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강적의 등장
랜튼의 체격과 움직임만 보아도 그가 날랠 것이라고 짐작하는 건 쉬운 일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랜튼의 속도가 상대의 예상보다 더 빠르다는 점이었다.
그러다 보니 상대는 첫수부터 궁지에 몰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제법 실력이 있군. 명색이 몬스터와 매일 싸우는 영지의 영주다 이거지… 하지만 실력에 비해 마나는 많이 떨어져. 마나 연공법을 얻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다행이야. 만약 마나 연공법을 오래전부터 익혔으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군. 이 정도 센스가 있는 인물이 마나까지 완벽했으면… 어찌 됐건 여기를 어떻게 알고 나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녀석만 잡으면 승기는 우리한테 있다.’
랜튼은 비록 첫 공격이 실패했지만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검술과 소드 익스퍼트 하급이라는 경지를 믿었다.
소드 익스퍼트는 오러 유저의 한 단계 위 등급이었다.
한 단계 위의 등급이라고 하지만, 그 사이의 갭은 매우 컸다.
묵직하면서도 뭉친 듯 자신의 검에 피어오르는 오러와 자포리자의 롱소드에 서린 뭉치지 못하고 퍼진 듯한 오러를 비교하면, 그 농도가 눈으로도 구분이 될 정도로 확연히 달랐다.
“빠르군.”
자포리자가 짧게 감탄한 뒤, 거리를 벌렸다.
“쳇, 덩치는 곰인데 그런 기술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네.”
랜튼은 바닥에 침을 한 번 뱉었다.
자포리자가 몸에 힘을 빼고 랜튼을 향해 빠르게 롱소드를 뻗었다.
“어림없지.”
랜튼이 재빨리 칼을 사선으로 내려 자포리자의 롱소드를 흘렸다.
하지만 자포리자의 장점은 큰 덩치에 어울리는 강력한 힘이었다.
그는 오로지 힘만으로 롱소드의 궤적을 바꾸어 버렸다.
“이런!”
직선으로 찔러 오던 롱소드가 순식간에 방향을 바꿔 횡으로 휘둘러졌다.
랜튼은 반대편 손까지 칼등에 갖다 대며 곧 다가올 충격에 대비했다.
쩡!
무거운 소리와 함께 랜튼이 옆으로 쭉 밀려 났다.
“무식한 힘이군!”
랜튼의 감탄이 끝나기도 전에 자포리자의 공격이 이어졌다.
롱소드의 무지막지한 길이는 간단한 손목의 움직임만으로도 검 끝에 큰 움직임을 줄 수 있었다.
그에 반해 짧은 검을 들고 있는 랜튼은 큰 움직임으로 롱소드를 막아 낼 수밖에 없었다.
자포리자가 마치 펜싱을 하듯이 손목의 작은 움직임으로 공격을 이어 가니 랜튼은 방어하기에 급급했다.
랜튼은 더욱 빠르게 스텝을 밟으며 자포리자와의 거리를 줄이려고 애썼다.
지금의 거리는 상대에게만 유리했다.
그러니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으로 바꿀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자포리자와의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자포리자는 귀신같은 감각으로 자신의 움직임을 읽고 뒤로 물러나 거리를 유지했다.
그러다 보니 자포리자의 롱소드는 자신의 몸을 위협하고 있는데 반해, 자신의 검은 아무리 크게 휘둘러도 자포리자의 몸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이런 씨발!”
랜튼의 호흡이 점점 가빠져 왔다.
자포리자 입장에서는 가볍게 휘두른 롱소드지만, 거기에 실린 힘은 적지 않았다.
그 공격을 사력을 다해 막아야 하다 보니 체력이 쭉쭉 빠졌다.
‘이럴 수가, 내가 촌구석의 이름도 없는 영주 따위에게 이렇게 밀린다고?’
랜튼의 눈이 조금씩 경악으로 물들어 갔다.
하지만 그는 소드 익스퍼트 초급을 넘어 중급에 가까운 실력자였다.
