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평생 잊지 않도록 가르치겠습니다
“아저씨, 떡볶이 주세요.”
아이들은 매일 먹으면서도 질리지 않는지 또 떡볶이를 주문했다.
“맛있어?”
“맛있어요!”
“얼마나?”
“엄마가 해 준 것보다 백배는 더 맛있어요.”
“어머니가 들으면 서운해할 거 같은데?”
“아니에요. 엄마가 매일 먹고 오래요. 밥 안 차려도 된다고 좋아하던데요.”
“맞아. 우리 엄마도 그랬어요.”
‘허~ 그럴 수도 있구나. 하긴… 매일 밥 차려 주는 것도 귀찮기는 하겠다. 하하하.’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대답에 경일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웃었다.
“우리 엄마가 내 볼에 살이 올라서 좋대.”
“살이 오르는 게 무슨 말이야?”
“몰라. 엄마가 좋다고 하니까 나도 그냥 좋아.”
“이거 먹고 어디 갈 거야?”
“놀이터 가서 오징어 게임 하자.”
“난 구슬치기!”
“안 돼. 오징어 게임 할 거야.”
“잉, 싫은데…….”
“그럼, 오징어 게임 한판 하고 구슬치기하자.”
아이들은 작은 것을 가지고도 참 즐거워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면 경일은 절로 마음이 편안해졌다.
‘나도 나중에 결혼하면 저렇게 이쁜 아기를 낳아야지. 아~ 생각만 해도 귀엽네. 나를 닮은 아기라…….’
“아저씨 나쁜 생각 한다. 얼굴이 빨개졌어.”
유난히 관찰력이 좋은 한 아이가 경일을 보며 웃었다.
“아니야. 아저씨가 있는 곳이 불 앞이라 더워서 그런 거야.”
“어휴~ 바보. 분명 애인 생각한 거야. 우리 삼촌도 애인 생각할 때 표정이 딱 저랬어.”
“아니야. 아저씨는 애인 없어. 나랑 결혼하기로 했단 말이야!”
얼마 전, 경일에게 고백한 지유가 화를 내며 소리를 빽, 질렀다.
“우리 귀염둥이들, 튀김 줄까? 어묵 꼬치 해서 줘? 아니면 만두 먹을 사람!”
경일은 얼른 말을 돌렸다.
역시 분위기가 안 좋을 때는 맛있는 음식이 최고였다.
“아저씨, 난 고구마튀김이요.”
“난 떡볶이 국물에 만두 비벼 주세요.”
“어, 너 얼굴에 고추장 묻었다.”
“아하하하하하!”
아이들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아주 사소한 것에도 자지러지게 웃었다.
입에 떡볶이 양념을 듬뿍 묻히면서도 떡볶이를 오물오물 맛있게 먹었다.
경일은 양념이 묻은 아이들의 입을 일일이 휴지로 닦아 주었다.
“그런데 호균이는 길 가다 보이는 전봇대를 왜 모두 치고 다니는 거야?”
길을 가다 호균이가 전봇대를 터치하는 모습이 생각난 경일이 물었다.
“비밀인데…….”
호균이가 우물쭈물하며 곤란한 듯 망설였다.
그러더니 경일을 향해 손짓했다.
매대를 나가 호균이의 앞에 쪼그려 앉아 눈높이를 맞추니 아이가 경일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거 비밀인데, 아저씨만 알고 있어야 해요.”
“그럼. 아저씨가 절대 이야기하지 않을게.”
“전봇대를 만지면 이상한 나라로 가는 입구가 열려요.”
“하하하!”
천진난만한 호균이의 말에 경일이 즐겁게 웃었다.
아이의 눈에 비친 세상은 가슴 뛰는 일로 가득한 곳이었다.
어른들의 입장에서는 산동네가 살기 불편하고, 지저분하고, 떠나고 싶은 장소일지 몰라도 아이들에게는 모험의 세계나 마찬가지였다.
호균이의 순진무구함에 던전에서 죽을 뻔한 일도, 스탄다비아의 일도 한순간에 사라지고 유쾌한 웃음이 나왔다.
한 무리의 아이들이 휩쓸고 간 매대를 깨끗이 닦았다.
경일은 모자란 음식을 채워 놓고 다음 손님을 기다렸다.
"오늘도 아이들이 뛰어놀기 딱 좋은 날씨야. 역시 아이들은 많이 먹고 즐겁게 뛰어놀아야 해'
아이들의 밝은 기운을 받은 탓인지 맑은 하늘에 흘러가는 뭉게구름도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처럼 이뻐 보였다.
