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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142화 (142/300)

[142화] 때로는 몬스터보다 무서운 게 인간이지 (1)

그는 아무런 걱정 없이 잠에 빠져들었고, 그날따라 즐거운 꿈까지 꿨다.

꿈속에서 그는 오랜 목표인 헌터가 되어 강한 몬스터와 맞서 싸웠다.

위험에 빠진 동료를 구해 주고, 몬스터가 그의 칼날에 쓰러질 때 느낀 기분은 짜릿한 쾌감, 그 자체였다.

이길호는 파티의 중심이 되어 파티원의 선망 어린 시선을 받으며 몬스터를 사냥했다.

늘 두렵기만 던전이었는데 지금은 아들과 함께 뛰놀던 동네 놀이터처럼 즐거움이 가득했다.

아침이 되자 눈이 떠졌다.

꿈속의 내용이 기억이 잘 나지는 않았지만, 짜릿한 흥분은 남아 있었다.

'왜 이렇게 기분이 좋지? 이런 적이 있었던가?'

거울 속의 비친 그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제법 많은 양의 술을 먹었는데도 숙취 하나 없었다.

대충 아침을 챙겨 먹고 이길호는 던전을 가기 위해 길을 나섰다.

우윳빛 맑은 하늘에서 화사한 햇살이 쨍쨍 쏟아져 내렸다.

화창한 날씨까지 그의 마음에 쏙 들었다.

매일 보던 동네의 익숙한 풍경이었는데 오늘따라 뭔가 달라 보였다.

"좋구나"

가벼운 발걸음으로 향한 그가 도착한 곳은 F급 던전 게이트였다.

아직 한창 공략이 진행 중인지 게이트 입구에는 헌터 협회에서 나온 사람들이 서 있었다.

그의 같은 스캐빈저들도 제법 많이 보였다.

오늘도 경쟁이 치열할 것 같았다.

평소였다면 잔뜩 조바심을 냈겠지만, 이길호는 여유 있는 모습이었다.

아내가 회복했으니 굳이 무리할 필요가 없었다.

이제는 가족을 위해서라도 자신의 안전을 생각해야 했다.

아내가 분식점에서 일하며 받아 오는 월급도 적은 돈이 아니었다.

선호연은 이길호가 위험한 던전에 들어가는 걸 반대했다.

대신 그는 다른 스캐빈저처럼 안전을 위주로 돌아다니기로 약속했다.

갑자기 밝은 빛을 내던 게이트에서 검은빛이 맴돌았다.

던전의 핵이 깨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헌터 협회 직원이 게이트를 측정했고, 공식적으로 던전 공략이 성공했음을 알렸다.

그러자 스캐빈저들이 조금이라도 던전에 빨리 들어가기 위해 경쟁하기 시작했다.

“이 새끼야, 비켜. 내가 먼저 왔잖아.”

“무슨 개소리야. 너야말로 비켜. 너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못 들어가고 있잖아!”

“씨발 새끼들아, 적당히 해라. 계속 시끄럽게 굴면 던전에서 확 죽여 버릴 테니까.”

던전에 먼저 들어가려 아귀다툼을 벌이는 스캐빈저들을 보고 주위 사람들의 얼굴에 경멸이 스쳤다.

불과 얼마 전까지 자신도 저들 중 한 명이었다.

아니, 저들 중에서도 가장 독하게 굴던 이가 자신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비웃어도 그는 결코 비웃지 못했다.

한참 동안 서로 싸우던 스캐빈저들이 들어가고, 이길호는 마지막으로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먼저 들어온 스캐빈저들이 빠르게 달려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남들보다 빨라야 던전 부산물을 하나라도 더 건질 수 있기 때문에 당연한 행동이었다.

이길호는 아내와 약속한 대로 안전하게 천천히 가는 것을 택했다.

대신 주위를 꼼꼼히 살폈다.

가는 길에 몬스터의 사체가 버려져 있었다.

돈이 되는 부분은 이미 공략대 헌터들이 모두 발골 해 갔고, 팔이나 다리 같이 비교적 가치가 낮은 부분들도 이미 다른 스캐빈저가 가져간 상태였다.

늘 보던 모습이지만 가죽이 벗겨져 근육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몬스터의 모습은 적응하기 힘들었다.

이길호가 던전에 들어온 지도 제법 시간이 지났다.

한적한 곳에서 아내가 싸 준 도시락을 먹고 또다시 수색에 나섰다.

그의 눈에 저 멀리 돌아오는 공략대의 헌터들이 보였다.

당당하게 걸어오는 그들이 늘 부러웠다.

자신과의 레벨 차이는 얼마 나지 않았지만, 현실은 하늘과 땅이나 마찬가지였다.

아직 F급 던전을 도는 헌터들이라 자신보다 훨씬 나이가 어린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이길호를 스쳐 지나가며 늘 그랬듯이 자신들의 우월함을 뽐내며 그를 스쳐 지나갔다.

