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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129화 (129/300)

[129화] 엎친 데 덮친 격

카스만과 대화를 마친 자포리자가 가신들 앞에서 선언했다.

“우리에겐 선인이 뒤에 있다는 걸 잊지 말라. 우리에게 강철을 주시고, 수만의 영지민들에게 쌀을, 그것도 최고급 쌀을 아낌없이 내려 주신 분이다. 그분이 바라시는 건 오직 하나, 스탄다비아의 발전뿐이다. 그러니 가슴을 활짝 펴고, 긍지를 잊지 말라.”

“알겠습니다. 영주님.”

“그리고 주변의 정보가 들어오면 다시 회의를 열도록 하지. 그리고 기존의 주민들과 이주민, 유민들끼리 다툼이 일어날 여지가 많으니 치안 유지에 적극적으로 신경을 쓰도록.”

“알겠습니다.”

치안대장 윌커슨의 대답으로 회의가 끝이 났다.

블라도는 자포리자의 명에 따라 정보를 모으기 위해 몇 명의 인원을 대동하고는 곧바로 주변 영지로 떠났다.

봄이 오자 스탄다비아가 깨어났다.

겨우내 언 땅이 녹고 새로운 생명이 꿈틀거렸다.

새로운 수로 작업은 연일 이어지고 있었고, 수로를 따라 많은 땅을 개간할 수 있었다.

가장 먼저 개간한 땅에는 경일이 보낸 씨감자를 심었다.

한편, 스탄다비아에 방문하는 상인들의 마차는 많은 물품들을 실어 왔고, 나갈 때는 몬스터의 부산물과 비누를 가지고 갔다.

발전하는 스탄다비아를 뒤로하고 자포리자가 급하게 찾아간 곳은 몬스터와 숲의 경계를 나누는 성벽이었다.

“충!”

병사들이 우렁찬 경례 소리가 자포리자를 맞았다.

“충.”

현장 지휘를 맡고 있는 기사, 라우터가 경례했다.

“그래. 수고 많아.”

자포리자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알리사의 기사 출신인 그를 사람들은 좋은 눈으로 봐주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일에 솔선수범하자, 사람들이 그를 보는 눈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지금은 어느 누구도 그를 전향한 기사라고 말하는 이가 없을 정도로 라우터는 스탄다비아에 스며들었다.

“그럼 보고를 시작하겠습니다.”

라우터는 허리를 꼿꼿이 펴고 입을 열었다.

“지난 일주일 동안 고블린과의 전투는 두 번 일어났습니다. 팔십 마리의 고블린을 사살하였고, 세 명의 부상자 외에 우리 측 피해는 없습니다. 부상자들은 모두 힐링 포션으로 치료가 완료된 상태입니다.”

자포리자는 경일이 보내 준 포션의 재료를 모두 하칸에게 보냈다.

그는 마법 공방에서 생산된 포션을 몬스터와 싸우는 병사들에게 가장 먼저 풀었다.

이전 같으면 자연히 상처가 낫기를 기다려야 했지만, 지금은 힐링 포션으로 빠르게 회복될 수 있었다.

“음…….”

보고를 들은 자포리자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하긴, 그만큼 죽였으면 이제는 씨가 마를 때도 됐지.’

옛날 같았으면 몬스터가 줄어들면 좋아했을 테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고블린의 지방은 비누의 원재료였다.

그 말인즉슨, 고블린이 없으면 스탄다비아의 재정 대부분을 책임지고 있는 비누 생산에 문제가 생긴다는 이야기였다.

라우터도 비누에 대해 잘 알고 있는지라, 자포리자가 짓는 표정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영주님.”

라우터가 조심스럽게 자포리자를 불렀다.

“그래. 의견이 있으면 자유롭게 말해도 괜찮네.”

“네, 그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 달에 급속도로 고블린의 수가 줄어들자,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몬스터의 숲으로 정찰을 나갔습니다. 숲을 살펴본 결과, 대부분의 고블린 부락이 텅 비어 있었습니다. 이제 이 지역은 수복된 것으로 보입니다.”

