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당황스러운 고백
한가롭게 헤엄치는 연못의 물고기를 보며 물 멍을 때렸고 저녁엔 모닥불을 보며 불 멍을 때렸다.
그동안 받았던 모든 스트레스가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오래간만에 자신을 위한 요리를 만들었다.
승리를 자축하며 커다란 등심 한 덩이를 불 위에 올렸다.
넉넉하게 식용유를 바른 프라이팬에 등심이 지글지글 소리를 내며 익어갔다.
두께가 두꺼운 만큼 집게로 자주 돌려가며 모든 면을 골고루 익혀 주었다.
불을 줄여주고 버터를 듬뿍 녹여 고기에 계속 끼얹었다.
맛있는 냄새에 입에 침이 고였다.
고기를 자르자 단면은 분홍빛을 내며 잘 익어 있었다.
간단하게 만든 소스를 고기에 끼얹고, 채소 가니쉬를 곁들이니 멋진 요리가 완성되었다.
고기를 깨물자 고기의 육즙이 뿜어져 나왔다.
진한 고기의 육향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절로 행복해지는 맛이었다.
붉은색의 와인이 든 잔을 우아하게 들어 마셨다.
누군가 보고 있다면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이지만 던전의 자신만의 세상이기 않은가.
온갖 허세와 겉멋을 부리며 언젠가 고전 영화에서 봤듯이 하얀 손수건을 와이셔츠 깃 안으로 넣었다.
“짜릿하구나. 이것이 승리의 맛이지.
이 기쁨을 나의 영혼의 벗인 던전과 스탄다비아와 나누겠습니다.”
던전에서의 평화로운 밤이 깊어 갔다.
분식점에도 새로운 변화가 불었다.
입구에는 구청에서 발급한 식중독 검사 결과지가 붙어 있었다.
모든 항목이 음성이었다.
그리고 경일은 과감히 음식의 모든 값을 올렸다.
음식값은 5배로 오늘의 안주는 10배로 올렸다.
“사장님 이렇게 비싸게 팔면 아무도 오지 않을 거 같은데요.”
오래간만에 출근한 손주아가 이상한 눈으로 경일을 쳐다봤다.
“그래, 손님이 오지 말라고 그러는 거야.
이번 사태도 전부 외지 손님 때문에 일어난 거고.
난 앞으로는 동네 사람들 이외의 손님은 받지 않을 생각이야.
처음 가게를 열었을 때부터 그럴 생각이었는데, 멀리서 오는 손님을 이대로 돌려보기가 미안해서 거절하지 못한 게 실수였어.
내가 음식을 싸게 파는 건 이 동네 사람들을 위한 거지, 잘 사는 외지 사람들의 입을 즐겁게 해주려는 것이 아니거든.
돈 많은 인간들은 비싸고 맛있는 집에서 먹으라고 하고 우리 같은 서민들은 싸고 더욱 맛있는 음식을 먹어야지. 안 그래?”
경일의 눈에 살짝 광기가 비치자 손주아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떡였다.
그의 말이 지나치게 호전적이긴 했지만, 식중독 사태의 원인이 외지인들의 탓이라면 경일의 마음이 이해되기도 했다.
행패를 부리던 덩치 큰 손님들도 전부 이 동네 사람들이 아니니 어떻게 보면 그게 현명한 방법인 것도 같았다.
“그런데 사장님. 그럼 매상이 많이 떨어지지 않을까요?”
“매상은 떨어질 수도 있겠지.
하지만 수입은 크게 떨어지지는 않을 거야.
어차피 오늘의 안주는 마진도 거의 없으니.”
“하긴 오늘의 안주는 무지막지하게 싸긴 하죠.
그동안 미순이가 여기서 음식을 못 먹어서 금단 현상에 걸렸어요.
원치 않은 다이어트를 한 셈이죠.
저도 덕분에 살이 좀 빠졌어요. 어때요? 사장님”
손주아가 귀밑의 머리를 뒤로 넘기고 날씬한 몸매가 더욱 잘 보이게 포즈를 잡았다.
“야 이년아. 사장님한테 꼬리 치지 말라고 했지.”
벼락같은 소리에 깜짝 놀란 손주아가 놀아보니 이미순이 노려보고 있었다.
“넌 언제 왔어?”
“네가 꼬리를 칠 거 같아서 얼른 달려왔지.
도도했던 손주아는 어디 가고 이런 푼수 댁이 됐데.
어머, 사장님 오래간만이에요.
고생 많으셨죠.
저희도 걱정 많이 했어요.
친구들이랑 구청에 민원도 넣어보고 따지기도 했는데 그때는 상대도 안 해주더니 어제 죄송하다고 따로 연락이 왔어요.
사람들이 왜 그러는지 몰라.
이렇게 좋은 일을 하시는 사장님을 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지.”
