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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93화 (93/300)

[93화] 깨어나는 스탄다비아

차가운 온도와 달리 영지민들은 활기가 넘쳤다.

스탄다비아에 새로운 일자리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농사와 사냥 이외에는 일자리가 없던 스탄다비아가 새롭게 태어나고 있었다.

첫 번째 생긴 일자리는 비누의 재료를 수급하기 위해 몬스터의 사체에서 지방을 떼어 내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병사들이 이 일을 담당했지만, 비누의 판매로 재정에 여유가 생기자 영지민들에게 넘겼다.

그 덕에 행정관 사미르가 바빠졌다.

사미르는 자포리자가 스카우트한 인물이었다.

이전 행정관의 비리를 겪은 그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스탄다비아가 발전하면서 행정관의 역할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어 어느 정도 학식 또한 가지고 있어야 했다.

그래서 선택한 사람이 사미르 던일 남작이었다.

스탄다비아에 몇 없는 귀족 가문의 장자로, 자포리자와는 그전부터 어느 정도 친분이 있었다.

그는 지금 영지민이 가장 많이 다니는 길목에 몬스터의 지방을 떼어 내는 일을 할 인원을 모집한다는 내용이 담긴 커다란 게시판을 세우는 작업을 진행 중이었다.

“자자, 다들 힘내라고. 땅이 얼어붙어 힘들겠지만, 얼른 끝나고 밥 먹으러 가자고.”

“알겠습니다, 행정관님.”

사미르는 고용한 일꾼들을 재촉했다.

일꾼들이야 몸을 움직여 추위를 몰아내고 있었지만, 그는 가만히 서서 일꾼들의 일을 감시만 하고 있으니 더 추울 수밖에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체면이고, 뭐고 자신이 대신 일을 하고 싶을 정도였다.

예전 같으면 더 빨리하라고 일꾼들을 윽박이라도 질렀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자포리자는 어느 날부터 조금씩 변했다.

이전에 알던 그는 뛰어난 기사일 뿐이었다.

스탄바디아의 특성상 영주의 가장 큰 책임은 몬스터의 침략을 막는 것이다 보니, 그는 늘 검술을 닦았다.

그러던 자포리자가 한마디로 똑똑해지기 시작했다.

그의 유연한 사고와 해박한 지식에 사미르는 하루에도 몇 번씩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이 시대를 이끌어 갈 선각자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사미르도 남작의 직책을 가지고 있는 귀족이라 책이라면 남부럽지 않게 읽었다.

자신도 이 시대의 낡은 관념이나, 습관은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포리자의 생각은 도저히 자신의 그릇으로 담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모든 사안에서 보이는 그의 통찰력은 날카로웠고, 노회한 정치가와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자신보다 훨씬 어린 자포리자에게서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을 느꼈다.

그와의 토론에서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새로운 관점으로 날카롭게 치고 들어올 때는 등에 식은땀이 맺힐 정도였다.

때로는 너무 급진적인 생각인 듯해서 걱정이 되곤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의 걱정과는 달리 그의 생각은 맞아떨어졌고, 영지는 하루하루 발전해 나갔다.

사미르는 그를 진정으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서로 의견을 나누는 관계였는데, 지금은 자포리자를 따르는 개인 비서처럼 되어 버렸다.

자포리자는 평민들에게 귀족의 권위를 내세우는 걸 특히 싫어했다.

행정관인 사미르는 당연히 자포리자의 의견을 따라야 했다.

그 덕인지 몰라도 요즘 그의 인기가 많이 높아졌다.

경일은 처음에는 그저 스탄다비아를 발전시킬 생각만 했다.

철과 같이 당장 필요한 것을 먼저 공급했다.

그러다 어느 날, 어떤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들이 필요한 것을 주는 것도 도움이 되겠지만, 이건 한시적일 수밖에 없어. 만약 나랑 연결이 끊어지기라도 한다면, 이전처럼 어려워질 수밖에 없을 거야. 그들이 자립할 수 있는 방향으로 지원해야 해.’

그러다 생각한 것이 비누였다.

스탄다비아의 기술로도 충분히 만들 수 있고, 재료 수급이 쉬웠다.

비누는 경일의 의도대로 커다란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실질적인 힘을 발휘했다.

그 외에 우수한 철을 빠르고 쉽게 생산할 수 있는 제련법과 흙을 구워 벽돌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을 전했다.