라우터의 말에 자포리자의 표정이 더욱 심각해졌다.

‘이거 큰일인데.’

언젠가는 몬스터에게 빼앗긴 선대의 땅을 수복할 계획이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은 외부의 확장보다 내부를 다질 시기였다.

하지만 몬스터가 줄어든다면, 어쩔 수 없이 외연 확장을 생각해 봐야 한다.

다만, 이것도 쉽지 않은 것이, 지금 프라인 영지의 패트래건 영주가 스탄다비아를 향해 이를 갈고 있는 상황이었다.

소드 익스퍼트라는 귀중한 인재를 잃고, 600골드라는 큰돈까지 날렸으니 결코 가만히 있지 않을 터였다.

외부에는 강한 적이 도사리고 있고, 내부는 불안정했다.

그러다 보니 자포리자의 머리가 아플 수밖에 없었다.

영지에 하루하루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가고 있는데 수입은 점점 말라 갔다.

세금을 걷으려 해도 영지민들은 가진 게 없었다.

“문제가 하나 더 있습니다.”

라우터는 말을 이었다.

“정찰하던 중 샤벨 타이거를 발견했습니다.”

늘 침착함을 잊지 않던 자포리자의 눈이 커졌다.

그도 그럴 것이, 샤벨 타이거는 스탄다비아 입장에서는 최악의 몬스터 중 하나였다.

엄청난 덩치를 자랑했고, 하늘을 향해 치솟은 두 개의 어금니는 적의 몸을 가볍게 찢어발겼다.

게다가 커다란 몸집에 맞지 않는 빠른 속도를 가졌고,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의 영역을 만들어 살아가는 몬스터라는 점이었다.

그러다 보니, 샤벨 타이거를 쉽게 잡으려면 소드 마스터가 필요했다.

그만큼 샤벨 타이거는 강한 몬스터였다.

적어도 소드 익스퍼트 상급의 경지에 이르러야 샤벨 타이거와 싸워 볼 만했다.

하지만 이 영지에서 가장 강한 자포리자도 소드 익스퍼트 하급이었다.

그렇다고 샤벨 타이가를 방치하면 더 이상 고블린의 유입은 끊기 터였다.

아무리 간이 큰 고블린이라고 해도 샤벨 타이거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러면 땅을 수복하는 것도 의미가 없어져 버린다.

오히려 샤벨 타이거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순간 먹이로 전락할 뿐이었다.

살아 있는 인간의 내장을 즐기는 샤벨 타이거는 무조건 피하는 것이 답이었다.

용병을 부르면 되지만, 소드 마스터 급은 워낙 귀하기도 했고, 부른다고 이런 작은 영지까지 올 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스탄다비아의 재정으로는 그들의 천문학적인 몸값을 감당하는 건 불가능했다.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져 내린 격과 같은 상황이었다.

안 그래도 스탄다비아의 상황이 좋지 않은 판국에 이것은 상당한 악재였다.

비누의 생산이 힘들어진 이상, 새롭게 돈을 벌 방법을 찾아야 했다.

사실 자포리자는 비누 이외에 돈을 벌 수단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무조건 꺼내 놓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비누만으로도 외부의 적이 생기는데, 비누와 같은 새로운 상품이 나오면 얼마나 많은 적들이 생길지 몰랐다.

보물은 지킬 힘이 없는 자에게는 오히려 불행을 가져다줄 뿐이었다.

‘지금은 시기가 좋지 않아 눈에 띄는 행동은 최대한 자제하고 싶었는데… 어쩔 수가 없구나.’

당장 돈이 들어가야 할 곳이 너무 많았다.

자신을 믿고 이주해 온 사람들이 무려 삼 만이었다.

최소한 이 사람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기반은 만들어 줘야 했다.

내성의 한쪽 구석에 새로운 건물이 지어지고 있었다.

황토 벽돌을 이용한 건물로 기존의 건물보다 두 배 이상 빠르게 완성되어 갔다.

“사미르, 언제쯤 완공이 될 것 같은가?”

“앞으로 한 달이면 완공이 될 듯합니다.”

