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우리 가족을 지켜주는 신
“수한이가 엄마랑 아빠 손잡고 놀이공원에 가 보는 게 꿈이라고 했지? 이제 곧 가게 될 거야.”
경일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황룡초를 채집했다.
오늘 목표로 삼은 것 중에 하나를 찾아냈다.
이제 남은 건 수아의 던전병을 치료해 줄 볼비네였다.
볼비네는 찾는 것이 쉽지 않았다.
많은 곳을 돌아다녀 봤지만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수아를 생각해서라도 꼭 찾아야 했다.
많은 노력 끝에 결국에는 큰 바위 틈에서 자라고 있는 볼비네를 찾아냈다.
“기분이 너무 좋아. 이제 수아도 던전병의 고통에서 벗어나 이쁜 숙녀로 자랄 수 있을 거야.”
다음 날, 분식점으로 출근하는 경일의 입에서 절로 노래가 나왔다.
마음이 가벼운 게 날아갈 것 같았다.
음악을 흥얼거리며 음식 재료 준비를 하는데 손주아가 출근했다.
“사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어라?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손주아는 입꼬리가 올라간 경일을 보고 물었다.
“하하하하, 난 분식점에 나오면 언제나 즐거워. 주아 씨는 그렇지 않아?“
“아… 네. 그런 거 같아요.”
손주아는 평소보다 과하게 기분 좋아 보이는 경일을 향해 당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동네 분식에 새로운 메뉴가 생겼다.
탕수육이었다.
경일은 민서와 할머니를 기리기 위해 오늘의 안주에 탕수육을 추가했다.
튀김은 별다르게 손볼 게 없어 소스에 집중했다.
던전 과일을 베이스로 소스를 만들었더니, 고급스러운 단맛과 상큼한 맛이 일품인 소스가 완성되었다.
탕수육은 특히 아이들과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아서 가족 단위의 손님들이 늘어났다.
그날 저녁에 반가운 손님이 왔다.
바로 수한이 가족이었다.
경일이 준 죽을 꾸준히 먹은 선호연은 이제 걸을 수 있을 정도로 호전됐다.
던전병이 발병하고 난 이후 그녀의 첫 나들이가 동네 분식이었다.
“어서 오세요!”
경일이 반갑게 인사했다.
이길호가 던전에서 다쳐 병원에 입원했을 때, 선호연을 본 적이 있었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꼭 직접 찾아뵙고 인사를 하고 싶었습니다. 우리 가족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특히 수한이를 잘 돌봐 주신 거 정말 감사합니다.”
선호연이 경일을 향해 고개를 깊이 숙였다.
“아닙니다. 제가 한 게 뭐가 있다고요.”
경일이 민망한 듯 손사래를 쳤다.
감사함이 가득 묻어 나오는 목소리와 다르게 그녀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피부가 딱딱하게 굳어 가는 던전병이 호전되기는 했으나, 아직 나으려면 한참 멀어 보였다.
하지만 이길호의 가족들은 그녀가 자력으로 걸을 수 있다는 것만 해도 기쁜 듯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특히 수한이의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수한이가 평소와 다르게 의젓하게 인사를 했다.
아픈 엄마와의 외출이라 바짝 신경을 쓰고 있었다.
“하하하! 어서 와.”
그 모습이 귀여워서 절로 웃음이 터졌다.
“사장님, 오래간만입니다. 매번 신세만 지고 자주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이 동네 분들 바쁜 건 제가 제일 잘 아는데요. 신경 쓰시지 않아도 됩니다. 어서 앉으세요.”
수한이 가족이 다찌에 일렬로 앉았다.
선호연이 수한이를 중간 자리에 앉히려 하는데, 수한이가 거부하고 제일 끝으로 갔다.
“엄마가 중간에 앉아.”
“그래, 여보. 수한이 말대로 여기에 앉아요.”
두 남자의 에스코트에 선호연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중간 자리에 앉았다.
어린 아들의 대견한 모습에 따뜻한 눈빛을 보내고 있지만, 표정이 따라 주지 않는 그녀의 모습에 경일은 마음이 아팠다.
‘던전병에 걸리기 전의 단란한 가족으로 돌아가실 수 있을 거예요.’
경일은 속마음을 숨기고 직접 주문을 받았다.
“수한이 아버님. 어떤 걸로 해 드릴까요?”
“오늘의 안주 두 종류 다 주세요. 소주도 한 병 주시고요.”
이길호는 가족 간의 외식이 몇 년 만이라 무척 기분 좋은 모습이었다.
“네. 잠시만 기다리세요.”
경일은 이길호의 가족 앞에 차가 든 물 잔을 놓았다.
“이거 직접 끓이신 거예요?”
