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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107화 (107/300)

[107화] 변수

“어서 오게. 진심으로 환영하네.”

자포리자가 연구 마법사를 기쁜 마음으로 환영했다.

“자포리자 영주님을 만나 봬서 영광입니다. 저는 하칸 얀디슈입니다.”

하칸은 머리카락 색이 까맣고, 마른 체형에 고집 있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눈빛이 강한 게, 자포리자는 그의 첫인상이 마음에 들었다.

“일단 앉지.”

“네.”

하칸이 자리에 앉자 집사가 따뜻한 차를 가져다주었다.

진한 갈색의 물이 찻잔에 담겨 있었다.

달콤한 냄새가 나는 것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차였다.

“영주님, 이 차는 무엇입니까?”

하칸이 궁금해하며 물었다.

“커피 믹스라는 것이네. 귀한 손님이 와서 그에 맞는 귀한 차를 내왔으니, 한 번 맛을 보게나.”

하칸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많이 놀랐는지 그의 고집스러운 얼굴이 확 펴져 순간 순수해 보일 정도였다.

“이런 맛이 존재할 수가 있다니, 대단합니다! 단맛은 알겠는데, 구수하기도 하면서 약간 쓰기도 한 거 같은 맛은 저의 짧은 식견으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정말 맛있습니다!”

늘 새로운 것을 연구하고 발명하는 연구 마법사답게 그는 편견 없이 커피의 맛에 빠져들었다.

사미르는 커피의 진한 색 때문에 지레 겁을 먹고 아직 제대로 커피를 즐기지 못했다.

“하하하하! 역시 연구 마법사라더니, 역시 새로운 것에 대한 거부감이 없군. 어쨌든 내 마음이 전달된 거 같으니 기쁘군.”

커피 믹스 한잔에 하칸의 마음속 빗장이 열렸다.

아직 대화도 나누어 보지 않았는데, 이런 귀한 것을 대접한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을 높게 본다는 얘기였으니까.

“감사합니다. 별 볼 일 없는 저에게 이런 귀한 차를 대접해 주시고.”

“아닐세. 이제 자세한 이야기를 해 주겠나?”

“알겠습니다. 저는 마실리 마탑 소속의 연구 마법사였습니다.”

“마실리 마탑이라면 하킨스 백작의 영지 안에 있는 마탑이 아닌가?”

“네, 맞습니다.”

“음…….”

자포리자가 침음을 흘렸다.

스탄다비아와 하킨스 백작의 영지는 베르아스 왕국의 끝과 끝에 위치할 정도로 왕국 안에서 가장 거리가 먼 곳이었다.

거리가 멀다 보니 자포리자와는 아무런 접점이 없었지만, 문제는 하킨스 백작의 명성이었다.

그는 베르아스 왕국의 실세 중의 한 명이었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이 많았겠군.”

자포리자는 일단 상대를 배려했다.

“아닙니다. 몸은 힘들었지만, 오히려 마음은 편했습니다.”

많은 의미가 함축된 말이었다.

마법사는 기본적으로 어디를 가나 좋은 대접을 받았다.

더군다나 3서클 마법사라면 어디에서나 기본 대접은 받았을 것이다.

“저는 어릴 때 우연히 마실리 마탑주 눈에 띄어 마탑으로 들어갔습니다. 우리 집은 찢어지게 가난했고, 부모님은 한 입이라도 줄이고자 흔쾌히 저를 마탑주에게 팔아넘겼습니다. 어린 나이였지만, 부모님께 버림받는 것에 대해 큰 충격은 없었습니다. 그리 좋은 부모님은 아니었거든요. 오히려 기쁜 마음도 있었죠. 어리지만 마법사라는 사람들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알았고, 이제는 평생 배를 곯을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마탑이란 곳은 또 다른 지옥이었습니다. 그곳은 모든 것이 경쟁이었습니다. 마탑은 들어가는 순간부터 엄청난 경쟁을 해야 했고, 경쟁에 지는 순간 가차 없이 버려지는 곳이었습니다. 쫓겨나면 갈 곳이 없는 저는 이를 악물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성적과 상관없이 늘 최악의 대접을 받아야 했습니다. 오로지 제 머리카락 색이 검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

자포리자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서렸다.

그는 오히려 하칸의 머리카락 색이 검은색이라 더 좋았다.

그가 선인인 경일의 머리카락 색과 같아서였다.

