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139화 (139/300)

[139화] 사면초가

“자네는 옛날 보일가의 힘에 대해 알고 있나?”

“그럼요. 이 근방에서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보일가에서 백작의 작위를 가지고 있을 때는 그 누구도 고개를 들 수 없었지 않습니까? 왕국에서도 알아주는 귀족 가문이었죠. 영주님도 그때의 영광을 되찾아 오기 위해 노력하는 거 아닙니까?”

“뭐… 비슷하다고도 할 수 있지.”

사미르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지만, 스탄다비아를 발전시키는 데에는 경일에 대한 충성심도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당시 가장 혜택을 많이 받은 곳이 종교라는 것을 알고 있나?”

“아무래도 그때는 스탄다비아가 힘도 세고 잘사는 영지였으니 종교도 번성했겠지요.”

“그래, 그게 당연하겠지. 그런데 말이야, 그동안 가장 혜택을 많이 받은 종교들은 보일가가 몰락하자 가장 먼저 영지민을 버리고 떠나 버렸지. 그것도 모든 종교가 약속이나 한 듯 한순간에 말이야. 선조의 일기장에는 그때의 이루 말할 수 없는 배신감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입으로는 자신들이 모시는 신의 교리를 전파하고, 자신의 교단이 가장 정의롭다고 말하고 다녔지. 자애로운 신께서 당신들을 누구보다 사랑한다고 말하며 확인할 수 없는 내세를 내세우며 온갖 미사여구로 사람들을 현혹했지. 영지민들이 바친 성금으로 호의호식하며 그들의 위에서 군림하던 것들이 영지가 어려워지자 침몰하는 배의 쥐새끼처럼 가장 먼저 도망쳐 버렸어.”

그는 종교를 좋아하지 않았다.

탐욕스러운 종교 단체들이 스탄다비아에 다시 돌아왔다는 건 뜯어먹을 것이 있다는 소리였다.

그들의 등장이 스탄다비아가 발전했다는 증거이긴 하지만, 그리 반갑지는 않았다.

한편, 가우스 교가 들어오면서 사제들은 우선 신전을 먼저 짓기 시작했다.

자포리자가 스탄다비아의 영주이긴 했지만, 종교를 함부로 건들 수는 없었다.

베르아스 왕국에서 현재 가장 큰 권력을 쥐고 있는 이들은 귀족이었다.

왕권이 약해질수록 그들의 세력은 더욱 커졌다.

그런데 귀족들의 권세가 막강하긴 했지만, 그들에게도 껄끄러운 존재가 하나 있었다.

바로 종교였다.

그들도 지금의 혼탁한 사회가 바로 기회였다.

기존의 종교뿐만 아니라 새로운 종교도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하지만 각각의 종교 단체들은 서로 사이가 안 좋았다.

아니, 좋을 수가 없었다.

외부로 교세를 확장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첫 번째 과제였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서로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일종의 제로섬 게임이었다.

파이의 크기는 정해져 있고, 교세를 확장하기 위해서 다른 종교의 교인들을 빼 오는 일이 흔하게 벌어졌다.

이렇게 서로 물어뜯기 바쁜 이들도 무조건적으로 단단하게 뭉치는 경우가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외부의 세력이 종교를 공격할 때였다.

그럴 경우 그들은 서로의 은원은 묻어 둔 채 서로 힘을 합쳐 대항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귀족들도 종교에 대해서는 신경을 꺼 버렸다.

큰 권력을 잡은 종교가 변질되는 건 역사의 당연한 수순이었다.

자포리자는 원래부터 종교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경일이 보내 준 역사서를 공부하고 나서부터는 더욱 싫어졌다.

이 시대의 종교는 종교라기보다는 혹세무민의 원흉일 뿐이었다.

종교의 순기능을 발휘하기보다는 오로지 자신들의 배를 불리기에 바빴다.

그 와중에 상상도 하지 못할 일들이 벌어지곤 했다.

그들은 교인들의 성금을 모아 고리대금업을 실시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이 시대의 종교는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악독한 방법으로 돈을 벌었다.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어떤 종교에서는 결혼을 하기 전, 신부를 신에게 바치는 봉헌이라는 명목으로 사제들의 하룻밤 노리개로 삼았다.

또한 교단의 행사에 동원되어 노예처럼 일하고도 한 푼의 임금도 받지 못했다.

종교인들은 봉건제를 옹호하며 사람들에게 높은 도덕성을 강요했다.

그에 반해 자기 자신에게는 높은 도덕성을 적용하지 않는 위선자들이었다.

안 그래도 머리가 복잡한데, 새로운 걱정거리가 하나 더 늘어난 자포리자는 답답한 마음을 뒤로한 채 돌아갔다.

성의 주요 인사들이 자포리자의 집무실에 모였다.

