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던전의 핵
트롤은 경일이 포션을 마시는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지금은 시간을 줄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쉽사리 쓰러트릴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걸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경일을 경계하며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
경일이 무방비한 모습을 보이자, 트롤은 조금씩 앞으로 걸음을 옮겻다.
그럴 때마다 경일은 창을 던지는 시늉을 했고, 놀란 트롤은 다시 뒤로 물러나기를 반복했다.
몇 번 이런 상황이 반복되는 동안 경일의 상처는 빠르게 나았다.
“휴~ 이제 좀 살 것 같네.”
경일이 목을 좌우로 흔들며 트롤에게 다가갔다.
얼마나 포션을 많이 마셨는지, 걸을 때마다 배 안의 포션이 출렁댔다.
“크르르르…….”
경일이 움직이자, 트롤이 잔뜩 경계하며 노려보기 시작했다.
“이 새끼야! 진짜 아팠어. 아까 다른 놈한테 맞은 것보다 거의 두 배는 아팠다니까!”
경일은 트롤을 향해 고함치면서 앞으로 달려 나갔다.
트롤의 지척에 이르자, 거대한 몽둥이가 날아왔다.
퍼억!
경일은 피하지 않고 창을 들어 몽둥이를 막았다.
마치 폭탄이 터진 것만 같은 소리와 함께 경일이 밟고 있는 땅이 움푹 파였다.
“역시 세네.”
트롤의 몽둥이를 막기 위해 이를 꽉 깨물었더니 입안이 터져 쇠 맛이 났다.
“하지만… 나도 만만치 않게 세다고, 이 새끼야!”
경일은 순수한 힘으로 트롤의 거대한 몽둥이를 막았다.
그리고 트롤의 얼굴을 보자, 녀석이 확실히 당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신보다 훨씬 작은 인간에게 힘으로 밀렸으니 놀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트롤이 허둥대는 사이, 경일은 순식간에 검으로 무기를 바꿔 트롤의 가죽을 베고 지나갔다.
검이 지나간 자리에 피가 스멀스멀 배어 나왔다.
스피드는 경일의 훨씬 빠를 수밖에 없었다.
경일은 자신의 강점인 스피드를 살려 순식간에 100번이 넘는 칼질을 트롤의 몸을 베었다.
비록 힘이 제대로 실리지 않아 깊은 상처를 내지는 못했으나, 트롤의 새하얀 털을 붉게 물들이는 데에는 충분했다.
트롤도 불리한 거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뒤로 이동했지만, 경일은 끈질기게 트롤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트롤은 주먹으로 연신 경일을 노렸지만, 그럴 때마다 얄밉게도 잘도 피해 냈다.
아니, 오히려 한번은 반격을 당해 주먹에 상처를 입기까지 했다.
뒤로 물러나는 트롤의 행동이 조금씩 부자연스러워졌다.
스텝이 살짝 꼬이고, 주먹질도 가끔 엉뚱한 곳을 때리곤 했다.
경일이 흘낏 바닥을 보자, 어느새 트롤의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아무리 재생력이 뛰어난 트롤이라도 많은 피를 흘리고도 멀쩡할 수는 없었다.
트롤의 몸에 상처가 점점 늘어갔다.
“크으으으…….”
트롤의 목소리가 점점 줄어들었고, 자랑스러운 자신의 무기인 거대한 몽둥이가 이제는 행동을 제약하는 거추장스러운 걸림돌이 되어 버렸다.
트롤은 몽둥이를 제대로 들 힘도 없어 보였지만, 끝까지 손에서 놓지 않으려 했다.
녀석의 눈에 서린 투지는 아직 죽지 않았다.
반면, 경일도 점차 지쳐 갔다.
트롤의 파괴력을 두 번이나 겪어 본 터라 공격을 피하는데 엄청난 심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한 방만 맞아도 상황이 역전될 수 있는 상황에서 회피와 공격을 동시에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슨 몬스터들이 하나같이 이렇게 질기냐. 힘들어 죽겠는데… 제발 좀 죽어라.”
경일은 들고 있던 검을 인벤토리에 넣고 긴 창을 꺼냈다.
그러고는 단전의 마나를 쥐어짜내 창에 밀어 넣자, 오러가 이글이글 타올랐다.
“크워어어어어어어어!”
창을 본 트롤도 마지막 힘을 짜내며 피어를 뿜어냈다.
경일의 코앞에서 터진 피어에 머리카락과 얼굴 살이 뒤로 밀려났다.
순간적으로 뇌가 흔들리며 밀려드는 어지러움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휘청거렸다.
하지만 경일은 오른쪽 다리에 단단히 힘을 주고 버텼다.
여기서 버티지 못하면 죽는 것은 자신이 될 터였다.
코에서 터져 나온 피가 입속으로 들어왔다.
