것도 무려 게이트가 사라지기 일보 직전에.
이건 기적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출혈이 워낙 심해 처음에는 의사도 어려울 수도 있다고 했지만, 자신은 건강하게 살아남았다.
그리고 아내는 비후초를 먹지 않았는데도 발작은커녕 아주 약간이지만 차도를 보였다.
오히려 행운의 연속이었다.
‘앞으로 걱정할 일이 없을 테니까 힘을 내세요.’
순간, 머릿속에 경일이 했던 말이 떠오른 건 왜였을까?
* * *
사나운 바람에 바닥의 눈이 회오리치듯 휘날렸다.
살이 에는 듯한 추위에 사람들이 옷깃을 단단히 여미었다.
봄이 오기 전, 스탄다비아의 겨울이 마지막 기승을 부렸다.
지금까지의 겨울은 그저 순종하고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랐던 것과 달리 이번 겨울은 달랐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