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마나의 벽
견딜 수 없는 답답함에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그의 발작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머리는 터져 피가 흘렀고, 손은 까져 뼈가 드러날 지경이었다.
그렇게 수백, 수천 대를 때렸지만, 벽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으아아아악!”
꽝꽝꽝!
두 손바닥을 벽에 잡듯이 붙이고 앞머리로 벽을 세게 들이박았다.
차라리 이 답답함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머리가 깨지는 한이 있더라도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느새 손가락이 부러지고, 단단한 두개골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벽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얇게 금이 간 틈을 따라 찬란한 빛이 새어 들어왔다.
아주 작은 빛이나마 몸에 닿으니 조금이나마 답답함이 풀려 왔다.
그는 빛에 이끌려 더욱 세차게 이마를 벽에 박았다.
벽이 여러 번 도장을 겹쳐 찍은 듯이 붉은 피의 자국으로 겹쳐졌다.
이마가 찢어지고 짓눌린 살이 밀려 뼈가 드러날 지경인데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아주 작은 빛에서 느낀 해방감에 더욱 큰 빛을 갈망했다.
죽어도 깨질 것 같지 않던 벽으로 둘러싸인 칠흑 같은 방이 점점 빛으로 밝아지기 시작했다.
한번 금이 간 벽은 계속된 충격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사방에서 찬란한 빛이 들어와 이길호의 온몸을 비추었다.
그는 놀라운 해방감과 커다란 환희를 맛봤다.
그 순간, 이길호는 15년 이상 그를 구속하던 마의 구간을 깼다.
마침내 마의 구간을 벗어나는 순간이었다.
잠을 자던 이길호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의 눈에서 순간 광채가 뻗어 나왔다.
“아얏.”
눈을 너무 크게 떴더니 실밥이 당겨 아픔이 일었다.
그 덕에 이것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설마 이게 진짜야? 내가 벽을 깬 거야?”
얼마 전부터 아랫배에서 느껴지던 묵직한 감각이 사라졌다.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모두 같았으나, 그걸 보는 자신이 달라졌음을 알았다.
예전과 비교해서 어떻게 달라졌는지 설명할 수는 없었다.
그냥 달라졌다는 걸 알았다.
“여보, 괜찮아요?”
이길호의 옆에서 쪼그려 잠든 선호연이 인기척을 느끼고 눈을 떴다.
“괜찮아. 많이 좋아졌어. 걱정 많이 했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선호연의 질문에 그는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말을 해 본들 아내의 마음만 아플 뿐이다.
“던전에서 실수로 높은 곳에서 굴렀어. 요즘 좋은 일만 생기니 나도 모르게 마음이 많이 풀어졌나 봐.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 몸 여러 군데 상처가 나서 그렇지, 실제로는 많이 다치지 않았어. 이것 봐봐. 하루 만에 이렇게 건강해지고 이제는 말도 하잖아.”
선호연은 남편의 말을 듣다 말고 물을 내밀었다.
“괜찮아. 지금은 별로 목이 안 마르네.”
“마셔요. 사장님이 특별히 가지고 온 거에요. 이거 마시고 죽도 먹어요. 사장님이 꼭 챙겨 먹으라고 했어요.”
“그래?”
선호연의 말에 이길호는 곧바로 물을 마셨다.
맹물이 아닌 다른 맛이 났다.
그제야 그는 심각한 상처를 입고도 하루 만에 이 정도로 회복된 이유를 알았다.
그리고 자신이 마의 구간을 깰 수 있었던 이유도.
‘감사합니다, 사장님.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앞으로 남은 인생은 우리 가족을 구해 준 사장님께 보답하며 살아가겠습니다.'
이길호는 주먹을 꽉 쥐며 굳은 결심을 했다.
경일은 그사이 어디론가 빠르게 걷고 있었다.
“대호 길드라고 했지? 내 사람을 건드렸으니, 절대 가만히 두지 않겠어.”
이길호가 간 던전과 그곳을 공략한 공략대가 대호 길드 소속이라는 것을 알아내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대호 길드라는 단어가 익숙해 곰곰이 생각해 보자, 얼마 전 자신의 돈을 노리고 강도질하던 무리도 대호 길드였다.
경일은 변장을 하고 대호 길드가 뒷배로 있는 암시장을 찾아갔다.
이번에는 특별히 지난번보다 두 배 정도의 물건을 가지고 갔다.
이 정도면 충분히 미끼를 물을 거라 생각했다.
