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117화 (117/300)

[117화] 칼자루

“하하, 뭘 그리 넋을 잃고 바라봅니까?”

대장장이가 차가운 물에 넣어 열처리를 끝낸 강철을 내려놓으며 션에게 말을 붙였다.

누군가가 자신이 일하는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보는 모습에 절로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아, 그게 말입니다. 워낙 대단해서요. 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후련해지는 기분입니다. 그렇게 뜨거운 철을 가볍게 다루시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션이 감동한 얼굴로 칭찬하자, 대장장이는 기분이 좋아졌다.

“큼큼.”

대장장이는 입술을 실룩거리며 헛기침했다.

션은 대장장이가 기뻐하는 모습을 놓치지 않고 더욱 살갑게 그를 칭찬했다.

그렇게 매일 대장간을 다니면서 그에게 살뜰하게 굴었고, 몇 번 술자리를 가졌다.

그의 호감을 충분히 산 션은 오늘을 디데이로 잡고 가장 좋은 술집으로 그를 안내했다.

“형님, 앉으십시오.”

션은 대장장이를 형님이라 불렀다.

사실 나이는 션이 두 살 많았지만, 지금은 동생이란 포지션이 일을 진행하기에 훨씬 수월했다.

“허~ 여기 많이 비싸 보이는데, 이런 곳에서 먹어도 괜찮아?”

대장장이가 술집을 둘러보며 말했다.

“어휴, 형님 같은 대단한 장인에게는 오히려 이런 술집이 모자라죠. 더 좋은 곳으로 모시고 싶었지만, 그나마 이 동네에선 여기가 가장 좋습니다. 오늘은 이 동생이 다 알아서 할 테니, 형님은 부담 없이 드시기만 하면 됩니다.”

션이 장인이라고 말하며 띄워 주자 대장장이는 술을 마시지도 전에 눈이 풀릴 지경이었다.

사실 그가 대장간에 들어온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션이 자신을 대단하다고 칭찬하고 있지만, 사실 자신이 하는 일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새빨갛게 불에 달궈진 쇠를 다루니 대단해 보일 수 있지만, 사실 정교한 작업을 하기엔 그의 실력이 아직 많이 부족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션의 혀는 기름칠하듯 그의 기분을 구름 위에 올려놓았다.

대장장이는 대장간에 취직하면서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있으나, 얼마 전까진 하루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가난했다.

그러다 보니 이렇게 좋은 술집은 인생에 처음이었고, 그는 션에게 마음의 빗장을 풀었다.

분위기는 화기애애하게 이어졌고, 얼큰하게 술이 들어가자 션이 살짝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대장장이는 그의 표정을 보더니 물었다.

“션, 무슨 걱정이라도 있어? 아까부터 표정이 안 좋아 보이는데.”

“아, 그게 말이죠… 아닙니다.”

션은 말을 할 듯하면서 하지 않았다.

그런 션의 태도에 대장장이는 안달이 나기 시작했다.

“뭔데 그래. 이 형에게 털어나 봐. 혹시 알아? 내가 도움이 될지?”

“하~ 이거 말하면 안 되는데…….”

“괜찮아. 날 믿고 말해 봐.”

“그럼 형님만 믿고 이야기하겠습니다. 대신, 어디 가서도 이야기하시면 안 됩니다.”

“그래. 걱정하지 말고 얼른 얘기나 해 봐.”

궁금증이 솟구친 대장장이는 션을 닦달했다.

“사실 제 친형이 용병입니다. 상인을 호위하면서 전국을 돌아다니는데, 얼마 전에 몬스터를 만나 죽을 뻔했다지 뭡니까. 상처를 크게 입는 바람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저는 형이 용병 일을 관두길 원하지만, 형이 결혼을 일찍 하는 바람에 조카들이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몬스터에게 죽을 뻔한 트라우마가 아직 사라지지도 않았을 텐데, 다시 일을 나서는 모습이 안쓰러워서…….”

“걱정이 많겠군, 그래.”

대장장이가 자기 일인 것마냥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며 말했다.

“말이 나온 김에 말씀드리는 건데, 저기… 그게… 형님.”

션이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망설였다.

“아니, 왜 말을 하다 마는가. 뒷간 가서 뒤를 안 닦고 나온 거처럼 찝찝하게.”

얼큰하게 취한 대장장이는 션을 진심으로 걱정했다.

“그래서 말인데. 제가 검을 하나 살 수 없겠습니까? 아무래도 무기라도 좋으면 훨씬 안전하지 않겠습니까? 이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알고 있긴 하지만, 형님이 아니면 누구에게 말하겠습니까? 대신 돈은 달라는 대로 줄 수 있습니다. 친형을 위한 일인데, 그 정도도 못 하겠습니까.”

션이 간곡하게 대장장이에게 부탁했다.

