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연금술사
“안녕하세요. 주아 씨 아버님 되시죠? 동네 분식을 운영하는 김경일이라고 합니다.”
경일이 손윤찬을 향해 인사를 했다.
“아, 네.”
손윤찬은 어색한 듯 꾸벅 인사를 건넸다.
딸이 다짜고짜 전화해서 일하는 분식점의 사장을 꼭 만나라고 하니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었다.
혹여나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싶어 그의 눈엔 걱정이 한가득이었다.
“주아 씨에게 문제가 있어서 만나자고 한 것이 아니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불안한 눈빛을 본 경일이 얼른 눈치를 채고 손윤찬을 안심시켰다.
그의 얼굴이 한결 편안해지는 걸 보고 경일이 말을 이었다.
“저기… 아버님이 연금술사라고 들었습니다.”
“그게… 참, 연금술사라고 말하기 부끄러운 실력이라… 아직 배우는 중입니다.”
손윤찬은 민망한 듯 고개를 살짝 숙였다.
“오늘 만난 이유가 궁금하실 거 같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아는 분이 포션의 재료를 공급할 수 있는데, 혹시 아버님이 시장에서 통할 만한 포션을 만들 자신이 있으신가요?”
“네?”
손윤찬은 생각지도 못한 경일의 말에 크게 당황했다.
“그분은 연금술사가 아니라서 포션을 만들지는 못합니다. 아 참. 이걸 말씀 안 드렸군요. 포션을 만드는 레시피는 가지고 있습니다. 레시피와 포션 재료를 공급할 테니, 아버님이 이걸 바탕으로 아버님만의 포션을 만들면 됩니다. 가능하시겠습니까?”
“그게… 저… 그러니까, 그 정도의 대단한 조건이면 저 같은 스킬 1짜리 연금술사가 아니라 훨씬 더 대단한 연금술사도 섭외할 수 있습니다. 그게 그분에게 훨씬 더 도움이 될 겁니다.”
손윤찬은 눈을 질끈 감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바로 지금, 그토록 바라던 기회가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포션의 레시피와 연구 재료까지 제공해 준다는 제안을 받고 거절할 연금술사는 없을 것이다.
그동안 2년이 넘도록 노력했지만, 연금술사는 자신의 레시피를 극비에 부쳐 약간의 노하우도 얻지 못했다.
그런데 약간의 노하우도 아니고, 만드는 방법을 통째로 알려 주고 포션을 연구할 재료까지 공급해 준다니…….
솔직히 너무나 달콤한 제안이었다.
각성하기 전까지 평생 연구만 하고 살아왔고.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고 싶어 제약 회사를 그만두고 나왔다.
그렇게 고생 끝에 찾아온 기회였지만, 그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능력이 그만큼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자신의 딸이 마련해 준 기회이기에 더더욱 민폐를 끼칠 순 없었다.
“이 분야를 잘 모르시는 거 같아서 말씀드릴게요. 시장에서 통할 만한 포션을 만들려면 스킬이 보통 3레벨은 되어야 가능합니다. 몇몇 천재적인 연금술사는 2레벨에도 괜찮은 포션을 만들긴 하지만, 그건 예외적인 이야기고요. 그렇다면 스킬의 레벨은 어떻게 올리느냐, 그냥 포션을 많이 만들면 됩니다. 스킬이 오른다는 건 자신이 가진 마나와 포션의 여러 재료를 조합해 최고의 시너지를 내는 구간을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스킬이 오르면 자신의 마나가, 그러니까 겉돌던 마나가 포션의 재료에 더욱 잘 스며든다고 해야 하나. 음… 저도 스킬을 올려 본 적이 없어서 여기에 대해서는 정확히 말씀드리지 못하겠네요. 그러니까 한마디로 자신의 마나가 포션의 재료와 조합이 잘돼서 포션의 효능이 올라간다고 보시면 됩니다.”
‘아, 이래서 내가 만든 건 효능이 엉망이구나. 스탄다비아의 연구 마법사가 만든 포션이 내가 만든 것보다 훨씬 성능이 좋은 이유를 이제야 알겠네. 확실히 마나를 다루는 마법사라 다르긴 다르네.’
경일은 자신과 스탄다비아의 연구 마법사가 만든 포션의 효능이 지구와 차이가 나는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사람마다 스킬이 오르는 시기는 천차만별이지만,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의 기간은 꼭 필요합니다. 문제는 저같이 실력이 없는 연금술사는 그 기간이 훨씬 길 수밖에 없으니 비싼 포션 재료를 낭비하는 것과 같습니다. 차라리 그럴 바에야 저 같은 초보보다는 어느 정도 수준 있는 연금술사를 구하시는 게 더 나으실 겁니다.”
