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강적의 등장
프라인은 패트래건 로우 백작이 영주로 있는 곳이었다.
자작인 자포리자보다 한 단계 지위가 높은 귀족으로, 중앙 정치에도 발을 뻗은 자로 알려져 있었다.
스탄다비아와 직접적으로 경계를 맞대고 있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멀다고 할 수 있는 위치의 영지도 아니었다.
상세히 말하자면 프라인은 알리사와 맞닿아 있었고, 알리사는 스탄다비아의 바로 옆 영지였다.
백작과 자작의 영지는 규모나, 병사의 수에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났다.
다른 곳도 아니고 이 부근에서 가장 강하다고 알려진 프라인이라는 이름을 듣자 그의 얼굴은 자연히 굳을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모르지만, 결코 자포리자에게 좋은 상황은 아닐 것이었다.
잠시 그의 얼굴에 걱정 어린 표정이 떠올랐지만, 곧 굳은 결의가 서렸다.
스탄다비아에 몰아친 폭풍이 지나가고 며칠이 지났다.
“영주님.”
이번에 페이빈과 싸워 승리를 이끌어 낸 칼튼이 자포리자를 찾았다.
“칼튼, 무슨 일인가?”
“의논드릴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그래. 일단 앉지.”
자포리자는 그에게 자리를 권했다.
“영주님, 다름이 아니라 마나 연공법에 관한 일 때문에 왔습니다. 이번 일을 겪으며 많이 생각해 봤는데, 모든 병사에게 마나 연공법을 알려 주는 일은 생각을 다시 해 봐야 하는 거 아닌지… 이미 알고 있는 병사들을 제외하고 새롭게 들어오는 이들은 어느 정도 시간을 둔 뒤, 적어도 그들의 충성심을 확인하고 알려 주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칼튼은 소중한 마나 연공법이 다른 영지로 알려지는 걸 경계했다.
“아니, 새롭게 들어오는 병사들도 모두 알려 주도록.”
“분명히 사리사욕을 위해 마나 연공법을 이용하는 자가 또다시 생길 겁니다. 지금 알고 있는 병사들의 단속도 힘든 상황입니다.”
“그래, 분명히 누군가는 마나 연공법을 팔겠지.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그런 것이 두려웠다면 애초에 병사들에게 가르쳐 주지 않는 게 가장 현명한 방법이었을 것이야. 마나 연공법을 병사에게 알려 준 순간부터는 더는 비밀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게 속이 편할 거야. 그러니 칼튼, 자네도 너무 속을 끓이지 말게. 물론 정신교육은 앞으로도 계속해야겠지만, 유출되는 걸 막을 수 없는 건 기정사실이야. 모든 건 일장일단이 있지 않은가. 그 덕에 우리 병사들은 빠르게 강해지고 있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지도 하고.”
“그 말씀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칼튼은 자포리자의 급진적인 사고가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자포리자의 행동은 이 시대의 상식과 너무 동떨어져 있었다.
보물을 독점하고 싶은 건 인간의 당연한 심리였고, 실제로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만 지식을 사용했다.
그런 귀중한 것을 무슨 식량 나누어 주듯 가볍게 알려 주는 자포리자의 파격적인 행동은 자신이 생각하는 사고의 범위를 넘어설 수밖에 없었다.
물론 자포리자는 칼튼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되었다.
그도 경일을 만나지 않았다면 칼튼과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얼마나 편협한 사고인지 지금은 잘 알고 있었다.
그도 이 시대를 살아온 사람으로서 처음에는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소중한 병사들의 목숨을 잃지 않고, 오히려 몬스터를 압살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실행할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혼자서 강해져 봤자 이곳을 지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당장 경일이 준 물품들을 개인의 영달을 위해 썼더라면, 첫 영지전에서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칼튼, 사실 나도 자네와 같은 고민을 했지. 나도 사람인 이상 보물이 욕심나는 건 당연하네. 자네가 우려하는 부분도 그거겠지. 마나 연공법이 모두에게 풀려 버리면 언젠가는 다른 이들도 우리와 같이 강해지지 않겠나? 지금 당장은 영지의 상황이 좋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나중에는 우리에게 독으로 돌아올 수도 있는 일 아닌가.”
“그럼요, 영주님. 제 이야기가 바로 그 뜻입니다.”
칼튼은 자포리자가 자기 뜻을 알아주자 얼굴이 확 밝아졌다.
“사실은 말이지… 알리사 영주에게서 구한 마나 연공법은 두 권이네. 공개한 건 상권만이지.”
놀라운 사실이었다.
칼튼은 순간 당황하여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자포리자의 입만 바라봤다.
“상권의 내용은 자네도 알다시피 체내에 마나를 쌓는 방법 위주로 쓰여 있네. 마나가 몸속에 쌓이고 깨달음을 얻는 순간, 오러 유저가 될 수 있지. 병사들에게는 큰 도움이 되는 내용이네.”