랜튼은 흥분을 가라앉히며 이 상황을 냉정하게 분석했다.
이대로 싸움이 흘러가면 자신이 질 확률이 매우 높았다.
그렇지만 자신이 쓸 수 있는 전략은 한 가지만 있는 게 아니었다.
거리를 줄이기 힘들다면 다른 방법을 쓰면 됐다.
랜튼은 무리해서 더 많은 마나를 밀어 넣었다.
검에 맺힌 오러의 빛깔이 더욱 짙어지며 더 단단한 형태를 갖추어 갔다.
그가 주목한 것은 마나였다.
자포리자의 검술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자신과는 마나를 이해하는 수준이 달랐다.
그는 자신의 성가시게 하는 자포리자의 롱소드를 아예 부숴 버릴 생각이었다.
랜튼은 공격 대상을 자포리자에서 그의 롱소드로 바꾸었다.
쩡쩡쩡!
두 개의 검이 부딪치면서 나는 소리가 조금 전까지와는 확연히 다르게 묵직했다.
마치 랜튼의 검이 망치가 된 듯 자포리자의 롱소드를 연속해서 후려쳤다.
빠른 속도에 마나까지 실어 내려치자 체력이 급속도로 빠졌지만, 그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지금은 길게 승부를 끌고 갈 상황이 아니었다.
최대한 빨리 자포리자를 처리하고 이곳을 빠져나가야만 했다.
쩡쩡쩡!
자포리자의 롱소드에서 엄청난 소리가 연달아 나자, 랜튼의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네놈의 검술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결국 강함의 척도는 마나야. 뭐, 어쨌든 이런 곳에 있기엔 아까운 인물이라는 건 인정하지. 하지만 날 만난 것으로 네 운은 다했어.’
랜튼은 계속해서 롱소드를 후려쳤다.
쩡! 쩡! 쩡! 쩡! 쩡 !쩡!
묵직한 소리에 공기가 떨렸다.
롱소드가 금방이라도 깨질 거 같았다.
하지만 자포리자는 자신의 전술을 바꾸지 않았다.
여전히 거리를 두고 강한 힘을 바탕으로 랜튼을 공격할 뿐이었다.
그렇게 한참 롱소드를 때리던 랜튼에 머릿속에 작은 의문이 떠올랐다.
시간이 흐를수록 의문은 점점 커졌고, 결국 랜턴의 얼굴에서 미소를 앗아 갔다.
‘뭐지? 왜 롱소드가 멀쩡한 거지? 이 정도로 때렸으면 벌써 깨져야 하는데…….’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단전의 마나가 빠르게 말라 갔기 때문이다.
이대로 계속해서 마나를 쓰다간 마나 결핍이 일어날 것이었다.
만약 마나 결핍이 일어나기라도 한다면 엄청난 탈력감과 고통에 시달릴 터.
지금 상황에서 그것은 곧바로 패배로 이어지는 것과 동시에 자포리자에게 붙잡힌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한편, 자포리자에게 랜튼은 지금까지 만나 본 적 없는 최고의 실력자였다.
알리사와의 영지전에서 만난 오러 유저 중급의 기사, 칼라일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강자였다.
영지전이 끝난 후, 자포리자는 꾸준히 마나 연공법을 익히고, 검술을 수련하며 몬스터와의 실전을 통해 단련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실력이 어느 정도로 발전했는지 늘 궁금했다.
알리사와의 영지전 때보다 더 강해졌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어느 정도까지 발전했는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스탄다비아에서는 자신 다음으로 기사단장인 칼튼이 가장 강했지만, 그와의 대련으로는 궁금증을 해결하지 못했다.
그런 자신에게 랜튼과 같은 강자는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았다.
만약 평상시와 같이 오러를 일으켰다면, 미스릴로 만든 롱소드를 랜튼의 검이 오래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오러의 수준 차이보다 검의 재질 차이가 훨씬 컸다.