경일은 매대의 서랍에서 책을 한 권 꺼냈다. 그는 시간이 나는 틈틈이 자포리자에게 보낼 역사책을 읽곤 했다.
“저기….”
누군가 머뭇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경일을 불렀지만 한참 책에 빠져 있는 터라 듣지 못했다.
"저기…. 아저씨."
“응?”
경일은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듯한 가느다란 목소리에 의자에서 일어섰다.
매대 앞에 서 있는 희진이가 보였다.
“떡볶이 먹을래? 아니면 튀김?”
"아까 먹었어요. 저기, 아저씨…….”
희진이가 경일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인 채 한쪽 발로 바닥에 쓸었다.
“아저씨한테 하고 싶은 말 있어? 아저씨한테 모두 말해도 괜찮아.”
경일이 부드러운 눈길로 바라보며 희진이를 편하게 해 주려 노력했다.
“저기…. 아저씨, 저도 죽 좀 주세요.”
희진이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힘겹게 말했다.
“죽? 무슨 죽?”
경일이 의아한 듯 물었다.
“수한이 오빠한테 준 죽이요. 수한이 오빠가 그러는데, 그거 먹고 아줌마가 나았대요. 우리 엄마도 아픈데 죽 좀 주시면 안 돼요?”
희진이의 눈가에 어느새 눈물이 가득했다.
소심한 성격의 희진이는 말하는 것이 힘들었는지 뒤로 갈수록 목소리가 약해졌다.
아이는 어머니를 위해 용기를 내고 있었다.
가련해 보이는 그 모습에 코끝이 시큰거렸다.
경일은 얼른 희진이를 가볍게 안아 들어 등을 토닥거리며 안심시켜 주었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부터 분식점 앞을 서성이던 게 떠올랐다.
‘아… 내가 왜 좀 더 빨리 알아차리지 못했지?’
그는 자신의 눈치 없음을 탓했다.
“엄마가 어디가 아프신 거야?”
경일은 아이와 눈을 맞추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몰라요. 그냥 매일 아파요.”
“그래, 잠깐만 기다려.”
경일은 희진이를 내려 놓고 곧바로 주방으로 가서 고기를 듬뿍 넣은 영양 죽을 끓였다.
혹시 던전병일지도 모르니 비후초를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여기, 엄마 갖다 드리고 다 먹고 나면 아저씨한테 또 만들어 달라고 해. 알았지?”
“네, 고맙습니다.”
죽을 받아든 희진이가 환한 얼굴로 인사를 하고 마음이 급한지 뛰어갔다.
“저러다 넘어지기라도 하면 안 되는데…….”
경일은 얼른 앞치마를 벗고 희진이를 쫓아가 집 앞까지 바래다주고 돌아왔다.
그 뒤로 희진이는 자주 죽을 받아 갔다.
엄마가 죽을 먹고 조금씩 나아진다는 이야기를 듣고 던전병이라는 것을 알았다.
비후초는 던전병의 증세를 억제하고 약간의 회복만 가능할 뿐, 근본적인 치료 방법은 아니었다.
어떤 증상인지 알면 그에 맞는 던전 고유 식물을 넣어 죽을 만들 수 있겠지만, 알 방법이 없었다.
“엄마!”
수한이가 분식점에 들어오면서 선호연을 큰 목소리로 불렀다.
“우리 아들 왔어? 엄마가 분식점에 오면 뭐부터 하라고 했지?”
“안녕하세요.”
수한이가 얼른 경일에게 다가가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에이, 누나는 뭘 또 그런 걸 가르치고 그래요. 편하게 들어오면 되지.”
아이의 과한 인사에 경일이 멋쩍어 하며 웃었다.
“안 됩니다. 당연히 사장님께 먼저 인사를 해야죠.”
선호연은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짧고 강렬하게 말했다.
경일은 프로 긍정러인 그녀의 이런 행동이 조금 어색했지만, 선호연으로서는 가족의 은인에게 하는 당연한 행동이었다.
경일은 수한이가 좋아하는 소고기가 듬뿍 들어간 카레라이스를 만들었다.
“수한아, 밥 먹어야지.”
“네!”
경일은 수한이를 단숨에 다찌에 딸린 의자에 앉혔다.
수한이가 카레라이스를 맛있게 먹자, 경일이 조심스레 물었다.
“수한아, 희진이 알아?”
“네.”
수한이가 입안에 음식을 가득 물고 대답했다.
“희진이 엄마는 어디가 아픈 거야?”
“나도 잘 몰라요. 그냥 조금만 부딪치면 아프대요.”
던전병의 종류 중에서 작은 충격에도 엄청난 고통을 호소하는 병이 있었다.
