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전투
병사들이 정비할 시간을 가지는 동안, 우르비노 언덕을 정찰할 수색조가 출발했다.
병과 중에 가장 위험한 수색조의 조장을 맞고 있는 이는 기사 라우터였다.
라우터는 비록 적의 기사였지만, 진정한 기사도를 아는 남자였다.
그의 기사도 정신에 감복한 자포리자는 그에게 자유로운 삶을 주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인정한 주군과 함께하는 기사로의 삶을 원했고, 자진해서 자포리자의 휘하로 들어왔다.
그는 가장 위험한 수색조에 지원했다.
자신의 진심을 보여 주기 가장 좋은 자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생각을 하는 이가 한 명 더 있었다.
탄두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오직 강해지기 위해서 모든 걸 바친 남자였다.
무기의 열세로 자신보다 약한 스탄다비아의 병사에게 지자, 그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죽음은 두렵지 않았으나, 자신보다 약한 이에게 죽는 건 용납이 되지 않았다.
평생을 모운 돈으로 검을 살 만큼 그는 검을 사랑한 남자였다.
그런 이에게 강철 검은 충격, 그 자체였다.
이에 그는 더 강해지기 위해 스탄다비아에 투항했다.
자신의 진심을 보이고 싶어 그는 누구도 꺼리는 수색조에 병사로서 가장 먼저 지원했다.
자포리자는 이들을 차별하지 않았다.
라우터와 탄두스에게도 강철 검을 내렸으며 마나 연공법을 알려 주었다.
이들은 누구보다 감격했으며 자포리자에게 목숨을 바칠 것을 다시 한번 맹세했다.
알리사 지방과 달리 매일 벌어지는 몬스터와의 전투는 그들의 식은 피를 다시 뜨겁게 데워 주었다.
언제 어디서나 가장 앞장서서 싸웠고, 위험한 임무에는 가장 먼저 손을 들었다.
그들의 진심이 통하자, 사람들은 더 이상 그들의 출신을 따지지 않고 가족으로 받아들였다.
수색조에서 만난 라우터 기사와 탄두스는 서로 합이 잘 맞았다.
정찰을 끝낸 그들은 즉시 자포리자에 보고했다.
“영주님, 여기서 1㎞ 떨어진 곳에 고블린의 부락이 있는 거로 파악됐습니다. 그 수는 대략 이천 정도로 보이며 이들이 우르비노 언덕의 진정한 주인으로 보입니다.”
수색조의 보고를 들은 자포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머릿속에 여러 전략이 떠올랐다.
입구가 좁은 골짜기에서 적을 맞아 싸울 수도 있었고, 야음을 틈타 습격도 가능했다.
그는 어떤 싸움도 자신이 있었다.
이미 자신의 병사들은 강병으로 다시 태어났고, 이 전투에서 진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어떤 싸움이 병사들의 성장에 도움이 될까 그것만 생각했다.
자포리자가 택한 것은 힘과 힘의 싸움이었다.
습격이 아닌 정면에서 서로가 가진 모든 힘을 총동원해 부딪치는 진정한 싸움을 택했다.
“우리는 개활지에서 싸운다.”
자포리자가 칼튼에게 말했다.
“영주님, 쉬운 싸움을 두고 굳이 어려운 싸움을 할 이유가 있습니까?”
칼튼의 의문은 매우 당연했다.
전쟁의 목적은 승리였고, 자신의 피해는 최소화하고 적에게 최대한의 피해를 주는 것이다.
전쟁에서 정당하다느니, 비겁하다는 등의 말은 필요가 없었다.
오로지 승리와 패배가 있을 뿐이다.
“칼튼, 그대의 말은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지금은 공격으로 돌아선 뒤에 하는 첫 싸움이고, 이 싸움은 병사들의 뇌리에 영원히 각인될 것이다. 자신들이 얼마나 강한지 아직 제대로 경험해보지 못한 병사들은, 이 싸움으로 자신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자포리자의 생각을 들은 칼튼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얼마간의 휴식을 취한 스탄다비아의 군대가 고블린의 부락으로 행군을 시작했다.
고블린의 부락은 개활지의 한쪽 끝에 위치에 있었다.
흉측한 고블린과 달리 이곳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무릎까지 올라오는 이름 모를 풀이 가득 자라고 있었다.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이슬 맺힌 잎, 색색으로 만발한 온갖 이름 모를 꽃에서 유혹하는 듯한 향긋한 냄새가 났다.
인간의 군대를 발견한 고블린이 괴성을 질렀다.
조용했던 고블린의 부락이 불길에 휩싸인 듯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그 즉시, 엄청난 숫자의 고블린이 각자의 무기를 들고 뛰쳐나왔다.