“네. 한 번 드셔 보세요. 그럭저럭 마실 만할 거예요.”
경일의 권유에 이길호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차가 몸에 들어가자 화한 느낌이 들었다.
“오, 이거 좋은데요? 무슨 술을 마신 것처럼 몸속에서 확 퍼져 나가는 느낌인데요?”
“아빠, 나도.”
수한이가 궁금했는지 물을 마셨다.
“어? 아빠, 난 아무런 느낌이 안 나는데?”
수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커미네스로 달인 차라 이길호의 몸에는 반응했지만, 수한이에게는 그냥 구수한 맛이 나는 차일 뿐이었다.
이길호는 몰랐지만, 경일은 영인초를 발견한 뒤로 그가 분식점에 올 때마다 꾸준히 그에게 영인초를 달인 차를 먹였다.
심지어 오늘은 커미네스까지… 그는 헌터들이라면 가장 원하는 두 가지 던전 식물을 자신도 모르게 먹고 있었다.
아직 본인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영인초를 달인 물을 꾸준히 마신 이상 잠재력은 꾸준히 늘어나고 있었다.
커미네스도 마나를 늘려 주는 효과가 있는 만큼, 마의 구간을 벗어나는데 도움이 됐다.
이대로라면 머지않아 마의 구간을 벗어나는 것도 가능할 것이었다.
선호연도 자신의 앞에 놓인 물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어머, 산뜻해라. 이 차, 너무 맛있다. 몸이 약간 가벼워진 거 같은 느낌이 들어요.”
“하하, 시골에서 친구가 직접 찻잎을 따서 말린 거로 우려낸 물이니 많이 드세요.”
“고맙습니다.”
선호연이 마신 차는 황룡초를 달인 차였다.
몸이 가벼워진다는 말은 딱딱하던 피부가 풀리며 나는 느낌인 듯했다.
수한이의 가족 앞에 푸짐한 음식이 차려졌다.
쏘가리가 한 마리 통째로 들어간 매운탕과 큰 접시에 듬뿍 담긴 탕수육이 놓였다.
“와~”
탕수육을 본 수한이가 감탄했다.
“아빠, 고기가 산처럼 쌓여 있어요.”
“수한아, 얼른 먹어 보렴. 당신도 먹고.”
이길호는 아들과 부인의 앞 접시에 적당량의 음식을 덜어 주었다.
“와, 정말 맛있네요. 이거 지금까지 먹어 본 음식 중에 제일 맛있는 거 같아요. 여보, 어떻게 이런 맛이 나지요?”
선호연은 감탄했다.
오래간만에 먹는 탕수육이어서 그런지 더욱더 맛있었다.
“나도 모르지. 아마 저 사장님은 신인 거 같아.”
“아빠, 신요?”
수한이가 이길호의 말에 흥미를 보이며 물었다.
“그래, 신. 우리 가족을 지켜 주는 신.”
그는 한창 요리 중인 경일의 등을 보고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었다.
이길호가 경일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느끼기 시작한 건 몬스터에게 큰 상처를 입어 병원에 입원한 무렵이었다.
선호연의 병세를 완화해 줄 비후초 값을 자신의 치료비로 모두 날리고 퇴원한 날, 그는 큰 자괴감에 빠져들었다.
비후초를 먹지 못하면 그녀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할지 알기에 참담함을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무려 삼 일간이나 죽음보다 더한 고통에 시달릴 그녀를 생각하자 마음이 찢어졌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놀랍게도 선호연이 정기적으로 오던 발작을 일으키지 않은 것이다.
이길호는 너무나 기분이 좋아 얼굴이 빨갛게 상기될 정도였다.
가슴 속에 가득 들어찼던 묵직했던 바위가 한순간에 사라진 것처럼 시원했다.
너무나 기뻤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발작하지 않고 지나간 이유가 궁금했다.
선호연이 던전병을 앓고 나서부터 그는 병에 대해 맹렬히 공부했다.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게 분명 있을 거라 여기고 모든 자료를 찾아봤지만, 비후초와 황룡초 이외에는 답이 없었다.
그가 공부하기로는 비후초를 먹지 않았는데도 발작이 일어나지 않은 사례는 단 한 건도 없었다.
지금껏 한 번도 없었던 사례가 선호연에게 일어나자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병원에 가서 검사 받으니 던전병이 호전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상한 게 하나 더 있었다.
어느 날부터 수한이가 가렵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수한이는 아토피를 심하게 앓고 있었다.
아이가 힘들어해서 몸에 안 좋은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스테로이드제와 항히스타민제를 어쩔 수 없이 먹일 수밖에 없었다.
