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150화 (150/300)

[150화] 늘어나는 적

“카스만 경과 나누는 대화를 보니 타협할 생각은 전혀 없어 보이던데. 뭐,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우리도 아드리온을 돕고 싶지만, 솔직히 여력이 없네. 5,000골드는커녕 1,000골드도 없네. 비누를 생산 못한 지도 오래됐고, 알다시피 두 영지의 인구가 합쳐지면서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네. 게다가 알리사에서 온 이주민들은 애초에 가진 재산이 없으니 세금도 거둘 수 없지. 우리가 할 수 없는 걸 강요하니 어쩔 수가 없군.”

자포리자가 내린 결론은 타협이 아닌 거절이었다.

사실 돈이 없으니 그가 선택할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무스타호 자작은 자신이 생각하던 것과 너무 다른 전개에 말을 잇지 못했다.

사실 그도 스탄다비아가 처한 상황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자포리자가 이렇게 쉽게 거절할 거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정말이십니까? 지금 한 말이 일으킬 결과를 모르시고 하는 말씀은 아니겠지요? 만약 제가 이대로 돌아가 영주님께 보고를 올리면, 그 순간 동맹은 깨질 겁니다. 그럼 프라인에서 가만히 있을 거 같습니까? 아니, 프라인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와도 척지게 될 텐데, 이건 어떻게 감당하려 하십니까? 설마 우리가 가만히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시겠지요? 아니, 우리는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주절주절 떠드는 무스타호 자작의 얼굴은 당혹감으로 얼룩져 있었다.

“우리가 당장 알리사에서 병력을 빼는 순간, 프라인이 곧바로 스탄다비아를 압박할 겁니다. 아니면 아드리온이 프라인과 동맹을 맺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영지전을 신청할지도 모르지요. 당장 생각나는 것이 이렇게나 많은데, 이 중 하나라도 실제로 벌어지면 스탄다비아는 베르아스 왕국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 뻔합니다. 영주님, 정말 이대로 제가 돌아가기를 원하십니까!”

계속해서 말하던 무스타호 자작은 흥분을 참지 못하고 큰 소리를 내지르고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자포리자의 말에 얼마나 열을 받았는지 목덜미의 혈관이 툭 불거져 나와 있었다.

이 협상이 깨지는 건 아드리온이 원하는 결과가 아니었다.

“후우~”

그는 분노를 삭히려 크게 숨을 한 번 내뱉고는 조금 전과 다르게 조곤조곤 말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요구가 과했다면 어느 정도는 물러날 용의가 있습니다. 스탄다비아의 사정도 알고 있으니, 서로 대화를 통해 합리적인 결과를 이끌어 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지금 왕국의 정세가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할 정도로 혼란스럽습니다. 그럴수록 우리가 서로 믿고 굳건한 동맹을 이어 간다면, 이번 일뿐만 아니라 또 다른 어려움이 와도 같이 손을 잡고 헤쳐 나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런 시기에 믿을 수 있는 친구는 분명 큰 힘이 될 것입니다. 게다가 그 친구가 강하면 강할수록 더 큰 도움이 되겠지요.”

무스타호 자작은 자신이 한 말에 한 점 거짓도 없다는 듯 진정성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 스탄다비아에서 우리에게 투자하는 건 미래를 위한 하나의 든든한 뒷배를 마련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자포리자 영주님도 현명한 결정을 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분명 스탄다비아의 차기 영주님에게도 커다란 힘이 될 겁니다. 물론 지금 당장은 힘들 수도 있지만, 미래를 위해서라도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결정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스타호 자작의 말은 정중했으나 말속에 뼈가 있었다.

무엇보다 기분 나쁜 것은 보일 가와 5만에 이르는 영지민들의 목숨을 그의 세 치 혀에 올렸다는 점이다.

상대의 목줄을 쥐고 있다는 말을 영주의 면전에 대고 직접적으로 하다니, 이건 대단한 모욕이자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무슨 말을 그렇게 함부로 하는 겁니까? 돈을 내놓지 않으면 우리 모두를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겁니까? 아무리 아드리온이 우리보다 강하다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무례를 저지르다니!”

평소 큰소리 한 번 낸 적 없던 카스만이 쉰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얼마나 화가 났는지 그의 노구가 덜덜 떨리고 있었다.

“감히 일개 가신 주제에 어디서 함부로 끼어드느냐! 나는 아드리온을 대표해서 온 사절단이다. 네놈이 감히 아드리온을 우습게 본단 말이냐?”

하지만 무스타호 자작은 오히려 더욱 큰소리를 쳤다.

그는 이미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와 마찬가지였다.

이미 상대방을 협박한 이상, 멈출 수는 없었다.

