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연구 마법사
오른손에 쥔 검을 비스듬히 땅으로 내렸다.
천천히 계단으로 향했다.
그는 삶의 마지막 투쟁을 펼치려 하고 있었다.
“뭐, 후회는 없어. 나 같은 밑바닥 인생이 던전을 만나 내 마음대로 한 번 살아 봤잖아. 감히 나 같은 놈이 많은 사람의 지지와 사랑도 받아 봤고. 특히 내 인생에서 절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아이들과 웃고 떠들고 친구까지 맺었으니… 그래도 막판에 나름 착한 일도 많이 했으니, 염라대왕도 정상참작을 조금이나마 해 주지 않겠어? 뭐, 해 주지 않아도 상관없고. 굳이 내가 살아온 인생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아. 벌 받는 게 무섭다고 내가 살아온 인생을 부정하는 건 너무 쪽팔리잖아. 그리고 오직 저만 사랑해 준 던전님. 평생 이 은혜는 마음에 새기겠습니다.”
결심을 굳힌 경일이 막 옥상의 계단으로 들어서려는 순간.
조용하던 동네가 욕설과 고성으로 시끄러워졌다.
* * *
스탄다비아에 봄이 찾아왔다.
혹독하던 겨울이 지나가고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 고개를 내밀었다.
얼어붙은 대지가 깨어나고 조금씩 따뜻해지는 걸 보고 있기만 해도 기분이 싱그러워지는 봄이었지만, 의외로 사람들은 특별한 관심이 없었다.
그저 흐르는 세월 중 하나일 뿐이었다.
태어났으니 어쩔 수 없이 죽을 날을 기다리고 살아가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그만큼 이들의 생활은 어렵고 처절했다.
하지만 올해의 봄은 작년 봄에 비해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스탄다비아에서 이번 겨울에서 가장 힘들었을 사람들은 알리사 영지에서 이주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모든 생활 기반을 두고 맨몸에 가깝게 이주한 이들은 제대로 된 집도 없이 겨울을 맞아야 했다.
먹을 것도 없이 모든 만물이 눈 속에 잠겨 버린 겨울은 악몽과 다름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단 한 명도 죽지 않고 겨울을 이겨 냈다.
이건 대단한 일이었다.
모든 생활 기반을 갖춘 알리사 영지에서 맞이한 겨울에서도 많은 사람이 굶어 죽거나, 얼어 죽었다.
하지만 더 열악한 환경인 스탄다비아에서 이들은 모두 살아났다.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경일이 보내 준 쌀 때문이었다.
자포리자는 경일이 보내 준 쌀을 단 한 톨도 남겨 두지 않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 영지민들을 위해 사용했다.
두 번째 이유는 겨울인데도 돈을 벌 수 있는 일자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몬스터의 지방을 채취하는 일부터, 대장간에서 발생한 여러 일자리, 많은 상인이 들어오면서 그들이 머물 건물을 지으면서 발생하는 일자리, 흙벽돌을 만드는 공장, 그리고 수로 공사에 필요한 일자리까지.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그들에게 다가온 이번 봄은 예전처럼 지나가는 힘든 시간이 아니었다.
어릴 때 잃어버린 희망을 다시금 품을 수 있었다.
사람들의 얼굴이 밝아졌으며, 활기가 넘쳤다.
봄이 되자 추운 날씨 때문에 느리게 진행되던 일이 빠르게 실천되었다.
자포리자는 여전히 영지 곳곳에 수로를 건설했다.
몬스터가 우글거리는 곳에 뛰어들어 병사들과 함께 싸웠다.
그 덕에 영지에 많은 물길과 물을 저장할 수 있는 소류지가 군데군데 건설되었다.
그와 함께 모든 영지민들이 바빠졌다.
물길이 생기자 그 근처의 땅을 모두 농지로 개간할 수 있게 되었다.
기존의 땅은 우물의 물을 이용해 농사를 짓을 수밖에 없어 엄청난 노동력이 들어갔다.
그런 사람들의 노력을 비웃듯 농사는 매년 흉년이었다.
자포리자는 기존의 농지가 농사가 되지 않는 이유를 설명했고, 영지민들은 그를 믿고 새로운 땅을 개간했다.
그들의 얼굴에는 새로운 땅에 대한 희망이 넘쳤다.
개간이 끝난 땅에는 씨감자를 지급했다.
경일이 노력한 덕에 씨감자의 양은 적지 않았다.
새로 개간한 모든 땅에 심을 정도는 아니지만, 이들에게 많은 도움을 줄 것은 확실했다.
스탄다비아가 새롭게 살아나고 있다는 소문은 천천히 퍼져 나갔다.