첩보장인 블라도의 보고를 듣기 위해서였다.

“그럼, 시작하지.”

자포리자의 말에 블라도가 일어나 보고를 시작했다.

“우선 알리사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아드리온의 영주인 게렉스 백작이 우리와의 동맹을 발표한 뒤, 알리사가 자신의 영지임을 선포했습니다. 당연히 프라인 영주 패트래건 백작은 인정하지 않았고요. 현재 두 영지의 병사들이 알리사의 주요 거점에 주둔하고 있습니다. 작은 싸움은 몇 번 일어났지만, 크게 번지지는 않았습니다. 서로의 힘이 비슷하기 때문에 이긴 쪽도 피해가 크다는 사실을 알기에 싸움은 최대한 피하는 분위기입니다.”

스탄다비아에서 공식적으로 알리사를 아드리온에 넘겼음에도 패트래건 백작은 포기하지 않는 눈치였다.

“패트래건 백작은 야심이 큰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현재 중앙 정계 진출을 노리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그가 있는 파벌의 수장 격인 세르지우 후작에게 막대한 뇌물을 바친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데, 거의 사실로 보입니다. 자신의 숙원인 중앙 정계 진출과 함께 손에 쥐게 될 권력으로 광산을 차지하려 하고 있습니다."

블라도는 패드래건 백작에 대한 설명을 마친 뒤, 잠시 숨을 고르고 보고를 이어 갔다.

“두 영지 다 상황은 매우 안 좋습니다. 주 수입이 농사인데 몇 년간 이어진 흉년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입니다. 둘 다 광산에 거의 목숨을 걸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인데도 두 백작가는 영지민들의 고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매우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프라인 영지민들이 더욱 힘든 실정입니다. 단기간에 세금이 올랐는데, 이는 후작에게 바치는 뇌물 때문으로 보입니다. 패트래건 영주가 우리를 노린 것도 이와 관계가 깊은 걸로 보입니다. 비누 제조법만 확보하면 중앙 정계로의 진출은 쉽게 이루어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권력을 이용해 광산의 소유권도 가지려고 할 겁니다. 만약 광산이 한쪽으로 넘어간다고 하면, 나머지 한쪽은 거의 잡아먹힌다고 보면 될 거 같습니다.”

“수고했어. 짧은 기간이었는데 이 정도까지 해내다니… 아주 만족스러워.”

“감사합니다.”

자포리자의 칭찬에 블라도는 그간 고생이 씻겨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상황이 아주 아슬아슬하군. 힘의 균형이 깨지는 순간, 우리도 위험해지겠어.”

“그렇습니다, 영주님.”

자포리자의 심각한 표정을 보고 카스만이 동의했다.

“카스만 경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자포리자가 물었다.

“아마 아드리온은 우리에게 지원을 요청할 듯합니다. 지금은 서로 팽팽한 상태이니 아이의 손이라도 빌리고 싶어 할 겁니다. 아드리온이 알리사를 차지하긴 했지만, 프라인의 방해로 실질적인 지배를 하는 것이 불가능한 만큼, 시간이 갈수록 손해라는 생각을 할 겁니다.”

“이거, 요즘은 계속해서 골치 아픈 일만 생기는군요. 지원을 요청한다라…….”

자포리자가 관자놀이를 엄지로 눌렀다.

상황이 갈수록 나빠지고 있었다.

분명히 아드리온은 프라인을 핑계로 삼아 병사나 돈을 요구할 게 뻔했다.

호랑이를 피하려다 여우를 만난 꼴이었다.

병사를 지원하는 건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돈을 줘야 하는데 비누의 생산이 줄어든 지금, 여유가 없었다.

“염색 공장을 돌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지금부터 염색을 시작하면 작은 물량이라도 생산 할 수 있습니다. 급한 대로 얼마라도 벌 수 있으니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사미르가 의견을 냈다.

“염색은 일단 중단한다. 몇 푼 벌자고 염색 기술이 있다고 알려지면 광산에 쏠린 두 영지의 눈이 우리에게 쏠릴 수 있어. 그리고 광산에 얼마나 많은 금이 매장되어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지. 더군다나 초기 자본도 만만치 않게 들어갈 거야. 기술자를 데려와야 하고, 광산을 개발하는 일이 쉬운 일도 아니고 말이야. 그에 비해 염색은 기술만 알면 돈을 벌 수 있으니, 광산보다 훨씬 매력적으로 느껴질 거야. 비누만으로도 이목을 끌었는데 염색까지 알려지면 광산에 쏠린 무게 추가 이쪽으로 기울 수도 있어.”

자포리자가 사미르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 갔다.

