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감사합니다
점원은 가게 옆의 골목으로 들어가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는 담배 연기를 한 번 내뿜고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 네, 형님. 저 석규입니다.”
점원은 핸드폰을 귀에 대고 굽신거렸다.
“저번에 미스릴을 팔러 오는 사람이 있으면 연락하라고 해서 전화드렸습니다. 아, 네네, 형님. 180㎝ 정도의 키에 검정 바지에 흰색 맨투맨을 입었습니다. 밝은 갈색의 뿔테안경을 쓰고 단정한 헤어스타일에 중간 가르마를 탄 남자였습니다. 말투가 조금 어눌한 게, 거래를 많이 해 본 것 같지는 않은데. 아, 네. 그냥 그렇게 보여서… 죄송합니다. 네, 네, 네, 알겠습니다.”
점원은 전화를 끊고는 인상을 썼다.
“젠장, 연락해 주면 고마운 줄 알아야지. 네가 뭔데 사람을 판단하냐고, 도리어 나에게 화를 내고 욕을 하다니. 개새끼. 내가 다시는 연락하는가 봐라.”
점원은 분한 얼굴로 몇 번 씩씩거리고는 담배꽁초를 발로 여러 번 짓밟은 뒤, 가게로 돌아갔다.
경일이 운이 좋아 미스릴을 쉽게 판 것이 아니었다.
점원은 누군가에게 미스릴을 팔러 온 사람을 보는 즉시 연락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는 경일이 미스릴을 팔러 왔다는 소리에 곧바로 경찰이 아님을 알아차렸고, 그래서 거래를 진행한 것이었다.
누군가가 경일을 은밀히 찾고 있던 것이다.
경일은 늘 하던 대로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서 옷을 갈아입은 뒤 가발을 쓰고 안경을 다른 것으로 바꾸어 꼈다.
마지막으로 모자까지 쓰고 나니 조금 전과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일련의 무리가 시장을 바쁘게 뛰어다니는 것이 보였으나, 설마 자신을 찾는 사람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시장을 빠져나와 필요한 물건을 사기 위해 트럭을 타고 떠났다.
다음 날 아침, 경일은 기분 좋게 분식점 문을 열었다.
“햇살도 좋고, 구름 한 점 없구나. 이 동네가 못살긴 해도 깨끗한 공기 하나는 남부럽지 않다니까.”
빠르게 재료 준비를 마치고, 떡볶이와 어묵탕을 준비했다.
그리고 기름 솥에 새 기름을 붓고 기본적인 준비를 모두 끝냈다.
“사장님, 안녕하세요.”
손주아가 출근을 하며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주아 씨, 어서 와. 아침은 먹었어?”
“아니요. 여기서 맛있는 거 먹으려고 굶고 왔어요.”
손주아가 웃으며 얘기했다.
“음~ 아침은 뭘 해 주지?”
“사장님, 새로운 메뉴로 해 주시려고요?”
손주아가 기대감을 한껏 드러냈다.
“매번 먹던 것만 먹으면 재미가 없잖아. 그래, 오늘은 만둣국을 끓여 줄게. 나도 아직 밥을 안 먹었으니 든든하게 먹고 일하자고.”
경일은 주방으로 가서 모든 음식의 베이스인 민물 새우 가루부터 끓는 물에 넣었다.
민물 새우 가루가 물과 섞이며 벌써부터 맛있는 냄새를 풍겨 왔다.
“역시 민물 새우 가루만 넣는 것만으로 음식의 70%는 완성된 것과 같다니까. 나한테는 정말 신의 가루야.”
말린 밴댕이도 몇 마리 넣어 육수의 감칠맛을 더욱 끌어올렸다.
거기에 고기가 듬뿍 들어간 고기만두와 떡도 같이 넣었다.
“주아 씨, 청양 고추도 넣을까?”
“네. 시원한 국물에 칼칼한 맛이 섞이면 더 맛있죠.”
경일은 파와 양파, 간 마늘과 함께 청양 고추도 썰어 넣었다.
채소의 맛이 국물에 충분히 우러났을 때, 풀어 놓은 달걀을 붓고 불을 껐다.
마지막으로 참기름과 후추를 살짝 뿌리고 요리를 마무리했다.
순식간에 맑은 육수의 만둣국이 완성됐다.
손주아가 냉장고에서 밑반찬을 꺼내 상을 차렸다.
“사장님, 냄새가 너무 좋아요.”
“어서 먹어 봐. 처음 끓인 거라 맛있는지는 잘 모르겠네.”
“네.”
손주아가 후후, 불어 가며 국물을 입안에 넣었다.
그리고 이내 그녀의 눈이 살짝 반달로 휘어졌다.
“맛있어요! 국물이 시원한 게 감칠맛이 끝내주는데요? 마음이 따뜻해지는 맛이에요. 날이 추워질수록 계속해서 생각날 거 같아요!”
손주아는 큼직한 고기만두를 숟가락에 올렸다.