다행히 어제 꿈자리가 좋아서 그런지 수입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비싼 건 아니지만 던전 고유 식물을 하나 캤다.

열 시간을 넘게 돌아다녔는데 평소와 다르게 별로 피곤하지 않았다.

그는 던전을 나와 수확물을 팔고 집으로 향했다.

기분이 좋아서인지 모르지만, 술이 당겼다.

안주가 더 당기는 거 같기도 했고.

어쨌든 집에서 씻고 부인이 있는 동네 분식으로 향했다.

분식점 안에는 이미 아들이 와 있었다.

경일이 아이들을 너무 좋아해서 그런지 수한이가 분식점에서 시간을 보내는 걸 오히려 좋아해 주어서 마음이 불편하진 않았다.

“사장님, 저 왔습니다.”

이길호는 경일에게 깍듯이 인사했다.

경일이 괜찮다고 말해도, 그의 인사는 늘 정중했다.

“네, 어서 오세요.”

경일도 웃으며 이길호를 맞았다.

“아빠, 다녀오셨어요!”

수한이가 이길호가 들어오는 걸 보고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손을 잡았다.

“여보, 식사는 하셨어요?”

“이제 먹어야지. 오늘의 안주랑 소주 한 병만 줘.”

“네. 앉아 계세요.”

선호연이 요리를 시작했다.

그녀가 쏘가리 매운탕을 불 위에 올리고 다른 음식을 준비하는 동안 경일은 마나 포션과 영인초를 음식에 넣었다.

“이상하네. 요새 쏘가리 매운탕이 입에 짝짝 감겨. 예전부터 맛있는 건 알고 있었지만, 요즘은 더 맛있어진 거 같아. 꿈에서도 먹고 싶을 지경이라니까?”

“여보, 많이 먹어요.”

“고마워.”

이길호는 밥을 먹으며 간단하게 술도 한잔 마셨다.

기분 좋은 하루였다.

아내가 건강한 모습으로 일을 마치고 온 자신에게 인사를 건네는 것이 이렇게 행복한 것인지 몰랐다.

수한이의 밝게 웃는 얼굴도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수한이는 오늘 하루 동안 있던 일을 하나하나 말하고 기쁜 듯 자신과 눈을 마주쳤다.

아들의 손에서 느껴지는 체온이 너무 좋았다.

문득, 수한이의 얼굴을 바라보니 여자아이처럼 뽀얬다.

그러고 보면 동네 아이들의 피부가 모두 좋았다.

잘사는 집 아이들처럼 좋은 것을 먹이고 학원을 보낸 것도 아닌데도 말이다.

대부분 태양 아래서 뛰어노는 아이들인데 얼굴을 보면 귀티가 났다.

앞으로도 오늘만 같았으면 바랄 것이 없었다.

이길호는 아내가 분식점에서 일한 이후로 대부분의 식사를 그곳에서 해결했다.

그런데 그 이후로 이상하게 아랫배에서 묵직한 느낌이 들고는 했다.

몸이 아픈 것도 아니라 특별히 신경을 쓰지는 않았지만, 왜 이런 느낌이 드는지 가끔은 궁금하기도 했다.

하루가 지나고 아침이 밝아 왔다.

이제는 예전처럼 해가 뜨기 전부터 집을 나서지 않았다.

가족과 함께 아침을 먹고, 아내의 출근길을 바래다준 뒤에야 그는 F급 던전으로 향했다.

신기하게 예전처럼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아등바등 용을 쓰지 않았는데도 수입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요즘 그의 주머니를 살찌우는 건 몬스터 가죽이 아니라 던전 고유 식물이었다.

마음이 여유로워져서 그런 건지 눈이 더 좋아진 거 같았다.

이전이라면 잘 알아보지 못할 거리에 있는 것도 이상하게 잘 보였다.

서두르지 않고 꼼꼼히 수색하다 보니 던전 고유 식물을 발견하는 날이 많았다.

“심봤다!”

이길호는 너무 기쁜 나머지 크게 소리쳤다.

그는 오늘 헌터의 마의 구간을 깨는 데 도움을 주는 영인초를 캤다.

주로 고등급 던전에서 발견된다는 영인초를 F급 던전에서 발견한 것이었다.

덕분에 그는 세 달 치의 수입을 한순간에 벌었다.

이길호는 기뻐하며 영인초를 조심히 싸서 배낭에 넣었다.

의외로 가장 먼저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사람은 가족이 아니라 경일이었다.

“이거면 동네 분식 사장님에게 작게나마 은혜를 갚을 수 있을 거야!”

싱글벙글 웃고 있는 그의 눈앞에 이 던전을 공략한 헌터들이 보였다.

‘이런 제길, 설마 들은 건 아니겠지?’

너무 기쁜 나머지 큰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이길호는 얼굴에서 표정을 지우고 평상시처럼 행동했다.