수한이가 정해진 용량보다 많이 먹은 게 아닐까 하고 확인해 보니 약은 약국에서 받은 그대로였다.
‘이상한데…….’
분명 가족에게 자신이 알 수 없는 일이 생기고 있었다.
물론 좋은 징조이긴 하지만, 이유를 알 수 없으니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 현상이 계속해서 이어진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갑자기 좋아진 것처럼 갑자기 나빠질 수도 있는 문제였다.
그는 가족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궁금했다.
“수한아, 이제 안 가려워?”
“응, 아빠. 이제는 하나도 안 가려워. 떡볶이랑 어묵이랑 튀김 먹고 나서부터는 안 가려워!”
“떡볶이?”
“응.”
“동네 분식 말하는 거지?”
“응.”
수한이는 밖에 놀러 갈 생각에 빠르게 대답하고는 집을 나갔다.
‘떡볶이랑 어묵?’
이길호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거실을 서성이던 그의 눈에 음식 포장 그릇이 보였다.
언제부턴가 식탁 위에는 늘 일회용 포장 그릇이 있었다.
동네 분식 사장님이 따로 챙겨 보낸 음식이었다.
“…혹시?”
수한이의 경우는 동네에서 놀다 보니 자신의 눈이 안 닿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내는 그럴 게 없었다.
아내에게 온 변화는 식탁 위에 놓인 죽, 단 하나였다.
분식점 사장님은 자신의 가족뿐만 아니라 동네 사람들을 위해 희생을 하는 분이다.
아이들을 위해 거의 공짜로 음식을 퍼 주다시피 하고 맛은 물론이고 음식 값도 저렴했다.
오늘의 안주로 나오는 매운탕은 더더욱 말이 되지 않았다.
저 정도 재료와 맛이라면 어딜 가도 최소 십만 원 이상은 충분히 받고도 남았다.
잔류 몬스터로 인해 물가 상승이 엄청난데도 당연하다는 듯이 이만 원에 팔고 있었다.
‘저렇게 팔아서 남는 돈이 있을까?’
더군다나 이 동네 사람들을 위해서 다른 지역 손님을 차단하기까지 했다.
어느 날, 이유를 알 수는 없었지만, 조폭으로 보이는 남자들이 가게를 점령했다.
분명 헌터로 보이는 자들도 몇 명 섞여 있었다.
그 정도의 인원을 동원할 정도의 세력이라면 보통 일이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모든 일이 해결되었다.
그 강한 세력이 서로 상잔하다시피 망해 버렸다.
이런 기막힌 우연이 연속해서 일어날 확률이 얼마나 될까?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일을 겪으니 마냥 신기할 정도였다.
눈앞에서 마술사의 공연을 보는 기분이랄까.
이제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을 넘어 엄청난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요즘은 다행히 운이 좋아 던전에서의 벌이가 나쁘지 않았다.
그 덕에 아내의 발작하는 날에 맞추어 비후초를 제때 먹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걸을 수 있을 만큼 회복되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몇 년을 정기적으로 비후초를 먹였지만, 이렇게 호전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건 분명 수한이가 가져온 죽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걱정할 일이 없을 테니까 힘을 내세요.’
자신의 가족이 가장 힘들었을 때 경일이 해 준 말.
그 당시에도 잊히지 않는 말이었지만, 이제는 하나의 신앙처럼 자리를 잡았다.
경일의 말대로 아내의 던전병이 조금씩 낫기 시작했다.
이제는 확신했다.
자신의 가족에게 일어난 일은 행운이 아니라는 것을.
이건 모두 한 개인이 베풀어 준 은혜라는 것을.
만약 경일이 자신을 필요로 한다면 미천한 힘이라도 보태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이길호가 음식을 하는 경일의 등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 수한이가 탕수육을 입에 가져다줬다.
입속에 들어온 탕수육의 감촉에 그는 혼자만의 생각에서 벗어났다.
바삭!
튀김이 이빨에 눌리면서 얇은 입자로 부서진다.
바삭하면서도 전혀 딱딱하지 않다.
소스는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맛있다.
이런 고급스러운 단맛에 새콤한 맛까지…….
이길호는 고개를 돌려 아내를 보았다.
요 몇 년간 죽만 먹어 왔던 아내가 매운탕과 탕수육을 맛있게 먹는 모습에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경일은 이길호가 아까부터 뜨거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왠지 쑥스러웠다.
그는 수한이 가족이 돌아갈 때까지 열심히 음식을 만들었다.
그들 가족이 돌아갈 때 황룡초가 들어간 죽을 챙겨 주는 걸 잊지 않았다.
수한이가 대표로 씩씩하게 인사를 했다.
참 기분이 좋았다.
아이의 환한 표정은 경일에겐 최고의 힐링이었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