실핏줄이 터져 온 세상이 붉게 보였다.
경일은 창을 든 오른손을 뒤로 크게 젖혔다.
“이야야야야얍!”
경일의 고함이 트롤의 피어를 뚫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와 동시에 있는 힘껏 창을 앞으로 던지듯이 찔러 넣었다.
어디를 공격할지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눈앞은 트롤의 몸으로 가득 차 있었으니까.
푸욱!
창끝이 트롤의 가죽을 뚫고 들어갔다.
질기고 단단한 가죽의 안에는 야들한 살과 내장이 있었다.
깊숙이 내장을 뚫은 창이 트롤의 몸을 관통했다.
“쿠어어어억!”
트롤이 고통을 참지 못하고 쩌렁쩌렁한 비명을 질러 댔다.
날카로운 비명이 경일의 귀에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고막이 찢어지고 한줄기 피가 밖으로 흘러나왔다.
그 순간, 주변과 단절이 되었다.
트롤이 분명 경일의 눈앞에서 소리를 지르고 있는데,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처음 느껴 보는 감각을 경험했다.
드문 경험이었지만, 당장 급한 일을 해결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또 다른 창을 꺼내 트롤의 몸속에 박아 넣었다.
만든 이의 실력이 엉망인 걸 한눈에 알 수 있을 만큼 비뚤배뚤한 투박한 창이 트롤의 내장을 거침없이 헤집었다.
비록 생김새는 엉망이었지만, 위력은 약하지 않았다.
두 번째 창이 깊숙이 꽂히자 트롤이 버티지 못하고 뒷걸음질을 쳤다.
녀석은 커다란 몸을 휘청대며 몇 발자국을 걷더니 그대로 허물어지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경일은 무표정하게 세 번째 창을 준비했다.
그 창을 바라보는 트롤의 눈에서 투기가 사라지고 드디어 공포가 맺혔다.
“제발, 이제 꺼져라.”
경일이 지긋지긋하다는 어투로 말했다.
푸욱!
오러가 먼저 목의 가죽을 가르고, 그 뒤를 따라 미스릴 창이 미끄러져 들어갔다.
푸칵, 하는 소리와 함께 트롤의 입에서 피가 터져 나오고, 트롤의 거대한 머리가 기우뚱하더니 곧 바닥과 맞닿았다.
“허억… 허억…….”
혈투를 마친 경일이 거친 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그대로 트롤의 몸 위로 쓰러졌다.
“따뜻하다.”
트롤의 식지 않은 피가 경일의 몸을 따뜻하게 감쌌고, 그 느낌을 마지막으로 기절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경일의 눈이 꿈틀거리더니, 조금씩 눈꺼풀이 위로 올라갔다.
‘여긴 어디지?’
정신을 차린 경일이 힘들게 몸을 일으키고는 주위를 둘러봤다.
트롤이 죽어 있는 모습을 보자 기억이 돌아왔다.
그때, 갑자기 몸속이 텅 빈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 공간을 찌르는 날카로운 고통이 뒤따랐다.
“윽!”
몸을 구부리며 아랫배를 감싸 안았다.
경일은 이게 무슨 현상인지 잘 알고 있었다.
얼마 전 스탄다비아에서 이 모습을 봤다.
자포리자와 겨루던 프라인의 기사 랜튼이 싸움 끝에 겪은 모습과 같았다.
마나 결핍이었다.
아마 체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마나까지 무리하게 쥐어짜는 바람에 그런 듯했다.
아마도 순간적으로 치밀어 오르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기절한 것 같았다.
이미 시간이 꽤 지난 거 같은데 지금도 이런 고통이라니…….
마치 수백 개의 바늘에 내장이 찔리는 고통과 함께 정신적으로 찾아오는 공허함은 참기 힘들었다.
마음속의 어떤 목소리가 이 고통을 벗어나는 방법은 죽음밖에 없다고 외치고 있었다.
“차라리 기절한 게 다행이었어.”
다행히 이곳의 독특한 구조 덕분에 기절한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사방이 막힌 것이 경일의 안전을 보호하는 장치가 된 것이었다.
아마 야외였다면 돌아다니는 몬스터에게 공격받았을 수도 있다.
경일은 곧바로 마나 포션을 꺼내 마셨다.
식도를 타고 들어가는 순간, 몸속의 세포들이 날뛰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포션에 깃든 마나가 순식간에 단전에 흡수되었고, 고통이 점차 줄어드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좋네. 이 정도면 충분히 비쌀 만해.”
경일은 쉬지 않고 두 병을 더 마셨다.
그러자 순식간에 고통이 사라졌다.
텅 빈 단전이 마나 포션 몇 병으로 모두 차진 않지만, 움직이는데 이상이 없을 정도는 됐다.
