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은혜를 갚고 싶어!
힐링 포션이 들어간 음식을 먹은 이길호는 빠르게 회복되어 갔다.
힐링 포션이 없었다면 적어도 5개월 이상 입원해야 할 만큼 중상이었지만, 일주일도 되지 않아 퇴원할 수 있었다.
그는 퇴원하고 곧바로 헌터 협회로 달려가 F급 던전 공략을 신청했다.
돈이 되는 던전이나, 위치가 좋은 던전은 모두 길드에서 쓸어 갔고, 남은 던전은 헌터 협회에서 따로 헌터들의 신청을 받아 공략을 진행했다.
F급 던전은 조금 기다려야 참여가 가능했다.
마의 구간을 만난 헌터들이 그 사실을 인정하기까지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기존의 헌터들과 마의 구간에 갇힌 헌터들까지 몰리니, 던전 공략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며칠 동안 기다려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날 저녁, 이길호와 선호연이 식탁을 두고 마주 앉았다.
“여보. 할 말이 있어요.”
평소답지 않은 선호연의 무거운 목소리에 이길호는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곰곰이 생각을 해 봤는데… 이제 스캐빈저 일을 그만두는 게 어때요? 그동안 내 치료비를 마련한다고 고생도 많이 했으니, 이제는 좀 쉬어도 될 거 같아요. 사장님이 월급도 많이 주시니까, 당신도 다른 일 한번 생각해 봐요. 그 정도면 우리 세 식구 먹고 사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잖아요.”
지금까지 응원을 보내 주던 아내가 처음으로 헌터를 그만둘 것을 요구했다.
D급 던전에서 지옥개를 만나 죽을 뻔한 적도 있었고, 이번에 당한 사건까지 생각하면 당연한 말이었다.
아마 이길호도 스캐빈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면, 지금 아내의 의견을 따랐을 것이다.
“저기, 오늘 헌터 협회에 가서 던전 공략 신청을 했어.”
“네?”
이길호의 말에 선호연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이내 표정이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찬바람이 이는 게 화가 많이 난 듯했다.
“여보, 말도 안 하고 혼자 결정해서 미안해. 사실 나, 병원에서 신기한 현상을 겪었어. 이번에 마의 구간을 벗어난 거 같아.”
“네? 정말요?”
격앙되어 있던 그녀의 표정이 순식간에 놀라움으로 변해 갔다.
“당신 말대로 스캐빈저로 평생을 살아야 한다면 지금 관두는 것도 괜찮겠지. 그런데 말이야… 당신도 알다시피 내가 열여덟 살에 각성하고 드디어 마의 구간에서 벗어났어. 그동안은 어쩔 수 없이 꿈을 가슴에 묻었지만, 이제 기회가 생겼으니 한 번 도전해 보고 싶어.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넘어가면 평생 가슴에 한이 맺힐 거 같아.”
이길호는 간절한 목소리로 아내에게 자신의 꿈을 말했다.
“그리고 말이야…….”
말끝을 흐리는 이길호를 선호연은 아무 말 없이 쳐다보았다.
“당신의 병이 나은 것처럼 이번에 내가 마의 구간을 벗어난 것도 다 사장님 덕인 거 같아. 그 비싼 영인초와 마나 포션을 나에게 준 거지. 내가 그랬잖아. 요즘 분식점에서 먹던 쏘가리 매운탕이 입에 쩍쩍 달라붙는다고. 내 몸에 필요한 성분이 있으니 매운탕이 그렇게 맛있던 거야. 그걸 먹고 나서 아랫배가 묵직해 오더라고. 처음에는 신경을 안 썼는데, 분식점에서 음식을 먹을수록 묵직한 느낌이 커지고, 몸도 더 가벼워지더라고.”
이길호는 가슴이 벅차오르고 목이 메여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가 병원에서 나를 단단히 둘러싸고 있던 벽이 무너지는 걸 느꼈어. 그 순간, 지금껏 보던 모든 것이 달라졌다는 걸 알았어. 이런 기회를 줬는데 이대로 포기하고 싶지는 않아. 그리고 우리 가족이 이런 대단한 은혜를 입었는데, 나도 꼭 사장님에게 미약하게라도 보답하고 싶어. 당신은 아플 때라 잘 모를 텐데, 몇 달 전에 분식점에 큰일이 있었어. 사장님을 노리고 가게에 깡패들과 함께 헌터까지 찾아왔지. 그때 사장님이 고생을 많이 한 걸로 알아. 그래서 내가 강해지면 그런 인간들이 함부로 설치지 못하게 지킬 거야.”