마음속으로 나쁜 예감이 들었으나 최대한 눌렀다.

‘제발 그냥 지나가라. 그냥 가라.’

이길호는 평소와 같은 모습을 연기하며 빌었다.

“어라, 이 아저씨 연기하네. 표정이 어색해. 저 봐, 분명 우리 눈치를 보고 있잖아. 이거 졸라 수상하네. 좋아 죽으려는 모습을 봤는데, 지금 이 표정은 뭐지? 졸라 기분 나쁜데. 이거 아무것도 안 했는데 내가 무슨 죄인 같잖아. 씨발!”

갓 스무 살 정도로 보이는 남자가 짜증을 냈다.

손등을 다 덮은 문신이 눈에 띄었다.

‘이런, 너무 흥분했어. 이런 실수를 하다니…….’

이길호는 뒤늦게 자신을 나무랐지만,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어이, 당신. 우리를 뭘로 보는 거야? 지금 우릴 잠재적 강도 취급하는 거잖아.”

“잠재적? 저 새끼 뭐라는 거야? 좆도 없는 새끼가 또 잘난 척하네”

“씨발, 무식한 새끼야. 이런 단순한 단어도 못 알아듣냐?”

“뭐라는 거야? 겨우 3류 대학에, 그것도 잘린 새끼가 어디서 지랄이야.”

“야~ 말로 하지 말고 싸워. 헌터가 쪽팔리게 무슨 말싸움이나 하고 그래?”

이길호는 서로 싸우는 헌터들을 보고 얼이 빠졌다.

‘뭐, 이런 황당한 놈들이 다 있지?’

그런 이길호를 보고 처음 그에게 말을 건 헌터가 소리쳤다.

“야, 이 개새끼들아, 아가리 닥쳐. 너희가 병신 짓을 하니 이 새끼가 비웃잖아.”

일행 중 가장 어려 보였는데도 그가 이 파티를 이끄는 파티장으로 보였다.

나이가 어린 헌터가 욕을 했지만, 다들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였다.

헌터의 세계의 기준은 오로지 레벨이었다.

레벨 앞에서는 나이는 별 의미가 없었다.

‘내가 언제 비웃었다고.’

손등에 문신을 한 헌터가 입을 열 때마다 자신을 사지로 끌어들였다.

오늘 처음 본 사이이니 무슨 억하심정이 있는 건 아닐 테니, 저자의 목표는 당연히 영인초일 것이었다.

분명 자신이 지른 소리를 들은 것이 틀림없었다.

저들이 지금 하는 짓은 한마디로 개수작이었다.

너무나 속이 보이는 짓을 보고도 대응할 수가 없어 가슴이 답답했다.

“아저씨, 좋은 걸 얻었나 본데… 우리도 구경 좀 하자고. 멀쩡한 사람 강도로 만들고 비웃을 만큼 좋은 건지 한 번 보자고.”

남자가 발톱을 드러냈다.

“무슨… 내가 언제 당신을 강도로 만들고, 비웃었다고 하는 거야?”

이길호는 문신의 말도 안 되는 억지에 맞섰다.

“하~ 씨발. 스캐빈저 새끼가 졸라 뻔뻔하네. 야, 이 새끼 배낭 가지고 와 봐.”

문신의 말에 조금 전 잘난 체를 하던 헌터가 다가와 배낭을 낚아챘다.

“이게 무슨 짓이야?”

“씨발, 무슨 짓이긴. 내가 조금 전에 이야기했잖아. 귀에 좆 박았어? 왜 사람 말을 못 알아들어. 내가 우스워?”

문신이 이길호를 윽박질렀다.

배낭을 받아 든 문신이 바닥에 내용물을 모두 쏟았다.

댕그랑!

아내가 정성스럽게 싸 준 도시락이 열리며 안에 든 음식이 땅에 쏟아졌다.

“씨발, 김치 냄새. 하여간 먹는 것도 졸라 촌스러워.”

짜증을 내던 문신의 눈에 천에 곱게 싸인 것이 보이자, 그는 얼른 주워 펼쳐 보았다.

“와, 씨발! 이거 영인초잖아. 이 새끼가 좋아서 날뛸 만했네. 아저씨, 고생했어.”

문신은 당연하다는 듯이 영인초를 자기 배낭에 넣었다.

“무슨 짓이야? 왜 남의 걸 가져가려는 거야?”

이길호가 손을 뻗어 문신의 배낭을 잡으려고 했다.

퍽!

소리와 함께 이길호는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리고 옆에 있던 헌터가 인정사정없는 발길질로 복부를 걷어차기 시작했다.

퍽퍽퍽퍽!

대비 없이 맞은 발차기는 훨씬 더 고통스러웠다.

그는 한 마리 벌레처럼 바닥을 기며 고통스러운 신음을 쏟아냈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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