스탄다비아에 도움이 될 것을 생각하는 중에 분식점의 TV에서 흘러나오는 뉴스에 눈길이 갔다.

오늘도 잘난 국회의원들은 서로 물어뜯는다고 민생에는 관심이 없었다.

당면한 현안은 뒷전으로 밀리고, 서로 책임을 떠넘기기에 바빴다.

오로지 권력을 잡기 위한 노력만 할 뿐이었다.

대통령은 임기의 반도 채우지 못한 상황에 심각한 레임덕에 빠지고, 그 피해는 모두 힘없는 서민에게 돌아왔다.

그 모습을 보자 지도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자신이 스탄다비아를 위해 여러 아이디어를 낸다고 해도 그걸 결정하고 실행하는 것은 자포리자였다.

자포리자의 능력에 따라 스탄다비아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거라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였다.

분수에 맞지 않는 복은 화로 돌아올 수도 있었다.

자포리자는 새로운 지식과 사상을 받아들이는 데에 대한 편견이 없었다.

신분 사회에 나고 자란 사람으로서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가끔 자신이 보내 주었던 옛 선인의 에피소드나, 가르침을 번역해 놓은 메모지를 무척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날부터 경일은 자포리자에게 도움이 될 만한 책을 본격적으로 찾았다.

하지만 이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신의 짧은 상식으로는 도저히 자포리자에게 필요한 책을 고를 수가 없었다.

막연히 철학이나, 정치에 관련된 책을 떠올려 봤지만, 아는 책이 없었다.

인터넷으로 관련 책을 찾아보니 수많은 책이 있었다.

책의 소개와 목차를 읽어 봤지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책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이해도 되지 않는 책을 어떻게 스탄다비아 언어로 번역을 한단 말인가.

그렇다고 아는 책이라고 해도 함부로 보낼 수는 없었다.

자포리자는 수많은 사람의 운명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보내는 책이라 더욱 조심스러웠다.

잘못된 편견을 심어 주기라도 한다면 수많은 사람이 고통받을 수도 있는 문제였다.

그래서 고민 끝에 선택한 것이 역사에 관한 책이었다.

처음에는 스탄다비아와 같은 봉건 시대의 역사부터 번역했다.

역사에는 모든 것이 녹아 있었다.

그 시대의 사람들의 삶과 생각, 정치, 유명한 사건과 그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던 이유, 그리고 이어진 전쟁 등 역사에는 모든 것이 녹아 있었다.

경일은 여러 나라의 역사를 틈틈이 번역해 자포리자에게 건넸다.

자포리자에게 이건 굉장한 책이었다.

한 자 한 자가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경일에겐 지나간 역사이지만, 자포리자에겐 미래에 벌어질 일들이었다.

인간의 어리석음과 그를 인해 발생한 비참한 사건들, 그리고 그것을 딛고 극복해 나가는 후손들의 이야기.

종교로 인해 일어난 여러 사건과 변화 과정, 사회 계급의 모순, 독재자의 폐단, 인간의 이기, 한 명의 무능한 왕으로 인해 겪어야 하는 민초들의 아픔과 고통 등.

역사에는 모든 게 들어 있었다.

자포리자에게는 무척 생소하고 급진적으로 다가오는 것들도 많았다.

하지만 역사를 처음부터 정독하면서 왜 그렇게 됐는지 충분히 이해가 됐다.

그는 역사를 읽으면서 자신이 사는 시대의 정신과 흐름을 깊게 이해했다.

지금의 무능한 왕으로 인해 발생하는 여러 부조리와 그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여러 사건 등을 예상할 수 있었다.

자포리자에게 경일이 전해 주는 책은 마나 연공법보다 훨씬 더 귀중했다.

그는 매일 매일 책을 읽으며 공부했고, 그의 식견은 점점 깊어져 갔다.

사미르의 볼이 추위로 빨갛게 달아올랐을 때쯤, 겨우 게시판 말뚝을 박을 땅을 팔 수 있었다.

얼어붙은 땅이 얼마나 단단한지, 곡괭이 자루가 몇 개가 부러졌고 구덩이에 불을 피워 녹여 가며 겨우 파냈다.

“어휴, 이게 무슨 고생이람.”

사미르는 추위로 떨어져 나갈 거 같은 볼을 장갑을 낀 두 손으로 감쌌다.