미스릴과 철의 차이는 소총과 탱크의 차이와도 같았다.
아무리 오러가 강해도 매개체가 될 검이 망가지면 싸움이 이어질 수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포리자는 대결을 길게 끌고 가기 위해 롱소드에 마나를 약하게 주입했다.
랜튼은 확실히 엄청난 강자였다.
자포리자는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온 신경을 기울이며 싸움을 이어 갔다.
스탄다비아는 이제 이런 자들이 들어올 만큼 지켜야 할 것이 많아졌다는 사실이 피부에 와닿았다.
그러니 자신이 더욱 강해져야 했기에, 한 합이라도 더 겨루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랜튼은 마나 결핍이 일어나기 일보 직전이었다.
페이빈이 재빨리 랜튼을 보호하고자 싸움에 끼어들려 했다.
하지만 그의 의도는 미수로 그칠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페이빈의 앞을 칼튼이 막아섰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포리자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던 랜튼은 결국 마나 결핍을 일으켰다.
마나 결핍에 따라오는 탈력감과 고통으로 인해 그는 정신이 없었다.
자포리자는 땅바닥을 기는 랜튼을 일으켜 망설임 없이 그의 단전에 단검을 박아 넣었다.
자신의 영지에 숨어든 쥐새끼를 용서할 생각은 없었다.
순식간에 구멍이 뚫린 단전이 풍선처럼 쪼그라들었다.
단전이 사라지자 마나 결핍에서 오는 탈력감과 고통이 순식간에 사라졌지만, 이내 칼에 찔린 상처가 아파 왔다.
하지만 랜튼은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정신적 고통을 느꼈다.
평생을 연마한 마나가 사라졌다.
이제 그는 영원히 마나를 받아들일 수 없는 몸이 됐다.
랜튼은 분노와 원망을 가득 담은 눈으로 자포리자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이런 개자식아! 너는 귀족으로서의 기본적인 예의를 모르는 놈이냐! 모욕을 주지 말고 죽여라!”
“하하하하하!”
자포리자는 랜튼을 보고 시원하게 웃었다.
“귀족? 남의 영지의 보물을 도둑질하러 온 놈이 예의를 따진다라… 매우 뻔뻔한 작자군. 넌 시궁창의 쥐새끼에게도 예의를 차리는가? 네놈이 나에게 예의를 말할 자격이 있는지 스스로 한번 생각해 보도록.”
랜튼은 이를 빠드득 갈았다.
시궁창의 쥐새끼는 자신이 루드웨어에게 쓴 단어였다.
그는 너무나 분했지만, 힘을 잃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랜튼의 자존심이 무너져 내렸다.
“아악!”
그때, 페이빈의 비명이 들려왔다.
자포리자를 제외하고 강자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페이빈까지 꺾였다.
“살… 살려 줘…….”
페이빈이 비참하게 목숨을 구걸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랜튼은 눈을 질끈 감았다.
스탄다비아의 감옥이 오래간만에 활기를 띠었다.
죄인이 한꺼번에 다섯 명이나 들어온 덕이었다.
그들은 이번에 무기와 마나 연공법, 비누 제조법을 노린 일당이었다.
“씨발, 난 아무런 죄가 없다고! 단지 저 새끼들에게 속았을 뿐이야. 난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집에만 있었다고… 병사, 영주를 불러와라. 난 고귀한 귀족의 혈통을 가진 사람이다. 나를 이렇게 대해서는 안 된다고!”
루드웨어가 창살을 잡고 울부짖었다.
“조용히 해, 멍청한 새끼야! 제발 분위기 파악하라고. 고귀한 혈통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네 알량한 실력은 알리사에서나 통했지, 여기서는 지나가는 개보다 못한 게 바로 너야. 그러니까 입 닥치고 가만히 있어!”
루드웨어를 향해 션이 화를 냈다.
지치지도 않는지 오전 내내 소리를 지르는 루드웨어에게 질려 버린 것이었다.