“만두 육즙에 입안이 델 수도 있으니 앞 접시에 놓고 잘라서 먹어. 생각보다 훨씬 뜨거울 수도 있어.”
경일의 말에 그녀는 앞 접시에 만두를 놓은 뒤 반을 갈랐다.
뜨거운 김과 함께 반짝이는 육수가 흘러나왔다.
“와, 비주얼부터 끝내주는데요? 튀긴 것도 먹어 보고, 찐 것도 먹어 봤지만 이건 느낌이 또 다르네요.”
그녀는 식힌 만두를 입에 넣었다.
식혔는데도 아직 뜨거운지 만두를 입에 넣은 채로 바람을 후후 불었다.
“뜨겁지 않아?”
경일이 얼른 차가운 물이 담긴 물 컵을 내밀었다.
“아니요. 이 느낌을 놓치고 싶지 않아요. 뜨겁긴 한데 입안 가득한 향이 너무 좋아요.”
손주아는 공기를 입안에 머금어 가며 만두를 씹었다.
“맛있다! 시원한 육수와 고기의 묵직한 육수가 만나니 이건 또 다른 맛이네요. 엄청 풍부한 맛이에요. 만두피가 맛있는 국물을 듬뿍 빨아들여서 입안에서 그냥 풀려 버려요. 부드러운 게, 이것도 좋은데요? 미순이가 이 맛을 알면 곧바로 달려오겠는걸요. 아, 행복해.”
손주아의 눈가에 걸린 미소가 한층 더 밝게 빛이 났다.
만둣국이 마음에 드는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녀는 음식을 참 맛있게 먹었다.
음식을 먹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만든 사람의 마음이 뿌듯해질 정도였다.
손주아의 밝고 따듯한 감정이 경일에게 밀려들었다.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듯 구김 없는 그녀의 표정을 볼 때마다 부러운 마음이 들곤 했다.
하지만 괜찮았다.
경일에게 저런 웃음을 지어 주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장사는 평소와 같이 바빴다.
점심이 조금 지난 시간, 만둣국의 소문을 들은 이미순이 분식점으로 들이닥쳤다.
“사장님, 제가 엄청난 정보를 하나 들었거든요? 제 정보원에게. 정보원이 누군지는 묻지 마세요. 비밀 유지는 아주 중요하거든요. 오늘에야 정보원을 키운 보람이 느껴지는군요.”
이미순이 흐흐흐, 하며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
웃음 뒤에 그녀의 꿍꿍이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경일이 악당처럼 씨익 웃어 보였다.
마치 너의 의도는 모두 알고 있다는 듯이.
경일을 표정을 읽은 그녀가 곧바로 쓸쓸한 여자인 것마냥 연기를 시작했다.
“사장님, 제가 요즘 고민이 하나 생겼어요. 사는 것도 힘들고. 미용의 길은 왜 또 그리 험한지. 실력이 제자리걸음이라 안 그래도 속상한데, 미자 언니는 매일 같이 폭풍 잔소리를 하질 않나. 이게 나의 길이 맞는 건지 아닌지 하루에도 열두 번씩 고민한답니다. 이럴 때 빠질 수 없는 것이 한잔의 술이잖아요. 친구들과 같이 술도 한잔하면서 서로의 고민을 나누고, 위로도 하고, 그런 게 바로 인생이 아닐까요. 그런데 이런 자리에서 깡소주만 먹을 수는 없잖아요. 가슴이 따뜻해지는 속이 꽉 찬 고기만두가 듬뿍 들어간 시원 칼칼한 만둣국을 먹으며 친구들과 우정을 나누면 나의 이 힘들고 외로운 마음이 회복되지 않겠어요?”
그녀의 말을 경일은 묵묵히 들어주었다.
“한참 센티해지는 분위기에 맛없는 안주를 먹고 분위기가 깨지면 서로가 얼마나 민망하겠어요. 어릴 때 가족끼리 모여 앉아 후후 불어 가면서 먹던 뜨거운 군고구마를 먹던 것처럼, 친구들끼리 모여앉아 고기 육즙이 팡팡 흘러나오는 만두를 후후 불어 가면서 우정과 행복을 나누는 소중한 시간을 허락해 주시지 않으시렵니까? 사장님의 하회와 같은 은혜를 느끼며 친구들과 조촐하게 나누는 한잔의 술에 힘을 내어 더욱 열심히 일하는 미순이. 이 얼마나 아름다운 스토리인가요. 이 모든 건 사장님의 만둣국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이미순이 그윽한 눈으로 경일을 올려다봤다.
두 손을 꼭 쥔 채 커진 눈이 반짝반짝 빛이 났다.
가끔 경일은 미순이가 미용실에 있는 것이 아쉽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만약 연기 쪽으로 나갔으면 최소한 밥은 굶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손주아도 미순의 옆으로 다가와 힘을 실었다.
