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수로
자포리자는 한창 고민 중이었다.
봄이 성큼 다가온 만큼, 새롭게 준비해야 할 것이 많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영지민들이 먹고사는 문제였다.
스탄다비아에 건축 붐이 일어나면서 많은 영지민들이 일을 할 수 있었으나, 문제는 단기적인 일자리라는 점이었다.
앞으로도 꾸준히 일할 수 있는 일자리가 필요했다.
역시 가장 많은 사람이 일할 수 있는 건 농사였다.
왜 매년 농사가 흉년이었는지 이제는 자포리자도 이유를 알았다.
한 해도 쉬지 않고 같은 땅에 농사를 지어 지력이 메말라 가면서 수확량이 계속 줄어들었던 것이다.
이유를 알았으니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가장 간단하면서도 확실한 방법은 지력이 떨어진 땅을 쉬게 하는 것이었다.
정기적으로 퇴비를 주어 작물이 먹고살 수 있는 영양분이 가득한 땅으로 다시 만들면 됐다.
하지만 무작정 영지민들에게 농사를 짓지 말고 일 년을 보내라고 말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땅을 살리기 위해서는 영지민들에게 새롭게 농사를 지을 땅을 주어야 했다.
이건 몬스터를 몰아내 새롭게 확보한 땅을 이용하면 됐다.
얼핏 보기에는 문제가 해결된 듯 보였으나, 그에 못지않은 큰 문제가 하나 남아 있었다.
그건 바로 물이었다.
물이 부족해 농사를 짓기가 힘들었다.
스탄다비아는 새로운 물길이 간절히 필요했다.
어느 정도 생각을 마친 자포리자는 성의 주요 인사들을 모두 불렀다.
그의 집무실이 오래간만에 활기를 띠었다.
“모두 모인 거 같으니 회의를 시작하겠다.”
예정에 없던 회의라 다들 무슨 일인지 궁금해했다.
“회의의 안건은 우르비노 언덕에서 흐르는 개울의 물길을 이곳으로 돌리기 위한 수로 공사에 관한 건이다. 의견이 있으면 말해 보도록.”
자포리자의 말이 끝나자 분위기가 싸하게 식었다.
가신들은 당혹스러운지 서로 눈치만 봤다.
그의 말은 간단했으나, 이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실행할 엄두도 나지 않을 만큼의 큰일이었다.
우르비노 언덕까지 몬스터와 싸워 가며 전진하는 일만 해도 작은 일이 아니었다.
거기다가 수로 공사까지 병행한다는 것은 힘에 부칠 수밖에 없었다.
가장 곤란한 얼굴을 한 사람은 행정관 사미르였다.
“영주님, 지금도 벌여 놓은 일이 많은데, 이런 대규모 공사라니요. 비누로 인해 재정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수로를 만드는 공사는 왕국에서도 힘들어할 만큼 대공사인데, 우리 역량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사미르가 가장 먼저 반대 의견을 밝혔다.
“더군다나 우르비노 언덕에서 이곳까지 중간중간 지대가 낮은 곳들이 있습니다. 만약 물을 흐르게 하려면 그 넓은 곳을 모두 메꿔서 여기보다 지대를 높여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그 일을 하기에는 우리의 여력이 부족합니다. 모든 영지민이 동원된다고 해도 힘든 일입니다. 거기다가 덤벼드는 몬스터도 신경 써야 하지 않습니까. 영주님의 의욕이 넘치시는 건 알고 있으나, 이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입니다.”
사미르의 말에 모두 동의하는 듯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만약 땅을 메꾸지 않고 물을 흐르게 할 방법이 있다면 어떤가? 공사가 가능하겠는가?”
이 시대의 사람들은 압력에 대한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사이폰의 원리를 이용하면 굳이 땅을 메꿀 필요가 없었다.
한 번쯤은 통에 담긴 물을 다른 통으로 옮기기 위해 호스를 빨아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런 게 가능하다는 말입니까?”
사미르가 놀라 물었다.
“그래, 가능하다. 그것도 아주 쉽게.”
그래도 사미르의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만약 이 공사가 시작되면 가장 고생할 사람은 행정관인 자신일 게 빤했다.