처음 검을 구해 달라는 말에 난색을 보였으나, 돈을 달라는 대로 준다는 말에 대장장이는 관심이 갔다.

요 며칠간 자신을 극진히 대하는 모습에 이미 마음이 기울었는데, 돈까지 지급하겠다는 말에 욕심이 생겼다.

더군다나 씀씀이가 작지 않았다.

집에 한창 커 가는 아들이 생각난 그는 결국 유혹에 넘어갔다.

“흡흡, 그게 말이지, 관리를 매우 엄격하게 해서 말이지. 웬만하면 동생 부탁을 들어주고 싶은데 말이야.”

대장장이는 말끝을 흐렸다.

션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분명 말은 거절이었지만, 뜻은 그런 게 아니었다.

곧바로 션이 말했다.

“쉬운 일이 아닌 건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5골드를 준비했습니다. 이 정도면 형님도 섭섭지 않을 겁니다.”

검 한 자루에 5골드만 절대 적은 돈이 아니었다.

좋은 품질의 검도 50페니면 살 수 있었다.

물론 강철로 만든 검이면 훨씬 비싸겠지만, 강철로 만든 무기는 판매용이 아니었으니 특별한 시세가 없었다.

더군다나 자기 것을 파는 것도 아니다 보니 5골드라는 액수는 대장장이의 마음을 충분히 만족시켰다.

그의 얼굴에 엷은 홍조가 떠올랐다.

이쯤 되면 일이 거의 성사된 거나 다름없었다.

자포리자는 엄격하게 병사들의 무기를 관리했지만, 분명 허점이 존재했다.

션은 그 허점을 교묘하게 파고들었다.

급격하게 비대해진 대장간은 아직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경일이 제공하는 고철의 무게를 잴 수 있는 수단이 없는 만큼, 대장장이가 마음만 먹으면 검 한 자루는 충분히 빼돌릴 수가 있었다.

열한 개를 만들어 열 개만 납품하면 누가 알겠는가.

그렇게 션은 세 가지 일 중 무기를 확보하는 일을 가장 먼저 해냈다.

루드웨어는 매일 이들을 불러 닦달했다.

션은 한 가지 일을 완수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하게 그의 잔소리만 들을 뿐이었다.

덕분에 테이의 사정도 속속들이 알 수 있었다.

테이는 여전히 병사와 친분을 쌓고 있었다.

그가 보기에 테이는 시간 내에 한 가지 일도 성공하기 힘들어 보였다.

그들은 오늘도 루드웨어의 잔소리를 실컷 듣고 쫓겨났다.

테이는 시무룩했지만, 션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션은 테이를 먼저 보내고 루드웨어의 집으로 돌아갔다.

루드웨어는 한창 화를 가라앉히고 있는데, 션이 다시 오자 못마땅한 눈으로 노려봤다.

“저기, 형님.”

션은 루드웨어의 눈초리를 무시하고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야?”

루드웨어가 곱지 않은 목소리를 냈지만, 션은 개의치 않고 말했다.

“활동비가 부족해서 그런데, 조금 더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션이 공손하게 말했다.

최대한 평상시와 같은 표정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의 가슴은 흥분과 걱정으로 두근거렸다.

그는 루드웨어를 실험하고 있었다.

루드웨어는 분명 훨씬 많은 돈을 가지고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처음부터 이 일의 기간을 정했다.

매일 자신들을 불러 닦달하는 것을 보니, 그 기간을 꼭 지키고 싶어 하는 것이 보였다.

션은 빠르게 상황을 읽었다.

만약 여기서 루드웨어가 순순히 활동비를 내놓는다면 자신의 생각이 들어맞았다는 의미였다.

루드웨어는 션이 활동비를 달라는 말에 눈을 크게 뜨고 놀라고 있었다.

많은 돈을 받고도 아직 아무런 성과도 올리지 못했으면서 뻔뻔하게 활동비를 더 요구하고 있었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10골드나 줬는데, 벌써 그 돈을 다 썼다고?”

“그게… 여기저기 기름칠을 하다 보니…….”

“그건 네놈 사정이고. 분명 활동비 10골드에 일을 하나씩 성공할 때마다 30골드를 걸었는데, 지금 와서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야?”

루드웨어가 입에 거품을 물고 화를 냈다.

알리사에서 이런 말을 했다면 곧바로 목을 치거나, 병신을 만들어 줬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자신이 힘이 통하지 않는 스탄다비아였다.

그런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션은 쫄지 않았다.

오히려 당당하게 루드웨어의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럼 할 수 없네요. 전 이만 빠지겠습니다.”

션은 말을 끝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섰다.

생각지도 못한 션의 반응에 루드웨어가 크게 당황했다.

그의 귓불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션이 설마 자신의 앞에서 이런 건방진 행동을 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감히, 감히, 감히!’

