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일상
“라면이 5만 원?”
경일은 분식점 벽에 외부 손님용 메뉴판을 크게 붙여 놓았다.
동네 사람들은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지만, 식당에 처음 온 외지인들은 하나같이 황당해했다.
“볶음밥이 10만 원? 분식점 메뉴 가격이 왜 이래? 사장이 미친 거 아냐?”
같이 온 기자는 숫제 화를 내고 있었다.
“여기요.”
기자가 불퉁스러운 목소리로 손주아를 부르는 것을 보고 경일이 재빨리 그들에게 갔다.
“네, 손님.”
혹시 모를 사고를 예방하고자 외지 손님들은 모두 그가 상대했다
신화 길드 사건으로 분식점 메뉴의 가격을 올리면서 이런 경우는 이미 수도 없이 겪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웃으며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저기 있는 메뉴판 가격, 진짜 맞아요?”
“네, 맞습니다.”
경일이 너무 당당하게 이야기하자, 오히려 질문을 한 사람이 당황했다.
“혹시 라면이 특제 라면인가요? 한우라도 때려 넣은… 아, 채끝살이 들어간 그런 라면?”
특제 라면은 맞았다.
던전 새우를 말려서 갈아 놓은 육수로 끓인 라면이니 말이다.
“아니요. 일반 봉지 라면에 달걀과 파를 넣어 드립니다.”
“그런데 가격이 저렇다고요?”
“네.”
기자는 경일의 뻔뻔한 대답에 말문이 막혔다.
그러자 점차 속에서 열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손님이 우스워 보입니까? 당신 지금 나랑 장난해?”
기자는 너무 어이가 없었는지 말을 하다 점점 흥분하더니 결국 마지막에는 반말로 경일에게 따졌다.
“당신, 우리가 누군지 알아? 우리는 안성일보 기자야. 지금 기자를 상대로 사기를 치려는 거야? 어디 한번 제대로 혼나고 싶어?”
경일은 윽박지르는 기자의 태도에 기분이 나빴으나, 어느 정도 이해 가는 부분도 있었다.
솔직히 던전 재료가 들어간 음식이기 때문에 저것도 싼 가격이지만, 그가 말을 하지 않았으니 받아들이기 힘들 터였다.
“저기, 남의 장삿집에서 소란 피우시면 안 됩니다. 가격이 안 맞으시면 다른 곳을 이용하시면 됩니다.”
경일이 정중히 이야기했다.
보통 이렇게 말하면 열에 아홉은 화를 내며 가게를 나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지금 화를 내는 이 기자는 열에 아홉에 해당이 되지 않았다.
“이거, 가만 보니 깡패네. 깡패 새끼가 못사는 사람들 상대로 피를 빨고 있는 거네. 이 기자, 오늘 기삿거리도 못 얻었는데 이 새끼를 취재하자고. 너 오늘 잘 걸렸다.”
“아, 네. 알아서 하시고요. 주문하지 않으실 거면 나가 주세요.”
“그래. 너, 두고 보자.”
기자들은 경일의 축객령에 온갖 화를 내며 분식집을 나갔지만, 그들은 단 한 줄의 기사도 내보내지 못했다.
저렇게 말도 안 되는 폭리를 취하는 분식점을 취재하는 자신들에게 동네 사람들이 당연히 호응해 줄 거라 생각했지만, 오히려 그들은 동네 분식을 칭찬하기 바빴다.
"어~ 이거 이러면 기사를 쓸 수가 없는데…. 내가 이대로 손을 들 거 같아? 절대 그럴 수는 없지. 내가 바로 안성일보 기자야. 저런 놈은 내가 무조건 혼을 내줘야 해"
기자들은 자신들의 생각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게 안 되면 다른 거라도 꼬투리를 잡아야 했다.
하지만 이것도 여의치 않았다.
꼬투리를 잡기 위해 무리한 질문을 하는 통에 오히려 동네 사람들에게 욕을 먹기 일쑤였다.
“뭐 저런 이상한 놈이 다 있어?”
결국 기자는 아무런 소득 없이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경일은 던전으로 동네가 시끄러워진 기간 동안 아예 가게 문을 닫아 버렸다.
자신의 분식점이 외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려서 좋을 게 없었다.
단골들에게는 미안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기왕 시간이 생긴 김에 전국을 돌아다니며 미스릴과 던전 고유 식물을 암시장에 팔았다.
“하~ 이거 짜증 나네…….”
암시장에 들린 경일은 누군가 자신을 미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눈치챈 지 오래였다.
