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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131화 (131/300)

[131화] 사장님 헌터시죠?

처음 이상하게 생각한 건 도마질이었다.

경일의 채소 써는 속도가 빨라도 너무 빨랐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렇게 빠르게 칼질을 하는데도 썰린 재료의 두께가 놀랍도록 일정했다.

마치 기계로 썬 듯한 칼질이었다.

하나를 의식하게 되자, 그러고 보니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분식점에서 하루에 팔려 나가는 음식의 양은 어마어마했다.

그 많은 재료를 장을 보고, 씻고, 다듬는 일을 혼자서 한다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하루도 빠짐없이 그녀가 출근하기 전에 이미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음식을 조리하는 속도나, 절대 지치지 않는 체력 등이 도저히 평범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결정적인 것을 목격했다.

그날따라 순두부찌개의 주문이 유독 많았다.

준비해 둔 순두부가 모두 떨어지지 않을까 하고 걱정이 들 정도였다.

손님이 주문한 내용을 전달하려 주방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아무것도 없던 주방의 허공에서 갑자기 나타난 순두부를 우연히 본 것이다.

그런데 경일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자연스럽게 허공에서 나타난 순두부를 냉장고에 넣고는 조리를 시작했다.

손주아는 그날 경일이 헌터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아버지가 헌터이기 때문에 자연히 그녀도 헌터에 관한 다양한 지식이 있었고, 그날 본 것이 인벤토리 스킬이라는 것을 곧바로 알아봤다.

하지만 경일이 헌터라는 사실을 밝히고 싶지 않은 것 같아 그녀도 굳이 묻지 않았다.

그 뒤로도 가끔씩 경일이 인벤토리 스킬을 쓰는 모습을 봤지만,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

‘왜 헌터가 이런 동네에서 분식점을 하는 거지?’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으나, 궁금증은 금방 풀렸다.

음식의 맛에 비해 말도 안 되게 싼 가격이나, 동네 아이들을 대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경일이 봉사에 삶의 기쁨을 누리는 사람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동안 손주아는 분식점 일이 아르바이트이기 때문에 정직원으로 일할 수 있는 곳을 알아보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새로운 일자리를 알아보는 것을 관뒀다.

이렇게 멋진 곳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다만, 아르바이트다 보니 딱 한 가지, 수입이 적은 게 걱정이었다.

그런데 경일은 자신의 마음을 알아본 듯 월급까지 인상해 주었다.

덕분에 이제 집에도 다달이 조금씩 생활비를 부칠 수 있었다.

한편, 분식집에 찾아오는 이 동네 아이들의 사정을 잘 알고 이는 경일 다음으로 그녀였다.

특히, 수한이의 사연은 그녀도 항상 안타깝게 여겼다.

언젠가부터 경일이 수한이에게 죽을 챙겨 주기 시작했다.

수한이는 매일 죽을 받으러 왔고, 그때마다 어머니가 나아지고 있다고 기뻐했다.

손주아는 호전되는 병세와 경일의 죽 사이에 어떠한 관련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결정적으로 며칠 전, 선호연이 걸어서 분식점에 나타난 날 그녀는 힘들어하는 아버지를 떠올렸다.

던전병은 그냥 낫는 것이 아니었다.

현재까지 알려진 사실로는 병을 치료하기 위해선 던전 고유 식물이 무조건 필요했다.

경일이 어떤 능력이 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손주아는 아버지를 생각하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녀는 아버지를 위해서 용기를 내기로 했다.

결심이 선 손주아는 평상시의 밝은 얼굴로 돌아왔다.

시간이 흘러 식탁 위에 음식이 식긴 했으나, 별 상관없었다.

경일의 음식은 식어도 맛있으니까.

다음 날, 손주아는 집을 나서며 콧속 깊이 숨을 크게 한 번 들이마셨다가 입으로 내뱉었다.

주먹을 굳게 쥐고 단호한 표정으로 분식점을 향해 힘차게 걸었다.

“사장님, 우리도 회식 한 번 해요!”

“응? 회식?”

늦은 점심을 먹고 있는데, 손주아가 경일을 향해 불쑥 말했다.

“네, 회식이요. 사실 사장님께 부탁드릴 것도 있고요.”

“그래, 그럼. 그런데 회식은 어디서 하지? 첫 회식인데 시내에 나가서 고기라도 먹을까?”

“아니요. 여기서 해요. 시내에서 먹는 음식보다 사장님 음식이 천만 배쯤 더 맛있어요.”

“아니, 뭘 또 천만 배씩이나…….”