“이곳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곳이 될 테니, 꼼꼼히 신경을 써야 하네.”

“알고 있습니다. 영주님.”

“참, 원단의 구입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나?”

“1,000야드의 원단이 창고에 들어와 있습니다.”

“괜찮군. 염색 재료는 잘 모이고 있나?”

“네. 순조롭게 모이고 있습니다. 보름 정도면 충분한 양이 모일 겁니다.”

어느새 사미르는 듬직한 행정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단기간에 워낙 많은 일을 하다 보니 확실히 일 처리 속도가 빨라졌다.

“일꾼들의 관리를 잘해야 하네.”

“네. 모두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을 뽑은 터라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염색의 과정을 세분화해서 과정마다 일하는 무리를 따로 관리하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모릅니다. 채집해야 하는 식물도 한 사람당 한 가지로 정해 두어서 채집꾼들을 모두 납치하지 않는 이상, 비법을 빼 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잘하고 있군. 고생하게나.”

자포리자는 사미르를 격려하고 외성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번에 시도하는 것은 원단의 염색이었다.

경일이 비누 다음으로 전해 준 것이 원단 염색 방법이었다.

귀족들은 화려한 색의 옷을 원했고, 기존의 염색과 다른 선명한 색의 옷은 큰돈이 될 게 분명했다.

스탄다비아의 재정을 책임질 새로운 무기였다.

외성으로 향하던 자포리자 무언가가 생각난 듯 다시 돌아와 사미르에게 물었다.

“참, 온돌 집을 짓는 교육은 잘되어 가고 있나?”

자포리자의 말에 사미르가 우물쭈물했다.

“그게… 잘 안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실제로 만들어 본 적이 없고, 가르치는 이도 영주님께 잠깐의 교육을 받은 게 전부다 보니… 영주님께서 직접 나가서 영지민들에게 교육을 한번 해 주시는 게…….”

사미르는 자포리자가 얼마나 바쁜지 잘 알고 있어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자신도 영지에서 가장 바쁜 사람 중의 한 명이지만, 자포리자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그는 요즘 자포리자를 볼 때마다 잠을 자는 건지 궁금할 때가 많았다.

사실 자포리자가 잠잘 시간도 아껴 가며 일을 하는 건 맞았다.

하지만 마나의 경지가 높아지니 잠을 줄여도 체력적으로 문제가 없었다.

게다가 예전에 일을 할 때보다 효율이 올랐다.

경일이 보내 주는 메모로 꾸준히 공부를 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머리가 틔었기 때문이다.

이해하는 것이 빨라지고, 상황에 맞게 응용하는 실력도 늘었다.

경일이 보기에는 아직 부족해 보일지 몰라도, 이 시대의 사람들이 보자면 자포리자는 거의 초인이었다.

“그래. 말이 나온 김에 지금 가자.”

“네!”

사미르가 자포리자를 데리고 간 곳은 이주민들이 집을 짓는 현장이었다.

지금 이들이 짓는 집은 황토를 이용한 온돌 집이었다.

이번 겨울에는 추위로 죽은 사람이 없었지만, 재작년까지는 얼어 죽은 사람이 허다할 정도로 이곳의 겨울은 혹독했다.

기존의 나무집으로는 보온의 한계를 느껴 경일이 보내온 책에 등장한 온돌이라는 문화에 관심을 가졌다.

자포리자가 온돌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을 눈치챈 경일은 그에게 자세한 내용을 보냈다.

자포리자는 경일이 보내온 자료를 읽고 온돌 집을 짓는데 가장 중요한 재료가 황토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스탄다비아에서 가장 많은 것이 나무와 흙이었다.

땅바닥을 조금만 파내도 불그스름한 흙이 나왔다.

집을 짓는데 가장 필요한 황토가 널려 있으니, 이제는 만들기만 하면 됐다.

자포리자가 현장에 도착하니 새로 뽑은 행정 직원이 사람들과 함께 온돌 집을 짓고 있었다.

그를 본 사람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인사를 건넸다.

“영주님, 어서 오십시오.”

행정 직원이 빠르게 달려와 자포리자를 수행했다.

