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마나의 이해
“키아아아악~”
고블린들이 분한 듯 악에 받친 소리를 질러 댔다.
“우리는 강하다. 나를 믿고 지금껏 싸워 온 자신을 믿어라! 우리의 전진을 막는 고블린을 모두 도륙하라!”
고블린의 포위를 순수한 힘으로 뚫고 나간 자포리자가 병사들을 향해 소리 질렀다.
단 한 번의 격돌이었지만, 자신들이 얼마나 강한지 병사들은 깨달았다.
피가 뜨겁게 끓어올랐다.
자포리자가 다시 한번 고블린 군대의 한 점을 뚫고 들어갔다.
그 뒤를 따라 기사와 병사들이 달렸다.
학살이 시작되었다.
수많은 검이 고블린의 몸을 베었고, 수많은 창이 고블린의 몸을 꿰뚫었다.
전장에서 들리는 것은 오직 고블린들의 비명뿐이었다.
비명이 커질수록 병사들은 힘이 났다.
고블린의 수가 아무리 많아도 이곳의 포식자는 자신들이란 것을 깨달았다.
자포리자는 크게 원을 그리듯 돌아 방향을 바꾸어 또 한 번 고블린 군대의 한 점을 뚫고 들어갔다.
“#@#&? $%#? &*#$? #%#@$!”
고블린 추장의 즉각적인 지시가 내려졌다.
무리 중 유난히 덩치가 큰 고블린 정예가 달려오는 자포리자의 앞을 가로막았다.
풍기는 기세가 제법 만만찮았다.
“캬아아아아악!”
자포리자를 향해 고블린들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힘껏 치켜든 녹슨 칼은 단숨에 자포리자의 몸을 반으로 갈라 버리겠다는 흉악한 의지를 내뿜었다.
태양을 등지고 뛰어오른 고블린에 자포리자의 시야가 순간 어두워졌다.
“흥!”
자포리자는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그와 동시에 그의 롱소드가 공기를 갈랐다.
파앗!
공기를 부수듯이 날아가던 롱소드는 공중에 뜬 고블린 정예의 몸을 한순간에 반으로 갈라 버렸다.
그야말로 추풍낙엽이었다.
하늘에서 고블린의 피가 비처럼 이름 없는 들꽃에 내려앉았다.
냄새나는 피로 물든 들꽃이 몸을 애처롭게 떨어 댔다.
고블린 정예는 자포리자의 발걸음을 조금도 잡지 못했다.
자포리자는 처음과 같은 속도로 고블린 무리를 뚫고 지나갔다.
그럴 때마다 추장의 잔뜩 화난 목소리가 들렸다.
인간과 몬스터의 순수한 힘과 힘의 싸움이 이어졌다.
스탄다비아의 군대는 강력한 힘으로 고블린의 밀집 대형을 뚫어 냈다.
고블린 무리를 뚫고 나올 때마다 고블린의 숫자가 확확 줄어 갔다.
마나 연공법으로 몸속에 마나를 쌓은 병사들은 강했다.
그들이 들고 있는 강철의 칼은 고블린의 무딘 칼 정도는 가볍게 잘라 냈다.
미처 막지 못한 고블린의 공격은 강철로 만든 플레이트 아머가 막아 주었다.
앞서 달리는 자포리자의 빛나는 실력을 보는 것만으로도 병사들의 기세가 올라갔다.
세 번의 공방이 끝나고, 자포리자는 개활지의 한 곳에서 멈춰 섰다.
그의 등 뒤로 병사들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밝았다.
자신들은 야수였다.
고블린이라는 먹이를 마음껏 유린하는 흉포한 야생의 사나운 짐승이었다.
고블린 추장의 지시로 모래알 같이 흩어졌던 고블린들이 단단하게 뭉치긴 했으나, 자포리자의 파괴력을 당할 수는 없었다.
고블린들이 목숨을 등한시하며 죽을힘을 다해 공격을 퍼부어 본들 쥐새끼들이 날뛰는 사자를 잡아 둘 수는 없었다.
자포리자는 군대의 대형을 상황에 맞게 변형시켜 가며 단지 뭉쳐 있기만 한 고블린의 군대를 서서히 잡아먹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위압감을 주던 이천 마리의 고블린들이 이제는 너무나 하찮게 보였다.
싸움의 막바지가 다가왔다.
이제는 스탄다비아의 군대에 포위될 만큼 고블린의 수는 줄어들어 있었다.
“캬아아아아악!”
고블린 추장의 비명을 끝으로 치열했던 전투가 모두 끝이 났다.
병사들은 개활지에서 하는 첫 전투였지만, 자포리자의 명령에 따라 훌륭하게 전투를 치러 냈다.
단지 성벽 위에서 방어만 하던 병사들에게 개활지에서의 순수한 힘과 힘이 맞부딪힌 전투의 승리는 엄청난 희열로 다가왔다.
* * *
경일은 던전에서 한창 수련 중이었다.
마나 연공법은 자포리자와 그의 병사들에게만 도움이 된 것이 아니었다.