규모가 작은 암시장일수록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났다.
그를 미행하고 있는 이들은 이 동네 암시장을 관리하는 길드의 헌터들이었다.
처음 온 손님이 큰 거래를 하자, 상인이 곧바로 뒤를 봐주는 길드에게 연락을 한 것이다.
“무슨 양아치들이 이렇게 많아? 이게 다 너희를 교화하라는 신의 계시일 거야. 대신 내 교화 방법은 몸도 마음도 좀 아플 테니, 각오해라.”
경일은 일부러 으슥한 곳으로 그들을 유인했다.
“저 새끼가 알아서 지옥으로 들어가네. 내가 인심 써서 한 대는 덜 때리마. 큭큭큭!”
그를 뒤쫓던 헌터들은 경일의 의도를 눈치채지 못하고, 즐거운 듯 서로를 쳐다보며 낄낄거리기 바빴다.
하지만 헌터들의 기분 좋게 웃던 웃음이 비명으로 바뀌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아악! 잘못했습니다. 한번만 용서해 주세요."
"죄, 죄송합니다."
"제, 제발, 그, 그만 이, 이빨이 부러진 거 같아요"
경일은 쫓아온 헌터들은 모두 얼굴을 못 알아볼 정도로 맞은 뒤, 바닥을 기고 있었다.
그 와중에 한 명이 제법 반항을 했다.
“아아악! 이 새끼야, 그만 때려!”
“어라? 제법 깡이 있네.”
“씨발… 우리가 누군지 알아? 우리 대호 길드야, 대호 길드. 넌 이제 죽은 목숨이야!”
“하여간 이런 새끼들은 하나같이 멘트가 똑같아. 대호 길드? 남자 새끼가 말이야, 스스로 맹수가 돼야지. 양아치 새끼들이 무슨 하이에나처럼 똘똘 뭉쳐서 되지도 않을 협박이나 하고 말이야… 넌 내가 특별히 스페셜 정신 개조 코스로 모셔 주마.”
경일이 인벤토리에서 미스릴 몽둥이를 꺼냈다.
“헉!”
헌터가 놀라 소리쳤다.
인벤토리 스킬에 놀란 건지, 몽둥이에 놀란 건지 경일은 관심이 없었다.
단지 자신을 죽이고 돈을 뺏으려고 한 놈들에게 몇 배의 고통을 돌려줄 생각밖에는.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도 아니고… 이것들이 감히 나를 죽이려고 해? 내 돈만 노렸으면 어느 정도 정상참작을 해 주려고 했는데, 너희는 안 되겠다. 요 며칠간 만난 놈들 중에서 너희가 가장 악질이네.”
퍽! 퍽! 퍽! 퍽!
“악! 악! 악! 악!”
한동안 타격음과 함께 비명이 이어졌다.
덕분에 스탄다비아에 보낼 식량을 사기 위한 이번 여행에서 많은 수의 광부를 얻었다.
“안 그래도 광부를 어떻게 구할지 고민이 많았는데, 앞으로 규모가 작은 암시장을 자주 돌아야겠어.”
경일은 이번 성과에 만족하며 다음 암시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 * *
결국 헌터 협회는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하고 철수했다.
그들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단서가 너무 없었다.
외부에서 온 인원들이 모두 떠나자 경일은 분식점을 다시 열었다.
“엄마!”
“우리 아들!”
수한이가 선호연의 품에 뛰어들어 그녀의 얼굴에 볼을 비볐다.
가만 보면 수한이는 남자아이인데도 애교가 참 많았다.
동네 아이들을 우르르 끌고 다닐 때는 영락없는 골목대장이었는데, 엄마 앞에서는 웬만한 여자아이보다 귀여웠다.
수한이가 어려운 환경에서도 구김살 없이 저렇게 밝게 자란 건 모두 선호연의 힘이었다.
그녀는 한마디로 프로 긍정러였다.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 주고, 진심으로 호응해 주었다.
천성적으로 정이 많은 성격이었다.
그런 그녀를 마치 수한이처럼 따르는 사람이 한 명 더 생겨났다.
“언니!”
반갑게 선호연을 부르는 이는 이미순이었다.
둘은 어느새 친한 사이가 되어 있었다.
이미순은 저녁에 술을 마시러 자주 들렀고, 주로 다찌에서 술을 마시다 보니 자연히 선호연과 인사를 하게 되었다.
수다스럽지만 약간 맹한 구석이 있는 이미순과 호응의 끝판왕인 선호연은 매우 잘 어울렸다.