사람들의 고용부터 공사 진행과 경비까지 이 모든 것을 혼자 해내야 했다.
“그래도 안 됩니다. 그만한 공사를 할 재정이 안 됩니다. 영주님이 영지민들에게 강제 노역을 시킬 건 아니지 않습니까.”
사미르는 여전히 반대 의견을 냈다.
“공사는 잘 모르지만, 우르비노 언덕을 탈환하는 건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동안 우리 병사들은 누구보다 강해졌고, 성벽이 없는 곳에서도 충분히 싸울 자신이 있습니다. 안 그래도 훈련 중인데, 이번에 실전을 경험할 수 있다면 오히려 잘된 일이죠.”
기사 칼튼은 찬성 의견을 냈다.
영지의 모든 병력을 책임지는 그는 자포리자의 말이라면 무조건 동의를 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이건 단순히 몬스터와 싸우는 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지금 영지의 재정이 어떤 상태인 줄 알고 그러는 거요? 현실에 맞게, 무리하지 않게 가야지. 무리하게 일을 추진하다가는 오히려 역풍을 맞을 수도 있습니다. 카스만 경 한 말씀해 주십시오. 제 말이 틀렸습니까?”
사미르가 카스만에게 도움을 청했다.
카스만은 전대의 인물로 왕국으로 따지면 재상과 같은 역할을 했다.
원로 격의 인물로 자포리자도 그의 혜안은 존중했다.
“사미르 행정관의 의견은 충분히 타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알리사와의 영지전이 끝나고 그곳의 영지민이 모두 이곳으로 이주했던 매우 큰일이 있었지 않습니까? 그때의 영지전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해도, 지금은 선택할 기회가 있습니다. 수로를 만든다는 것은 모든 영지민들이 바라는 일이긴 한데, 이건 알리사 영지민이 모두 이주한 것과도 같은 큰일이 될 것입니다. 비누가 재정적으로 큰 도움이 되고 있지만, 수로라는 대공사를 하기엔 아직은 역부족으로 보입니다.”
카스만까지 반대의 의견을 내비쳤다.
사실 자포리자도 이 계획이 얼마나 무모하고, 큰 공사인지 알고 있었다.
거의 10㎞나 되는 땅에 수로를 만들어야 하는 엄청난 대공사였다.
수로는 막연히 땅을 파서 물길을 낸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다.
물이 스며들지 않게 수로의 바닥과 벽에 최대한 돌을 촘촘히 깔아야 한다.
몬스터가 널린 곳에서 돌을 구하고 옮기는 것만 해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공사의 시일은 크게 늘어날 것이고, 아무리 병사들이 영지민들을 지켜 준다고 해도 사고가 터질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자포리자의 생각대로 땅을 메꾸지 않고 공사를 하려면 지대가 낮은 구간은 파이프를 제작해 땅속에 매설해야 했다.
그런 엄청난 길이의 파이프를 제작하는 것도 문제였다.
이곳엔 파이프를 만들 수 있는 재료는 철밖에 없었고, 그럼 엄청나게 많은 양의 철이 들어갈 것이다.
이건 스탄다비아가 지금껏 비누로 번 돈 모두를 털어 넣어도 불가능했다.
설사 만들었다고 해도 옮기는 것 또한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공사에는 많은 사람들이 동원될 것이고, 그들의 안전을 위해 몬스터의 습격을 막는 일도 쉽지 않을 것이다.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수로는 분명 스탄다비아를 살리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할 거라는 건,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동의했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자포리자에겐 경일이 있었다.
수로를 지을 수 있는 기술을 알려 준 것도 그였고, 해결책도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칼튼.”
“네, 영주님.”
“만약 수로 공사를 한다면 몬스터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몇 명의 병사가 필요하겠는가. 아~ 내가 말하는 공사는 완벽한 수로를 만드는 것이 아니야. 단지 삽으로 수로를 파는 것만 한다면 말이야.”
칼튼이 잠깐 생각을 하고 입을 열었다.
“일단 공사를 시작하기 전에 영지의 모든 병사를 데리고 가서 수로가 생길 길에 있는 몬스터를 한 번 쓸어버리겠습니다. 그런 뒤에 수로를 판다고 하면 병사 200명이면 방어가 가능할 거 같습니다. 대신 공사는 여러 군데에서 하는 것이 아닌 한 군데에서 집중적으로 하고, 다음 구역으로 넘어가는 식으로 해야 할 거 같습니다.”