가장 고통스러운 병 중 하나로 알려져 있어 경일도 병명을 외울 정도였다.
피부에서 타는 듯한 고통이 느껴진다 해서 복합 부위 작열 통증 증후군이라 불렸다.
치료 식물은 이미 알려져 있었다.
산세베리아라는 던전 고유 식물이 치료제로 알려져 있었다.
다행히 경일이 가지고 있는 식물이었다.
던전과의 동조가 높아져 던전 고유 식물도감에 실려 있는 건, 대부분 그의 인벤토리에 들어가 있었다.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수한이에게서 죽에 관한 이야기가 퍼져 나갔듯이 희진이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가 알려질 것은 짐작하고 있었다.
그동안 분식점에 대한 소문을 막으려 외부 손님들의 출입까지 금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이의 간절한 부탁을 외면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들지 않았다.
경일은 희진이가 올 때를 대비해서 산세베리아를 듬뿍 넣은 죽을 준비해 두었다.
“아저씨, 감사합니다.”
희진이가 기쁜 얼굴로 인사를 했다.
조그마한 얼굴에 슬픔이 사라지고 커다란 기쁨이 맺혀 있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뛰지 말고. 천천히 가야 해.""네"
희진이가 환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아이의 웃음은 언제나 자신에게 힐링이 되었다.
희진이는 매일 동네 분식에 들렸다.
아이에겐 경일에게 죽을 받아 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상이 되었다.
꾸준히 죽을 먹은 희진이 어머니의 병세는 크게 완화됐다.
어느 날, 희진이 어머니는 드디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오랫동안 누워 있어 다리의 근육이 많이 사라져 움직이기 힘들었을 텐데도, 그녀는 기어코 경일에게 인사를 하러 왔다.
“사장님, 감사합니다.”
허름한 옷차림에 나이보다 훨씬 늙어 보였지만, 그녀의 얼굴은 밝았다.
희진이는 어머니가 넘어질까 봐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의 팔을 부축하고 있었다.
“아닙니다. 제가 한 게 뭐가 있다고요. 죽 몇 번 보내 드린 거로 이렇게 인사를 하시니 민망합니다.”
그런데 경일은 희진이 어머니가 인사를 하는 모습을 보고 왠지 모를 기시감이 들었다.
언젠가 한 번 겪어 본 일 같았다.
‘아~’
경일은 문득 선호연이 자신에게 인사를 건넸을 때가 떠올랐다.
그리고 이내 어째서 그녀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는데도 분식점에서 일하려 했는지 깨달았다.
“아닙니다. 우리 가족의 생명의 은인입니다. 희진이에게 평생 잊지 않도록 가르치겠습니다.”
“어휴~ 어머님 안 그러셔도 됩니다. 이거, 도시락입니다. 가지고 가서 희연이랑 드세요. 그럼 전 장사 준비해야 해서…….”
희진이 어머니는 아무런 티를 내지 않는 경일의 모습에 감동하며 깊이 머리 숙여 감사의 인사를 했다.
경일은 손을 꼭 쥐고 돌아가는 모녀의 모습을 보고 마음속에 따뜻한 감정이 차올랐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손주아와 선호연의 눈에도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녀들은 더욱 열심히 해야겠다고 마음속 깊이 다짐했다.
아이들의 입소문은 빨랐다.
수한이의 입에서 희진이에게 건너갔고, 희진이의 입을 통해 여러 군데로 퍼져 나갔다.
때때로 죽을 얻으러 오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경일은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옛날과 같이 던전이 알려질까 두려워하며 숨던 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제는 자신을 위협하는 어떤 세력과도 싸울 준비가 끝난 전사였다.
숨는 것은 역시 자신의 성격에 맞지 않았다.
한 대 맞으면 최소 열 배 이상으로 돌려주는 게 그의 본질이었다.
* * *
이길호는 설마 자신에게도 변화가 찾아올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 일이 시작된 건 아내가 처음으로 병상에서 일어나고 가족과 같이 외식을 간 날이었다.
그날은 요 몇 년간 가장 행복한, 그동안의 고생이 눈 녹듯 사라지는 그런 날이었다.
그는 기분이 너무 좋아 술을 실컷 마셨다.
몸이 후끈거리더니 술이 잘도 들어갔다.
안주인 쏘가리 매운탕도 이미 몇 번 먹어 봐서 익숙한 맛이었는데, 그날따라 입안에서 짝짝 달라붙었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후끈 달아 오른 몸이 식지 않았다.
몇 년 만에 아내와 행복한 잠자리까지 가질 수 있었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