“비누 제조법과 염색 기술, 이 두 개가 합쳐지면 앞으로 벌어들일 수입도 광산보다 더 나을 거야. 광산의 금은 언젠가 고갈될 테지만, 비누와 염색은 그럴 염려가 없지. 만약 우리가 새로운 염색 기술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면 서로를 겨누던 칼이 모두 우리에게 올 수도 있어.”

“헉!”

사미르가 손바닥으로 입을 막았다.

“이런… 사면초가군요.”

카스만도 뚜렷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다른 가신들 역시 머리를 싸매어 봤지만, 그들도 별다른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일단 아직 요청이 있는 것은 아니니 오늘은 이만하는 걸로 하지.”

자포리자가 회의의 끝을 알렸다.

돈을 벌 방법이 있으나, 자신들과는 관련이 없는 이유로 포기해야 했다.

이 때문에 앞으로 힘들어질 영지민들을 생각하니 자포리자는 마음이 착잡해졌다.

주위가 온통 야수 천지였다.

정면은 샤벨 타이거가 막고 있고, 등 뒤에는 프라인과 아드리온이 막고 있었다.

하지만 그도 믿고 있는 게 있었다.

경일이었다.

선인은 언제나 그랬듯이 자신과 스탄다비아의 영지민들을 버리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답답한 마음을 이길 수 없어 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한 자포리자였다.

그는 억지로 잠을 청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바람을 쐬러 나갔다.

찬바람이 얼굴이 스치고 지나갔다.

봄이 왔지만, 아직 초겨울처럼 추웠다.

“영주님 무슨 상념이 그리 깊으십니까?”

카스만이었다.

“카스만 경께서는 어찌하여 주무시지 않고 이런 늦은 밤에 나오셨습니까?“

“나이가 많으니 가장 먼저 잠이 사라지더군요. 가끔 가장 조용한 이 시간을 즐기러 산책을 하곤 합니다.”

“하하하, 저도 종종 이 시간을 즐겨야겠습니다. 조용한 게 답답한 마음이 조금은 해소되는 느낌입니다.”

“영주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십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계십니다. 물론 상황이 매우 어렵긴 하지만,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으니 분명 무슨 수가 생길 겁니다.”

“참 어렵습니다. 저는 단지 스탄다비아가 잘살기를 바랐을 뿐인데…….”

“영주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욕심만 많은 돼지 같은 놈들이 문제지요. 그러니 스스로를 책망하지 마시지요. 영지민들의 얼굴을 보십시오. 그들의 웃는 얼굴이 바로 영주님께서 가시는 방향이 틀리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카스만 경의 말씀을 들으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집니다.”

“어쩔 수 없이 한번은 겪어야 하는 일입니다. 조금 빨리 겪는 거라고 생각하시면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하실 겁니다. 예전처럼 희망도 없이 그저 살아가는 것보다는 지금이 훨씬 낫지 않습니까?”

“아무래도 처음 겪는 일이다 보니 걱정이 앞선 거 같습니다.”

“제가 선대 영주님까지 세 분을 모셨습니다. 세 분의 영주님들 중에서 자포리자 님이 가장 자애롭고 영특하십니다. 자신을 믿고 앞으로 나아가시면 분명 좋은 결과가 있을 겁니다. 영주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벌써 5만 명이 넘어섰습니다. 어떤 결정을 하시든 저희는 믿고 따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자포리자는 무겁기만 하던 어깨가 한결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오히려 등 뒤가 든든했다.

자신을 믿어 주는 이들이 이렇게나 많으니 말이다.

* * *

경일의 집 뒷산에서 일어난 던전 폐쇄로 인해 한동안 동네가 시끄러웠다.

F급 던전이라면 어느 정도 조사하다가 마무리됐을지 모르지만, D급 던전이라 소란이 오래갔다.

더군다나 게이트 주변의 흔적을 조사한 결과, 단 한 명이 던전을 폐쇄했다는 사실이 드러나 더욱 시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사건을 조사하며 헌터 협회의 사람들과 기자들을 포함해 많은 사람이 조용한 산동네를 드나들었다.

오랫동안 조사를 진행했지만, 그들은 한 사람이 던전을 폐쇄했다는 사실 이외에 새롭게 밝혀낸 것은 없었다.

게이트가 발생한 곳이 산속이다 보니 CCTV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오로지 발자국만을 따라 추격하는 수밖에 없었는데, 산에서야 가능할지 모르지만 산을 벗어난 순간부터 더 이상의 추격은 불가능했다.

경일은 암시장을 다니며 흔적을 지우는 것에 익숙한지라 아무 걱정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문제는 분식점에서 일어났다.

많은 사람이 조용한 동네에 들어오면서 식사를 하기 위해 분식점을 찾아들었다.

“이게 뭐야? 무슨 가격이 이래?”

분식점 안으로 들어온 기자 한 명이 황당하다는 듯이 벽에 적힌 메뉴판을 바라봤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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