“아주 좋군. 나도 자네의 의견에 동의하네.”
자포리자는 잠시 뜸을 들이고 입을 열었다.
“나는 대규모 인원을 동원해서 공사를 할 생각이 없다. 병사들만 데리고 공사를 할 생각이다.”
“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사미르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나의 충성스러운 병사들만으로 수로 공사를 진행할 생각이다. 200명의 병사가 경비를 서고, 나머지 병사는 공사를 진행한다. 그리고 영지 내의 공사는 행정관이 영지민을 동원해서 하는 거로 하지. 물이 지나갈 자리를 파기만 하는 거니,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거야. 이 정도면 우리의 힘으로 충분히 수로를 만들 수 있을 거 같지 않은가?”
“그냥 땅만 파 놓으라고요?”
사미르가 뜨악한 표정으로 말했다.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말이니, 그가 저런 표정이 되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칼튼만은 달랐다.
그는 이미 자포리자의 신기한 능력을 가장 가까이서 본 사람이었다.
지금까지 본 적도 없는 강철을 구해 온 영주였다.
몬스터에게 죽어 간 수많은 동료와 부하들의 복수를 하게 해 준 영주였다.
그는 이번에도 기적을 보여 줄 거라 믿었다.
결국, 회의는 자포리자의 의견대로 끝이 났다.
그는 지금껏 스탄다비아를 다스린 영주 중에 가장 많은 영지민의 지지를 받았으며, 지금까지 보여 준 것 또한 보통 비범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말한 계획에 의아한 점이 많았지만, 믿고 따를 수밖에 없었다.
스탄다비아의 병사는 현재 300명으로 늘어났다.
알리사와 영지전을 할 때의 병력과 비교하면 두 배로 늘어나 있었다.
그만큼 스탄다비아가 빠르게 강해지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병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들었다.
3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의 월급과 함께 그들의 장비를 지원하고, 이런저런 부대비용까지 많은 돈이 들 수밖에 없었다.
가난한 영지민이 내는 세금으로 병사를 유지하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병사를 유지하는 데에 드는 돈 대부분은 자포리자가 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칼튼은 자포리자의 명령대로 영지를 지킬 일부 병력을 제외한 모든 병력의 출전을 준비했다.
병사들의 눈빛에 생기가 넘쳤다.
그들의 표정에 투지가 드러났다.
처음이었다.
지금까지는 자신들은 수동적인 입장일 수밖에 없었다.
오로지 살아남는 것에 온 전력을 집중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토록 바라던 능동적인 입장으로 돌아섰다.
이제는 자신들이 침략자가 되어 앞으로 나아가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자포리자가 정렬한 병사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와아아아아아아!”
“자포리자 보일!”
“자포리자 보일!”
“자포리자 보일!”
단단한 힘이 느껴지는 병사들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사열대 위로 올라간 자포리자가 손을 들자 순식간에 함성이 잦아들었다.
군기가 바짝 든 모습에 자포리자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스탄다비아의 창과 방패이다. 지금부터는 창이 되어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오늘이 바로 스탄다비아의 위대한 한 걸음을 내딛는 첫 날이다. 나를 믿고 위대한 역사를 시작하자!”
자포리자가 말에 올랐다.
그의 뒤로 그의 기사들과 병사들이 나열했다.
하나같이 형형한 눈빛으로 자포리자의 든든한 등을 바라보며 그 뒤를 따랐다.
반나절을 몬스터와 싸우며 행군한 그들은 우르비노 언덕 초입에 도착했다.
병사들의 투지가 하늘을 찔렀다.
행군하는 동안 고블린이 습격을 해 왔다.
지금까지 성벽 위에서만 싸워온 터라 처음 고블린의 습격을 받았을 때 병사들은 긴장했다.
개활지에서의 몬스터와의 실전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금방 적응해 나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쌓아 온 경험과 실력은 그들을 배신하지 않았다.
어느 순간, 긴장한 자신들이 우스울 정도로 병사들은 고블린을 가볍게 죽였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