“어릴 때부터 다른 이들의 놀림감이 되어야 했고, 허드렛일은 모두 제 차지가 되었습니다. 저를 데려온 마탑주는 물론이고 어느 누구도 저를 신경 쓰지 않더군요. 하지만 마법 연구라는 것이 좋아 힘들어도 버틸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 3서클을 완성시킬 수 있었습니다. 3서클 마법사만 돼도 기본적인 대접을 받을 수 있으니, 이제 어려운 생활은 끝이 날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더군요. 오히려 3서클이 되어도 그런 대접을 받아야 하니, 마음속에 자괴감이 더 커졌습니다. 이미 저는 마실리 마탑에 매인 몸이고, 3서클 연구 마법사인 저를 그들이 놓아줄 리 없었습니다. 저는 묵묵히 마탑에서 노예 같은 생활을 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허락된 연구 시간은 남들의 반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실력을 닦는 동안 저는 온갖 마법 물품을 만들어 마탑의 재정에 이바지해야 했습니다. 그런 저에게도 사랑하는 여자가 생겼습니다…….”

하칸의 고집스러운 얼굴에 슬픔이 감돌았다.

“하지만 마탑에서는 저의 결혼을 찬성하지 않더군요. 결혼하면 마탑을 나가서 생활해야 했고, 그럼 마탑의 수입이 줄어들 걸 염려한 거였습니다. 그런 사실에 환멸이 느껴지더군요. 차라리 어릴 때 경쟁에서 져서 마탑에서 버려지는 길을 택하지 못한 게 후회가 될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사달이 일어났습니다. 어릴 때부터 저를 악랄하게 괴롭히던 귀족 자제가 있었습니다. 제가 먼저 3서클로 올라가자 그는 저에게 강한 질투심을 느꼈고, 결국 일을 저질렀습니다. 저와 결혼을 약속한 여자를 강간하고 살해한 겁니다…….”

하킨은 그때의 끔찍하던 기억을 떠올리고는 인상을 찌푸렸고, 자포리자는 아무 말 없이 그의 말을 경청하였다.

“그리고 그 부모에게 돈 몇 푼을 쥐어 주고 일을 무마시켰습니다. 마탑에서도 아무런 징계를 내리지 않더군요. 오히려 여자가 사라지자 기뻐하는 눈치였습니다. 저는 그 길로 마탑에서 도망쳤습니다. 도저히 그곳에 있을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떠돌다 마법사인 걸 잊고 살려 했는데, 영주님의 소문을 듣게 됐습니다. 혹시 영주님 같은 분이면 저를 받아 주시지 않을까 해서 왔습니다. 영주님이 거절하셔도 그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적은 확률이라도 저로 인해 마실리 마탑과 하킨스 백작과 관계가 나빠질 수도 있으니까요.”

자포리자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의 말대로 작은 확률이긴 하지만, 분명 왕국의 실세와 척을 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킨스 백작은 자포리자라는 귀족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 터.

하지만 그렇다고 처음부터 안 좋은 관계를 맺을 필요는 없었다.

더군다나 겨우 3서클 마법사 한 명을 얻는 걸로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포리자는 하칸을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그는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미리 겁을 먹고 몸을 사릴 생각이 없었다.

지금은 영지의 발전에 도움이 된다면 무엇이든 수용할 것이었다.

만약 먼 훗날, 이 일로 문제가 발생한다고 해도 그는 충분히 헤쳐 나갈 자신이 있었다.

그때쯤 되면 자신이 하킨스 백작보다 우위에 서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으니까.

“하칸 얀디슈, 환영하네. 우리 영지에도 이제 마법사 정도는 있어 줘야지. 자네가 생활해 보며 알아 가겠지만, 우리 영지가 다른 곳보다 훨씬 발전돼 있다고 느껴질 걸세. 이제 스탄바이아의 영지민이 됐으니, 그에 맞춰 좋은 활약을 기대하지. 연구 마법사이니만큼 그에 따른 지원도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마음 편하게 제2의 인생을 살아 보게나. 참고로 나는 검은색 머리카락을 매우 좋아하니, 이곳에서 머리카락 색으로 인한 차별은 없을 걸세.”

“네?”

하칸은 자포리자의 말에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그가 듣기로 자포리자 영주가 공정하며 개혁적인 인물이라고 이야기를 듣기는 했으나, 자신을 받아 줄 확률은 거의 없다고 생각했다.

베르아스 왕국의 제일 끝에 있는 스탄다비아까지 온 이상,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자포리자에게 접견을 신청했다.

지금까지 혹시나 자신을 받아 줄 영주가 있을까 싶어 몇 번 시도 했지만, 결과는 당연히 좋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을 잡아 하킨스 백작과 줄을 대려고 하는 영주도 있었다.

빠르게 눈치를 채고 도망가지 않았다면, 자신은 노예보다 더 비참한 삶을 살 뻔했다.