“그럼요. 병사들뿐만 아니라 기사인 저에게도 도움이 됐습니다.”
“그래, 마나란 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니까. 그런데 진정한 오의는 하권에 모두 담겨 있네. 마나를 더 효율적으로 다루는 방법이 서술되어 있지. 마나를 깨우치고 오러 유저가 된 다음에는, 하권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의 차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커지겠지. 마나를 깨우치는 첫 단계인 오러 유저까지는 상권으로도 충분할 테지만, 소드 익스퍼트로 넘어가면서부터는 하권이 진정한 힘을 발휘할 걸세. 즉, 상권도 중요하지만, 하권은 그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뜻이지. 그렇지만 난 하권을 병사들에게 풀 생각이 없다네. 하권은 우리 영지의 숨겨진 한 수로 만들 생각이야.”
자포리자의 혜안에 칼튼은 그저 놀라워하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하권은 말이지. 나와 같은 꿈을 꾸고, 나와 같은 길을 걸어갈 이들에게만 알려 줄 생각이네. 내 생각에 그 첫 번째 인물은 칼튼, 자네 같은데, 그대의 의견은 어떤가?”
칼튼은 이어지는 자포리자의 놀라운 제안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가 꿈꾸는 길을 확실히 알지는 못하지만, 오래전부터 자포리자와 평생을 같이할 것을 이미 영혼에 맹세하지 않았는가.
“충!”
칼튼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진중한 얼굴로 자포리자를 향해 경례했다.
그의 얼굴에 서린 각오만 봐도 그때의 맹세가 얼마나 순결한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앞으로 스탄다비아는 결코 타인에게 무릎을 꿇지 않을 것이며, 몇백 년간 보일 가를 믿고 따라 준 영지민들을 위해서만 노력할 것이다.”
자포리자가 칼튼의 맹세에 화답하듯 그가 앞으로 걸어갈 길을 밝혔다.
놀랍게도 그의 말에는 베르아스 왕국의 국왕은 배제되어 있었다.
이미 그의 가슴속 주군은 경일이었다.
그를 위하는 일이 스탄다비아를 발전시키는 걸 알기에 거침이 없었다.
또한 자포리자 본인 또한 영지민들을 위해 경일에게 무릎을 꿇을 만큼 그들을 아꼈다.
결국 같은 맥락이다 보니 경일에 대한 믿음은 더욱 두터울 수밖에 없었다.
“충!”
칼튼은 다시 한번 자포리자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스탄다비아는 욕심 많은 포식자의 목표가 되었으나, 자포리자는 최선을 다해 그들로부터 이곳을 지켜 낼 것이다.
* * *
경일이 머무는 던전의 거처는 많이 변해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흙벽돌로 만든 집이었다.
흙벽돌을 직접 하나하나 만들어 집을 지은 터라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땅을 다져 집터를 만들고, 사각형의 집터에 흙벽돌을 쌓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높아지는 벽을 볼 때마다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창문은 지구에서 사 온 새시로 설치했다.
던전의 경치를 즐기기 위해 제법 큰 사이즈로 사방에 달자, 집안으로 햇빛이 가득 들어왔다.
벽을 다 만들고 지붕은 간단하게 패널로 덮었다.
투박하지만 직접 만든 집은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기존의 나무로 만든 집에 비하면 세 배나 넓어진 크기였다.
이윽고 저녁이 되자 집에 등이 켜졌다.
이번에 발전기를 하나 들여서 전기를 쓸 수 있었다.
발전기의 소음이 조금 거슬리긴 했지만, 어둠을 밝힐 수 있으니 그 정도는 충분히 감수할 만했다.
훈련할 수 있는 공간도 하나 만들어 검술을 수련하고, 마나 연공법을 연마했다.
경일은 마나 연공법의 수준이 높아지자 몸속의 마나를 더 세밀하게 다룰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바깥에 있는 커다란 나뭇가지에는 그네를 하나 매달았다.
가끔 그네를 타면 어릴 때의 추억이 떠오르곤 했다.
경일이 가꾸는 농지 또한 훨씬 더 넓어져 있었다.
생산되는 작물이 늘어났고 그것들을 꾸준히 스탄다비아로 보냈다.
스탄다비아의 인구가 증가하는 속도가 빨라 생각보다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지만, 던전 식물은 특유의 효능이 있어 건강 면에서는 크게 도움이 될 것이었다.
던전에 들어가 처음 개울가에 자리를 잡았을 때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었지만, 지금은 경일의 흔적이 넓게 퍼져 있었다.
그는 최대한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어우러져 생활했다.
던전에서는 비누와 같은 화학제품은 애초에 쓰지를 않았다.
자연에 해가 될 것은 아예 지구에서 가져오지 않았고, 모두 천연 재료로 만들어서 썼다.