미순이 말한 저녁에 같이 맛있는 안주와 함께 술을 나눌 친구에 자신도 포함된 까닭이었다.
마나를 깨우친 뒤로 경일은 상대의 감정이 더욱 잘 느껴졌다.
이미순의 간절함이 그대로 느껴질 정도였다.
“하하하, 미순 씨가 원하면 해 드려야죠. 귀한 아르바이트생도 소개해 줬는데,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죠. 근데 몇 인분을 포장해 놓을까요?”
“20인분요.”
“네? 20인분요?”
이미순의 대량 주문에 놀란 경일이 되물었다.
“사실 20인분도 얼마 못 먹어요. 주아 먹는 거 안 보셨죠? 저게 여기서 내숭 떤다고 1인분씩만 먹는 모양인데, 사실 2, 3인분은 앉은 자리에서 뚝딱 해치우는 아이예요. 그렇게 먹어도 살이 안 찌는 게 부럽긴 한데.”
“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돼지냐? 한 번에 2, 3인분을 먹게? 사장님, 절대 미순이 말 믿지 마세요. 제 몸매 어디에 저렇게 많은 음식이 들어가겠어요. 하여간 친구란 년이 맨날 누명이나 씌우고. 너 이런 식이면 앞으로 이런 고급 정보는 절대 안 줄 거다.”
손주아가 자신의 몸매 이야기를 하며 경일의 앞에서 자연스럽게 날씬한 몸매를 강조했다.
“흥~ 내가 이럴 줄 알고 동영상 찍어 놨거든? 한 번 볼래?”
손주아의 얼굴이 금세 시무룩해졌다.
“그리고 내숭 좀 그만 떨어 이 지지배야. 사장님 앞에서 끼도 그만 좀 부리고.”
손주아를 한 방에 보내 버린 이미순이 경일을 향해 코맹맹이 소리로 말했다.
“일단 주아 같은 식신이 세 명이거든요. 저는 1인분만 먹으면 충분한데.”
“야, 너도 나만큼 먹으면서 무슨 헛소리야? 그러고 너 미자 언니한테 가서 이른다. 남자 앞에서 코맹맹이 소리한다고.”
손주아가 기회를 잡은 듯 다시 살아나 이미순을 구박했다.
“얘는 내가 언제 코맹맹이 소리를 냈다고 그래. 어쨌든 사장님, 한 번에 10인분은 금방이라니까요. 특별 요리인데 두 번은 먹어야 하잖아요. 그래서 20인분.”
“맞네. 네 말대로 최소 20인분은 있어야겠다.”
손주아도 이미순을 거들었다.
언제 싸웠냐는 듯이 이럴 땐 둘의 손바닥이 짝짝 맞았다.
그렇게 경일은 20인분을 포장해 주기로 했다.
늘 동네 분식을 위해 발 벗고 나서는 소중한 2호 단골인데, 이 정도 서비스를 받을 자격은 충분했다.
저녁이 되자 이길호와 수한이가 찾아왔다.
이길호는 다리의 상처가 다 나았는지 걸음걸이가 이상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정말 다행이었다.
수한이도 기쁜지 밝은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사장님, 고맙습니다. 덕분에 우리 가족이 다시 안정을 되찾을 수가 있었습니다. 빨리 오고 싶었는데,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리고 이거… 더 좋은 거로 해 드리고 싶었는데, 죄송합니다.”
이길호는 몇 번이나 감사 인사를 하고는 경일에게 쇼핑백을 건넸다.
“이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경일은 사양하지 않고 선물을 받았다.
선물은 홍삼이었다.
홍삼 라인 중에서도 가장 고가의 제품이었다.
매일 광고를 하는 제품이라 경일도 잘 알고 있었다.
“아니, 이렇게 비싼걸. 이거 살 돈으로 가족이랑 좋은 곳에서 외식이나 하시지.”
“아닙니다. 사장님이 베풀어 준 은혜에 비하면 천분의 일도 되지 않습니다. 더 좋은 걸 선물하고 싶었는데, 능력이 부족해 죄송합니다. 수한이가 어려운 환경에서도 얼굴에 구김살 없이 이렇게 밝은 아이로 자랄 수 있는 건, 모두 사장님 덕분입니다. 아내도 정말 감사하다고 꼭 전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외식을 왔지 않습니까? 수한이도 저도 사장님 분식점만큼 맛있는 곳은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습니다. 맛도 맛이지만, 사장님 음식을 먹고 나면 온몸에 힘이 납니다. 정말 마음마저 따뜻하게 해 주는 음식은 여기밖에 없을 겁니다.”
“맞아요. 아저씨 음식이 제일 맛있어요. 매일 먹어도 질리지도 않고. 그리고 아빠를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수한이가 두 손을 모으고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그 모습에 경일은 코끝이 시큰거렸다.
자신이 한 건 가진 능력에 비해 아주 작은 부분이었는데, 저 가족은 마음속 깊이 감사하고 있었다.
가슴속에서 무언가 알 수 없는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