그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저번보다 더 빨리 한 무리가 자신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이 새끼들은 정말 변하지 않네. 오늘, 내가 제대로 지옥의 문을 열어 주지.’
경일은 저번에 한 번 가 본 인적이 없는 공터로 들어갔다.
그와 함께 몇 명의 헌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흐흐흐흐흐흐.”
한 명의 헌터가 기쁜 듯 웃음을 흘렸다.
퍼억!
그리고 들려오는 타격 소리.
웃던 헌터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경일의 주먹이 정확하게 헌터의 입에 박혀 들었다.
“이런 미친 새끼가… 야, 그냥 죽여 버려!”
이 무리의 두목으로 보이는 자의 명령에 헌터들이 덤벼들었다.
윙윙!
경일의 머리 위로 날카로운 검이 지나갔다.
“듣던 대로 아주 악질이구나.”
허리를 젖혀 검을 피한 경일이 그대로 헌터의 턱에 주먹을 올려 쳤다.
퍼억!
헌터는 턱과 함께 몸이 들리더니 그대로 뒤로 날아가 등부터 바닥에 떨어졌다.
심한 경련과 함께 입에서 게거품이 뿜어져 나왔다.
“이 새끼 뭐야? 너, 너, 누구야?”
한 명의 헌터가 당황해 소리쳤으나, 경일은 깔끔하게 그 질문을 무시했다.
대신 발차기로 대답했다.
낮게 내지른 발차기가 헌터의 허벅지에 맞는 순간 뼈가 부러지는 느낌이 났다.
“아아악!”
“조용히 해, 이 새끼야.”
경일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헌터의 입을 그대로 걷어차 버렸다.
“켁켁켁켁!”
걷어차인 놈은 부러진 이를 삼켰는지 괴로운 듯 목을 부여잡고 다시 뱉어 내려 용을 썼다.
“헉!”
순식간에 동료들이 쓰러진 모습을 보자, 남은 두 명의 헌터가 각자 다른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하~ 이것들이 사람 귀찮게 구네. 의리라고는 1도 없는 새끼들.”
어느새 경일의 손에는 단도가 들려 있었다.
쐐액!
두 개의 단도가 동시에 허공으로 뿌려 졌다.
그와 함께 도망가던 두 명의 헌터가 땅바닥을 굴렀다.
“아아아아악!”
등에 박힌 단도에서 밀려드는 고통에 헌터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경일은 헌터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질질 끌고 갔다.
“놔! 놓으라고, 이 새끼야! 아아악! 이거 놔!”
머리 가죽이 벗겨질 것 같은 고통에 헌터가 몸부림치며 소리를 질렀다.
“너, 한마디만 더 하면 입을 막아 버린다.”
경일의 날이 선 한마디에 남자는 입을 다물었다.
다섯 명의 남자가 한곳에 모여 괴로운 듯 인상을 찡그렸다.
하지만 그중에 소리를 지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남자의 손속이 얼마나 독한지 알고 있으니 함부로 개길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내가 몇 가지 물을 거야. 똑바로 대답하지 않는 놈은 몸을 아주 걸레짝으로 만들어 놓을 테니, 제대로 각오해야 할 거야.”
경일의 소름 끼치는 목소리에 헌터들은 사색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전 신흥동 게이트에 공략대로 참여한 사람?”
질문에 대답하는 헌터들은 없었다.
“그래, 여기는 없다는 거지. 좋아. 뭐,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지.”
낚시가 시작됐다.
경일은 헌터들에게 각자 한 명씩 친한 길드원을 이곳으로 부르라고 시켰다.
“진호야. 여기 큰 건수 하나 물었어. 어떻게… 같이할래?”
“형님, 암시장에 큰 거래를 한 놈이 나타났다네요. 네네. 알겠습니다. 형님 올 때까지 기다릴 테니 빨리 오세요. 그럼요, 이게 다 형님을 좋아해서 연락드린 거죠. 네. 다음에 맛있는 거 먹자고요? 네네. 일단 얼른 오세요. 네네.”
“규민아, 은호가 좋은 호구 하나 잡았어. 두당 최소 천만 원은 먹을 수 있을 거 같아. 어떡할래? 온다고? 그래. 그럼 우리 관할 암시장 뒤에 있는 공터로 와. 그래.”
헌터들은 제각기 친한 헌터들에게 전화해서 이곳으로 불렀다.