이미순은 언제 순주아를 구박했다는 듯이 경일을 보고서는 금세 표정을 바꿔 환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고는 그녀 특유의 수다를 떨었다.
“이렇게 깨끗한데 식중독이라니. 제대로 볼 줄도 모르는 눈은 왜 달고 다니나 몰라. 공무원들이란 사람들이 시민들보다 오히려 기본 상식이 더 없어요.
내가 이 동네에 사장님 음식 먹고 식중독 걸렸다는 사람을 본 적이 없는데.
우리가 못 산다고 신선한 재료를 구분도 못 하는 바보로 보는 건지.
사장님 음식 먹고 다른 얼마나 건강해졌는데.
도대체 이런 일이 왜 생기는지 모르겠어요.”
경일은 속이 뜨끔했다.
이 일은 전부 자신 때문에 일어난 것과 마찬가지였다.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어쨌든 자기 꼬리가 밟히는 바람에 일어났다.
“사장님 아무래도 단단히 마가 낀 거 같은데.
제가 아주 용한 무당 언니를 알고 있거든요.
한번 만나서 이야기를 해보세요.
그 무당 언니가 얼마나 용하면요.
우리 언니가 시집을 못 간 거랑 히스테릭한 성격까지 알아맞히더라니 깐요.
도대체 왜 우리 언니는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지 그게 너무 궁금해서 물어봤더니 글쎄.... 그 이유를 이야기해주는 데 소름이 다 끼치더라니 깐요."
이미순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지 팔로 배를 칭칭 감더니 그 큰 눈을 떨어 됐다.
"글쎄 전생에 내가 언니였는데요. 언니가 동생이고.
그런데 내가 언니 구박을 많이 했대요.
그래서 이번 생에는 그 죄를 갚기 위해 내가 동생으로 태어난 거래요.
그러니 어쩔 수가 없대요.
그래서 그날 이후로 마음을 비우고 살아요.
언니가 나한테 화를 내도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요.
그랬더니 저한테 마음의 안정이 찾아오는 거 있죠.
이제는 스트레스도 하나도 안 받고 하루하루가 즐거워요.
사장님도 무당 언니 한번 만나보세요.
인생이 새롭게 보인다니깐요.”
이미순이 순정만화의 주인공 소녀처럼 빤짝이는 눈을 씩씩하게 떴다.
그와 반대로 손주아의 표정이 썩어 갔다.
“야 이 한심아. 안 그래도 요즘 미자 언니가 너 때문에 스트레스성 탈모가 온대. 그나마 옛날에는 말을 하면 알아들었는데,
요즘은 얘가 이상해졌다고 나한테까지 와서 물어보더라.
무슨 말을 해도 반응도 없고, 혼자 비실거리고 웃기나 하고.
아주 복장이 터져 죽을 지경이래.
미용실에서 맨날 사고치고 심심하면 술을 먹고 늦게 출근하고.
요즘은 아예 술고래가 됐다면서?
집안에 여기저기에 굴러다니는 소주병을 밟았다가 언니가 황천 갈 뻔했다더라.
무슨 여자아이가 알코올 중독이냐면서 너 본가로 보낼 생각까지 하고 있던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너랑 진지하게 이야기 좀 해보던데.
그게 다 이상한 무당은 만나서 그런 거라니.
넌 얘가 왜 그러냐?
좀 맹한 곳이 있는 건 아는데.
무슨 다 큰 여자가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을 못 하냐?
아무리 바보래도 그렇지 그런 뻔한 이야기를 믿냐?
너 복채도 지갑 채로 주고 왔지?
용하다고 손님들한테도 권하고.
아이고 이거 큰일 났네.
너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 거 같다.
이번에는 진짜 쫓겨날 거 같은데 그럼 이 맛있는 음식도 못 먹고.
쯧쯧쯧 이 언니가 미리 애도의 뜻을 전하마. 잘 가. 나의 친구야"
손주아가 애처로운 표정으로 이미순을 바라보며 손을 들어 안녕하고 인사를 건넸다.
"사장님 급한 일이 있어서 나중에 올게요."
그녀의 말에 이미순은 뜨끔 했는지 급하게 인사를 하고 나가버렸다.
“어휴 저 바보”
손주아가 그런 그녀의 뒤 모습을 걱정했다.
경일은 이미순이 술고래가 됐다는 데서 자신의 책임도 조금 있는 거 같았다.
‘미순 씨 건강을 생각해서 단골에서 빼버릴까?
아니지. 그건 너무했네’
그의 얼굴에 피식하고 작은 웃음이 걸렸다.
이런 소소한 일상이 자신이 원하는 삶이었다.
이번에 한번 큰일을 겪고 나니 이 소소한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더욱 크게 깨달았다.
새롭게 문을 열고 나서 며칠 동안은 조용했지만, 이전 단골들이 한 명 두 명 다시 찾아왔다.
경일은 그들을 웃음으로 맞이했다.
