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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133화 (133/300)

[133화] 사장님, 무조건 열심히 일할 수 있습니다

“아니, 왜 저한테 그런 이야기를… 일단 앉으시죠.”

경일은 선호연의 공손한 인사에 당황하면서 자리를 권했다.

그녀가 의자에 앉자 경일이 말했다.

“저기, 식당 일이라는 게 생각보다 체력이 많이 필요한 일입니다. 다행히 이전에 비하면 몸이 많이 좋아진 거 같긴 한데… 저기, 분식점에서 일하기에는…….”

경일이 곤란한 표정으로 어렵게 말을 꺼냈다.

“아니에요.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아니, 무조건 할 수 있습니다. 쓰러지더라도 집에 가서 쓰러지겠습니다. 절대 사장님께 폐를 끼치지 않겠습니다.”

경일이 완곡하게 거절했지만, 선호연은 마치 무사가 주군에게 충성을 맹세하듯 결연하게 말했다.

지금껏 봐 온 모습과 너무 딴판이라 경일은 무척 혼란스러웠다.

심지어 그녀의 기세에 밀려 경일은 하마터면 자신도 모르게 ‘내일부터 출근하세요’라고 말할 뻔했다.

“저기, 수한이 어머님. 저는 아르바이트를 뽑는 건데 너무 진지한 거 같으신데…….”

“네, 사장님. 저는 최선을 다해 일할 자신이 있습니다.”

방금 전 대답보다는 차분한 어조였지만, 그녀의 대답은 매우 진지했다.

‘수한이 집에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오늘 수한이 표정은 평소처럼 밝았는데… 굳이 아픈 수한이 어머니까지 일해야 하는 이유가 있는 건가?’

경일은 머뭇거리자 선호연이 다시 한번 자신의 의사를 밝혔다.

“사장님, 전 꼭 여기서 일하고 싶습니다. 제가 아프기 전에는 요식업계에서 일했고, 또 한식 조리사 자격증도 있습니다. 급여도 조금만 주셔도 됩니다. 아니, 아예 안 주셔도 됩니다. 그러니까 저 여기서 꼭 일하게 해 주세요.”

힘찬 어조와 달리 선호연의 안색은 파리했다.

하지만 그 눈빛만큼은 누구보다 생동감이 넘치고 뜨거웠다.

그런 그녀의 기백에 눌린 경일은 자신도 모르게 말을 하고 말았다.

“아, 네. 수한이 어머님, 그럼 내일부터 출근하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경일의 대답을 들은 선호연은 환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벌떡 일어서서 인사를 하고 곧장 나가 버렸다.

마치 경일이 다른 말을 할 틈을 주지 않으려는 듯이…….

‘이거, 꼭 귀신에 홀린 기분이네. 수한이 어머님은 아직 몸이 다 나은 거 같진 않으니 내가 좀 더 신경을 쓰면 되겠지. 이제 굳이 황룡초가 들어간 죽을 안 끓여도 되겠어. 그리고 아예 여기서 마실 수 있게 황룡초가 들어간 차를 따로 끓여 놔야지. 던전 작물로 만든 음식을 드시면 더 빨리 나을 수도 있잖아. 그래, 좋게 생각하자. 저렇게 열정적으로 일하고 싶어 하는데, 내가 막을 수는 없잖아.“

잠시 상념에 빠진 경일은 고개를 흔들면서 입구에 붙여 놓은 주방 아주머니를 구한다고 적힌 종이를 떼러 갔다.

하지만 종이는 누가 떼어 갔는지 이미 없었다.

‘허… 참. 이거.’

누가 뗐는지 알 것만 같은 경일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시 분식점으로 들어왔다.

다음 날, 그녀를 위한 차를 만들었다.

황룡초를 진하게 우려낸 차였다.

그동안은 수한이 어머니의 병세가 급속도로 회복되면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수한이에게 죽을 보낼 때 황룡초의 양을 조절해 가며 넣었다.

그럼에도 선호연을 남들보다 두 배 이상 빠른 속도로 회복시키기에 충분했지만, 경일은 던전병에 대한 지식이 많지 않아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경일이 보기에는 이제 일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한 듯해서 굳이 황룡초의 양을 조절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

딸랑!

분식점 입구 문에 달아 놓은 종이 맑은 소리를 냈다.

“사장님, 안녕하세요.”

선호연이 단정한 옷차림을 하고 분식점에 들어오자마자 경일을 향해 인사했다.

“아, 네. 어서 오세요.”

경일도 선호연을 향해 인사했다.

“이렇게 빨리 안 오셔도 되는데.”

“아니에요. 더 빨리 오고 싶었는데, 집안일이 많아서… 그럼 저는 뭐부터 하면 되나요?”

