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아드리온 사절단
“베니티 사제님, 잘 알겠습니다! 이번 예배 때 제가 모든 것을 바칠 테니, 제발 케나베스를 좀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예배일까지 아직 3일이나 남았는데, 그때까지 도저히 기다릴 자신이 없습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남자는 빌고 또 빌었다.
그 모습에 베니티 사제는 마음이 조금 풀렸는지 소매 속에 넣어 둔 케나베스를 슬쩍 땅에 떨어뜨리고는 신전으로 빠르게 들어갔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남자는 멀어지는 베니티 사제의 뒷모습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3일 뒤, 남자는 예배에 참석해 그동안 일하면서 모은 돈을 모두 바쳤다.
남자와 같이 가우스 교의 계략에 빠져 신전에 돈을 바치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힘든 생활을 하면서 한 푼 두 푼 힘들게 모은 돈이 가우스 교의 시커먼 뱃속으로 들어갔다.
더군다나 중독자가 넘치면서 병을 얻는 이들도 생겨났다.
자포리자는 지금 벌어지는 사태에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갔다.
“영주님, 참으십시오. 지금 저들을 건드리면 우리같이 작은 영지는 한순간에 끝이 날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종교 활동을 방해했다는 이유로 가우스 교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들까지 몰려들 것입니다.”
카스만이 연신 자포리자를 달랬다.
“이게 무슨 종교란 말입니까? 사람을 마약으로 중독시켜 자신들의 교리를 전파하고, 힘들게 모은 재산을 성금이라는 명목으로 갈취하고… 이게 신을 모시는 작자들이 할 짓이란 말입니까!”
“지금은 참을 수밖에 없습니다. 저희는 프라인만 해도 버거운 상황입니다. 더군다나 종교와 척지는 건 왕국 전체와 싸워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분명 기회가 올 것입니다. 그때를 위해 힘을 모으셔야 합니다!”
카스만이 피 끓는 충정으로 말했다.
늙은 카스만의 진심에 자포리자는 끓어넘치는 분노를 삼킬 수밖에 없었다.
‘두고 보자. 분명 기회가 올 것이야. 그때는 너희들에게 가장 비참한 죽음을 선사하마!’
이를 가는 자포리자의 두 눈이 맹수의 눈빛처럼 시퍼렇게 빛이 났다.
영지가 한창 어수선할 때, 스탄다비아에 새로운 손님이 찾아왔다.
스탄다비아와 동맹을 맺고 있는 아드리온의 사절단이었다.
“영주님, 아드리온에서 방문한 사절단이 영주님을 뵙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집사의 보고에 자포리자의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미 이 상황을 예상하였지만, 막상 눈앞에 닥치니 짜증이 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가우스 교 때문에 골치가 아픈 판국에 아드리온의 사절단까지 오니 두통이 밀려왔다.
“저녁에 만나기로 하지.”
“알겠습니다.”
자포리자는 일단 시간을 벌고 카스만을 불렀다.
“원로님, 우리의 예상대로 아드리온에서 사절을 보내왔습니다.”
“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결국 오고야 말았군요. 첩보부에서 따로 참고할 만한 정보를 가져오지는 않았습니까?”
“알리사 지방에서 간헐적으로 작은 전투가 일어나는 것 이외에는 특별한 일은 없었습니다.”
“그럼 우리의 예상대로 프라인을 핑계로 돈을 요구하겠군요.”
“아마 그렇게 진행이 될 듯합니다.”
“이거 참, 골치 아프게 됐습니다.”
카스만은 작은 도움이라도 주고 싶었지만, 그도 별다른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약자인 자신들의 입장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었다.
게렉스 백작은 스탄다비아에서 알리사 영지를 대가로 동맹을 제안했을 때는 자다가 떡이 생긴 기분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게 아닌 걸 알았다.
알리사 영지를 받았다고 하나, 실질적으로 이득을 본 건 전혀 없었다.
오히려 평소 좋지 않던 프라인과의 관계만 더욱 틀어졌다.
자포리자가 알리사 영지를 아드리온에게 넘긴다고 대외적으로 발표했지만, 프라인에서 이를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스탄다비아와 아드리온이 동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프라인 영주는 아드리온에 대한 악감정이 더욱 깊어졌다.
그 덕에 알리사에서 가끔 일어나던 병사들 간의 크고 작은 전투가 더욱 빈번히 일어났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프라인과의 충돌로 인해, 아드리온이 입는 손해가 점점 커져 갔다.