손윤찬의 태도가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자신이 처음 연금술사를 구한다고 말했을 때, 그의 눈동자가 급격하게 떨리는 것을 봤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그 자리가 자신의 것이 아님을 인정했고, 오히려 도움을 주려 하고 있었다.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치는 건 절대 쉽지 않았을 터였다.
더군다나 2년을 넘게 고생하고 이제 거의 희망을 잃은 상태에서 이런 기회를 포기한다니…….
만약 자신이라면 절대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그분이 찾는 건 스킬이 높은 연금술사가 아닙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겁니다. 스킬은 시간이 지나면 올라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님은 그런 면에서 아주 훌륭한 적임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버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돈입니까? 아니면 스킬을 올려 좋은 포션을 만드는 것입니까? 원하시는 건 뭐든지 만족시켜 드리겠습니다. 그분이 원하는 조건은 단 하나, 이 모든 것에 대해 철저히 비밀을 지켜 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님을 택한 건 수아 씨 때문입니다. 수아 씨가 부탁했고, 평소 그녀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선택한 겁니다. 수아 씨 같이 훌륭한 자식을 키운 분이라면 믿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이 자리를 만든 겁니다.”
손윤찬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누군가 자신의 자식을 이토록 극진히 칭찬하는데, 기뻐하지 않을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손윤찬이 깊게 고개를 숙였다.
손윤찬과의 만남을 끝내고 던전으로 돌아온 경일은 기분이 좋았다.
생각지도 못하게 겪고 있던 어려움 하나가 해결됐다.
물론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포션에 대한 걱정은 이제 내려놓을 수 있었다.
앞으로 스탄다비아에 질 좋은 포션을 공급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도 이용할 수 있게 됐다.
사실 손윤찬이 실패작이라고 말하는 포션도 아예 못 쓰는 것은 아니었다.
스탄다비아에서 생산되는 포션은 지구에 비해 효능이 너무 떨어져서 실패작이라도 충분히 효능을 발휘할 것이었다.
다음 날, 경일은 곧바로 분식점과 가까운 곳에 사무실을 하나 계약했다.
앞으로 손윤찬의 연구실이 될 곳이었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포션은 스탄다비아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한편, 경일은 요즘 한창 바빴다.
그의 일상에 새로운 일이 하나 추가된 덕이었다.
그 일 때문에 오늘도 그는 보육원에 들린 다음 산을 헤매고 다녔다.
“던전에서도 할 일이 산더미라서 여기서 시간을 뺏기면 안 되는데… 그렇다고 무작정 관두자니 불행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는 거고. 저 봐, 저 봐. 그만두려고 하면 꼭 한 마리씩 기어 나오잖아.”
경일의 앞에 고블린 한 마리가 침을 흘리며 나타났다.
고블린으로서는 최고의 먹이가 제 발로 찾아온 거나 다름없었다.
“크아악!”
고블린이 경일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덮치기 전, 상대의 기를 먼저 꺾고 싶어 한 행동이었지만, 문제는 그 상대가 하필 경일이라는 것이었다.
“어이쿠, 재롱을 떠는구나. 아주 죽여 달라고. 내가 또 그런 부탁을 절대 거절하지 못하는 걸 어떻게 알고 말이지.”
고블린은 자신의 기세가 전혀 통하지 않자 직접 앞으로 나섰다.
그러고는 녹슨 칼을 치켜들고 경일을 향해 덤벼들었다.
“아오, 냄새 봐라.”
경일은 고블린이 다가오면서 풍기는 비릿한 냄새에 코를 막고 왼발로 가슴팍을 걷어차 버렸다.
체중이 가벼운 고블린은 경일의 앞차기를 맞고는 거의 5미터 정도를 날아가며 데굴데굴 굴렀다.
“케엑!”
조금 전과는 다른 비명이 경일의 귀를 간지럽혔다.
캑캑거리던 고블린은 경일의 앞차기 한 방에 곧바로 자신의 위치를 알아챘다.
이 자리의 진정한 포식자가 누구인지.
눈치 빠른 고블린은 바닥에서 일어나자마자 등을 돌려 달아났다.
“잔류 몬스터는 이게 귀찮아. 보통 몬스터는 인간만 보면 무조건 덤벼든다는데, 잔류 몬스터는 왜 도망을 가는 거야? 몬스터 주제에 잔머리를 굴린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이러니 잡기가 더 힘들지.”