게시판이 세워지는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그는 글을 모르는 영지민들에게 글을 읽어 줄 사람을 게시판 옆에 세워 두고는 곧바로 근처 여관으로 들어가 몸을 녹였다.

‘옛날에는 이 자리만큼 좋은 자리가 없었는데…….’

처음 행정관 일을 맡았을 때는 그가 할 일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남는 시간에 소일거리나 하며 월급만 받으면 됐다.

하지만 비누가 본격적으로 유통되면서 달라졌다.

일거리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이다.

더군다나 모든 일을 직접 챙기라는 성주의 지엄한 명령에 모든 현안을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 했다.

가만히 앉아서 월급만 받던 때를 그리워하며 사미르는 몸을 녹였다.

하지만 언 몸을 제대로 녹이지도 못했는데, 또 다른 일을 해야 했다.

게시판을 보고 온 사람들이 여관으로 들이닥쳤다.

“행정관님, 여기서 일을 신청하면 된다고 해서 찾아왔습니다.”

허름한 옷을 여러 개 껴입은 남자가 뛰어왔는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그에게 돈을 벌 수 있는 일자리는 목숨만큼 소중했다.

“그래. 자네의 이름은 뭔가?”

“알튼입니다.”

시미르는 찾아오는 개개인에게 일에 대한 설명과 하루 일당, 출근일과 장소 등등을 상세하게 설명해야 했다.

지금까지 할 일이 없던 터라 자기 일을 도와줄 부하조차 한 명 없었다.

모든 일을 혼자 직접 다 해야 했다.

추위로 잘 움직이지 않는 혀를 부지런히 움직이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했던 말을 반복해야 했다.

두 번째 일자리는 대장장이 일이었다.

경일이 보내 준 고철을 제련해 무기와 갑옷을 만드는 데에는 많은 인력이 필요했다.

또한 새로운 제련법이 도입되면서 이 시대의 철을 이용해 기존의 것보다 한층 품질 높은 여러 물품을 만들어 냈다.

한층 단단해진 철이 끼칠 영향력은 절대 작지 않았다.

당장 다양한 철제 농기구는 농작물의 생산력을 늘리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대장간은 많은 영지민을 받아들였고, 아침부터 밤까지 망치질 소리가 끊기지 않았다.

세 번째의 생긴 일자리가 영지민들에게 가장 많은 일자리를 제공했다.

그건 바로 벽돌 공장이었다.

자포리자는 경일이 가르쳐 준 벽돌이 앞으로 엄청난 쓰임새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당장에 성벽을 쌓는다든지, 집을 짓는다든지 벽돌은 그 활용도가 어마어마했다.

흙을 구워 단단하게 만든 벽돌이 창고에 차곡차곡 쌓여 갔다.

외성의 중심 거리에 비누 거래에 참여했던 상단이 한창 건물을 짓고 있었다.

상단은 단지 비누만을 사 간 것이 아니었다.

알리사의 주민들이 스탄다비아로 이주해 오면서 이곳은 매력적인 시장으로 떠올랐다.

인구가 두 배 이상 늘어난 만큼, 그들이 필요한 물건은 당연히 많아질 터였다.

자포리자는 비누를 팔아 번 돈을 모두 영지의 발전을 위해 썼고, 시중에 돈이 돌기 시작했다.

돈 냄새에 민감한 상인들이 이런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왕권이 약해질수록 시중의 돈이 귀족들에게 집중되기 시작했다.

이는 왕국 전체 경제를 생각하면 그리 좋은 현상이 아니었다.

귀족과의 거래가 작은 것은 아니었지만, 전체 거래로 보면 일부분일 뿐이었다.

평민과의 거래 금액이 더 클 수밖에 없었다.

자연히 물품의 거래량이 줄어들었고, 그들도 어렵긴 마찬가지였다.

이런 와중에 새롭게 생긴 시장은 그만큼 매력적이었다.

기존에 워낙 못 살던 곳이라 물건의 수요가 넘쳐났다.

상단들이 건물을 지을 때 필요한 인력을 이곳의 사람들로 고용했다.

시장을 읽은 일부 주민들은 상인들이 묵을 여관과 술집을 지었다.

경제의 선순환이 일어났다.

분명 쥐 죽은 듯이 조용해야 할 스탄다비아의 겨울이 한창 바쁘게 돌아갔다.

움츠리기만 했던 스탄다비아가 활개를 펴기 시작했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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