선호연은 홀을 두리번거리더니 곧바로 빗자루부터 잡았다.

“청소는 전 날 다해 놨습니다. 지금 당장 할 일은 없으니 일단 앉으세요.”

경일은 선호연에게 황룡초를 진하게 달인 차를 건넸다.

“고맙습니다.”

선호연이 머리 숙여 인사를 하고 차를 받았다.

‘수한이 어머님은 무슨 차 한 잔에 저렇게 정중하게 인사를 하시지?”

선호연은 뜨거운 차를 마시자 몸이 화하게 풀리는 느낌이 났다.

마치 겨울철 뼛속 깊이 추울 때 뜨거운 차를 마시는 느낌이랄까.

“이거, 친구가 준 차를 달인 물인데 냉장고에 넣어 뒀어요. 파란 뚜껑이 있는 물통에 들어 있으니 물 대신에 이걸 마시세요. 찻잎은 많으니까 이왕이면 많이 드세요. 찻잎이 변질되기 전에 빨리 마셔야 하거든요.”

“고맙습니다. 사장님.”

선호연이 감격한 얼굴로 또다시 머리 숙여 인사했다.

경일은 몰랐지만 이미 그녀는 자신의 은인이 경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무래도 병에 걸린 당사자이다 보니 경일이 보낸 죽의 정체를 가장 먼저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긴가민가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몸이 빠르게 호전된 게 모두 죽 때문이란 걸 알았다.

그리고 자신이 아플 동안 아들의 얼굴에서 웃음을 지켜 준 것도 경일이었다.

항상 마음속으로만 감사하던 어느 날, 수한이가 분식점 입구에 붙은 주방 아주머니를 구한다는 종이를 보고 집으로 가 선호연에게 알렸다.

그녀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생각할 겨를도 없이 옷을 챙겨 입고 분식점으로 달렸다.

그때 선호연의 머릿속에는 그저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경일에게는 머리카락으로 짚신을 삼아 바쳐도 다 못 갚을 만한 은혜를 입었는데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이미 부부는 경일에게 죽을 때까지 은혜를 잊지 않고 보답하기로 맹세한 지 오래였다.

한편, 경일은 음식을 만들며 그녀에게 레시피를 전수했다.

워낙 간단한 방법으로 만드는 거라 전수라고 말하기가 민망할 정도였다.

“대단하시네요. 원래 요리는 여러 가지를 섞어 맛을 내는 것보다 간단한 재료로 맛을 내는 게 더 어려운 거예요. 정말 대단하시네요.”

“아니에요. 이거, 너무 칭찬을 해 주시니…….”

“사장님, 주방이 너무 깨끗해요. 이런 주방에서 일하게 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사장님, 재료가 너무 신선해요. 이렇게 좋은 재료를 고르다니 안목이 대단하시네요.”

“이런 방법이… 역시 사장님은 멋지십니다.”

선호연은 사소한 것에도 감탄했다.

그녀의 리액션이 워낙 좋아 마치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 된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수한이가 힘든 와중에도 저렇게 밝게 자랄 수 있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저렇게 다양한 표정을 지닌 사람에게 피부가 굳는 던전병이라니…….

아마 그녀에게는 천형처럼 다가왔을 것이다.

선호연은 열심히 메모하면서 경일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집중했다.

결국 출근한 지 삼 일째부터 그녀는 분식점의 모든 음식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나름 고민하면서 만든 레시피인데, 벌써 다 배우다니. 역시 경력자는 다르구나.’

그녀가 빠르게 레시피를 익혔다는 사실보다 경일을 더 좌절하게 만든 것은 요리의 맛이었다.

분명히 똑같은 재료와 레시피로 만들었는데 그녀가 만든 요리가 자신이 만든 요리보다 미묘하게 맛있었다.

경일은 감각이 예민한 헌터이다 보니 그 차이가 확실히 느껴졌다.

아마 맛에 민감한 손님이면 더 맛있다는 걸 알아차릴 수도 있을 듯했다.

‘손맛인가? 아니면 요리의 내공인가? 뭐, 맛있으면 됐지.’

경일은 선호연 덕분에 생각보다 빠르게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가장 바쁜 점심시간이 지나고 외출을 했다

그가 찾아간 곳은 암시장이었다.

이번에 그가 팔 것은 커미네스였다.

지난번에 판 미스릴에 대한 소문이 아직 암시장에 남아 있을까 봐 커미네스를 선택했다.

커미네스도 좋은 선택인 것이, 마나의 스탯을 늘려 주기에 미스릴만큼 인기가 있는 품목이었다.

물론 마나 포션으로 만들어 파는 것이 훨씬 돈을 더 많이 받을 수 있지만, 아직 손윤찬의 실력이 시장에 통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문제는 포션은 판매가 복잡하다는 점이었다.

