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이 정도면 나도 던전의 가질 권리가 있잖아
“그래, 이제야 말이 통하는군. 처음부터 고분고분했으면 고통을 받지 않았을 건데 말이야. 이렇게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니 서로에게 얼마나 좋아. 물론 너로서는 아깝겠지. 나도 충분히 이해해. 하지만 이게 오히려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 주면 좋겠어. 너도 보물을 지킬 힘이 없다는 걸 깨닫고 이런 산동네의 분식점에서 터를 잡은 거겠지. 참고로, 아주 현명한 생각이었어. 그 덕에 내가 정말 고생을 많이 했어. 절로 이가 갈릴 정도로 말이야. 뭐, 이건 조금 있다가 다시 얘기하고.”
곽마권은 그동안의 고생이 떠올랐는지 자신도 모르게 조금 울컥했다.
그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이게 왜 좋은 기회냐고 하면, 너에게 던전을 활용할 기회를 내가 주겠다는 거야. 내가 너를 지켜 주는 거지. 그럼 아무도 너를 위협하지 못할 거야. 그럼 넌 던전의 자원을 팔아 이런 냄새 나는 동네에서 떠나 좋은 동네에서 큰소리치며 재밌게 살면 되는 거야. 너 정도의 잘생긴 얼굴에 돈도 많으니 여자들이 줄을 설 거야. 좋은 차에 좋은 집, 예쁜 여자. 인생이 얼마나 재밌겠어. 넌 가만히 앉아서 나라는 대단한 권력을 손에 쥔 거나 다름없어. 대신 우리는 네 수익의 아주 작은 부분만 수고비로 가지고 갈 것을 약속하지.”
곽마권은 경일을 쳐다보며 느긋하게 이야기했다.
그에 반면 경일의 얼굴은 점점 굳어 갔다.
“내가 던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지?”
경일이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하긴, 그게 제일 궁금했을 거야. 이제부터 자주 볼 사이인데, 내가 친절히 알려 줘야지. 사실 내가 너를 안 건 오래됐어. 오래전 네놈이 시장에서 던전 사과를 팔 때부터 알고 있었지. 사과가 우연히 내 손에 들어왔고, 난 그게 던전 사과라는 걸 바로 알아냈지. 내가 미각이 아주 특별하거든. 그 덕에 스킬이 생길 정도로 말이야. 지금껏 쓸모없다고 여기던 스킬이 이런 큰 복을 가지고 올 줄이야. 큼큼.”
곽마권은 너무도 기쁜 나머지 한껏 잡고 있던 무게가 순간 풀려 버렸다.
민망한 듯 헛기침을 한 뒤 다시 한번 한껏 무게를 잡고 입을 열었다.
“거기다가 신체가 아주 민감해서 던전 사과의 효능을 미세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지. 그때 잡을 수도 있었는데… 아니지. 잡는 게 아니라 그때 서로 만나 건설적인 대화를 할 수 있었는데, 그때는 이미 사라지고 없더라고. 사실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내가 너를 찾으려고 그동안 노력을 많이 했어. 우리 길드원들이 쉬는 날에도 쉬지 못하고 지금까지 전국의 재래시장을 뒤지고 다녔거든.”
곽마권의 집요함에 경일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게나 오랫동안 쫓았다니…….
하필 걸려도 저런 지독한 놈에게 걸리다니…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비싼 헌터들을 계속 투입했으니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지. 그러니 나도 이제 투자금을 회수해야 하지 않겠어? 이만하면 나도 던전에 대한 권리는 충분히 있는 거 아니겠어? 보아하니 던전은 서로 나누어 먹어도 될 만큼 충분할 거 같은데? 던전 사과에 물고기까지. 쏘가리 매운탕은 정말 눈 돌아가게 맛있더군. 내가 그 덕에 너를 찾을 수 있었지.”
경일은 궁금증이 모두 풀렸지만, 얼굴은 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마 매운탕에 들어간 채소도 던전에서 나온 거겠지? 나도 던전 재료로 만든 음식은 안 먹어 본 건 아니지만, 이건 아예 차원이 다른 맛이었어. 분명 이거 말고도 다른 자원도 많겠지. 너도 얼마나 자랑하고 싶었으면 던전에서 나온 자원을 가지고 이런 말도 안 되는 가격으로 팔았겠어? 하긴, 좀 재미있었을 거 같기도 해. 이 거지 같은 동네 놈들이 천고의 보물을 먹고 맛있다고 날뛰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우월감이 들기도 했겠지.”