경일에게도 새로운 세계를 열어 주었다.
마나가 체내에 쌓이는 것이 느껴졌다.
레벨이 오를 때마다 늘어나던 마나가 마나 연공법을 수련함으로써 진정한 힘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건 헌터들의 패러다임을 깨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헌터들은 마나에 대한 이해도가 전혀 없었다.
레벨이 높아지면 자연히 늘어나는 것으로 인식했다.
헌터로 각성하고, 신체 능력이 늘어나는 이유가 마나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마나를 운용한다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던전 금속은 마나와의 친화력이 높았고, 헌터들은 별다른 노력 없이 어느 정도의 마나를 자연스럽게 자신의 무기에 실을 수 있었다.
이것이 현존하는 헌터들의 한계였다.
경일은 마나를 이해하게 되면서 같은 양의 마나로 더 많은 힘을 낼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무기에 더 많은 마나를 주입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헌터의 근원이 마나란 것을 완벽하게 이해했다.
꾸준한 수련으로 그는 결국에 마나를 깨우쳤다.
이건 스탄다비아에서 기사가 될 수 있는 최소한의 자격을 갖췄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였다.
몸속의 마나가 꿈틀거렸다.
몸속을 따라 유영하던 마나가 점차 아랫배에 모여들었다.
마나가 모여들어 회오리처럼 회전하더니, 어느 순간부터 단단하게 뭉치기 시작했다.
단전이 생성된 것이었다.
마나로 이루어진 심장이 생긴 것과 같았다.
하단전이 생김으로 심장에 피를 공급하듯이 마나를 온몸에 공급했다.
피와 마나가 다른 점은 피를 느끼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마나는 느끼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의지까지 실을 수 있었다.
이것은 경일의 생각대로 몸속의 마나를 운용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자신의 검에 단전에서 뿜어 나오는 마나를 밀어 넣었다.
그 순간, 서서히 검에 오러가 맺혔다.
지구인 최초로 오러 유저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스킬 마나의 이해가 생성됩니다.]
그 순간. 새로운 스킬이 생성됐다.
경일은 상태창을 열었다.
<상태창>
레벨 29
힘 (287/290)
민첩 (293/295)
체력 (292/295)
마나 (295/310)
[스킬]
식물 찾기 (Lv.2)
스탄다비아의 현황 관찰(Lv.3)
인벤토리
사람 찾기 (Lv.2)
광산 관리 (Lv.2)
마나의 이해 (Lv.1)
[특성]
스칸다비아와의 동조가 이루어짐.
어느새 레벨이 29가 되어 있었다.
다른 스탯과 달리 마나의 스탯이 가장 높은 건, 마나 연공법의 효과 때문이었다.
신체 기간 중 가장 많은 마나를 필요로 하는 곳은 바로 뇌였다.
경일은 자연스럽게 많은 마나를 뇌로 인도했다.
뇌로 흘러간 마나로 인해 감각이 한층 예민해졌다.
새로운 감각 즉, 육감이 열렸다.
집중하면 자신을 중심으로 한 일정 공간 안에서의 모든 움직임을 느낄 수 있었다.
상대의 기세를 더욱 세세하게 읽을 수 있었으며, 어느 정도 다음 수를 예상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경일은 남들보다 세 배의 시간을 가지고 있었지만, 어느 누구보다 바쁜 나날을 보냈다.
일주일의 한 번 있는 정기 휴일이 오히려 가장 바쁜 날이었다.
지금 급하게 사야 하는 건, 스탄다비아의 수로 공사에 필요한 자재였다.
자포리자는 영지의 발전을 위해 수로를 만들고 싶어 했고, 그에 맞추어 공사 방법을 알려 준 건 경일이었다.
최대한 미스릴의 판매를 자제하고 있지만, 돈은 꾸준히 필요했기에 가끔은 판매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 새로 산 트럭을 몰고 암시장으로 향했다.
“이거, 매번 새로운 가발이랑 안경을 쓰니, 무슨 스파이라도 된 기분인데?”
조금이라도 자신의 노출을 최소화하기 위해 한 번 이용한 가발과 안경, 옷 등은 모두 버렸다.
평소와 다르게 머리 중간에 가르마를 타고, 깔끔한 뿔테안경과 함께 검은색 슬랙스에 흰색 맨투맨을 입었다.
길에서 볼 수 있는 가장 흔한 스타일이라 그런지, 그를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경일은 오늘도 새롭게 암거래를 할 가게를 찾았다.
기존에 한 번 거래 한 가게를 이용하면 편하겠지만, 굳이 자신의 꼬리를 남겨 두고 싶지 않았다.
암시장을 자주 이용하다 보니, 이제는 어느 정도 보는 눈이 생겼다.
몇 번 시장을 돌아다니다 보면 암거래를 하는 가게라는 느낌이 왔다.
느낌이 다 맞는 것은 아니었지만 뭐, 틀려도 별 상관은 없었다.
거래하지 않으면 그만이었으니까.