이미 한쪽 발을 담근 이상, 이대로 발을 뺄 수도 없었다.
아드리온 영주는 알리사를 공식적으로 자신의 영지로 인정받기 위해 중앙 정계에 힘을 써 보려 했지만, 프라인 영주를 당해 낼 수는 없었다.
프라인 영주는 오래전부터 중앙 정계에 줄을 댄 터라 그 힘은 자신보다 훨씬 강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알리사에 대한 공식적인 칙령은 내려오지 않았다.
결국 많은 돈이 들어갔지만 아무런 성과도 이루지 못한 셈이었다.
아드리온 영주는 이 손해를 어떻게든 메꿔야 했다.
안 그래도 부족한 재정을 쥐어짜서 일을 진행한 터라, 영지의 사정이 급속도로 나빠졌기 때문이다.
그가 생각하기에 이 일의 단초를 제공한 쪽은 스탄다비아였다.
그들이 아니었으면 이렇게까지 어려워지지 않았을 것이다.
스탄다비아가 분명 책임져야 부분이 있었다.
“자포리자 영주님, 반갑습니다. 저는 아드리온에서 온 무스타호 힉슨 자작입니다.”
저녁 약속 시간이 되자, 사절단이 찾아왔다.
“일단 앉지.”
자포리자와 카스만이 테이블을 중간에 둔 채 무스타호 자작과 마주 보고 앉았다.
“이번에 제가 온 이유는 게렉스 백작님의 전언을 전달하기 위해서입니다. 영주님도 아시다시피 프라인과의 크고 작은 전투로 인해 저희 아드리온은 큰 피해를 보고 있는 실정입니다. 병사들의 피해뿐만 아니라 재정적으로도 힘든 상황입니다. 이번에 알리사 영지가 저희 소유임을 인정받기 위해 중앙 정계에도 연줄을 대느라 재정이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이거 참, 영지의 살림살이를 말하는 게 부끄럽기는 하지만, 서로 동맹을 맺은 사이니 가감 없이 말씀드리는 겁니다.”
분명 동맹 관계임에도 용건을 꺼내는 무스타호 자작의 말투는 왠지 스탄다비아를 업신여기는 듯했다.
“사실 프라인이 우리와 부딪치는 동안 가장 이득을 본 건 스탄다비아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스탄다비아의 안전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는 것은 영주님도 부정하지 못할 사실입니다. 그러니 이번에 스탄다비아에서도 어느 정도 성의를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말은 정중했지만, 무스타호 자작의 표정엔 자신감이 넘쳤다.
이 자리에서의 갑은 자신이었고, 자포리자가 을이었다.
더군다나 명분까지 완벽한 상황이니, 자포리자가 거절할 수 없을 게 뻔했다.
자포리자는 조용히 무스타호 자작의 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성의라… 구체적으로 얼마를 원하는 건가?”
자포리자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이번에는 일시금으로 5,000골드를 지원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두 달에 한 번, 1,000골드씩은 지원해 주셔야겠습니다.”
무스타호 자작의 말을 들은 자포리자는 무표정을 유지했지만, 마음속으로 상당히 놀란 상태였다.
5,000골드는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몇 배는 더 많은 금액이었다.
더군다나 두 달에 한 번씩 1,000골드를 지원해 달라니.
이건 동맹을 맺은 상대를 대하는 태도가 아니었다.
“5,000골드는 너무 많은 것이 아닌가? 병사들과의 충돌이 있었다고 하지만, 대부분 소규모 전투였는데 이 정도 금액은 상당히 과하다고 생각되는군.”
“영주님 입장에서는 그렇게도 생각하실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병사들이 스탄다비아가 흘릴 피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희생을 생각하면 결코 과한 액수가 아니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실제적으로 우리가 프라인의 위협으로부터 스탄다비아의 지켜 주고 있는 셈이지 않습니까? 평화의 대가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적은 금액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스타호 자작은 굳건한 태도로 말했다.
그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충분히 통할만 한 명분이었다.
“아드리온은 우리와 동맹을 맺기 전부터 광산 문제로 프라인과 싸우고 있지 않았습니까? 그런 점은 제쳐 두고 무조껀 우리를 위해 싸운다고 말하는 건 어폐가 있습니다.”
카스만이 끼어들어 무스타호 자작의 말을 지적했다.
“처음에는 그런 면이 있었지요. 하지만 지금 우리는 분명 스탄다비아를 지켜 주기 위해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광산에 대한 권리 때문에 일어난 싸움은 대부분 광산이 있는 두 영지의 경계선에서 일어났습니다. 광산만 생각했다면 우리는 알리사에서 물러나도 벌써 물러났을 겁니다.”