예상치 못한 자포리자의 발언 때문에 마지막 수를 사용한 만큼, 무조건 성과를 거둬야 했다.

그 정도로 아드리온의 사정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아드리온의 영주인 게렉스 백작도 그에게 최대한 많은 돈을 받아 오라고 신신당부하지 않았는가.

그는 영주의 말에 자신만 믿으라고 큰소리를 땅땅 치고 나왔다.

이미 칼자루를 쥐고 시작하는데 성과를 올리지 못한다면, 평생 바보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처음 무스타호 자작의 주장과 달리 실제로 게렉스 영주가 원하는 돈은 3,000골드였다.

거기에 더해서 두 달에 한 번씩 500골드의 돈을 바치길 원했다.

물론 이 금액도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스탄다비아에서 걷히는 모든 세금을 바쳐도 모자랄 돈이었다.

무스타호 자작은 일단 크게 지른 뒤, 자포리자가 울며 겨자 먹기로 돈을 깎으려 하면 자신이 온갖 생색을 내며 깎아 주려는 생각이었다.

그러면 분명 자신의 손에도 온갖 떡고물이 묻을 건 당연했다.

자신의 이득도 챙기고, 게렉스 영주가 원한 액수보다 더 높은 금액으로 협상해 공을 세울 계획이었다.

이건 꿩 먹고 알 먹기였다.

하지만 협상은 자신이 상상도 못 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만약 이대로 아무런 성과 없이 돌아간다면 그의 경력은 끝장이었다.

아니, 자신 혼자만으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그의 가문도 최소 몇십 년 동안 피해를 받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자신의 자손과 그 자손의 자손, 모두의 운명이 걸려 있었다.

이제 모 아니면 도였다.

적당히 밀고 당기면서 최대한의 성과를 얻으려는 계획은 자포리자가 발을 빼 버리는 바람에 모두 어그러졌다.

이판사판으로 나오는 무스타호 자작의 무례한 태도 때문에 자포리자의 얼굴에 노기가 서렸다.

자포리자는 빙하보다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 뜻은 분명히 밝혔다. 바쁘니 이만 나가 주겠나?”

아무 성과도 없이 이대로 돌아가면 자신의 처지도 곤란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조금 전의 당당한 모습은 잠시 접어 두고 어떻게든 타협의 실마리를 이어 가려 한 것인데, 자포리자의 느닷없는 축객령에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잠깐만! 이대로 끝낼 수는 없습니다. 진정 우리와 영지전을 벌이겠다는 겁니까?”

그는 이미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무스타호 자작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내 분명 나가라고 말했다.”

자포리자의 눈에 살기가 맴돌았다.

무스타호 자작은 도저히 믿을 수 없었지만, 이 협상이 완전히 깨지고 최악의 결과로 귀결됐음을 받아들여야 했다.

“후회하실 겁니다.”

그는 서늘한 눈초리로 자포리자를 노려보았다.

“글쎄. 후회는 네놈이 먼저 할 거 같은데.”

자포리자의 단호한 말에 무스타호 자작은 분노한 듯 강하게 쥔 주먹을 부르르 떨더니 그대로 방을 나가 버렸다.

“영주님, 이대로 보내도 되겠습니까?”

카스만도 자포리자의 행동을 전혀 짐작하지 못한 듯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뭐… 어쩌겠습니까, 돈이 없는데. 이번에는 협상을 통해 액수를 깎아 넘어간다고 해도, 다음번에 줄 돈을 구하는 건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그럴 바에야 처음부터 안 주는 게 이득 아니겠습니까. 겨우 두 달의 시간을 벌기 위해 그 많은 돈을 쓸 필요는 없지요. 만약 억지로 짜내어 돈을 맞춰 준다 해도, 우리는 평생 그들의 노예로 살아야 합니다. 목숨이 아무리 귀하다고 한들, 그런 삶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미 단호하게 결심을 내린 자포리자의 눈동자는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우리에게 위기가 닥친다면 저들은 얼마나 도와주겠습니까? 우리와 저들 사이의 신뢰는 처음부터 발톱의 때만큼도 없었습니다. 단지 필요 때문에 서로 잠시 동맹한 것뿐. 이게 전부 우리가 힘이 없기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차라리 그들에게 줄 돈을 우리에게 투자한다면, 적어도 발버둥이라도 한 번 쳐 보지 않겠습니까?”

“물론 그렇기는 한데…….”

카스만은 뒷말을 잇지 못했다.

물론 자포리자의 말은 정론이었지만, 당장 자신들의 위협을 막아 줄 벽이 사라질 판이니 걱정이 되는 건 사실이었다.