중얼거리던 경일은 인벤토리에서 작은 단검을 하나 꺼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단검을 고블린을 향해 던졌다.
가볍게 던진 듯 보였지만, 단검은 빠르게 날아가 고블린의 등에 깊숙이 박혔다.
“케에엑!”
고블린은 비명과 함께 넘어지며 바닥을 굴렀다.
팔을 허우적거리며 등에 단검을 뽑아 보려고 하지만 손이 닿지 않았다.
고블린은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에 진땀을 흘리면서도 땅바닥을 기며 경일과 멀어지려고 노력했다.
“뭐, 저런 게 다 있냐? 아주 살아 보려고 발광을 하는구나. 저런 행동을 하는 게 지구가 그만큼 좋다는 걸 알아서 그런 거겠지. 분명 사람을 많이 먹어 본 놈이구나.”
경일은 망설이지 않고 고블린의 심장에 검을 꽂았다.
죽은 고블린은 인벤토리에 넣고 산을 한 바퀴 돌아보고 던전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주방을 봐줄 사람을 한 명 뽑아야겠어. 스탄다비아에 필요한 물품도 사야 하는데 시간이 너무 없어. 잔류 몬스터도 잡아야 하고… 너무 바쁘네. 재료만 내가 준비해 놓으면 레시피 대로 하는 건 별로 어렵지 않을 거야. 내가 요리를 잘해서 맛있는 게 아니라 재료가 워낙 좋아서 맛있는 거니까. 설마 나보다 더 맛있게 만드는 거 아냐? 그럼 조금 곤란한데…….”
한편, 스탄다비아는 비누의 생산량이 떨어지면서 사정이 급속도로 나빠졌다.
워낙 비누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였다.
개간한 농지에 심은 감자를 수확하려면 아직 멀었고, 본격적인 염색을 준비하는 데에도 시간이 걸릴 터였다.
경일은 그 사이 힘든 시간을 메꿔 줄 생각이었다.
“이번에도 식량이 가장 급하겠지. 마음 같아서는 마트에서 파는 맛있는 걸 왕창 보내고 싶지만… 그럼 안 되겠지. 스탄다비아를 존중하는 만큼, 그 시대에 최대한 맞게 보내야 해. 내가 평생 도울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어설프게 현대의 음식을 보내는 건 삼가야지. 참, 다들 열심히 노력하는데 이번에는 고기도 좀 보내자. 어차피 스탄다비아에서도 고기는 먹을 테니까. 몇만 명이 먹을 정도면 발품을 많이 팔아야겠는걸.”
다음 날, 경일은 분식점에 출근하자마자 ‘주방 아주머니 구함’이라고 쓴 종이를 분식점 입구에 붙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손주아가 출근했다.
그런데 늘 밝던 그녀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사장님, 이제 분식점 안 나오시려고요?”
“아니, 무슨 말이야? 내가 분식점을 안 나오다니?”
“입구에 주방 아주머니 구한다고 종이가 붙어 있던데요.”
“아~ 그거? 내가 요즘 좀 바빠서 잠깐씩 자리를 비워야 할 거 같아. 그럴 때마다 분식점 문을 닫을 수는 없어서 사람을 쓰려고. 주아 씨도 사람이 한 명 더 들어오면 조금 더 편해지지 않겠어?”
“그건 그렇긴 한데…….”
손주아는 경일의 사정을 이해했지만, 둘 사이에 누군가가 끼어드는 느낌이 싫었다.
점심이 지나 조금 한가해질 무렵, 분식점에 한 사람이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손주아가 밝은 표정으로 손님을 향해 인사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저기… 주방 아줌마 구한다고 해서요.”
아주머니 한 분이 상기된 얼굴로 숨을 몰아쉬며 급한 듯 빠르게 말했다.
“아, 네. 잠깐만요. 사장님! 면접 보러 오셨어요.”
손주아는 낯이 익은 그녀를 어디서 봤는지 궁금해하며 주방에 있는 경일에게 말했다.
“그래.”
경일은 설거지 하던 손을 수건으로 대충 닦고 홀로 나왔다.
그런데 홀에는 뜻밖에도 수한이 어머니인 선호연이 앉아 있었다.
“안녕하세요.”
선호연이 일어서며 경일을 향해 공손히 인사를 건넸다.
“아니, 수한이 어머님이 여긴 어떻게… 몸은 괜찮으세요?”
“네. 사장님 덕분에 괜찮아졌습니다.”
선호연이 다시 한번 경일을 향해 깊숙이 머리를 숙였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