곽마권은 경일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전혀 없어. 사람들의 면상에 대고 잘났다고 자랑해도 돼. 내가 네 뒤에 있으니 하고 싶은 대로 다해도 괜찮아. 아 참! 요리하는 걸 좋아하면 식당을 계속해도 돼. 그럼 이런 거지 같은 손님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권력자들은 전부 다 만날 수 있을 거야. 노는 물이 완전히 달라지는 거지. 아, 참고로 그 식당에는 절대 식중독 신고는 들어가지 않을 거야. 당연히 공무원이 귀찮게 할 일도 없을 테고. 문신으로 도배한 돼지 새끼들도 사라질 거고. 어때? 충분히 합리적인 거래잖아.”
경일은 이가 갈렸다.
모든 사건의 전말은 대충 짐작하고 있었지만, 당사자에게 직접 듣는 거랑은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더군다나 상대는 오히려 자신을 봐준다는 식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더 웃긴 건, 저 말도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저 정도 감언이설에 넘어간다면 경일이 고아로 살면서 먹은 눈칫밥이 아까울 터였다.
게이트의 위치를 말하는 순간, 자신을 죽일 게 빤했다.
남의 물건을 힘으로 찍어 눌러 강탈하려 하고 있었다.
힘이 있다고 남의 것을 마치 자기 것인 양 당당하게 말하는 모습이 역겨웠다.
경일은 자신이 인상을 찌푸릴 때마다 곽마권의 웃음이 진해지는 걸 보았다.
어릴 때부터 험난한 인생을 살아온 그가 상대의 표정을 읽는 건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표정을 아무리 숨기려 해도 참지 못하고 삐져나오는 곽마권의 비웃음을 볼 때마다 가슴속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자신을 조롱하고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며 즐기고 있었다.
당장 곽마권을 쳐 죽이고 싶지만, 아까의 기세로 보아 자신보다 레벨이 높아 보였다.
‘만약 던전을 나만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저 새끼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지금의 방식으로는 절대 던전을 가질 수 없다는 걸 알면 얼마나 분할까?’
경일은 던전의 진심을 알고 너무도 기뻤다.
던전은 오로지 자신만 허용했다.
늘 누군가에게 던전을 뺏길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있었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누군가 자신을 죽이더라도 던전이 그의 손에 넘어가지 않는다는 사실이 매우 통쾌했다.
그와 함께 눈가가 촉촉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경일은 철든 이후로 한 번도 울어 본 적이 없었다.
가족처럼 믿은 이에게 사기를 당해 힘들게 모은 재산을 뺏기고, 빚까지 졌을 때도.
매일 같이 사채업자가 찾아와 그를 협박하고 폭력을 행사할 때도.
하루 몇 시간도 채 자지 못하고 힘든 일을 해야 할 때도 그는 울지 않았다.
하지만 던전의 진심을 알자 경일은 눈물이 솟구쳐 올랐다.
그러나 곽마권 앞에서는 절대 우는 모습을 보일 수 없었다.
이빨을 꽉 깨물며 눈물을 참았다.
“내게도 생각할 시간을 줘. 설마 지금 당장 결정하라는 건 아니겠지?”
경일은 일단 시간을 필요하다고 말했다.
“좋아. 하루를 주지. 네놈은 모르겠지만, 우리 애들이 네놈을 감시한 지 오래됐어. 그러니 도망갈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괜히 도망가다 잡혀 와서 곤란을 겪지 말고. 크크크.”
곽마권은 경일의 눈이 벌게지며 울음을 참는 듯한 모습에 기분이 좋아졌다.
경일을 찾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였는가.
머리가 으스러질 듯한 스트레스를 받으며 어떻게든 버텨 왔다.
그런데 자신을 그렇게 힘들게 만든 놈에게 고통을 돌려주자 이것만큼 통쾌한 게 없었다.
자신이 만든 이 상황이 무척이나 만족스러운지 그의 입에 진한 웃음이 걸렸다.
오만한 눈빛으로 경일을 내려다보며 여유롭게 이 상황을 즐겼다.
‘천고의 보물 같은 던전을 남이랑 나누는 것이 고통스럽기도 하겠지. 아마 생살이 잘리는 것보다 더 아픈 고통일 테지. 나중에 던전을 통째로 뺏겼다는 걸 알았을 때는 어떤 얼굴을 보여 줄지 기대가 되는군. 하루를 더 준다고 하도 바뀔 건 없겠어. 이미 독 안에 든 쥐니까, 흐흐흐.’
그러다 문득, 곽마권은 여기까지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아직 게이트의 위치를 모르니 더 이상 자극하면 안 되겠어. 너무 궁지로 몰아 감정이 격해지면 무슨 짓을 할지도 몰라. 자살이라도 하면 게이트를 못 찾을 수도 있잖아. 일단 게이트를 찾기 전까지 약간의 편의는 봐주는 걸로 하자. 지금까지 기다려 왔는데 하루를 더 못 기다리겠어?’