“로이드, 잘 안 되는 부분이 있는가?”

“저… 그게 막상 해 보니 막히는 부분이 너무 많습니다.”

“실전에 들어가면 늘 새로운 문제가 생기지. 그럼 나랑 같이 처음부터 새롭게 지어 보세. 이번 기회에 직접 지어 보는 것도 나쁠 게 없겠지.”

자포리자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귀족이, 그것도 영지에서 가장 고귀한 사람인 영주가 직접 일하는 모습은 영지민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들은 자포리자의 작은 행동에도 눈을 떼지 않고 바라봤다.

“터다지기부터 시작하지.”

사람들이 많으니 금방 일이 진행됐다.

“아니, 처음부터 너무 많은 흙을 올리면 안 돼. 일을 빨리하고 싶어서 한꺼번에 많은 흙을 채워 다지면, 겉은 다져질지 몰라도 안은 하나도 다져지지가 않아. 만약 이 상태로 무거운 벽이 세워지면 땅이 꺼져 집이 기울어질 수도 있어. 뭐든지 기초를 확실히 해야 오래가는 법이지. 그러니 흙을 조금씩 올리고 한 번 다진 뒤, 그 위에 다시 흙을 올려 다지는 것으로 진행하자고.”

자포리자의 말에 사람들이 한 몸처럼 움직였다.

고운 흙을 집터에 올려 평평하게 다듬었다.

집 평수가 그리 넓지 않아 금방 사각형의 집터가 완성되었다.

그러자 자포리자는 바닥에 간단한 설계도를 그려 주었다.

한국 전통 방식의 기둥과 보를 이용한 구조였다.

“일단 이 설계도를 참고해서 집의 뼈대부터 만들도록 하지. 집의 뼈대가 완성되면 다음 단계를 설명해 주겠네.”

“알겠습니다, 영주님.”

자포리자는 집터를 잡는 법과 나무를 이용한 집의 구조를 설명하고 자리를 떴다.

시간이 흘러 집의 뼈대가 완성됐다는 연락에 자포리자는 현장으로 가서 교육을 이어 갔다.

“고운 황토에 물과 지푸라기를 썩혀 만든 반죽을 섞고 대나무를 엮어 만든 벽에 바르면 된다. 두껍게 바를수록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게 지낼 수 있으니 명심하도록.”

사람이 많으니 금방 벽이 완성됐다.

“황토가 마르고 균열이 가면 그 사이로 반죽을 꾸준히 발라 주어야 한다.”

벽이 세워지고 곧이어 지붕까지 완성되었다.

이제 가장 중요한 온돌을 시공할 차례였다.

자포리자도 이론으로 이해했지만, 처음 만드는 것이라 살짝 긴장되었다.

온돌 공사는 역시 쉽지 않았지만, 다 같이 노력해 구들장을 만들고 굴뚝을 쌓았다.

마지막으로 부뚜막까지 설치가 끝나니 집이 완성되었다.

집 안의 방바닥에는 짚으로 만든 멍석을 깔았고, 커다란 솥이 부뚜막에 떡하니 올려졌다.

솥 안에 물을 붓고, 불을 때자 방바닥이 따뜻해져 왔다.

열 손실이 적어 나무의 사용도 줄일 수 있었다.

연기는 굴뚝을 통해 모두 나가니 실내 공기는 쾌적했다.

방 안은 금방 훈기로 가득해졌고, 바닥은 기분 좋게 따뜻했다.

‘대단하구나. 이것이 몇백 년 전의 기술이라니…….’

자포리자는 완성된 온돌을 보고 감탄을 내뱉었다.

“우와, 이거 너무 좋다. 바닥에 한번 누워 봐. 등이 따뜻한 게 잠이 절로 온다니까?”

성질 급한 누군가가 방에 누워 편안한 표정을 짓자 사람들이 너도나도 따라서 누웠다.

“세상에… 이런 집도 다 있구나. 이런 집에 살면 더는 추위에 떨지 않아도 되겠어.”

따뜻한 방바닥에 누워 본 사람들은 달뜬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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