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128화 (128/300)

[128화] 프러포즈

경일은 평소보다 빠르게 분식점을 마감했다.

마음이 급했다.

수아에게 조금이라도 빨리 가고 싶었다.

경일은 수아가 걸린 던전병의 치료제인 볼비네가 들어간 죽을 챙겨 들고 급하게 걸음을 옮겼다.

보육원으로 가는 걸음이 오늘처럼 가벼운 날이 없었다.

마치 구름을 밟듯 공중에 붕 뜨는 기분이었다.

“아저씨!”

보육원 입구에서부터 수아가 반겨 주었다.

그동안 꾸준하게 비후초가 들어간 죽을 먹인 효과였다.

옛날처럼 뛰어놀 수는 없어도 어느 정도 일상생활이 가능할 정도로 회복이 됐다.

수아가 걸을 수 있게 된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옛날처럼 경일을 마중하는 것이었다.

“어서 오세요. 늘 감사합니다.”

수아의 손을 잡은 이해인 수녀가 경일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인데요.”

경일은 쑥스러워하며 아이들을 위해 싸 온 음식을 건넸다.

오늘을 탕수육을 태산만큼 만들어서 가지고 왔다.

아이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벌써 기분이 좋아졌다.

“아저씨, 아저씨.”

수아가 경일의 품에 안겨 왔다.

안 그래도 좋아하던 아저씨였는데, 아픈 뒤로 더욱 살뜰하게 챙겨 주는 경일에게 더 큰 정을 느꼈다.

너무 힘껏 끌어안았더니 피부가 아파져 왔지만 옛날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픈 것도 아니었다.

경일의 체온을 더 가깝게 느끼는 게 훨씬 더 좋았다.

“아저씨, 이거 봐요. 내가 아저씨 그림 그렸어요.”

수아가 밝게 웃으며 스케치북을 내밀었다.

스케치북에는 크레용으로 그린 경일의 얼굴이 있었다.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었다.

아이가 기대감이 가득한 얼굴로 경일을 바라본다.

“이야, 이거 너무 잘 그렸는데? 수아는 커서 화가를 해도 되겠다. 아저씨가 받아 본 그림 중에 최고로 멋있어.”

경일은 스케치북에 그려진 그림만큼 환하게 웃으며 수아를 칭찬했다.

“헤헤헤.”

수아가 경일의 칭찬이 좋은지 세상에서 제일 밝게 웃었다.

그 웃음이 너무 정겨워서 울음이 나올 거 같았다.

‘수아야, 이제 매일 그렇게 웃을 수 있게 해 줄게.’

“수아야, 오늘은 더 맛있는 죽을 가지고 왔어. 이번에 아저씨가 심혈을 기울여 새로 만든 죽이거든. 저번에 먹은 것보다 훨씬 맛있을 거야. 이 죽만 열심히 먹으면 친구들이랑 뛰어다니면서 놀 수 있을 거야.”

수아의 눈동자가 기대감으로 가득 찼다.

아이에게 경일은 영웅이었다.

그리고 영웅의 말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고맙습니다.”

수아가 꾸벅 인사를 했다.

“늘 감사합니다.”

이해인 수녀가 눈가에 서린 눈물을 닦으며 인사를 건넸다.

“수녀님, 아무것도 아니라니까요. 이러시지 마세요. 인사를 받으실 분은 수녀님 같은 분이십니다. 아, 저기 아이들이 빨리 오라고 손짓하네요.”

경일은 민망한지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전 수아 죽 먹이러 먼저 가 보겠습니다.”

이해인 수녀에게 인사를 하고 경일은 수아를 데리고 갔다.

방에 도착한 수아가 스케치북을 펼쳤다.

“아저씨.”

“응?”

“이것도 내가 그렸어요.”

수아가 아까 그림의 다음 장을 넘겨 경일에게 보여 줬다.

아이의 얼굴이 살짝 발그스레했다.

수아가 보여 준 그림에서 경일은 넥타이를 맨 멋진 양복 차림이고, 그 옆에 웨딩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서 있었다.

“나 커서 아저씨랑 결혼할 거예요.”

수아가 몸을 배배 꼬면서 수줍게 고백했다.

‘어이쿠, 요즘 사랑 고백을 너무 많이 받는걸. 이러다 동네 남자아이들의 공공의 적이 되는 거 아닌지 몰라.’

얼마 전 지유에게 고백했다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해서 차인 시환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시환이는 아직 마음이 풀리지 않았는지 요즘도 경일을 보면 한 번씩 째려봤다.

“그럼 먼저 건강해져야겠지? 이 죽만 먹으면 금방 건강해질 수 있을 거야.”

“헤헤.”

수아가 귀엽게 웃으면서 경일이 내미는 죽을 아기 새처럼 받아먹었다.

직접 먹을 수도 있지만, 일부러 먹여 달라는 듯이 입을 크게 벌렸다.

경일은 웃으며 수아가 걸린 던전병의 치료제인 볼비네가 듬뿍 들어간 죽을 먹여 주었다.