뜨내기손님이 파는 포션을 믿고 사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효과를 증명하는데 시간이 걸릴 뿐더러 자신의 신원까지 노출될 위험이 컸다.

현재 판매되는 포션은 대부분 만든 연금술사 헌터의 이름이나, 회사의 상호를 달고 시장에서 팔려 나갔다.

연금술사의 이름이나 회사명 그 자체가 하나의 메이커였고, 사람들이 믿고 살 수 있는 하나의 지표였다.

어느 정도 검증된 사람이나 단체가 만든 것이 시장에서 제대로 대접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경일이 커미네스를 내밀자 상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시장에 잘 나오지 않는 식물이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경일은 상인에게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커미네스는 귀한데다가 경일이 들고 온 양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상인도 큰돈을 벌 수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정체를 숨기기 위해 조금씩 여러 군데에 팔았겠지만, 이번에는 굳이 그러지 않았다.

물론 변장은 했지만, 굳이 발품을 팔아 가며 여러 군데를 돌아다니기가 귀찮았다.

어차피 알 놈은 다 알아차릴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미 지난번 미스릴을 팔 때 그렇게 조심했건만 누군가가 눈치를 채지 않았는가.

그리고 결정적으로 자신을 노렸던 두 길드를 이미 지워 버린 만큼, 실력에 자신이 붙은 상태였다.

경일은 오래간만에 목돈을 쥐고 기분 좋게 암시장을 떠났다.

그러고 나서 스탄다비아에 보내기 위해 쌀 도매상을 돌며 쌀을 사고, 축산물 업체를 돌아다니며 고기를 샀다.

마나 포션은 지구에서나 자포리자가 있는 세상이나 귀한 대접을 받았다.

오히려 마나에 대한 이해는 이 세계 사람들이 훨씬 높았기 때문에 더 귀하게 다루어졌다.

그동안 스탄다비아에도 연구 마법사가 들어왔지만, 그가 지금까지 만든 마나 포션은 단 한 개였다.

결코 연구 마법사 하칸의 실력이 낮아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하칸도 베르아스 왕국에서 나름 실력 있는 축에 속했다.

문제는 재료였다.

마나 포션의 주재료인 커미네스는 지구보다 이 세계에서 훨씬 귀했다.

게다가 마나 포션만이 아니라, 포션을 만들 때 들어가는 모든 재료가 지구보다 이 세계에서 훨씬 찾기 힘들었다.

경일은 이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는 던전에서 채집한 던전 고유 식물을 꾸준히 자포리자에게 공급했다.

아직은 스탄다비아에서 포션을 만들어야 하기에 재료를 공급했지만, 조만간 손윤찬이 만든 포션으로 대체될 터였다.

이 세계에서 포션을 만드는 재료 중에는 지구에 알려지지 않은 던전 고유 식물도 많았다.

덕분에 경일은 지구에서 포션에 대해 가장 해박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한편, 잔류 몬스터 수색도 밤이 아닌 낮에 이루어졌다.

선호연 덕분에 시간이 늘어나서 좀 더 넓은 구역을 수색할 수 있었다.

경일은 지금까지 시간 때문에 오지 못한 숲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들어갔다.

“응? 저게 뭐지?”

숲의 깊은 곳에서 아주 약한 공기의 일렁거림이 느껴졌다.

지금은 낮인데도 불구하고 자신도 겨우 느낄 정도로 작은 움직임이었다.

아무리 경일이라도 밤이었다면 못 보고 지나쳤을 것이다.

아마 일반적인 헌터들이라면 경일처럼 빠르게 알아차리기 힘들 만큼 미세한 움직임이었다.

신기한 현상에 조심히 손을 뻗어 만져 보았지만, 아무런 느낌이 나지 않았다.

일렁이는 공기는 경일의 손을 그대로 통과했다.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기분 나쁜 예감이 들었다.

“혹시 게이트가 생기는 건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마 자신의 짐작이 맞을 거라고 생각했다.

유심히 관찰하는 도중 주변의 온도가 낮아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공기의 일렁임이 거칠어지더니 순식간에 게이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우와, 놀래라.”

처음 본 현상에 놀라 뒷걸음질 쳤다.

“게이트가 맞았네.”

경일은 일단 게이트 주변의 흔적을 살폈다.

이곳에 게이트가 열렸다면 헌터 협회의 게이트 관리부 사람이 다녀갔어야 했다.

아니, 지금쯤 던전 폐쇄를 할 헌터들이 이곳에 모여 있어야 했다.

하지만 산속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이대로 있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몬스터가 한 마리씩 나오기 시작할 것이었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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