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130화 (130/300)

[130화] 이이제이

“대단합니다, 성주님. 기존의 집은 모양만 집이었네요. 바람도 안 들어오고, 방 안이 따뜻하고 너무 좋습니다.”

사미르는 벌써 온돌 집의 매력에 빠진 듯했다.

그의 태도로 보아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집이 새로 지어질 것 같았다.

얼마 뒤, 첩보부의 첫 보고가 올라왔다.

보고서를 읽어 내려가던 자포리자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나는 우물 안 개구리였구나. 우리만 잘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 예전에는 몬스터만 막으면 잘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제는 사방이 적이구나.’

보고서에는 많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만든 지 얼마 안 된 첩보부가 보고할 정도의 정보라면 이미 넓게 퍼진 이야기라는 것인데, 이런 것도 모르고 있었다니… 지금까지 너무 무심했다.

아니, 무심이 아니라 생각도 하지 못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었다.

자포리자는 급히 성의 주요 인사들을 불러 회의를 열었다.

다들 첩보부의 보고서를 심각하게 읽었다.

“영주님, 이거 놀라운 이야기들이 많군요. 우리만 다른 세상에 살고 있었네요.”

보고서를 읽은 칼튼은 자포리자와 같은 생각을 했다.

보고서의 첫 내용은 베르아스 왕국에 관한 것이었다.

현재 베르아스의 상황은 악화 일로를 걷고 있었다.

왕권은 갈수록 약해지고, 귀족들은 여러 파벌로 나누어 서로 싸우고 있었다.

스탄다비아에서는 중앙 정치에 대해 들어 본 적도, 생각해 본 적도 없으니 남의 이야기 같았다.

두 번째는 알리사 지방에 관한 이야기였다.

자포리자가 알리사의 영지민을 이주시키고 철수해 버리자, 알리사는 무주공산이 되어 버렸다.

왕국 법에 따르자면 알리사는 스탄다비아의 영지인 것이 맞지만, 지금 세상에서 왕국 법은 유명무실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무주공산인 알리사에 프라인의 병사와 아드리온의 병사가 들어와 있다고 했다.

“이거, 주인이 따로 있는데 날강도 같은 놈들이네요. 아무리 왕권이 약해졌다고 하지만, 엄연한 법도가 있는데. 왕국의 귀족이라는 것들이 먼저 법을 어기면 어쩌자는 건지… 그들의 작위도 모두 왕국에서 받은 것이거늘.”

사미르가 제법 날카롭게 말을 했다.

“그런 게 통하면 백성들이 그렇게 어렵게 살지 않겠지요. 보고서를 보니 영주들이 하나같이 사치에 빠져 있다고 적혀 있네요. 그 돈이 다 어디서 나오겠습니까. 전부 힘없는 영지민들을 쥐어짠 결과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두 영지 모두 사정이 그리 좋다고 할 수 없는데, 알리사는 왜 노리는지 모르겠습니다.”

치안대장 윌커슨이 답답한 심정을 토해 냈다.

직책상 영지민들과 가장 많이 부딪치는 터라, 그는 무엇보다 영지민들이 우선인 듯했다.

“영주들이 새로운 땅을 노리는 건 당연한 겁니다. 권력에 욕심 있는 자들이라면 영지를 넓히는 건 당연한 본능이지요. 이들은 땅을 늘리고 세금을 걷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손쉽게 땅을 늘릴 수 있는 기회를 마다할 이유가 없지요.”

카스만이 사람들의 궁금증을 풀어 주었다.

“그런데 여기 재미있는 사실이 하나 적혀 있군요. 이걸 잘 이용하면 한동안 우리를 노리는 프라인의 패트래건 영주의 발을 묶어 둘 수 있을 겁니다.”

순간, 자포리자의 귀가 번쩍 뜨였다.

지금 스탄다비아에 당면한 과제 중에 가장 골치 아픈 일이 혹시 일어날지도 모를 프라인과의 영지전이었다.

영지전을 피하려고 비누 제조법과 마나 연공법까지 넘길 각오를 했는데, 아무런 피해 없이 시간을 벌 수 있다면 이보다 좋을 건 없었다.

모두의 눈이 카스만의 입으로 향했다.

“카스만 경, 어서 말씀해 주시지요. 저 역시 무척 궁금합니다.”

평소 과묵한 자포리자도 마음이 급한지 대답을 재촉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알리사에 들어온 프라인의 영주와 아드리온의 영주의 사이가 무척 안 좋다고 나와 있습니다. 선대에서부터 이어져 온 원한이 깊은데, 최근 두 영지의 경계에 있는 광산의 소유권을 두고 그 사이가 더욱 악화됐다고 나오는군요. 아마 알리사에 두 영지의 병력이 들어온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겁니다. 프라인이 알리사로 들어온 건 그 땅을 노리는 것도 이유 중에 하나겠지만, 이번에 계략이 실패하면서 우리를 직접적으로 압박하기 위한 이유도 있을 겁니다.”