그렇게 말하는 이길호의 눈에는 굳은 의지가 담겨 있었다.
“분식점은 우리 가족에게도 은인이지만, 동네 아이들을 생각해서라도 꼭 오랫동안 있었으면 좋겠어. 그리고 한 번 일어난 일이 또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잖아. 아니, 분명 다시 일어날 수밖에 없을 거야. 돈이 된다는 걸 알면 또다시 그런 놈들이 올 테지. 최대한 조심할 테니 나를 한번 믿어 줘. 스캐빈저 일은 이제 관둘게. 벌써 몸에서 커다란 힘이 느껴져. 아, 그리고 던전에서의 경험은 나를 따라갈 사람이 없잖아. 다치지 않고 잘해 나갈 자신이 있어.”
그녀는 남편의 간절한 마음을 느꼈다.
남편이 마의 구간에 갇혀 얼마나 절망했는지는 바로 옆에서 지켜본 그녀가 더 잘 알고 있었다.
천형과 같은 마의 구간을 벗어났으니 의욕이 살아나는 건 누구나 같은 마음일 것이다.
다른 것을 다 떠나 경일에게 은혜를 갚고 싶다는 남편의 말은 절대 반대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녀 또한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는데도 분식점에서 사람을 구한다는 말에 억지로 취직하지 않았는가.
“그래요. 대신, 최대한 안전하게 행동하기로 약속해 줘요.”
“내 인생의 가장 1순위는 가족이야. 난 수한이가 결혼해서 자식을 낳는 것까지 기어코 보고 죽을 테니, 걱정하지 마. 당신이나 몸 관리 잘해.”
“내 걱정은 하지 말아요. 분식점에서 일하면서 오히려 건강이 더 좋아졌어요. 피부도 훨씬 더 깨끗해졌고… 사실 사장님이 준비해 주는 음식 재료도 평범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당신은 매일 동네 아이들을 보니까 느끼기 힘들겠지만, 난 가끔 동네 아이들을 볼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 다들 힘들게 살다 보니 입고 있는 옷은 허름한데, 아이들 얼굴에선 전부 광이 나. 게다가 하나같이 건강하고. 이게 전부 사장님이 해 준 음식 때문인 거 같아. 수한이도 분식점 다닌 이후로 감기 한 번 걸린 적 없잖아. 아토피도 사라지고.”
“어머, 그러고 보니 정말 그렇네요!”
그녀가 눈을 크게 뜨며 놀라워했다.
이길호는 아내의 허락도 떨어졌으니, 이제부터 정말 열심히 하기로 마음먹었다.
던전을 비치는 햇볕이 등을 따뜻하게 데워 주었다.
들판의 풀들이 잔잔히 부는 바람에 맞춰 춤을 추듯 살랑살랑 흔들어 댔다.
여느 날과 같이 던전은 평화로운 분위기로 가득했다.
경일은 늘 그랬듯이 한참 동안 바쁘게 움직였다.
그가 요즘 집중하는 것은 던전 고유 식물의 재배였다.
매번 필요한 던전 고유 식물을 찾으러 다니는 건 시간이 너무 많이 들었다.
그래서 아예 집 근처에서 키울 생각을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준비해야 할 게 많았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비닐하우스를 만드는 일이었다.
경일은 먼저 자재를 바닥에 일렬로 놓은 뒤, 기둥이 될 파이프를 일정한 간격으로 땅에 박았다.
“쉽네.”
경일이 두 손으로 힘을 주어 땅에 박으니 푹푹 잘 들어갔다.
원래라면 망치로 때려 고정시켜야 하지만, 힘으로도 가능하니 작업은 금방 끝이 났다.
땅에 박힌 파이프에 연결대를 넣고 지붕 부분이 될 파이프를 가로로 연결해 주었다.
눈대중으로 지은 거라 삐뚤어진 곳이 보였으나,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 각 기둥을 기다란 파이프로 엮은 뒤 고정구로 고정해 주었다.
아무리 신체 능력이 좋아도 혼자서 하는 작업이라 중간중간 일의 진행이 느려지곤 했다.
“이럴 때는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다니까.”
한참을 고생하고 나서야 뼈대가 완성되었다.
정확하게 측량하고 만든 것이 아니라서 파이프의 높이가 달라 파도처럼 춤을 췄다.