곽마권은 행복한 내일을 기대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일은 분식점을 나가는 그를 무서운 눈으로 노려봤다.
얼굴에 절로 쓴웃음이 지어졌다.
자신을 감시하는 눈이 있어 힘없는 걸음으로 옥탑방으로 돌아갔다.
사실 하루의 시간을 벌긴 했지만, 그로서도 특별한 방법은 없었다.
“신화 길드… 신화길드…….”
아까 곽마권이 자신을 소개하면서 한 말이 계속 입안에서 맴돌았다.
문득, 처음 간 암시장에서 자신을 유인한 신화 길드의 헌터가 생각났다.
‘사람을 죽여 그들을 가진 물건을 뺏을 정도로 악독한 놈들이었지.’
그들은 오늘도 열심히 던전 광산에서 눈을 뜬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미스릴을 채굴 중이었다.
경일 또한 신화 길드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자신을 쫓고 있다는 말에 관심이 안 생길 수가 없었다.
신화 길드를 의식하자 소문을 듣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대부분이 그들이 행패를 부린 이야기였고, 당한 사람들은 울분을 토해 냈다.
악랄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악명이 자자한 길드였다.
소속 헌터만 해도 50명이 넘는 길드의 손아귀에 잡혀 버렸으니, 이건 도저히 벗어날 방법이 안 보였다.
유일한 방법은 단 하나.
던전으로 도망가 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24시간 감시를 받고 있었다.
그럼 분명 옥탑방에서 사라진 걸 알아차릴 테고, 옥탑방과 던전이 어떤 관계가 있다 생각할 건 빤했다.
오래전에 판 던전 사과를 쫓아 여기까지 찾아올 정도로 집요한 성격으로 봐서는 자신이 나타날 때까지 옥탑방에 헌터를 상주시킬 공산이 컸다.
그럼 경일은 기약할 수 없는 세월을 던전에 묶여 있어야 할 터.
지구의 한 달이 던전에서는 석 달의 시간이었다.
지구와 시간 축이 다른 던전에서 혼자서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지 몰랐다.
더군다나 자신의 강해지기 위해서는 스탄다비아에 꾸준히 지원을 해 줘야 하는데, 던전의 자원만으로는 그 효과가 미비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그들의 삶에 가장 큰 도움을 준 건 지구의 철과 식량이었다.
지구의 물건을 공급하지 못한다면 던전에서 오랫동안 버틴다고 해도 복수를 할 수 있을 만큼 강해진다는 보장이 없었다.
주위를 살펴보니 자신이 있는 건물을 꽁꽁 둘러싸고 있는 헌터들이 보였다.
평소보다 최소 세 배의 인원이 투입된 듯 보였다.
이제는 숨을 생각이 없는 지 아예 모습을 드러내고 경일을 압박했다.
담배를 피우고 바닥에 가래침을 뱉고 서로 즐거운 듯이 웃고 있었다.
그들을 보고 있자니, 커다란 돌덩이가 가슴에 들어찬 거 같이 답답해졌다.
“제기랄, 외통수네. 방법이 없어, 방법이. 하지만 말이야. 곽마권, 너도 게이트는 차지하지 못 할 거야. 게이트는 내 눈에만 보이니, 내가 사라지면 던전을 차지할 방법은 없어.”
경일은 답답한 와중에도 이 생각만 하면 입가에 웃음이 삐져나왔다.
오늘 만난 곽마권은 집요할 정도로 탐욕스러운 사람이었다.
이미 던전이 자기 것인 듯 생각하는 그에게 이 사실은 실망을 넘어 절망스러울 터.
“만약 게이트가 내 눈에만 보인다는 사실을 말하면, 최소한 내 목숨은 지킬 수가 있겠지. 그럼 난 온갖 감시 속에서 노예 같은 삶을 살아야 하겠지. 찍소리도 못 한 채. 그런 놈에게 휘둘리면서 사는 건 딱 질색인데… 이런 삶을 살 바에야 싸우다가 죽고 싶어. 자포리자 영주님께는 좀 미안하긴 하지만, 이해해 주시겠지. 명예를 아는 분이니, 분명 나의 결정을 지지해 주실 거야.”
[스탄다비아가 발전했습니다.]
[힘이 5 올랐습니다.]
[민첩이 5 올랐습니다.]
[체력이 5 올랐습니다.]
[마나가 5 올랐습니다.]
스탄다비아가 경일의 결심을 응원하는 듯 때마침 그의 신체 능력이 상승했다.
경일은 비장한 각오로 인벤토리에서 검을 꺼냈다.
검에서 시린 예기가 뿜어져 나왔다.
경일의 눈이 싸늘하게 식어 갔다.
이미 가야 할 길을 결정한 듯 그의 눈에는 망설임이 사라져 있었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