이제는 마법사로서의 삶은 거의 접은 상태였다.

다른 나라로 가는 방법도 있었지만, 국경을 넘어간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힘들게 탈출해서 다른 나라를 간다고 해도 3서클밖에 되지 않는 검은 머리 밀입국자를 환영해 줄 리도 없었다.

엄청나게 고민하고 마지막으로 시도해 본 일이 너무도 쉽게 해결이 되자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마치 자포리자가 자신을 놀리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집사.”

“네, 영주님.”

“일단 하칸이 편히 쉴 곳을 안내해 주고, 사미르에게 필요한 것들을 지원하라고 하게.”

“알겠습니다. 하칸 님, 저를 따라오시죠.”

“아… 네.”

하칸은 얼떨떨한 얼굴로 집사를 따라나갔다.

스탄다비아에도 마법사가 생겼다.

이 일은 자포리자뿐만 아니라 경일에게도 큰 도움이 될 터였다.

* * *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직감한 경일이 빠르게 옥상의 담벼락으로 가서 밑을 내려다봤다.

건물의 입구에 두 무리의 사람들이 서로 대치하며 욕과 함께 고성이 오가고 있었다.

“개새끼들아, 감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더러운 몸뚱이를 들이미는 거야? 좋은 말할 때 꺼져라. 여긴 너희 같은 개새끼들이 올 곳이 아니야!”

새로 나타난 무리에게 욕과 함께 고함을 내뱉고 있는 이는 자신을 미행하던 신화 길드 헌터 중 한 명이었다.

“이런 니기미. 하여간 신화, 이 개새끼들이 돈 냄새 하나는 기가 막히게 맡는다니까. 씨발, 꼭 다 된 밥에 초를 친단 말이야.”

“이런 대복 머저리들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우리가 작업을 시작한 지가 언젠데, 누가 초를 쳐. 이미 작업 다 끝내고 먹기만 하면 되는 순간에 나타난 게 누군데 헛소리야? 좋은 말할 때 너희 동네로 꺼져라. 너희 같은 허접한 놈들이 끼어들 판이 아니다.”

“뭐라는 거야, 비열한 뱀 새끼 밑에서 똥꼬나 빠는 새끼들이. 무슨 개소리를 씨부렁거리는 거야?”

“뭐? 비열한 뱀 새끼라고? 너 이 새끼 말 다했냐? 오늘 진정 죽고 싶냐?”

대복 길드 헌터가 곽마권을 비열한 뱀 새끼라고 놀리자 눈이 뒤집히며 길길이 날뛰었다.

“씨발, 맨날 등 뒤에서 음흉하게 잔머리나 굴리는 새끼를 비열한 뱀 새끼라고 하지, 아니면 뭐라고 불러야 해? 찐따 새끼? 아니면 간신 새끼? 그것도 아니면 변태? 응? 네가 한번 말해 봐. 아직도 더러운 똥파리 날개나 찢으면서 버둥거리는 거나 보면서 기뻐하는 거 아냐?”

길길이 날뛰는 신화 길드 헌터에게 대복 길드 헌터는 전혀 밀리지 않았다.

두 길드는 서로 원수지간인 건, 이 동네 헌터라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저번에 벵갈 길드의 일로 두 길드가 한 번 충돌할 뻔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곽마권의 신묘한 전략에 결국 대복 길드가 제대로 힘 한 번 쓰지 못하고 뒤통수를 맞는 걸로 끝이 났다.

원래 감정이 안 좋은데 그때의 사건까지 겹쳤으니, 대복 길드 헌터들의 뚜껑이 열리는 건 당연했다.

서로 기회만 있으면 서로 물어뜯으려는 두 길드가 운명의 장난인 듯 경일이라는 먹잇감을 중간에 두고 만났다.

그것도 보통의 먹잇감이 아니었다.

자신들의 입이 찢어져도 삼키기 어려울 만큼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크고 맛있는 고기였다.

굶주린 들개 떼가 최고급 먹이를 놓고 서로의 목을 노리고 있는 형상이었다.

서로 나누어 먹어도 배불리 먹을 수 있을 만큼 먹이는 컸지만, 애초애 이들의 머릿속에는 협력이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았다.

서로를 노려보는 그들의 눈에서 불꽃이 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런 그들의 분위기는 옥상에서 사태를 지켜보고 있는 경일에게도 전달이 되었다.

골똘히 생각하던 경일은 인벤토리에 칼을 도로 집어넣었다.

아까와의 비장한 걸음걸이와는 다르게 가벼워진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경일이 입구에 모습을 드러내자 두 길드간의 긴장감이 급속도로 높아졌다.

경일은 속으로 작은 미소를 띠었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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