아직 정신이나 몸이 완벽히 회복된 것은 아니지만, 더 이상 쉬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정면에 보이는 문을 향해 걸었다.
문 너머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존재감이 이제 끝이라는 걸 알리는 듯했다.
경일이 문을 열고 나가니 또다시 복도였다.
복도 끝에 보이는 문 너머가 던전의 종착지일 것이었다.
경일을 맞이한 건 커다란 보석 같이 생긴 무엇인가였다.
처음 보는 것이지만, 이것이 무엇인지 곧바로 알 수 있었다.
던전의 핵이었다.
경일은 망설이지 않고 들고 있던 검으로 핵을 내려쳤다.
챙그랑!
던전과 전혀 어울리지 않을 듯한 맑은 소리와 함께 핵이 깨져 바닥으로 흩어졌다.
그 순간, 자신을 압박하던 던전의 기세가 서서히 줄어드는 것이 느껴졌다.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완전히 사라질 거란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이곳까지 정말 힘들게 왔는데, 던전의 핵이 너무도 쉽게 깨지자 왠지 허탈해졌다.
트롤과의 지독한 싸움에 비해 던전의 핵을 깨트리는 것은 너무 쉬워 난이도의 균형이 맞지 않아 허무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경일은 이곳에 오래 있고 싶지 않았다.
처음으로 느껴 보는 몬스터가 발산하는 원초적인 살기와 투쟁심에 맞서 싸우다 보니 정신과 몸, 모두 지쳐 버렸다.
그저 쉬고 싶다는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경일은 게이트 입구를 향해 걸었다.
이미 한 번 지나온 곳이라 몬스터는 보이지 않았다.
약한 스캐빈저들이 어떻게 던전에서 활동을 할 수 있는지 알 수 있을 거 같았다.
던전의 핵을 향해 갈 때는 무척 멀게 느껴지던 길이 막상 돌아갈 때는 금방이었다.
경일은 게이트를 나와 곧장 집으로 돌아갔다.
한 남자가 경일이 사라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게이트 근처에 나타났다.
“이게 뭐야?”
게이트 탐지 기계가 강렬한 빛을 내며 경고음을 발산했다.
게이트 탐지부 직원인 김승우가 기계의 반응에 당황했다.
지금 나타나는 현상이 어떤 것인지 교육 때 배워서 알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 정도의 반응이면 분명 D급 게이트였다.
기계에 표시되는 게이트가 발산하는 에너지가 상당히 높았다.
최악의 경우, 얼마 지나지 않아 던전의 몬스터가 튀어나올 수도 있었다.
“큰일 났다.”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평범한 게이트 탐지부 직원이 맞닥뜨리기엔 너무 큰 사건이었다.
이곳이 깊은 산속이긴 하지만 산을 벗어나면 곧바로 도시였다.
김승우는 곧바로 상부에 보고했고, 게이트 탐지부는 난리가 났다.
무려 D급 게이트의 던전 브레이크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은 사람들을 패닉에 빠트리기에 충분했다.
그는 기계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달렸다.
산속이라 마음만큼 빠르게 달리진 못했지만, 그래도 3㎞ 거리를 이렇게 빨리 왔다는 것은 나름 최선을 다한 셈이었다.
“헉헉헉헉… 이, 이럴 수가!”
김승우가 눈앞의 광경에 믿을 수 없다는 듯 급히 눈을 깜박거렸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의 눈앞에 게이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산속 풍경과 이질적인 게이트가 지옥의 입구처럼 그 입을 크게 벌리고 있었다.
이건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날 때 보이는 전형적인 게이트의 모습이었다.
당장이라도 몬스터가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았다.
“분, 분명 기, 기계의 반응으로는… 아, 아직 게이트가 열, 열, 열리기 전이어야 하, 하는데…….”
도망을 가려고 해도 도저히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머리에서 도망가라고 아무리 외쳐도 얼어붙은 그의 몸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기계의 반응이 맞았다.
그런데도 게이트가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날 때와 같은 모습인 건, 던전의 핵이 파괴되면서 일어나는 하나의 현상이기 때문이다.
던전의 핵이 깨진 걸 받아들이지 못한 게이트의 마지막 발악 같은 것이었다.
눈앞의 모습과 달리 기계가 측정한 에너지가 차이 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게이트가 내뿜는 에너지를 탐지한 기계의 수치는 당연히 게이트가 열리기 전의 수치였다.
김승우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일반적인 게이트 폐쇄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그도 당연히 알아차렸겠지만, 지금은 일반적인 상황이 아니었다.
헌터고 뭐고 이곳엔 자신 이외엔 아무도 없었다.
당연히 던전 브레이크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 상황이 두려워 두 눈을 질끈 감아 버리고 말았다.
무려 D급 게이트였다.
지금 이 순간이라도 D급 몬스터가 튀어나와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