무스타호 자작도 카스만에게 밀리지 않고 주장을 이어 갔다.
“…….”
“더 이상의 손해를 버티지 못하고 지금이라도 우리가 발을 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프라인과 스탄다비아의 감정이 매우 안 좋은 걸로 아는데, 그들이 과연 가만히 있겠습니까? 지금 우리는 동맹으로서의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는 겁니다.”
“이 싸움의 대가는 스탄다비아가 알리사를 넘김으로써 충분히 지급했다고 생각합니다.”
카스만이 적극적으로 반론을 펼쳤다.
“그때는 스탄다비아와 프라인 사이에 깊은 원한이 있는지 몰랐습니다. 안 그래도 그 부분을 말하고 싶었는데 잘됐군요. 처음 동맹을 요청했을 때, 그런 정보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만약에 그 사실을 알았다면 우리는 이 동맹에 대해 더욱 신중하게 결정했을 겁니다.”
“아니, 우리는 알리사를 넘길 테니 동맹을 맺자고 한 것뿐입니다. 아드리온도 이 조건에 찬성했기 때문에 받아들인 거 아닙니까? 사실, 프라인이 갑자기 끼어든 것도 우리와의 원한 때문이라기보다는 경쟁자의 성장을 막고 싶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앞으로 알리사를 차지한 쪽이 상대방보다 훨씬 강해질 게 빤하니까 프라인 입장에서는 당연한 조치겠지요.”
카스만이 무스타호 자작의 말에 강력히 반발했다.
“그럼 우리가 이대로 알리사에서 물러나도 상관없다는 이야기입니까? 분명 알리사는 중요한 가치가 있으나, 그건 먼 미래의 일입니다. 그리고 아까 이야기했다시피 우리는 더 이상 알리사에서 싸울 여력이 되지 않습니다. 스탄다비아에서 지원하지 않으면 우리로서는 어쩔 수 없이 철수할 수밖에 없습니다.”
무스타호 자작이 더 이상의 반론은 듣지 않겠다는 듯이 확실히 선을 그었다.
카스만이 아무리 노력해도 칼자루는 아드리온 쪽이 쥐고 있으니, 애당초 스탄다비아가 이길 수가 없는 싸움이었다.
그러자 카스만이 한풀 꺾인 목소리로 말했다.
“좋습니다. 그럼 현실적으로 액수에 관해 이야기해 봅시다. 5,000골도만 해도 적은 돈이 아닌데, 그것도 모라자 두 달에 1,000골드라니요. 이건 말도 안 되는 처사입니다. 그 정도 금액은 스탄다비아에서 거두는 세금보다 훨씬 많은 돈입니다. 이건 결국 영지민을 쥐어짜라는 것과 같은 말인데, 우리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입니다.”
“스탄다비아의 평화를 생각하면 절대 큰 액수가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평화의 값어치는 절대 작지 않습니다. 이건 매우 합리적인 액수라는 것을 분명히 밝힙니다.”
“이건 스탄다비아가 아드리온의 밑으로 들어가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치욕적인 조건입니다. 말로만 동맹이지, 이건 상대를 무시하는 처사입니다.”
“무시라니요. 우리가 스탄다비아를 위해 흘린 피가 얼만데 그런 식으로 매도하시면 곤란합니다. 계속 이런 식이면 우리는 동맹을 깰 수밖에 없습니다.”
“으…….”
카스만이 입을 열려다 다시 다물었다.
무스타호 자작의 말이 협박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더 이상 토론을 이어 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미 오랜 세월을 살아온 만큼 웬만해서는 잘 흥분하지 않는 그도 이번에는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얼마나 분한지 창백한 얼굴로 쓴웃음을 짓는 모습이 애처로워 보일 지경이었다.
카스만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자, 무스타호 자작은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5분 뒤, 그의 얼굴은 더할 나위 없이 일그러졌다.
설마 자포리자가 이렇게 나올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것이다.
“그럼 어쩔 수 없군. 동맹을 깨는 것으로 하지.”
너무나 간단한 말이었다.
하지만 이 말의 파급력은 어마어마했다.
“정말입니까? 문제를 대화와 타협으로 풀어야지, 아예 판을 엎으면 어떡하자는 겁니까?”
무스타호 자작의 얼굴이 당황한 듯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안정된 목소리로 카스만과 토론을 이어 가던 모습과 정반대로 새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