경일이 수줍어하면서도 자랑스러운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오늘은 조금 일찍 문 닫고 회식하자. 메뉴는 음… 뭐가 좋으려나.”

“메기 매운탕이랑 탕수육 먹고 싶어요.”

“그래.”

분식점의 하루는 금방 지나갔다.

경일은 손주아를 위해 손질해 놓은 메기 중 가장 큰 놈을 인벤토리에서 꺼내 매운탕을 끓였다.

그러고 나서 탕수육도 튀겨 테이블에 놓았다.

“이거면 되겠어? 자주 먹던 음식인데.”

“아니에요. 전 메기 매운탕이랑 탕수육의 새콤달콤한 소스가 너무 맛있어요. 따로 먹은 적은 있는데 두 가지를 한꺼번에 먹은 적이 없어서 꼭 이렇게 먹어 보고 싶었어요.”

손주아는 밝게 웃으며 음식을 먹었다.

두 사람은 회식인 만큼 술도 한잔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손주아가 얘기한 부탁할 일이 뭔지 궁금했지만, 경일은 굳이 재촉하지 않았다.

“저기… 사장님.”

적당히 마신 술에 볼이 발갛게 된 손주아가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경일이 그런 그녀를 부드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사실… 사장님이 헌터라는 거 알고 있어요.”

갑작스러운 그녀의 말에도 경일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항상 조심스레 행동했지만, 마나 연공법을 익히고 감각이 예민해진 뒤에 손주아에게 인벤토리에서 물건을 꺼내는 모습을 몇 번 들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모습을 보고도 태연한 그녀의 태도 때문에 자신이 알아차리기 전에도 인벤토리를 사용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매우 당황했으나, 그녀가 얼마나 착하고 의리 있는 사람인지 잘 알고 있어 별다른 걱정은 되지 않았다.

“혹시 미순이에게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저희 아빠도 헌터고 연금술사세요.”

경일의 얼굴에 살짝 놀라움이 스쳤다.

손주아가 자신이 헌터인 걸 알고 있다는 말보다 지금 이야기가 더 놀라웠다.

“전혀 몰랐어. 주아 씨 아버님이 헌터였어?”

“네. 공식적으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늦은 나이로 각성한 헌터예요.”

“우와~ 이거 대단하시네. 가장 늦게 각성한 헌터인 것도 굉장한데 연금술사라니…….”

경일이 놀라워했지만, 그녀의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아빠가 각성하기 전에 제약 회사 연구원이셨거든요. 그래서 그런지 처음 각성하고 곧바로 연금술사 스킬이 생겼어요.”

손주아는 처음 말을 꺼내는 것을 힘들어했지, 막상 말을 한 이후로는 편안히 말을 이어 갔다.

“기본 레벨인 10레벨까지 올리시고 곧바로 나름 대한민국에 유명한 연금술사 밑으로 들어가셨어요. 그런데 사장님, 그거 알아요?”

“…….”

경일은 그녀의 풀 죽은 목소리에 아무 말없이 다음 말을 기다렸다.

“연금술사 사회라는 게 정말 이기적인 곳이더라고요. 아빠는 새롭게 펼쳐진 인생에 큰 꿈을 가지고 도전했어요. 정말 열심히, 성실하게 일하셨죠. 헌터들이 전부 나이가 어리니 오히려 아빠가 더 조심하셨어요. 무시도 많이 받았지만, 그때만 해도 아빠는 꿈에 부풀어 계셔서 그 모든 것을 지나가는 하나의 과정으로 받아들였어요. 새로운 걸 만들어 낸다는 것은 아빠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었거든요…….”

이야기를 이어 가던 손주아는 울분을 삼키듯 몸을 떨었다.

“하지만 일 년이 지났는데도 아빠의 스킬은 처음 그대로였어요. 처음에는 포션을 만드는 기술과 노하우, 그리고 연구를 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고 달콤한 말로 아빠를 꼬셨지만, 현실은 완전히 달랐어요. 연금술사는 자신이 하기 싫은 반복적인 작업만 꾸준히 시켰어요. 아빠를 이용할 생각만 했지, 성장에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더군요. 게다가 그 사회가 도제식으로 운영되다 보니 거의 무임금에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셨어요.”

아빠를 생각하던 손주아는 답답한지 반쯤 찬 맥주를 한번에 들이켰다.

“…….”

“하지만 아빠는 자신의 꿈과 가족을 위해 이 모든 걸 꿋꿋이 견디면서 여전히 연금술사 밑에서 일하고 계세요. 벌써 2년이 넘었는데도 아버지의 스킬은 여전히 제자리에요. 아빠가 너무 힘들어하셨어요. 무엇보다 가족들에게 미안해하시고… 그래서 제가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어서 취직한 거였어요. 다행히 사장님이 덕분에 집으로 생활비를 보낼 수 있어서 걱정을 덜긴 했지만, 아빠만 생각하면 늘 가슴이 아파요…….”