보기에는 안 좋았지만, 기능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넓은 비닐을 씌우자, 커다란 비닐하우스 하나가 완성되었다.
던전 고유 식물은 모두 자라는 환경이 달라 한 종류당 비닐하우스 하나에 재배할 생각이었다.
요즘은 던전에 들어오면 다른 일은 제쳐 두고 일단 비닐하우스 제작에 전념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스무 개의 비닐하우스가 완성되었다.
다 만들고 나니 일렬로 쭉 서 있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멀리서 보고 있노라면 꼭 강물이 흘러가는 것처럼 보였다.
경일은 각 비닐하우스마다 던전 고유 식물들이 자라는 주위 환경과 최대한 비슷하게 만들어 놓았다.
어떤 식물은 어두운 곳을 좋아했고, 어떤 식물은 햇빛이 잘 비추는 곳에서 자랐다.
세밀히 들어가면 습도, 온도, 자라는 흙까지 모두 달랐다.
이미 그가 할 수 있는 조사는 모두 끝낸 상태.
경일은 식물이 좋아하는 흙을 각각의 비닐하우스에 깔았다.
그러고 나서 각 비닐하우스마다 식물이 좋아하는 환경을 맞춰야 했는데, 이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휴~ 이렇게 노력했는데 제발 잘 자라다오.”
경일은 마나 오토바이를 타고 던전을 돌아다니며 던전 고유 식물을 채집했다.
최대한 뿌리가 상하지 않게 조심히 캐서 비닐하우스에 옮겨 심었다.
시간이 흐르며 경험이 많아지고, 공부가 깊어질수록 식물에 대한 이해가 늘어났다.
조금 더 효과적인 방법도 깨닫고, 그동안 잘 자라지 않던 이유도 알아냈다.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일이라 처음에는 걱정도 했지만, 막상 부딪쳐 보니 힘들긴 해도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잘 자라고 있는 식물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불러 왔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풀리지 않는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몇 종류의 던전 고유 식물은 그의 노력에 비해 성과가 미미했다.
“대체 뭐가 문제일까?”
경일은 답답한 듯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가만히 서서 생각에 잠겼다.
습도도 올려 보고, 일조량도 조절해 보고, 흙에 거름을 주기도 하고, 식물의 간격에도 신경을 써 가면서 여러 시도를 했다.
하지만 그의 노력과 달리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시들어 갔다.
“짧은 기간에 이 많은 던전 식물의 재배에 성공한다는 게 말이 안 되지. 꾸준히 노력하다 보면 분명 성과가 나올 거야.”
경일은 실망하지 않았다.
앞으로 더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면 분명 좋은 성과가 있을 거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 * *
힘든 춘궁기가 지나갔다.
이번에도 경일이 보내 준 식량으로 위기를 넘겼다.
이제 영지에서는 다들 감자를 수확하느라 바빴다.
작년에 거름을 뿌린 효과가 있는지 풍년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얼굴도 밝았다.
그에 비해 어두운 얼굴로 돌아다니는 이들이 있었다.
바로 가우스 신을 모시는 사제들이었다.
“베니티 사제.”
“네. 루터 님.”
베니티는 루터의 부름에 공손하게 대답했다.
루터는 이 지역을 책임지는 봉역 사제로 이들의 우두머리 격이었다.
“우리가 이곳에 온 지도 벌써 몇 달이나 지났는데, 그동안 확보한 신도가 몇 명인지 알고 있습니까? 백 명도 채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건 그나마 데려온 이들의 믿음 또한 건실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그저 우리가 던져 주는 음식을 받아 갈 때나 믿는 척을 하지, 실상은 신도가 아니라 봐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지금 수도의 교단에서 난리가 난 걸 모릅니까?”
루터는 제1사제인 베니티를 호되게 질책했다.
교단에서 강한 질책을 들은 터라 마음이 급해졌기 때문이다.
“저… 그게, 아무리 노력해도 선교가 잘 되지 않습니다. 가우스 신의 교리를 아무리 설명해도 영지민들은 전부 별다른 흥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아니, 우리가 처음 개척하는 것도 아니고, 그게 말이 됩니까? 다른 지방에서는 선교를 훌륭하게 성공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교단에서 특별히 우리를 이곳에 보낸 것이고요. 그런데 이곳에서만 이렇게 고전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미 여기에 들어간 돈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시는 건 아니겠지요?”
루터는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