주로 상인들의 입에서 퍼진 소문은 많은 유민들의 귀에도 들어갔다.
먹고 살길이 없어 정든 고향을 버리고 유민이 된 이들에겐 정착할 땅이 누구보다 간절했다.
기존의 영주들은 유민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굳이 그들을 받아들일 여유도 없었다.
제대로 세금을 내지 못하는 영지민은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유민들에 대해 좋지 않은 인식도 한몫했다.
소속감이 없고, 가진 것이 없다 보니 유민들은 쉽게 범죄를 일으켰다.
기존의 영지민들도 그들에 의해 일자리가 줄어드는 것을 원치 않았다.
매년 생산하는 양은 정해져 있는데, 새로운 입을 받아들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 유민들이 스탄다비아로 몰리고 있었다.
그들이 이곳에 희망을 품고 오는 이유는 자포리자가 알리사 영지민들을 받아들였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그 많은 사람을 받아들였으니 자신들도 받아들이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졌다.
일부는 굳이 자포리자가 자신들을 받아들이지 않아도 스탄다비아서 몰래 살 생각이었다.
알리사 영지민들의 이주로 혼잡한 지금, 몰래 그들의 무리로 스며들 생각이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유민들이 스탄다비아로 몰렸다.
자포리자는 오래간만에 집무실에서 밀린 일을 하고 있었다.
수로 건설을 최우선으로 하다 보니, 영지의 여러 가지 일들이 자신의 결제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창 바쁘게 일하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영주님, 윌커슨입니다.”
“들어와.”
윌커슨은 영지의 치안을 맞고 있는 치안대장이었다.
그가 집무실로 들어와 자포리자를 향해 절도 있게 경례하였다.
“그래, 이 시간에 무슨 일인가?”
“영지로 유민이 들어왔습니다.”
“유민?”
“네. 서른 명 정도 되는 유민이 들어와 이곳에서 살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미 많은 유민들이 영지로 들어온 것으로 파악됩니다.”
“음…….”
자포리자가 생각에 잠겼다.
유민이 여러 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도움이 되는 것도 분명 있었다.
그건 인구의 증가였다.
이 시대의 인구는 영지의 힘과 다름없었다.
수용할 여력이 된다면 받아들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집사, 행정관과 카스만 경을 불러오도록.”
“알겠습니다.”
“유민에 관한 결정이 내려지면 알려 주지. 그때까지 유민들은 구금해 두게. 이왕 이곳까지 왔으니 식사는 신경을 써 주도록 하고.”
“알겠습니다.”
윌커슨이 집무실을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미르와 카스만이 들어왔다.
“영주님, 무슨 일입니까?”
사미르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먼저 물었다.
“일단 앉지. 카스만 경도 앉으십시오.”
“네, 영주님.”
그들이 자리에 앉자 자포리자가 입을 열었다.
“지금 영지에 유민들이 들어오고 있다고 합니다. 이 문제를 의논하고자 불렀습니다.”
“저는 유민들을 받아들이는 것을 반대합니다. 이번 겨울은 어떻게 넘겼다고 하지만, 영주님도 알다시피 지금 성의 재정은 바닥입니다. 세금이 어느 정도 들어오려면 추수철이나 돼야 할 텐데, 이제 영지민들은 땅을 개간하고 곡식을 심고 있습니다. 이런 시기에 유민들까지 떠맡는 건 아무래도 무리라고 생각합니다.”
사미르는 성의 재정을 책임지는 위치인 만큼 현실에 빗대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더군다나 유민을 받기 시작한다는 소문이 돌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찾아올지 모릅니다. 영주님도 알다시피 지금 왕국의 정세는 백성들이 살기에 너무 힘들지 않습니까. 작년의 농사도 전체적으로 대흉년이었고, 유민들은 엄청난 수로 증가했을 겁니다. 더군다나 알리사 이주민들이 이제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기존의 영지민들은 영주님을 깊게 존경해서 알리사의 이주민을 받아들이고도 소요가 없었지만, 유민들까지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들로서도 용납하기 힘든 결정일 겁니다.”
“음…….”
자포리자가 엄지와 검지로 머리를 꾹꾹 눌렀다.
그가 고민할 때 나오는 버릇 같은 거였다.
카스만은 사미르의 이야기를 듣고도 아직 의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원로인 그는 단순히 현실에 관한 문제만을 보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정치적인 감각이 가장 뛰어난 인물로 자포리자의 의중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카스만 경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제 생각을 말하기 전에 영주님의 생각을 먼저 듣고 싶습니다.”
카스만의 질문에 자포리자가 입을 열었다.