분식점에 들어온 손님이 인상된 가격을 보고 하나같이 ‘헉’하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 밑에 크게 '이 동네 분들은 이전 가격입니다.' 이라는 글을 보고 안심하고 주문했다.
가장 기쁜 건 역시 동네 아이들이 돌아온 것이었다.
수한이를 필두로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동안 험상궂은 어른들이 분식점을 포위하듯 감싸고 있었으니 아이들이 올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매대에 놓인 떡볶이와 어묵, 튀김, 만두를 보고 침만 꼴깍 삼킬 뿐 먹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저씨 가격이 오른 거예요? 돈이 없는데”
앞접시를 앞에 놓아도 먹지 않는 모습에 이상했는데 그제야 이유를 알았다.
“하하하 아니야. 저건 너희들과 상관이 없어.
다른 동네 사람들이 너무 많이 찾아와서 그런 거니깐 너희는 신경을 쓰지 말고 예전처럼 먹고 싶은 만큼 먹고 1,000원만 내면 돼”
아이들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언제부턴가 떡 볶기와 어묵, 튀김, 만두는 동네 아이들에게 1,000원짜리 뷔페가 되었다.
“아저씨 보고 싶었어요.”
앙증맞게 생긴 여자아이가 떡 볶기를 우물거리면서 말했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절로 얼굴에 함박웃음이 걸렸다.
보고 싶었다는 아이의 말이 경일의 가슴에 꽃을 피웠다.
“아저씨도 이쁜 선화가 너무 보고 싶었어.
맛있어?““네 맛있어요. 오래간만에 먹어서 그런지 더 맛있어요.”
“물도 먹어가면서 천천히 먹어. 오늘은 우리 귀염둥이들을 다시 만난 기념으로 아저씨가 오늘은 전부 공짜로 줄 테니 천천히 많이들 먹어”
“신난다.”
“감사합니다.”
“네”
“아저씨. 최고”
아이들이 다양한 말로 경일을 칭찬했다.
그런데 그중 한 아이만 화가 난 듯한 얼굴로 경일을 노려봤다.
"아~"
경일은 곤란한 듯 눈동자가 흔들렸다.
"시환아 어묵탕 국물 더 줄까?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얘기해"
"없어요."
시환은 퉁명스럽게 말하고는 힐끗 만두를 쳐다봤다.
경일이 재빨리 만두를 챙겨 시환의 앞접시에 놓았다.
그런 뒤 딴 곳을 보자 시환이 못 이기는 척 만두를 먹었다.
시환이 화가 난건 모두 지유 때문이었다.
"난 너 좋아해"
며칠 전 시환이 용기를 내어 지유에게 고백했다.
발그스레한 얼굴로 부끄러운 듯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생에 처음 아이의 마음속에 찾아온 사랑을 표현했다.
"나 좋아하는 사람 있어."
안타깝게도 시환의 마음은 지유에게 닿지 못했다.
아이의 설레던 얼굴이 멍해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누군데?""음 분식점 아저씨. 나중에 크면 결혼할 거야"
지유는 시환의 마음도 모른 채 생각으로만 기분이 좋은지 생기가 득한 얼굴로 눈빛을 반짝였다.
시환은 지유 앞에서 울지 않으려 곧바로 뒤돌아 뛰었다.
목적지는 동네 분식이었다.
"아저씨. 지유가 아저씨 좋아한대요.
내가 분명 좋아한다고 했는데 지유는 아저씨만 좋데요.
엉 엉 엉"
매대에서 떡볶이를 만들던 경일의 손이 멈췄다.
너무 당황해서 그대로 얼어버렸다.
시환은 서럽게 울고 경일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발만 동동 구르고.
태어나 처음 실연의 아픔을 겪은 시환은 한참을 울다가 그렇게 돌아갔다.
그 뒤로 시환은 경일만 보면 노려봤다.
떡볶이랑 만두는 먹고 싶고, 경일은 자신도 좋아하는 아저씨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사랑을 뺏어간 나쁜 아저씨기도 하고 시환은 복잡한 표정으로 만두를 먹었다.
경일은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몰래몰래 시환의 모습을 훔쳐봤다.
그들이 내뿜는 천진난만한 밝은 기운에 덩달아 경일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도 사라졌다.
“수한아, 이거 엄마 가져다드려.”
경일은 한동안 못 챙겨 주었던 비후초가 들어간 죽을 주었다.
사실 이번일 적에 동네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미순과 같이 일부 동네 사람들은 구청에 가서 민원을 넣고 담당 공무원에게 따졌다.
손주아는 위험을 무릅쓰고 출근해서 경일을 도우려 했고 수한의 아버지는 던전을 가지 않는 날은 매일 분식점에 찾아왔었다.
자신이 스캐빈저라고 해도 10레벨의 헌터였고, 일반인은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분식점의 테이블을 차지 하는 덩치들을 쫓아내려다 크게 싸움이 붙을 뻔한 적도 있었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