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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151화 (151/300)

[151화] 잊고 있던 감각

F급 던전 공략에는 기존의 헌터들과 마의 구간에 갇힌 10레벨 헌터들이 지원하다 보니, 파티에 10레벨 헌터의 비중이 가장 높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F급 던전은 10레벨 헌터에게 결코 쉬운 곳이 아니었다.

파티의 구성원에 10레벨 헌터가 많을수록 사고가 일어날 확률이 높았다.

그렇기에 헌터 협회로서는 마의 구간에 갇힌 헌터들을 사냥에서 제외하고 싶었지만, 현실적인 문제가 많아 불가능한 일이었다.

우선, 마의 구간에 갇힌 헌터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마의 구간에 갇힌 헌터와 일반적인 헌터를) 구분할 수 있는 방법도 없었다.

그럼에도 어떻게든지 마의 벽에 갇힌 헌터를 걸러 내려고 하는 것은, 만약 공략에 참가한 헌터가 몬스터에게 모두 죽기라도 한다면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사정 때문에 헌터 협회는 F급 던전 공략 시에는 20레벨 정도의 헌터 한 명을 동행시켰다.

어느새 열 명의 헌터와 헌터 협회에서 지원 나온 헌터까지 모두 모였다.

그들 앞에 공기가 일렁이더니,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파란빛이 감도는 게이트가 나타났다.

다들 자주 봐서 익숙한 장면이긴 하지만, 볼 때마다 신기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헌터들에게 게이트 관리부 직원이 주의 사항에 대해서 설명했다.

“반갑습니다. 이번 던전 관리를 맡은 설기우입니다. 이번 던전의 등급은 F급입니다. 게이트의 에너지를 측정해 본 결과, 일반적인 수준의 F급 던전으로 보입니다. 그럼 모두 안전한 사냥하기를 바라며, 입장하겠습니다.”

설기우의 말이 끝나자 헌터들이 게이트로 들어갔다.

던전에 들어서자, 저 멀리 던전 핵의 존재감이 느껴졌다.

“씨발, 왜 스캐빈저 새끼가 사냥에 참여하는 거야. 짜증나게.”

게이트로 출발하기 전, 헌터들 중 한 명이 이길호를 보고 짜증을 냈다.

“거기, 던전에 들어왔으면 사냥에만 신경 쓰세요.”

헌터 협회에서 파견을 나온 헌터가 주의를 주었지만, 그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니, 아무리 스캐빈저를 구분할 방법이 없다고 해도 저런 노땅은 누가 봐도 마의 구간에 갇힌 10레벨 아닌가요? 저런 놈은 알아서 걸러 줘야 하는 거 아시잖아요. 저런 놈 때문에 성실하게 레벨 업을 하는 우리 같은 선량한 헌터들의 기회가 박탈된다고요.”

“어쨌든 던전에 들어온 이상, 사냥에만 집중하세요. 이런 식으로 문제를 일으키면 따로 페널티를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그쪽도, 사람이 포기할 줄 아는 것도 하나의 용기가 아니겠습니까?”

파견 나온 헌터도 이길호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이길호는 헌터들이 보내는 짜증스러운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처럼 나이가 많으면 누구나 스캐빈저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99%의 헌터들이 스물두 살 안에 각성을 하는데, 자신처럼 서른이 넘은 아저씨가 F급 던전에 들어왔다는 건 십중팔구는, 아니, 거의 백 퍼센트 마의 구간에 갇혔다는 소리였다.

이길호는 마의 구간을 벗어났다고 굳이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가 진실을 말해도 아무도 믿어 주지 않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하기야 자신도 마의 구간을 벗어난 게 믿어지지 않을 지경인데, 저들은 오죽하겠는가.

그냥 헌터들의 따가운 시선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그러고 보면 사장님을 만난 게 기적이구나. 저들의 눈초리가 아무리 사나워도 전혀 화가 나지 않네.’

이 파티에도 분명 마의 구간에 갇힌 헌터가 있을 것이다.

분명 아직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사냥에 참가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이들일수록 이길호를 더 신경질적으로 대했다.

마치 이길호처럼 마에 구간에 갇힌 채 늙어 가지 않겠다는 듯이 스스로에게 지르는 비명일 수도 있었다.

헌터들이 이길호를 배척하자, 그는 자연히 파티의 가장 뒤로 쳐졌다.

그는 자신에게 가장 강하게 가시를 세운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이길호의 눈에는 쓸쓸함과 깊은 연민이 어려 있었다.

그 남자의 심정은 어느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전진하던 헌터들의 앞을 막아선 건 다섯 마리의 고블린이었다.

“크르륵.”

고블린이 헌터들을 향해 경계심을 드러냈다.