카스만이 주위를 둘러보다 다시 말을 이었다.

“제 생각으로는 프라인의 패트래건 영주가 먼저 알리사를 노리고 병력을 보냈는데, 그것을 두고 볼 리가 없는 아드리온의 게렉스 영주도 병력을 파견한 듯합니다. 이걸 잘만 이용한다면 패트래건 영주가 한동안 우리를 생각할 여유가 없어질 겁니다. 문제는 그렇게 되면 패트래건 영주는 우리와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된다는 겁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은 벌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일지는 모르나 영지전을 할 날이 분명히 올 것입니다”

카스만의 이야기가 끝나자 자포리자가 곧바로 입을 열었다.

“패트래건 영주는 우리를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아끼는 기사와 큰돈까지 잃었는데,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우리가 가만히 있든, 무슨 수를 쓰든, 어차피 프라인과의 영지전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시간입니다. 시간만 벌 수 있다면 영지전을 겁낼 이유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 안에 프라인보다 더 강해질 테니까요. 당한 건 확실히 돌려줘야죠.”

자포리자가 확실히 방침을 정했다.

“그렇다면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도 우리가 전혀 손해 볼 것이 없는…….”

“그 방법이 무엇입니까?”

“아드리온과 동맹을 맺는 겁니다. 그럼 프라인도 우리를 쉽게 노리지 못할 겁니다. 우리와 영지전을 하기 위해 병사를 일으키는 순간, 아드리온에게 뒤통수를 맞을 수가 있으니까요. 소중한 광산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쉽게 영지전을 벌이지는 못할 겁니다.”

“그런데 아드리온이 우리 같이 작은 영지와 동맹을 맺으려고 할까요? 우리야 얻는 것이 있지만, 그들이 얻는 것은 없지 않습니까?”

“그것도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어떤 방법인가요?”

“영주님은 알리사 영지에 뜻이 있습니까?”

한창 동맹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중에 뜬금없이 알리사 얘기가 나오자 자포리자는 의아했지만, 곧바로 대답했다.

“없습니다. 좋은 땅도 아니고 지금은 관리할 여력도 없습니다.”

“지금 두 영지가 모두 알리사를 노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왕국이 인정하는 실질적인 주인은 우리입니다. 그러니 알리사로 흥정을 하는 겁니다. 우리가 공식적으로 알리사를 아드리온에게 넘기면 아드리온은 명분을 얻을 수가 있으니 프라인을 압박하기 좋을 겁니다. 우리로서는 알리사가 프라인의 손에 들어가면 턱 끝에 창이 겨눠지는 것과 같으니 아드리온이 나을 듯합니다.”

“아주 좋은 생각입니다. 그럼 우리도 사절을 보내야겠군요. 누가 가는 것이 좋겠습니까?”

“모두 바쁘니, 이 일은 제가 마무리하겠습니다.”

“그럼 카스만 경이 고생 좀 해 주십시오. 덕분에 큰 걱정을 하나 덜었습니다.”

자포리자는 주변 정세를 읽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뼈저리게 실감했다.

이번 일로 그는 많은 것을 배웠다.

카스만이 떠나고 한 달 뒤, 그가 기쁜 소식을 가지고 돌아왔다.

아드리온 입장에서는 알리사 영지를 통째로 준다는데 이 협상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 덕에 한동안은 프라인에 대한 걱정을 덜 수 있게 됐다.

* * *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손주아의 표정은 평상시와 다르게 매우 복잡했다.

집에 도착한 그녀는 우선 식탁에 음식부터 차렸다.

분식점은 저녁이 특히 바빠서 일을 마치고 나면 늘 배가 고팠다.

그 점을 잘 알고 있는 경일은 매번 이렇게 따로 음식을 챙겨 주곤 했다.

누구보다 그의 음식을 좋아하는 그녀였지만, 오늘은 음식에 손이 잘 가지 않았다.

손주아는 얼마 전부터 커다란 고민거리가 하나 생겼다.

그런데 이 일은 경일만이 해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게 작은 일이 아니다 보니 부탁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사실 그녀는 동네 분식에서 아르바이트를 오래 할 생각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에게 더없이 소중한 곳이 되었다.

손주아에게 있어서 동네 분식은 알면 알수록 신기한 곳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정이 넘치고 사람들의 웃음이 가득한 곳이었지만, 여긴 마치 신화 속에 등장하는 엄청난 비밀을 간직한 듯한 신비로운 곳이었다.