“언니, 있잖아요. 그 사람이 또 온 거 있죠? 그동안 눈치만 보더니 오늘은 나에게 머리를 맡기는 거 있죠. 그동안 너무 자주 와서 정리할 머리도 없는데 말이에요.”
“어머, 어머. 그 남자, 하는 행동이 너무 귀엽다.”
선호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리액션을 했다.
그녀의 표정을 보고 있자면 말할 맛이 났다.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임이 따로 있어서 고민이에요.”
“어머, 이를 어째.”
“언니가 봐도 제가 매력이 넘치잖아요. 요즘은 제 미모에 물이 올라서 그런지, 길을 지나가기만 하면 남자들이 몰래몰래 훔쳐본다니까요.”
“맞아, 미순이가 한 미모 하지. 게다가 귀엽기는 또 얼마나 귀엽고.”
“그렇죠? 언니, 역시 나를 제대로 알아주는 사람은 우리 언니밖에 없어요. 언니가 친언니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데 고민이에요. 좋아하는 임을 위해서 거절해야 하는데, 막상 그러려니 아깝고…….”
“고민되겠다.”
조금 전까지 미소를 띠고 이야기를 듣던 선호연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했다.
그녀의 표정 하나하나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런데 그 임이 말이에요. 인기가 너무 많아요. 저년도 노리고 있고.”
“흥! 뭐라는 거야.”
옆에 있던 손주아가 콧방귀를 뀌었다.
“쟤가 옛날에는 안 저랬거든요. 우리 친구들 중에서 도도한 척은 혼자 다 했는데, 어느 날부터 아주 푼수가 됐어요. 친구한테 콧방귀나 뀌고… 너, 그러다 코딱지 나온다. 벌써 나왔네, 쯧쯧.”
“어머!”
손주아는 얼른 손으로 코를 가리고 화장실로 뛰어갔다.
“호호호!”
선호연은 즐겁게 웃었다.
늘 누워서 TV만 보고 지냈던 터라 현실에서의 삼각관계는 드라마보다 백배 더 실감 나고 재미있었다.
“미순아, 웬만하면 그냥 사귀어. 너 좋다고 남자는 처음이잖아. 이 기회를 놓치면 이제 다시는 오지 않을 수도 있어.”
화장실에서 돌아온 손주아가 이미순을 보고 깐족거렸다.
“흥~ 이거 왜 이래. 나 좋다는 남자 많거든? 너야말로 헛바람 잡지 말고 정신 차려. 너, 친구가 먼저 찜한 거에 침 바르는 건 몹시 나쁜 짓이야. 맞죠, 언니?”
“호호호.”
선호연은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에 웃음으로 넘겼다.
“우리 사장님 인기가 많으시네. 하긴… 사람 착하지, 어려운 사람들을 자기 몸처럼 돌봐 주지. 내가 봐도 멋있긴 하다.”
“맞죠, 언니? 그래서 고민이에요. 한 명은 순정을 다 바쳐서 대시해 오고, 한 명은 보고만 있어도 멋있고. 아… 요즘 너무 힘들어요.”
“흥~ 호강에 겨워서 요강에 똥 싸는 소리 하네.”
손주아가 빈 접시를 치우며 길게 언급할 가치가 없다는 듯 이미순을 향해 콧방귀를 뀌었다.
“저, 저, 저, 저년이… 너, 사장님한테 이른다.”
“이르긴 뭘 일러? 내가 방금 뭐라고 했는데? 증거 있어?”
“우와, 저 가증스러운 인간이. 언니, 언니는 분명히 들었죠? 어? 우리 언니 어디 갔지?”
선호연이 아무리 프로 긍정러라도 이런 상황은 곤란했다.
그녀는 주방으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다음 날, 경일은 매대에서 열심히 떡볶이와 어묵탕, 튀김을 준비 중이었다.
요즘 음식은 대부분 선호연이 하는 편이었다.
확실히 손맛이라는 것이 존재했다.
같은 재료를 사용하고, 같은 양의 양념이 들어갔는데 선호연의 음식이 더 맛있었다.
그러다 보니 손님들도 은근히 그녀가 음식을 해 주기를 원했다.
‘내가 먹어 보니까 별 차이도 안 나더구먼.’
경일은 투덜거리면서 튀김 솥에 기름을 부었다.
요리하는 것은 양보하더라도 매대는 넘겨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매대야말로 그가 분식점을 하는 이유가 있는 곳이었다.
오늘도 동네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