놈들은 천천히 움직이며 헌터들과의 거리를 좁혀 왔다.

그러자 방패를 든 헌터들이 앞으로 나서며 고블린과 맞섰다.

“캬아악!”

고블린이 방패를 든 헌터들을 향해 뛰어들면서 싸움이 시작됐다.

텅!

고블린이 방패를 녹슨 칼로 후려쳤다.

방패에서 전해지는 충격에 헌터가 뒤로 밀렸다.

녀석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재빠른 움직임으로 방패를 든 헌터에게 달려들었다.

놈의 녹슨 칼이 헌터의 목을 노리고 휘둘러지는 순간, 이길호가 번개같이 뛰어나가 고블린의 가슴에 검을 찔러 넣었다.

그의 찌르기는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고 빨랐다.

고블린은 분한 듯 이길호를 향해 원망스러운 눈빛을 보내고 죽었다.

15여 년 만의 싸움인데, 몸은 예전에 사용하던 기술을 정확히 기억했다.

이길호는 자신이 마의 구간에 갇혔음을 오랫동안 인정하지 않았다.

절대 아닐 거라 믿었고, 누구보다 피나는 노력을 했다.

사냥할 때에는 누구보다 앞장서서 싸웠다.

다치기도 많이 다치고 죽을 뻔한 적도 많았다.

한때는 실력으로 마의 구간을 넘어서려는 시도까지 했다.

그 덕에 비슷한 레벨의 헌터들에 비해 확실히 뛰어난 실력을 갖출 수 있었지만, 그 정도로는 레벨 차이를 뛰어넘는 건 불가능했다.

스캐빈저 생활을 하는 동안 고블린은 피해 다니기 바빴는데, 그런 놈의 심장에 검을 박자 대단한 쾌감이 밀려들었다.

자신의 달라진 위치가 정확히 실감이 났다.

이제부터 자신은 헌터였고, 지금이 그 헌터로서의 첫걸음이었다.

코끝이 찡해지고 눈물이 나려 했지만, 이길호는 멈추지 않았다.

그의 칼춤이 화려하게 이어졌다.

그의 검에 고블린들이 죽어 나갔다.

통쾌한 모습에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한차례 고블린 사냥이 끝나자, 그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조금은 너그러워졌다.

고블린의 마나석을 챙기고 던전 핵이 있는 곳을 향해 일직선으로 나아갔다.

놈들은 끊임없이 나타났지만, 어느 정도 손발을 맞춘 헌터들은 초반에 비해 좀 더 안정적으로 잡을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이길호의 활약은 독보적이었다.

이길호는 재빨리 고블린의 사각으로 숨어들어 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녀석의 어깨 쪽 살이 뭉텅 잘려 나갔다.

“케에에엑!”

고블린의 고통스러운 비명은 오히려 이길호에게 힘이 되었다.

놈이 시뻘게진 눈으로 이길호에게 몸을 돌리는 순간, 그는 자세를 낮추고 고블린의 품으로 쇄도했다.

그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두 손으로 강하게 거머쥔 검을 고블린의 목에 찔러 넣고는 재빨리 검을 회수했다.

목을 꿰뚫린 녀석은 당연히 바닥으로 쓰러졌다.

푹!

이길호는 멈추지 않았다.

또 다른 고블린의 목에 검을 박자 피거품을 물고 축 늘어졌다.

“어이, 아저씨. 제법 하는데?”

헌터 중 한 명이 건들거리며 다가왔다.

그는 이 파티의 헌터들 중 가장 강했다.

이길호가 부족한 레벨을 실력으로 채우려 했다면, 그는 레벨의 힘으로 무리 없이 고블린을 썰어 나갔다.

아마 E급 던전으로 올라가기엔 레벨이 약간 부족해 F급 던전에서 활동하는 헌터 같았다.

“하하하, 레벨이 낮아서 최선을 다하는 거죠.”

이길호는 남자의 무례한 태도를 웃어넘겼다.

레벨이 깡패인 세상인데, 굳이 나이를 따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캐빈저 때 받은 무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

“야, 씨발! 똑바로 못해? 병신아, 그거 하나 제대로 못하면 어쩌자는 거야. 너 때문에 다쳤잖아!”

“이따위로 할 거면 헌터 때려치워. 너 때문에 몇 명이 위험해진 줄 알아? 생판 모르는 네놈 때문에 내가 왜 이런 위험에 빠져야 하는 거야? 내 치료비하고 다쳐서 일 못하는 기간 동안 입는 손해는 어떻게 책임질 거야?”

“너, 조심해라. 밖에서 혹시라도 마주치면 내가 절대 가만두지 않을 테니.”

그에 비해 욕을 먹는 헌터들도 많았다.

싸움에서 제 몫을 하지 못하는 헌터들은 욕설을 들었다.