‘이것들은 헌터가 아니라 범죄 집단이네. 어떻게 하나같이 동료를 부르는 미끼가 범죄에 관한 거야? 이런 놈들이 아무런 제재도 없이 돌아다니니까 사회가 더 팍팍해지지.’
경일은 전화를 끊은 헌터들을 모두 광산으로 보내 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명씩 공터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둠 속에 숨어 있던 경일은 가볍게 헌터를 제압한 뒤, 이길호가 맞은 만큼 때렸다.
그러고 나서 또 다른 헌터에게 전화를 걸게 시켰고, 어느새 대호 길드 헌터들은 이곳으로 몰려들게 되었다.
대호 길드원을 제압하고 다시 불러내기를 반복하던 경일은 드디어 이길호를 무지막지하게 폭행한 헌터를 만날 수 있었다.
“이야~ 반갑다. 내가 너를 찾으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아? 이거, 이가 갈리게 반갑네!”
경일의 입은 분명 웃고 있었지만 눈은 한기가 느껴질 정도로 차가운 빛을 냈다.
동료의 전화를 받고 이곳에 왔는데 엉뚱한 사람이 등장하자 남자는 당황해했다.
“너, 누구야?”
“나? 네놈이 며칠 전 던전에서 폭행한 사람의 지인.”
“뭐? 그때 그 스캐빈저 새끼가 살아 나왔다고? 제법 질기네. 그 정도로 맞았으면 몇 걸음 걷기도 힘들었을 텐데.”
“하… 이런 미친 새끼가!”
남자는 순간 어이없어하며 곧 위협적인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경일을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이 여유로운 자세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 쓰레기 복수하려고 온 거야? 나 참, 간이 쳐 부었군. 내가 분명히 대호 길드라고 알려 줬는데도 복수하러 올 거라곤 생각도 못 했네. 그런데 너, 달랑 혼자 온 거야? 그리고 나한테 전화한 온유 새끼는 또 어디 갔어? 설마… 네가… 온유를 어떻게 한 거지?”
이제야 이상함을 느낀 남자는 물러나서 곧바로 핸드폰을 꺼냈다.
하지만 그는 전화를 걸지 못했다.
손등에서 강렬하게 느껴지는 아픔에 쥐고 있던 핸드폰을 놓쳐 버렸다.
"이런… 개 같은!"
경일이 던진 돌에 맞은 손등이 순식간에 벌겋게 부어오르며 욱신거렸다.
순간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덤벼들려는 남자의 발이 멈췄다.
'저 새끼가 가볍게 던진 돌이 보이지가 않았어. 설마!'
온유가 사라진 것이나, 그가 던전 돌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나, 이건 자신보다 훨씬 강한 헌터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판단은 빨랐다.
곧바로 몸을 돌려 뛰었다.
하지만, 몇 발짝 가지 못하고 쫓아 온 경일에게 뒷덜미가 잡혀 그대로 땅바닥을 굴렀다.
“아직 볼일이 많이 남았는데 어딜 가려고? 빚을 지고 도망을 가면 쓰나. 난 아주 악질이라서 이자까지 톡톡히 받아 낼 생각이거든.”
“오지 마! 오지 마! 이 새끼야, 오지 말라고! 너… 내가 누군지 몰라? 나, 대호 길드의 박재하야. 나를 건드리면 네놈도 무사하지 못해. 아니, 네놈의 가족까지 전부 죽여 버릴 거야. 대호 길드는 절대 적에게 아량을 베풀지 않아. 여기서 끝내는 게 너와 너희 가족을 위해서라도 좋을 거야!”
“뭘 끝내, 이 새끼야. 지금 내 손에 결딴난 대호 길드 헌터들이 몇 명인데… 너까지 정확하게 열일곱 명째야. 내가 오늘 밤 안으로 네가 속해 있는 쓰레기 같은 길드까지 모두 정리해 주지. 그리고 넌 내가 특별히 제일 마지막까지 귀여워해 주지. 우리 형님을 건드린 걸 평생 후회하도록 만들어 줄게.”
“오지 마… 오지 마! 오지 말라고, 이 새끼야!”
경일이 박재하를 향해 걸어가자, 그는 바닥을 기며 경일에게 멀어지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애초에 허망한 몸부림일 뿐이었다.
“헉… 그, 그게 뭐야?”
어느새 경일의 손에 쥐어진 미스릴 몽둥이를 본 박재하가 놀라서 소리쳤다.
보기만 해도 묵직해 보이는 것이, 한 대만 맞아도 살이 터지고 뼈가 부러질 것 같았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