* * *

게렉스 백작의 집무실에서는 엄청난 고함이 터져 나왔다.

“이런 병신 같은 새끼가!”

아드리온의 영주, 게렉스 호킹 백작은 무스타호 자작의 보고를 듣고 마자 그의 얼굴에 명패를 던져 버렸다.

퍼억!

날카로운 모서리에 찍힌 이마가 길게 찢어지고 피가 흘러내렸지만, 무스타호 자작은 입을 꽉 다문 채 고개를 바닥으로 처박고 있을 뿐이었다.

“꺼져. 이 병신 같은 놈아. 이런 쉬운 일도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넌 앞으로 내 눈에 띄지 마!”

무스타호 자작은 자포리자에 이어 자신의 영주에게도 축객령이 떨어졌다.

그는 이마에서 흐르는 피를 닦지도 못하고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방을 나갈 수밖에 없었다.

이번 일로 인해 앞으로 자신의 가문은 거의 끝장이 났다고 봐도 무방했다.

이미 이렇게 될걸 알고 있었지만, 막상 현실로 닥치니 터지려는 울음을 참는 것이 무척이나 힘들었다.

이제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에게 자작의 지위를 물려줄 수 있을지도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게렉스 영주가 원한 액수로 협상했다면… 이런 꼴을 당하지 않았을 텐데.'

깊은 후회가 밀려들었다.

하지만 그가 모르는 사실은 게렉스 영주가 원한 조건으로도 자포리자는 협상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리라는 점이다.

그러니 무스타호 자작은 애초에 이 일을 받아들이지 말았어야 했다.

후회로 가득한 그의 발걸음은 무척이나 무거워 보였다.

게렉스 영주는 분을 참지 못하고 손에 걸리는 모든 것을 집어 던졌다.

집무실 안의 모든 살림을 박살 냈음에도 그의 분노는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오히려 곱씹을수록 더 화가 났다.

“감히 나에게 물을 먹여!”

게렉스 영주가 빠드득 이를 갈았다.

스탄다비아에 또 하나의 적이 추가되는 순간이었다.

* * *

경일이 던전 고유 식물의 재배에 푹 빠져 있는 동안, 이길호가 F급 던전의 공략에 참여하는 날이 왔다.

“여보, 몸조심해요. 절대 무리하지 말고, 당신만 믿고 사는 우리가 있다는 거 절대 잊으면 안 돼요.”

선호연의 두 눈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길호는 헌터로 활동한 지 이미 15여 년 이상 지난 상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호연과 다르게 이길호는 헌터가 된 후 처음 던전에 들어갔을 때처럼 설레며 떨리고 있었다.

“오랜만이라 좀 긴장되긴 하는데, 그동안 내가 던전을 떠나서 생활한 것도 아니고, 경험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 F급 던전은 우리 동네처럼 훤하다고 보면 돼. 그리고 헌터 협회에서 주관하는 사냥이라 안전하니까 마음 편하게 기다리고 있어.”

“여보, 이거 가지고 가요.”

선호연이 500㎖ 정도 되는 물병을 세 개 내밀었다.

“무슨 물을 이렇게나 많이 줘?”

“사장님이 당신이 사냥 간다고 하니까 챙겨 준 거예요. 이건 목마를 때 마시래요. 여기 두 개는 몬스터랑 싸우고 나서 마시라고 하던데, 하여간 잊지 말고 가져가요.”

이길호는 아내가 주는 물병들을 소중히 받아 들었다.

그는 이 물병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대충 알 수 있었다.

몬스터와 싸운 뒤 먹으라는 건 아마 힐링 포션과 체력 포션을 섞은 물일 것이다.

다른 하나의 물병에 담긴 것은 정확히 짐작할 수 없었으나, 아마 그것도 포션일 것이라 생각했다.

이길호의 짐작대로 나머지 물병에 담긴 것도 포션이었지만, 일반적인 포션이 아니라 마나 포션이었다.

아주 고가로 거래되는 물건이다 보니, 이길호도 거기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감사합니다. 사장님.’

이길호는 가방에 소중히 챙겨 넣었다.

약속 시간에 맞춰 도착하니 몇몇 헌터가 이미 도착해 있었다.

그는 헌터 협회에서 나온 직원에게 자신이 온 것을 알리고 대기했다.

이번 F급 던전은 모두 열한 명의 헌터들이 들어가기로 되어 있었다.

열 명의 헌터들과 헌터 협회에서 나온 한 명의 헌터가 동행했다.

헌터 협회에서 한 명이 따라가는 이유는 가장 등급이 낮은 F급 던전에서 의외로 가장 많은 사고가 일어나기 때문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마의 구간에 갇힌 헌터들 때문이었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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