이 기묘한 인연의 시작은 이미순이었다.

그녀에게 처음 아르바이트를 제안받았을 때가 생각났다.

“야, 너 이번 기회 놓치면 분명 후회해. 내가 특별히 너 생각해서 만든 자리야.”

“미순아, 그래도 분식점은 좀 아니지 않아? 내 꿈 중 하나가 식당을 차리는 거긴 하지만, 분식점에서 특별히 배울 건 없어 보이는데…….”

이번에 집에서 독립하면서 일자리가 급하긴 했으나, 소개받은 곳이 분식집이라 조금 실망스러웠다.

“너, 내가 사 오는 안주 먹을 때마다 맛있다고 감탄했지?”

“그럼~ 네가 말하니 또 먹고 싶네. 그 음식은 신이 인간에게 내려 주신 축복이 틀림없어. 재료 하나하나가 살아 숨 쉬는 것도 모자라 전체가 어우러져 또 다른 천상의 맛을 내지. 요즘 들어서 내게 가장 힘을 주는 게 바로 그 음식이야.”

손주아가 황홀한 행복감에 빠져들자 이미순이 얼른 말했다.

“그게 전부 그곳 사장님이 만든 음식이야. 그 정도면 웬만한 곳보다 배울 게 훨씬 더 많을 거 같지 않아? 너, 그런 대박 집 노하우는 어디 가서 쉽게 배울 수 있는 거 아니다. 그리고 일자리를 하루빨리 구해야 한다면서. 아버지 생각해서라도 취직해야 한다면서.”

손주아의 아버지는 연금술사 헌터였다.

99퍼센트가 22살 안에 각성한다고 알려진 헌터 세계에서 남은 1퍼센트에 들어간, 어찌 보면 행운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공식적으로 대한민국의 최고령 각성자가 손주아의 아버지 손윤찬이었다.

하지만 손윤찬의 사정은 매우 좋지 않았다.

“알았어. 언제 면접 보러 가면 되는 거야?”

“내일 너 편한 시간에 가면 돼.”

“그래, 고마워.”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준비를 시작했다.

지금까지 공부만 하다 처음 면접을 보는 거라 긴장이 됐다.

‘잘해야 해. 아빠가 많이 힘든데 내가 조금이라도 빨리 일해서 도와드려야 해.’

화장을 몇 번이나 고쳤는지 몰랐다.

막상 화장을 다 하고 나면 어딘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을 확인하고는 급하게 어젯밤 미리 준비해 둔 정장을 입고 거울 앞에 섰다.

포니테일로 머리를 단정하게 묶은 단아해 보이는 여자가 한 명 서 있었다.

‘조금 모자라 보이긴 하지만, 이 정도면 괜찮을 거 같아.’

민무늬의 단정한 구두를 신고 대문을 열고 나섰다.

밝고 따듯한 햇빛이 그녀를 맞이했다.

‘이 첫발이 사회로 향하는 첫걸음이야.’

손주아는 살짝 흥분한 듯 입술을 깨물고, 입은 재킷을 당겨 주름을 정리하고는 씩씩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지만 막상 동네 분식이라는 간판을 보자, 조금 전까지 넘치던 자신감이 사라지고 긴장이 밀려들었다.

다시 한번 옷매무새를 가다듬고서는 분식점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자신이 인사를 하기 전에 경일이 먼저 인사를 건네 왔다.

긴장을 많이 해서 면접 때 실수를 많이 한 거 같았지만, 다행히 합격하고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 후로 그녀는 바쁜 분식점 생활에 적응해 나갔다.

처음에는 실수도 많이 했지만, 경일은 한 번도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격려해 주었다.

일은 힘들었지만 매일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고, 왁자지껄한 분식점의 분위기에 점점 빠져들었다.

처음에는 경일에 대한 경계심도 있었으나, 아이들을 사랑하는 모습에 모든 경계심이 사라져 버렸다.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평소 체력이 약해서 늘 걱정이었는데, 의외로 금방 적응하는 자신이 뿌듯했다.

요즘은 일을 마치고도 그다지 피곤하지 않았다.

예전의 저질 체력을 생각하면 괄목할 만한 성장이었다.

특별히 운동을 하거나 약을 챙겨 먹은 것도 아닌데, 체력이 너무 좋아져 스스로가 신기할 정도였다.

친구들도 전부 단골이다 보니, 어떤 때는 일이 아니라 같이 노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다.

일이 익숙해질수록 여유가 늘어났다.

눈앞의 일을 처리하는 것만으로도 급급했던 때와 달이 지금은 분식점의 모든 일을 둘러볼 정도가 됐다.

그런 그녀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경일이었고,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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