“#?*@#[email protected]%!*&*%@!”
고블린 중 유독 머리 하나가 더 큰 고블린이 알 수 없는 소리로 연신 고함을 질러 댔다.
하이 톤의 유리를 긁는 듯한 소리가 고막을 연신 찔렀다.
그 소리에 반응하듯 무질서하던 고블린들이 진형을 갖추기 시작했다.
“고블린 추장이다!”
병사 중 한 명이 정체를 알아보고 소리를 질렀다.
고블린 추장은 생각지도 못한 변수였다.
흉포한 공격성밖에 없는 모래와 같은 고블린들을 뭉치게 만들 수 있는 존재.
그의 존재 여부에 따라 고블린들의 전력이 완전히 달라졌다.
불을 향해 무작정 달려드는 불나방 같은 고블린들이 고블린 추장의 외침에 달리기를 멈추고 모여들었다.
인간에 대한 적대감과 먹이에 대한 본능만이 존재하는 고블린은 그리 무서운 존재가 아니었다.
본능에 이끌린 단순한 공격은 숙련된 병사라면 누구나 쉽게 막을 수 있었다.
협동이란 것이 없이 그저 혼자 무조건 덤벼드는 공격이 다였다.
자신의 공격이 방해되면 비록 같은 동족이라도 이빨을 드러낼 정도였다.
하지만 이런 고블린을 통제하는 존재가 나타나면 그들은 달라진다.
단순하고 무질서한 공격이 복잡하고 효율적인 공격으로 바뀌었다.
하나의 집단으로 변모한 고블린은 인간의 군대와 다를 바 없었다.
자포리자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실력에 대한 믿음이 있었으며, 병사들의 실력 또한 믿었다.
신과 같은 경일의 존재는 그에게 무한한 힘을 주었고, 그가 내려 준 미스릴은 그에게 용기를 주었다.
겨우 고블린 추장 한 마리에 당황하기엔 자존심이 너무 상했다.
앞으로 되찾아야 하는 비옥한 조상들의 땅에는 더욱 강한 몬스터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고블린 추장이 있든 없든 간에 이 정도는 가볍게 씹어 먹을 생각이었다.
자포리자가 고블린들이 어설프게나마 대형을 짜는 모습을 보고 오른손을 번쩍 들었다.
그와 함께 병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약속된 대형을 갖추었다.
한 명의 병사도 머뭇거림 없이 자신의 자리를 찾아갔다.
얼마나 많은 훈련이 이루어졌는지, 그 움직임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고블린 군대와 스탄다비아 군대의 대치가 시작됐다.
개활지에 불어오는 바람에 작은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이천 마리가 넘는 고블린들이 무서운 눈초리로 병사들을 노려봤다.
그들이 내뿜는 흉악한 살기가 개활지를 뒤덮어 갈수록 공기가 차갑게 식어 갔다.
아름답게 피어난 이름 모를 들꽃이 살벌한 전장의 공기에 고개를 숙였다.
고블린 추장을 중심으로 뭉친 고블린들이 거친 기세를 내뿜으며 저마다 알 수 없는 위협적인 말을 뱉어 냈다.
생각지도 못한 고블린 추장의 등장과 엄청난 수의 고블린을 보자, 병사들의 마음에 작은 소요가 일었다.
지금껏 고블린과 수없는 전투를 치러 왔지만, 이렇게 많은 고블린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살육에 미쳐 날뛰는 고블린의 숫자가 자신들보다 무려 여덟 배나 많았다.
하지만 담대하게 서 있는 자포리자의 든든한 등을 보고 있노라면, 왠지 모르게 긴장한 자신이 바보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사들의 사기가 살아나며 강한 기세를 피워 올렸다.
고블린의 살기와 병사의 기세가 맞부딪치며 차갑게 식었던 전장의 공기가 불타올랐다.
“@#%@ @#%$? @!”
고블린 추장의 귀를 찢는 듯한 외침에 고블린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방패병 앞으로!
자포리자는 지체하지 않고 지시를 내렸다.
방패병이 대열의 앞으로 빠르게 달려와 위치했다.
그 순간, 수백 개의 돌이 날아왔다.
“방패 들어!”
따땅땅땅따땅땅땅!
방패와 돌이 부딪치는 요란한 소리가 났다.
나무에 철판을 입힌 방패는 돌 정도는 가볍게 튕겨 냈다.
“*@%&*!”
고블린 추장이 알 수 없는 말로 크게 소리를 질렀다.
목소리에 짜증이 잔뜩 묻어 있었다.
기껏 준비했던 수가 물거품으로 돌아가자 화를 참지 못하고 들고 있던 몽둥이로 애꿎은 땅을 내려쳤다.
“1번 대형으로!”