혹시나 입맛에 맞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잘 먹는 모습에 안심이 되었다.

‘수아야, 그동안 고생했어. 많이 아팠을 텐데 잘 견뎌 줘서 고마워. 얼마 뒤면 예전처럼 아이들과 즐겁게 뛰어놀 수 있을 거야. 그때가 오면, 수아는 이쁘니까 또래의 멋진 친구들이 줄을 설 거야. 그럼 아저씨는 금방 잊히겠지만, 아저씨는 수아가 건강해진 거로 충분히 만족할 수 있어.’

경일은 그동안 조심스럽게 만졌던 수아의 머리를 편하게 쓰다듬어 주었다.

수아가 그런 경일을 향해 방긋 웃음 지었다.

오래간만에 던전에 비가 내렸다.

하늘에 구멍이 난 것처럼 쏟아진 비가 온 세상을 때렸다.

탕탕탕탕탕!

지붕 패널을 때리는 시끄러운 빗소리가 났지만, 경일은 다른 곳에 집중하느라 전혀 듣지 못했다.

“이게 왜 안 되는 거지?”

그의 앞에는 힐링 포션이 놓여 있었다.

“분명 스탄다비아의 연구 마법사가 만드는 대로 똑같이 했는데도 효능이 너무 많이 차이가 나. 이유가 뭘까?”

경일은 새로운 던전 고유 식물을 발견하고, 그 효능을 높이기 위해 포션을 만들었다.

그러고 나서 자신이 만든 힐링 포션을 가지고 효과를 실험했으나, 지금까지 봐 온 연구 마법사가 만든 힐링 포션의 효능보다 심각하리만큼 떨어졌다.

혹시 자신이 잘못 만들었나 싶어 집중해서 같은 방법으로 여러 번 만들어 봤지만, 결과물은 전혀 달랐다.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거야? 들어간 재료도 똑같고, 만드는 방법도 똑같고, 만든 사람은 다르고… 어, 설마… 그런 거였나? 만든 사람이 달라서 그런 거였나? 맞네, 같은 재료로 무기를 만들어도 대장장이의 실력에 따라 무기의 품질이 다 다른 것처럼… 이런, 그럼 내가 만드는 건 좋은 재료를 버리는 것과 같잖아.”

경일은 한 가지 의문을 해결했지만, 또 다른 의문이 떠올랐다.

“연구 마법사가 만든 포션이랑 지구의 연금술사 헌터가 만든 포션의 효능은 얼마나 큰 차이가 있을까?”

그는 그 길로 암시장으로 갔다.

여러 가게를 돌아다니며 가격별로 여러 힐링 포션을 사 왔다.

집으로 돌아온 경일은 효능을 실험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 직접 상처를 내는 수밖에 없다는 깨달았다.

경일은 어쩔 수 없이 자기 팔등에 상처를 내고 포션을 부었다.

상처가 빠르게 아물어 가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그의 얼굴엔 깊은 실망감이 떠올랐다.

가장 하품의 힐링 포션이 스탄다비아의 힐링 포션보다 효과가 훨씬 더 좋았다.

이런 차이가 난 이유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스킬의 존재 유무였다.

지구의 헌터는 연금술에 관한 스킬을 가지고 있었고, 연구 마법사는 스킬이 없었다.

“아, 이러면 머리가 아파지는데… 최상급의 재료가 있는데도 제대로 활용을 못 한다니. 아쉬운 대로 스탄다비아에는 포션의 재료를 보낸다고 해도 내가 문제네. 이렇게 좋은 재료를 가지고 내가 쓸 포션조차 만들 수 없다니… 설마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

손필견과의 싸움에서 단전의 마나가 고갈되어 큰 위기를 겪지 않았는가.

만약 경일에게 인벤토리 스킬이 없었으면 질 수도 있던 싸움이었다.

그 싸움에서 만약 마나 포션을 가지고 있었다면 큰 도움이 됐을 것이다.

포션은 위험한 상황에서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물건인데, 최고급 재료를 두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답답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자 경일은 모든 것이 귀찮다는 듯이 이불 위에 축 늘어져 버렸다.

* * *

자포리자의 집무실은 늦은 밤인데도 환했다.

연구 마법사가 이번에 새로 만든 마법등이 가장 먼저 그의 집무실에 설치되었기 때문이다.

마법등의 불빛이 벽난로에서 타고 있는 장작의 따뜻한 열기와 만나 아직 추운 초봄의 밤이지만 방 안은 포근했다.

하지만 자포리자의 표정에서는 방과 다르게 찬바람이 불었다.

깍지 낀 두 손을 턱에 받친 그의 얼굴은 매우 복잡해 보였다.

이번에 겪은 강철 무기와 마나 연공법, 그리고 비누 제조법을 노린 범죄는 결코 좌시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다행히 영지에서 범죄를 일으킨 범인들은 모두 검거할 수 있었으나, 배후는 손도 대지 못했다.

배후가 어디인지 알면서도 따지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보복을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이것이 힘의 논리가 적용되는 세상의 법칙이었다.