걷잡을 수 없이 치밀어 오르는 화로 인해 살갗이 파르르 떨리고 핏대가 섰다.

하지만 그는 화를 표출하지 못했다.

화를 내기엔 그의 상황이 너무 좋지 못했다.

이미 10일이나 지났고, 그에게 10골드나 주지 않았는가.

다른 놈을 투입하자니, 이놈을 대체할 만큼 똑똑한 부하가 없었다.

더군다나 이 일을 아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자신에게 좋을 게 없었다.

그가 악감정을 품고 밀고라도 해 버리면 자신은 끝장이었다.

루드웨어가 바보가 아닌 이상, 달라진 션의 태도를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알리사 때의 그가 아니었다.

션은 더 이상 자신에 대한 존중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둘 사이의 공기가 압축되었다.

약간의 충격에도 폭발할 거 같은 분위기가 이어졌다.

‘여기서 그냥 죽여 버릴까?’

그의 가슴에서 살심이 피어났다.

하지만 그는 곧 그 계획을 철회했다.

션은 이미 이 상황을 예상했는지 문을 등지고 서 있었다.

빈손인 자신이 아무리 빨라도 션을 잡기엔 불가능해 보였다.

루드웨어는 나름 똑똑한 놈을 뽑긴 했으나, 션은 그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똑똑했다.

그는 두 손을 번쩍 들었다.

항복의 표시였다.

‘이 정도로 똑똑한 놈이니 일을 성공시킬 확률도 훨씬 높을 거야. 일단 내 목숨이 걸린 일이니, 일부터 성공시키자. 기회는 지금만 있는 것이 아니야. 감히 비천한 피를 가진 놈이 나를 농락하다니. 이 일이 끝나면 반드시 죽여주마.’

루드웨어는 마음속으로 이를 갈았다.

“얼마를 더 원하지?”

그가 굳은 얼굴로 물었다.

“20골드가 필요합니다.”

“뭐?”

루드웨어는 순간 자신이 잘 못 들은 줄 알았다.

션은 자신이 처음 걸었던 성공 보수인 20골드를 원했다.

아니, 10골드를 이미 줬으니, 지금 성공 보수인 30골드를 원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겨우 억눌렀던 살심이 다시 튀어나오려 하고 있었다.

‘제기랄, 저 개 같은 놈이 한 번 봐줬더니 머리끝까지 기어오르는구나.’

루드웨어의 돈 욕심은 끝이 없었다.

무려 600골드나 걸린 일인데, 그는 겨우 20골드를 더 주는 일을 고민했다.

고귀한 피를 가졌다고 입버릇처럼 떠들고 다녔으면서 그의 그릇은 간장 종지보다 작았다.

하지만 이 싸움은 애초에 루드웨어가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결국 그는 션의 손에 20골드를 쥐어 줘야 했다.

‘흥! 네놈이 나보다 힘이 셀지는 몰라도 머리는 내가 훨씬 좋아. 알리사에서야 힘이 센 게 최고였지만, 여기선 넌 아무것도 아니야. 네놈의 수작을 내가 모를 줄 알아? 칼자루는 나에게 넘어왔어. 멍청한 테이는 절대 이 일을 성공시키지 못 할 거야. 내가 네놈이 가진 돈을 모두 뺏어 주지. 돈을 주지 않고 어디 버틸 수 있는지 두고 보자고. 과연 얼마나 많은 돈을 가지고 있을까?’

션은 뜻한 바대로 20골드를 손에 넣었지만, 욕망의 불꽃은 더욱 크게 타올랐다.

그렇게 션의 예상대로 테이가 여전히 아무런 성과를 올리지 못할 동안, 그는 호감을 얻은 병사에게 술을 잔뜩 먹여 결국에는 마나 연공법의 구결을 빼내는데 성공했다.

대장장이에게 써먹은 형이 다쳤다는 이야기는 병사에게도 통했다.

좋은 술과 맛있는 안주에 결국 그는 술에 취해 비몽사몽간에 마나 연공법을 털어놓았다.

병사는 내일 자신이 말한 것을 기억이나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아는 사람이 많은 이상, 비밀을 지키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일지도 몰랐다.

이제 비누의 비법만 빼내면 되었다.

스탄다비아에 독버섯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지만, 자포리자는 이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 * *

오래간만에 찾아온 평화였다.

신화 길드와 대복 길드는 거의 해체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두 길드의 주력은 상잔하다 모두 죽었다.

길드장은 실종됐고, 자연히 길드는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두 길드가 맡고 있던 암시장은 살점이 두둑하게 붙어 있는 고기였고, 욕심 많은 다른 길드들이 탐내는 것은 당연했다.

암시장을 두고 여러 길드 간의 이권 다툼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와중이지만, 그건 경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야기였다.

경일은 사건이 마무리된 후, 던전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3일간 푹 쉬었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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