자포리자의 지시에 병사들이 빠르게 움직여 그를 중심으로 화살촉 모양의 대형을 완성했다.
“@#^$? &*$#? @#%!”
고블린 추장의 외침에 이천 마리의 고블린들이 한꺼번에 뛰어나갔다.
자포리자가 롱소드를 뽑았다.
그의 롱소드에 뿌연 오러가 타올랐다.
“모두 공격하라.”
그는 롱소드를 앞으로 겨누며 힘 있게 소리쳤다.
이천 마리의 고블린들을 향해 스탄다비아의 군대도 뛰어나갔다.
앞장선 자포리자의 롱소드에서 타오르는 오러는 걸리는 것은 무엇이든 베어 버리겠다는 확실한 의지를 내뿜었다.
인간의 군대와 고블린의 군대가 넓은 개활지에서 맞부딪쳤다.
대열의 꼭짓점에 위치한 자포리자가 가장 먼저 고블린과 맞닥뜨렸다.
150㎝도 되지 않는 고블린 여러 마리가 장신의 자포리자에게 날듯이 달려들었다.
자포리자의 롱소드가 초승달을 그렸다.
서걱!
손에서 작은 저항감이 느껴졌다.
자포리자는 저항 따위는 가볍게 무시하고 더 강한 힘으로 롱소드를 휘둘렀다.
그의 긴 팔과 일반적인 규격을 벗어난 긴 길이의 롱소드가 만나 전방 3미터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베어 버렸다.
가공할 공격력이었다.
한 번의 휘두름에 스무 마리의 고블린이 잘려 나갔다.
고블린의 진한 피비린내가 본격적인 전투의 시작을 알렸다.
그의 바로 뒤 양옆으로 칼튼과 블라도가 든든하게 자포리자의 뒤를 받치고 있었다.
쏟아지는 고블린들을 향해 둘은 맹공을 퍼부었다.
그들의 숙련된 창술은 조금의 군더더기 없이 일격에 고블린의 머리를 꿰뚫었다.
특히 칼튼의 귀신 같은 창술은 마치 뱀이 입을 크게 벌리고 몸을 날려 사냥감의 머리에 독니를 박아 넣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한 마리도 남김없이 모든 고블린들을 죽여라.”
자포리자의 외침이 전장을 쩌렁쩌렁 울렸다.
“와아아아아아!”
“캬아아아아악!”
인간의 함성과 고블린의 함성이 조용하던 개활지를 뜨겁게 달구며 전투가 시작되었다.
자포리자는 엄청난 기세로 고블린 군대의 한 점을 뚫고 전진했다.
“이야얍!”
우렁찬 기합을 내지르며 자포리자는 파공성을 뿌리며 롱소드를 휘둘렀다.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롱소드에 고블린은 믹서기 안의 고기처럼 그대로 갈려 나갔다.
“$%$? &$#? #@@$?? #%$!”
고블린 추장이 전장이 떠나가라 소리치자, 고블린들이 진형을 바꾸어 병사들을 둘러쌌다.
자포리자가 달리는 방향으로 더욱 두터운 고블린의 벽이 세워지고, 이천 마리의 고블린들이 병사들을 포위하는 형태가 되었다.
만약 자포리자의 걸음이 고블린들의 저항으로 멈춰진다면 포위당한 병사들이 위험할 터.
하지만 자포리자는 멈추지 않았다.
강하게 지면을 박찰 때마다 땅이 움푹움푹 파였다.
그는 이 시대의 사람들과 다르게 엄청난 덩치를 자랑했다.
자포리자의 강한 힘에 고블린들은 속절없이 뒤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눈이 파랗게 불타올랐다.
자신의 길을 막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는 깨부수겠다고 분명 말하고 있었다.
그는 앞으로 달리며 롱소드의 사정거리에 걸리는 모든 것을 벴다.
스탄다비아의 군대는 하나의 드릴이 되어 고블린이라는 강력한 벽을 사정없이 꿰뚫었다.
고블린들의 잘린 신체가 먼지처럼 비산했다.
자포리자를 위시한 그의 기사와 병사들은 다가오는 모든 고블린을 죽였다.
스탄다비아 군대의 인정사정없는 공격이 펼쳐졌다.
“케이에에옉!”
“카라아아악!”
“그르르!”
고블린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전장의 공기가 후끈하게 달아올랐다.
자포리자가 달려가는 길을 고블린들이 아무리 두껍게 벽을 세워 보지만, 전진을 막기엔 그는 너무 강했다.
고블린의 군대가 홍해가 갈라지듯 완전히 반으로 쪼개졌고, 자포리자와 병사들이 지나간 길 위로 고블린들의 시체와 피로 이루어진 기다란 길이 생겼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