“지금의 우리가 처한 상황은 사미르가 아주 정확히 말해 주었지요.”
자포리자가 칭찬하자 사미르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벌여 놓은 일은 산더미 같이 많은데, 유민이라는 또 다른 큰일을 벌인다는 것에 많은 사람이 우려를 표할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스탄다비아는 겨우 이 정도가 아닙니다. 이 정도로 멈추어 설 거면, 애초에 그렇게 간절히 빌지 않았을 겁니다.”
자포리자는 자신의 믿음에 화답해 준 경일을 떠올렸다.
그는 자신의 꿈도 있지만, 경일을 위해서라도 이대로 멈추고 싶지 않았다.
스탄다비아의 발전이 경일에게도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상,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달려 나갈 생각이었다.
“물론 나 혼자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겠지요. 하지만 여러분들이 지지해 주고, 힘을 모아 준다면 충분히 가능할 거라 생각합니다.”
“음, 성주님의 뜻이 그렇다면 전 따르겠습니다. 지금까지 성주님이 보여 준 기적만 봐도 이번 일도 충분히 잘해 내실 거라 믿습니다.”
카스만이 찬성하고 나서자 급해진 건 사미르였다.
“성주님, 안 됩니다! 물론 성주님 뒤에 전설로만 전해 오는 선인님이 계신 건 알지만, 이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지금 성의 인원으로도 벅찹니다. 제가 지금 하루에 몇 시간을 자는 줄 아십니까? 겨우 세 시간을 자고 쉬는 날도 없이 일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아직 할 일이 태산 같습니다. 알리사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에 대한 호구 조사를 시작도 못 했습니다. 이대로라면 세금도 제대로 거두기 힘들 지경이란 말입니다.”
사미르가 강력하게 반대의 뜻을 밝혔다.
“이거 미안하군, 사미르. 전부 내 실수네. 내가 밖으로만 돌다 보니 가장 중요한 스탄다비아의 살림을 책임지는 자네에게 많이 무심했군. 그래, 자네 말은 잘 알아들었네.”
자포리자가 위로의 말을 건네자 사미르의 코끝이 찡해졌다.
이제야 자신의 일을 알아 주는 자포리자가 밉기도 했지만, 지금이라도 알아 주니 마음 한구석에 우쭐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카스만 경, 이번 일은 경이 신경 써 주시기를 바랍니다. 사미르와 의논해서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을 뽑아 주십시오. 물론 능력도 중요하겠지만, 우리와 끝까지 갈 수 있는 인성을 가진 사람을 위주로 뽑아 주십시오. 한 사람이 두 사람 몫을 하면서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믿을 수 없지만 능력이 있는 사람보다 믿을 수 있는 두 명의 사람을 뽑는 방향으로 진행해 주십시오.”
“영주님의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
카스만은 자포리자의 생각을 읽고 대답했다.
스탄다비아에는 외부로 알려지면 안 되는 일들이 많았다.
비누의 제조법이라든지, 흙벽돌의 제작법, 그리고 마나 연공법 등 하나하나가 더없이 귀중한 것들이었다.
언젠가는 비밀이 새어 나가기 마련이지만, 최대한 그 시기를 늦추고 싶은 게 자포리자의 바람이었다.
집무실 밖으로 나가는 사미르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일이 더 늘어나긴 했지만, 그의 일을 도와줄 사람들이 생길 거란 생각에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유민들은 기쁨에 날뛰었다.
이런 시국에 아무 조건 없이 이렇게 자신들을 받아들일지는 몰랐다.
알리사의 영지민을 받아들였다는 말에 나름 기대는 하고 있었지만, 몇 년간 세금을 무겁게 매긴다든지, 강제 노역을 해야 한다든지 어느 정도 고생할 각오를 했다.
거기다가 유민들의 정착에 어느 정도 지원까지 해 준다는 말에 이곳이 진정 자신들의 뼈를 묻고 후손이 살아야 할 곳임을 알았다.
자포리자에 대한 충성심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유민들을 차별 없이 받아들인 성과는 의외로 금방 나타났다.
그들 중 한 명인 3서클의 연구 마법사가 자포리자에게 몸을 의탁해 온 것이다.
이 시대의 마법사는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었다.
전투에 특화된 전투 마법사와 연구에 특화된 연구 마법사로.
전투 마법사는 공격 주문을 위주로 익히며 주로 전쟁에서 활약했다.
연구 마법사는 그와 반대로 마법을 연구하는 일을 했는데, 고대 마법을 연구하고 여러 마법 물품을 개발하고 제조했다.
그들이 만드는 것 중 대표적인 게 포션과 생활에 필요한 마법 도구였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