몬스터와 싸우며 목숨이 오가는 상황이라 욕의 수위는 매우 심하고 적나라했다.

그렇기에 욕을 들은 헌터들의 얼굴은 어김없이 붉어져 있었다.

‘휴~ 스캐빈저가 가장 비참할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네. 저 정도 실력이면 사냥 나올 때마다 욕을 먹겠구나.’

이길호는 욕먹는 헌터가 불쌍하기는 했지만, 굳이 동정하지는 않았다.

그러고 나서 이길호는 경일이 준 물을 마셨다.

그가 짐작한대로 역시 포션이었다.

한 모금 마신 순간, 금방 체력이 차오르고 다친 상처가 아물었다.

‘이럴 수가!’

이길호는 자신의 상상을 뛰어넘는 경일의 스케일에 깜짝 놀랐다.

설마 500㎖의 물병 안을 포션으로 꽉 채웠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사실 평범한 헌터들도 힐링 포션을 하나 정도는 꼭 가지고 다녔는데, 혹시나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줄 수 있는 수단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가진 포션병의 크기는 50㎖ 정도에 불과했기에 헌터들은 조금씩 아껴 가며 마실 수밖에 없었다.

그 정도로 귀중한 포션을 경일은 가득 챙겨 주었으니, 이길호로서는 감동받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효능도 뛰어나 상처가 금방 낫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덕분에 이길호는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지쳐 가는 헌터들과 다르게 쌩쌩했다.

오히려 힘이 불끈 솟았다.

이번에 처음으로 포션을 마셔 봤는데, 이건 완전히 신세계였다.

‘포션의 효과가 원래 이렇게 뛰어난 건가? 아닐 거야. 내가 아는 상식과는 전혀 달라. 사장님의 포션이 특별한 게 틀림없어.’

이길호는 포션을 마시는 게 아까워서 망설여질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까지 느낀 경일의 성격으로 봐서는 자신의 이런 모습을 좋아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베푸는 걸 좋아하는 경일의 성격상 큰 병에 포션을 담아 준 이유가 모두 마시라는 뜻이 틀림없었으니까.

“와우, 저 아저씨 나이도 많은데 아주 날아다니는구먼.”

“그러게. 처음에는 스캐빈저인줄 알았는데, 지금 보면 또 아닌 거 같고.”

“그래. 내 생각에도 아닌 거 같아.”

“그럼 뭐지? 저 나이 먹도록 뭐 한 거야?”

“왜, 그런 거 아닐까? 몬스터 피를 보고 쫄아서 관뒀다가 이제 나이가 들면서 복귀하는… 뭐, 그런 거?”

“그래.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니까 저렇게 열심히 하지. 사실 스캐빈저라가 저 정도로 열심히 한다면 다음에도 같이 사냥할 용의가 있긴 해.”

이제 이길호를 스캐빈저로 보는 눈이 많이 사라졌다.

포션 덕분에 부상에 대한 염려가 사라지고, 체력까지 받쳐 주니 고블린을 상대하는 게 확실히 편해졌다.

물처럼 마신 포션 덕에 날아갈 것 같은 컨디션이었다.

지금까지는 다른 헌터들과 협력해서 고블린을 잡았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믿는 구석이 있으니 긴장이 풀리고 훨씬 더 대범해지고 자신감이 생겼다.

하지만 이길호는 어느 정도 나이를 먹은 만큼, 자신감과 만용을 구분할 줄 알았다.

이성을 차갑게 유지하며 싸움을 이어 나갔다.

고블린이 녹슨 칼을 치켜들고 달려들었다.

이길호는 달려오는 고블린에게 온 신경을 집중했다.

놈은 크게 한 번 숨을 들이마신 뒤 그대로 호흡을 멈추고는 녹슨 칼에 힘을 실어 이길호의 머리를 향해 수직으로 내려쳤다.

고블린의 공격은 눈 깜빡할 사이에 그의 머리를 양단할 수 있을 것처럼 빨랐다.

하지만 이길호의 눈에는 뻔히 보였다.

그 짧은 순간, 이길호는 스텝을 밟아 이미 칼의 궤도에서 벗어나 있었다.

녹슨 칼이 이길호의 머리에 도달하는 순간, 고블린은 옆구리에서 느껴지는 살이 타오르는 듯한 고통에 무기를 놓쳤다.

그가 순식간에 칼을 피하고 놈의 옆구리에 검을 쑤셔 박은 것이다.

이윽고 고블린은 영화의 슬로비디오처럼 그대로 앞으로 쓰러져 얼굴을 바닥에 처박았다.

그 순간, 이길호는 커다란 희열에 휩싸였다.

몸이 한 단계 진화된 듯한 느낌이 든 것이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감각이었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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