“이, 이, 이… 개…새끼가!”
루드웨어의 눈이 분노로 물들었다.
자신을 바보로 만든 것도 모자라 이곳에 끌려온 것도 모두 션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자신은 중간에서 당하기만 했는데, 션과 같은 처지에 놓이니 참을 수가 없었다.
“너, 이 새끼.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너… 내가 가만히 두나 봐라. 여기서 나가면 네놈부터 죽여주마. 목을 뽑아서 몬스터 먹이로 던질 것이다!”
“씨발, 좀 조용히 좀 하라고. 이 멍청한 새끼야. 아휴~ 나도 눈이 삐었지. 한동안이지만 저런 걸 형님으로 모셨다니.”
테이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넌 여기서 못 나가. 알겠어? 네가 한 짓이 얼마나 큰 죄인지 아직도 파악이 안 되냐?
이 빡대가리 새끼야, 네가 수락한 거래는 말이야… 어휴~ 아니다. 말을 말자.”
그는 루드웨어를 경멸 어린 눈으로 바라봤다.
션과 테이는 이미 자신들의 운명을 어느 정도 예감하고 있었다.
루드웨어와는 달리 인생의 마지막 모험을 거나하게 했으니 삶에 별다른 미련은 없었다.
한 달간 돈도 펑펑 쓰고 다녔고, 계획이 성공해서 상상도 못할 돈까지 만져 봤다.
비록 그 돈을 쓰기도 전에 잡혔지만, 자신들의 힘으로 획득한 건 분명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사실이었다.
그들은 각자의 생각대로 삶을 정리했다.
그때, 랜튼은 의자에 묶여 있었다.
악동 같은 얼굴을 가진 그는 이전과 달리 십 년은 늙어 보였다.
“네놈들은 누구지?”
중대한 사안이니 만큼 자포리자가 직접 그를 심문했다.
하지만 랜튼을 입을 열지 않았다.
이미 여러 번 자살을 시도했을 정도로 독종이었다.
그는 입을 앙다물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겠다는 것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자포리자가 옆의 남자에게 눈짓했다.
남자는 자포리자를 향해 작게 고개를 숙이더니 랜튼에게 다가갔다.
“감히 영주님이 물었는데 대답을 하지 않다니… 마지막 기회를 주지. 괜한 고통을 겪지 말고 대답해. 그리고 한마디 해 주자면, 페이빈이란 놈이 이미 모든 걸 다 불었어. 지금 하는 건 그놈 말이 맞는지 확인하는 과정일 뿐이야. 그러니 애써 힘 빼지 말라고.”
남자의 말에 랜튼의 눈이 순간 흔들렸으나,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뭐, 나도 이런 짓을 좋아하는 건 아닌데… 권주를 마다하고 벌주를 택한 건 네놈이니, 나를 원망하지 말라고.”
“아아악!”
굳게 닫힌 랜튼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새빨갛게 달구어진 인두가 그의 허벅지를 지졌다.
이 시대의 고문은 끔찍했다.
아무리 정신력이 단단한 사람일지라도 고문은 너무나 간단히 그런 정신력을 박살 냈다.
이내 방은 살이 익는 냄새로 가득 찼다.
“잠, 잠깐!”
랜튼의 다급한 목소리에 인두가 그의 몸에서 떨어졌다.
그의 얼굴에는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땀을 폭포수처럼 흘리고, 바지가 오줌으로 젖어 있었다.
랜튼의 마지막 발악은 허무하게 끝이 났다.
그는 포기한 듯 고개를 바닥으로 처박았다.
자포리자는 그의 상처에 이번에 몸을 의탁한 연구 마법사 하칸이 만든 힐링 포션을 부어 주었다.
그러자 상처에서 고통이 빠르게 줄어들었다.
“네놈은 누구지?”
“…난 랜튼 호시 남작이다. 프라인 영지에서 왔다.”
자포리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하필 프라인이라니… 생각조차 하기 싫은 최악의 상대였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