말을 이어 가는 손주아의 얼굴에 복잡한 감정이 떠올랐다.

“아빠에게 기회가 주어지면 분명히 좋은 포션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제약 회사에 다닐 때도 노력으로 저희 아빠를 따라갈 사람은 없었어요. 나름대로 많은 성과도 올리셨고요… 연금술사가 처음에 약속한 대로 포션을 만드는 노하우와 연구할 수 있는 재료만 공급해 줬어도 아빠는 분명 스킬을 올릴 수 있었을 거예요.”

손주아의 얘기를 듣던 경일이 진지한 얼굴로 그녀의 빈 잔에 맥주를 따라 주었다.

“하지만 그 연금술사는 지금도 허드렛일만 시키지, 노하우를 가르쳐 줄 생각은 전혀 없는 거 같아요. 그래, 노하우를 가르쳐 줄 수 없다는 건 이해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 정도로 오래 일했으면 최소한 포션 연구를 할 수 있게 도와줄 수는 있는 거 아니에요? 갈수록 수척해지는 아버지를 보니 마음이 아파서…….”

손주아의 큰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이자, 경일이 조용히 휴지를 내밀었다.

“죄송한데요. 사장님. 저희 아빠라서 그런 게 아니라 정말 열심히 하시는 분이시거든요. 기회만 주어진다면 금방 좋은 포션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거예요. 무리한 부탁이라는 건 알지만, 저희 아빠 한 번만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평생 사장님 밑에서 무보수로 일해서라도 이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혹시 사장님이 하실 수 없는 일인데 제가 모르고 이런 부탁을 드린 거면 정말 죄송합니다. 그만큼 절박했거든요. …….”

생각지도 못한 손주아의 부탁에 경일은 생각에 잠겼다.

계속해서 자신의 비밀이 퍼져 나가는 건 좋은 일이 아니었다.

신화 길드나 대복 길드와의 싸움도 비밀이 새어 나가서 일어난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움츠리고 있을 생각도 없었다.

예를 들어 스탄다비아처럼 마나 연공법이나, 비누의 제조법을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언젠가는 알려질 수밖에 없었다.

그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처음부터 던전을 숨길 생각이었다면 던전에서 나오는 자원은 오직 자신을 위해서만 써야 했다.

하지만 당장 던전의 자원으로 분식점을 운영하고, 주위의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스탄다비아를 지원하고 있지 않은가.

자신이 남들이 탐내는 보물을 가진 이상, 앞으로도 위험은 꾸준히 닥쳐올 것이다.

이번에 곽마권과 손필견의 싸움을 겪으며 그도 느낀 게 많았다.

무조건 피하는 것만이 답이 아니었다.

그동안은 최대한 정체를 숨기는 것에 주력했지만, 그건 한계가 분명했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단 하나였다.

바로 자신이 위험을 극복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지는 것이었다.

이미 스탄다비아는 오로지 강해지기 위해서 위험천만한 줄다리기를 하고 있지 않은가.

갑작스런 손주아의 부탁이 의외이긴 했지만, 믿을 수 있는 사람을 곁에 둘 수 있다는 건 자신에게도 큰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지금까지 보아 온 손주아는 충분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이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어떨지 모르기에 일단 만나 보고 결정하기로 마음먹었다.

“아버님을 한번 만나 보고 싶은데.”

“그럼요. 사장님이 부담 가지실까 봐 아빠한테는 사장님이 헌터인 건 말씀 안 드렸어요. 사장님이 만나 보시고 결정해 주세요. 이런 힘든 부탁을 드려서 죄송해요…….”

“아냐. 주아 씨가 있어서 내가 얼마나 든든한데. 일단 아버님을 한번 만나 볼게.”

“감사합니다.”

손주아는 마음이 급했는지 곧바로 약속을 잡았다.

다음 날, 경일은 손윤찬을 만나기 위해 오래간만에 시내의 커피숍으로 갔다.

자신보다 나이 많은 어른을 만나는 자리이니만큼 약속 시간보다 일찍 가서 기다리고 있었다.

약속 시간 오 분 전에 오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들어왔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사람을 보며 경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아 씨가 예쁜 이유가 아버지를 닮아서 그런 거구나.’

손윤찬은 선한 얼굴을 가진 남자였다.

특히 맑고 깊은 큰 눈은 주아 씨의 눈과 똑같았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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