프라인 영지의 영주인 패트래건 로우 백작이 마음만 먹으면 오히려 스탄다비아가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약속 시간이 가까이 오자 스탄다비아의 중요 인사들이 집무실로 모였다.

이윽고 모두 자리에 앉자, 자포리자는 인사를 생략하고 곧바로 용건을 꺼냈다.

그만큼 지금의 상황이 엄중했다.

“이번에 일어난 일은 모두 잘 알고 있겠지. 앞으로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의논하기 위해 이 자리를 마련했다. 의견이 있으면 모두 기탄없이 말하도록.”

자포리자가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지만, 다들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집무실에 모인 사람들의 표정은 매우 심각했다.

애초에 약자인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았다.

“영주님은 이번 일로 프라인과 영지전을 생각하고 있습니까?”

원로인 카스만이 물었다.

“아닙니다. 현실적으로 영지전을 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상대에게 어느 정도 타격을 줄 자신은 있지만… 아마 스탄다비아는 그걸로 끝이 나겠죠.”

“답답합니다. 죄를 지은 건 저쪽인데, 오히려 그쪽의 처분만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니요. 나 참, 이거 더러워서…….”

사미르가 거침없이 말을 내뱉자 기사단장인 칼튼이 눈치를 주었다.

기사인 칼튼이 보기엔 그가 자포리자의 앞에서 하는 말이 불충해 보였다.

그는 충성을 맹세한 기사가 아니라 귀족 출신의 행정관이다 보니 직설적으로 말하는 면이 있었다.

“뭐, 사미르의 말이 틀린 건 아니지. 하지만 지금은 신세 한탄보다는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만 논의하자고.”

자포리자는 사미르의 말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단지 주제에서 벗어나려는 분위기를 다시 돌려놓을 뿐이었다.

“영주님.”

한참 생각하던 카스만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말씀하세요.”

“지금 무언가를 결정하기엔 정보가 너무 없습니다. 지금까지 몬스터 방어에만 집중하다 보니, 다른 영지에 비해 기본적인 체계가 너무 빈약합니다. 그래서 이번에 첩보부를 신설하는 안을 건의하겠습니다. 이제 다른 영지에서 우리에게 관심을 가기지 시작했습니다. 늦은 감이 있으나, 우리도 빨리 정보를 모아 올 수 있는 첩보부를 만들어야 합니다.”

“아주 좋은 의견입니다. 첩보장은 블라도 기사를 임명하려고 하는데, 다른 의견이 있는 분 있습니까?”

“블라도는 책임감도 강하고 순발력도 좋으니 제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칼튼은 자신의 밑에 소속된 기사라 블라도를 가장 잘 알았다.

“그럼 블라도를 첩보장으로 임명하고 필요한 인원은 직접 뽑는 것으로 하지. 최대한 빨리 주변 영지의 정보를 수집할 수 있도록 하고. 사미르는 먼저 첩보부의 예산부터 챙기도록.”

“알겠습니다.”

사미르가 대답했다.

“만약 패트래건 영주가 영지전을 걸어온다면 우리는 어떤 대책이 있겠는가?”

이어서 자포리자는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기 위한 논의를 시작했다.

좋은 지도자는 늘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 먼저 대비해야 한다는 것을 역사를 통해 배웠다.

“만약 그런 일이 생기면 저희 기사단과 병사는 최선을 다해 싸우겠습니다. 그들의 기억 속 최악의 전투로 기억되게 만들겠습니다.”

칼튼이 의기를 표출했다.

“좋군. 다른 의견은 없나?”

“영주님, 싸움을 피할 수 있다면 피하시겠습니까?”

카스만이 물었다.

“영지민을 보호해야 하는 게 나의 첫 번째 사명입니다. 이길 수 없는 싸움에 무작정 달려들지는 않을 생각입니다.”

“그럼 그때는 정치를 해야 합니다. 저들이 원하는 것을 주고 시간을 버는 것도 한 가지 방법입니다. 영주님도 알다시피 영원한 비밀은 없습니다. 마나 연공법이나, 비누 제조법은 이미 많은 사람이 알고 있으니 언젠가는 새어 나간다고 보는 게 맞을 겁니다. 그러니 만약 영지전을 걸어온다면 이 점도 한번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카스만은 원로답게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정치를 이해하고 있었다.

“아주 좋은 의견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건 시간입니다. 적의 침공 없이 이대로 발전한다면 몇 년 안에 그 누구도 우리를 핍박할 수 없을 만큼 강해질 수 있습니다. 마나 연공법이나, 비누 제조법으로 시간을 살 수 있다면, 모두 내놓을 수 있습니다.”

자포리자의 말에 카스만은 뿌듯했다.

그가 태어날 때부터 본 터라 이렇게 현명하게 자란 모습을 보니 마음에 뜨거운 무언가가 가득 차올랐다.

‘선대 영주님이 저승에서나마 자랑스러워하실 겁니다.’

카스만은 스탄다비아의 전 영주, 자포리자의 아버지가 떠올랐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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