경일이 들어선 곳은 암시장의 구석에 위치한 가게였다.
가게 위치상 장사가 그렇게 잘될 거 같지는 않았다.
“어서 오세요. 어떤 걸 찾으세요?”
20대 초반의 점원이 인사를 하며 다가왔다.
“음~ 글쎄요. 일단 좀 둘러볼게요.”
경일은 점원의 말을 얼버무리고 대충 이것저것 진열된 물건을 살폈다.
“이런 건 얼마나 해요?”
“아, 네, 그건 천칠백만 원입니다. 미스릴이 100g 섞인 검으로, 최고의 대장장이가 만들었습니다. 대장장이의 실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굳이 말 안 해도 잘 아실 거고. 다른 제품과 비교해도 마나 친화력이나, 수명이 확실히 긴 제품입니다.”
“아, 네.’
경일은 고개를 대충 끄떡였다.
점원의 열성적인 태도에 비해 그의 태도는 영 걸쩍지근했다.
사실 점원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최고의 대장장이라고 하지만, 만든 대장장이의 보증서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무기나 갑옷을 만드는 대장장이는 많았고, 알려진 대장장이가 아니면 실력을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다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하는 게 속 편했다.
사람마다 무기를 쓰는 스타일이 다르고, 관리도 다를 뿐더러 마나의 성질도 약간씩 달랐다.
쓰는 사람에 따라 무기의 수명이 결정되는 측면도 있으니, 최고의 대장장이가 만든 것인지 아닌지는 점원의 말을 믿고 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럼 이런 걸 되팔면 얼마나 받을 수 있을까요?”
경일의 뜬금없는 질문에 점원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만약 암거래하는 가게가 아니면 점원이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런 경우는 정상적인 가게로 판단했다.
이번처럼 점원이 분위기가 미묘하게 달라지면 암거래를 하는 가게일 확률이 높았다.
문제는 이들이 자신을 의심하냐, 안 하냐의 차이였다.
점원은 혹시나 경찰일 수도 있으니 나름 신중하게 경일을 살피는 모습이었다.
“글쎄요, 손님. 저희는 중고품을 판매하는 가게가 아니라서 정확한 가격은 모르겠습니다.”
“그래요? 그럼 이걸 어디서 팔아야 하는 거지…….”
경일이 약간 급한 표정을 지으며 초보티를 내고 말을 흘렸다.
“손님, 뭘 파시려고요? 이건 그냥 제 개인적인 호기심입니다.”
점원의 말이 웃겼다.
이건 누가 봐도 암거래를 하는 것을 암시하면서도 혹시나 모를 단속에 대비하는 모습이었다.
더군다나 점원은 아주 은밀한 어조로 말했다.
경일이 밑밥을 던졌다.
“순수 미스릴을 팔고 싶은데요.”
순수 미스릴이라는 말을 들은 점원의 눈빛이 살짝 빛이 났다.
무기와 방어구를 만드는데 있어 최고의 재료인 미스릴은 언제 어디서나 대접을 받았다.
“저기, 근데 얼마나 가지고 계시나요?”
경일은 점원이 계속 관심을 가지는 모습에 오늘 거래는 별로 힘들지 않을 거 같았다.
“글쎄요. 조금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만, 그럼 전 바빠서 이만.”
경일도 점원처럼 냄새를 피우고 가게를 벗어나려는 시늉을 했다.
이제 공은 점원에게 넘어갔다.
점원은 경일이 의심스러우면 나가는 그를 잡지 않을 것이고, 반대의 경우라면 잡을 것이다.
“손님 잠시만요. 저를 따라오시죠.”
경일은 듣고 싶은 말을 들었다.
점원도 이 동네 단속반의 정보는 모두 알고 있으니, 경일이 경찰이 아니라고 판단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더군다나 미스릴을 팔러 온 손님을 놓치기는 아까웠다.
이러면 거의 거래가 이루어졌다고 보는 게 맞았다.
첫 거래다 보니 상대가 가격을 후려치는 경우가 많았는데, 경일은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새로운 가게를 찾으려고 발품을 파는 것보다 돈을 좀 적게 받더라도 거래를 하는 편이 나았다.
가게 사장과 거래를 마치고 나온 경일의 가방이 지폐의 무게 때문에 묵직했다.
다른 곳보다 싼 가격으로 팔긴 했지만, 500g의 미스릴을 판 돈은 작은 액수가 아니었다.
이 정도면 오늘 필요한 물품을 모두 사고도 남을 정도였다.
“오늘은 운이 좋은걸. 생각보다 미스릴을 쉽게 팔았어. 매번 새로운 가게를 찾고 거래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다른 날도 오늘 같았으면 좋겠다. 덕분에 시간도 많이 남고.”
경일은 밝아진 표정으로 가게를 떠났다.
몇 분 뒤, 점원이 담배를 피운다는 핑계로 가게를 나왔다.
점원은 저 멀리 걸어가는 경일의 뒷모습을 의미심장한 눈길로 뚫어지게 쳐다봤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