경일은 날이 갈수록 던전에 대한 애정이 깊어졌다.
던전은 늘 싱그러웠고, 어머니의 품처럼 따스했다.
그리고 언제나 노력한 만큼 결실을 주었다.
그런 경일의 마음이 통했는지 오래간만에 던전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던전과의 유대가 깊어졌습니다. 던전 고유 식물이 늘어납니다.]
“설마 이것 때문이었나?”
경일은 그동안 많은 곳을 돌아다니며 던전 고유 식물을 찾았지만, 그가 찾은 건 몇 가지 되지 않았다.
비후초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쓸모가 없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없는 걸 그토록 찾아 헤맸으니…….”
지금까지 던전을 열렬히 사랑하던 마음에 살짝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욕심이 많은 거지, 감히 던전을 탓하다니… 방금 든 감정은 아주 일시적인 것이니 던전님께서는 노하시지 마소서. 제가 요즘 배가 불러 살짝 정신이 나갔나 봅니다.”
경일은 곧바로 자신의 잘못을 빌었다.
잠시 후, 오토바이가 요란한 엔진 소리를 내며 던전을 질주했다.
경일은 새롭게 추가된 던전 고유 식물에 대한 기대감으로 들떠 있었다.
그는 산과 들을 시간이 나는 대로 돌아다녔다.
그가 찾는 것은 넓은 들의 한구석에 있었다.
“찾았다!”
그가 가장 먼저 찾은 것은 헌터의 잠재력을 높여 주는 영인초였다.
많은 고생 끝에 원하는 것을 찾으니 그 기쁨이 더욱 컸다.
이곳을 기억하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니 한번도 온 적이 없던 곳이었다.
“내가 지금껏 못 찾은 건지, 이번 던전과의 유대로 새로 생겨난 건지 알 수가 없네. 뭐, 어쨌든 찾았으니 됐지.”
경일은 분식점에서 퇴근한 후로 던전 탐사에 집중했다.
탐사가 이어질수록 새로운 던전 고유 식물이 속속 발견되었다.
이번 탐사의 가장 큰 수확은 마나 포션의 주재료인 커미네스를 찾은 것이었다.
스탄다비아에 새로운 연구 마법사가 들어오면서 경일은 포션의 재료와 제조 방법에 대해 알게 되었다.
특히 스탄다비아뿐만 아니라 지구에서도 포션은 없어서는 안 될 물품이었다.
포션은 여러 재료를 섞어 제조해 그 효능을 최대로 높일 수 있었다.
던전 고유 식물을 직접 먹는 것보다 포션으로 만들어 먹는 게 훨씬 효능이 높았다.
일명 연금술사라고 불리는 생산직 스킬을 가진 헌터들의 연구를 통해 자신들만의 조합법으로 포션을 제조했다.
그러다 보니 같은 재료를 사용하더라도 만드는 연금술사에 따라 그 효능은 천차만별이었다.
종류도 많았고, 몇몇 연금술사는 자신들이 개발한 포션이 따로 있을 정도였다.
그중 가장 비싼 포션 중 하나가 마나 포션이었다.
영인초가 잠재력의 그릇을 늘려 주는 역할이라면, 이번에 찾은 커미네스는 마나 스탯을 올려 주었다.
커미네스는 헌터의 성장에 가장 직접적인 도움을 주는 식물이었다.
거기다 마나 포션으로 만들면 전투 중에 마나가 떨어졌을 때 빠르게 마나를 보충할 수도 있었다.
더욱 중요한 건 스탄다비아의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란 점이다.
지구와 다르게 마의 구간이란 것이 없어 영인초는 그들에게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커미네스는 달랐다.
몸속의 마나가 많아진다는 건 그만큼 강해진다는 의미였으니, 마나를 깨우친 자들에겐 천고의 영약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대단한 커미네스가 경일의 눈앞에 피어 있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군락을 이루고 자라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봤으면 길가의 잡초라고 밖에 생각지 못했을 정도로 흔하게 생긴 식물이었다.
“감사합니다. 역시 던전님은 저의 진정한 사랑을 알아주시는군요.”
경일이 넙죽 절을 했다.
커미네스는 던전 고유 식물 중에서 가장 비싼 식물 중 하나였다.
강해지고 싶어 하는 헌터는 많았고, 돈과 권력이 있는 사람은 커미네스를 독점하듯이 사들였다.
이 세상에서 헌터는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발전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경일은 탐사를 쉬지 않았다.
그가 꼭 찾고 싶은 걸 아직 못 찾은 탓이었다.
하지만 그의 노력이 통했는지 원하는 걸 드디어 찾을 수 있었다.
이번에 찾은 것은 황룡초라는 던전 고유 식물이었다.
줄기는 붉고, 잎은 연한 녹색을 띠고 꽃은 황색으로 피어 있었다.
황룡초는 바로 수한이 어머니의 던전병을 고칠 수 있는 약초였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