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레벨 업
‘그래. 바로 이 느낌이었어. 이 감각을 느끼기 위해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데… 나에게 더는 허락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얼마나 절망했는데…….’
자신에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억지로, 억지로 마음속 깊은 곳으로 밀어 넣은 아픔이 다시 떠올랐다.
지금까지 ‘괜찮다’, ‘별거 아니다’라고 자신을 속이고 살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괜찮았다.
닿을 수 없는 하늘의 별을 딴다면 이런 기분일까.
이길호는 주먹을 쥐고 하늘을 향해 뛰어오르고 싶었다.
이곳에 다른 사람들이 없었다면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펑펑 울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보다 한참 어린 헌터들 앞에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눈에 힘을 주고 버텼다.
<상태창>
레벨 11
힘 (108/110)
민첩 (105/110)
체력 (110/112)
마나 (115/115)
이길호는 상태창에 찍힌 11이라는 숫자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너무 기뻐 날뛰려는 마음을 다잡으며 누구보다 열심히 고블린을 사냥했다.
그러면서,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 준 경일에게 다시 한번 깊은 감사를 올렸다.
다행히 사냥은 큰 사고 없이 끝이 났다.
던전의 핵을 무사히 깨고 이제는 돌아갈 일만 남았다.
다들 큰 사고 없이 사냥이 끝난 걸 기뻐하면서 게이트를 향해 걸었다.
네 시간 정도 걸었을 때, 스캐빈저들이 보였다.
어제까지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들을 보니 자신이 얼마나 축복받은 사람인지 깨달았다.
지금까지 저주받은 인생이라 생각하며 운명을 원망했는데,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이렇게 간사했다.
‘앞으로 더욱 겸손하게 살아야겠어.’
그는 스캐빈저들을 향해 가볍게 인사를 하고 지나갔다.
그러고 나서 게이트를 나와 정산을 받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오늘따라 가족들이 너무 보고 싶었다.
경일은 던전에서 나와 힘찬 발걸음으로 분식점을 향해 걸었다.
“공기 좋고, 날씨 좋고, 아이들이 딱 뛰어놀기 좋은 날씨네.”
분식점에 도착한 그는 가장 먼저 인벤토리에서 꺼낸 재료를 냉장고에 넣었다.
채소를 씻고 한창 손질 중인데, 분식점 문이 열렸다.
아직 오픈 시간이 멀었는데 벌써 손님이 왔나 싶어 홀로 나가 보니 이길호였다.
“형님, 웬일이세요?”
전혀 생각지 못한 이길호의 등장에 경일이 의아한 듯 물었다.
“이번에 사장님 덕분에 마의 구간에서 벗어났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수한이를 챙겨 주시고, 아내의 병을 고쳐 주신 것만 해도 엄청난 은혜인데, 저한테까지 은덕을 베풀어 주시다니요.”
이길호는 경일을 향해 깊숙이 머리를 숙였다.
경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도 수한이 가족이 자신의 비밀에 대해 눈치채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굳이 자신의 입으로 말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가 생각을 해 봤습니다. 저희 가족을 구해 주신 은혜를 어떻게 갚을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사장님께 도움이 될 만한 게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내가 그랬듯이 저도 사장님을 근처에서 모시게 해 주십시오.”
이길호가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경일을 바라봤다.
그의 강렬한 의지가 그대로 느껴졌다.
전쟁터로 떠나기 전의 장수처럼 결연한 이길호의 태도에 경일은 당황했다.
“형님, 안 그러셔도 됩니다. 제가 특별히 한 것도 없으니까 이러실 필요 없습니다.”
이런 상황이 익숙지 않아서 그런지 무척이나 쑥스러웠다.
“아닙니다. 이렇게 큰 은혜를 입고 그냥 넘어가는 건 짐승과 다름없는 일입니다. 저희 부부는 사장님을 평생 모시기로 다짐했습니다. 그러니 사소한 일들은 모두 저희 부부에게 맡겨 주십시오. 사장님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강해지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허락해 주십시오!”
이길호의 강한 다짐이 경일의 가슴을 울렸다.
계속해서 거절하는 게 오히려 너무 큰 실례라고 느껴질 정도였다.
‘어떻게 해야 하지? 에이, 모르겠다. 형님이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겠지.’
“형님 편하신 대로 하세요.”
“감사합니다!”
그렇게 동네 분식에 직원 한 명이 늘어났다.
“사장님, 언니, 좋은 아침입니다.”
손주아가 환한 얼굴로 출근했다.
“주아 씨, 어서 와.”
평소와 달리 손주아를 맞이한 건 이길호였다.
“어머, 형부! 아침부터 무슨 일이에요?”
“오늘부터 여기서 일하기로 했어.”
“네? 그럼 저 잘리는 거예요?”
그녀의 얼굴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하하하, 아니야. 인원 보강이야. 내가 요즘 자리를 자주 비우니까, 주아 씨 힘들까 봐 한 명 더 뽑았어.”
경일이 웃으며 말했다.
“어휴, 난 또 잘리는 줄 알았잖아요. 언니는 좋겠다. 24시간 부부가 붙어 있고…….”
“글쎄다. 잘 모르겠는걸.”
늘 웃는 얼굴로 공감을 잘하던 선호연이 그녀답지 않게 시큰둥한 말투로 대답했다.
현실 부부의 작은 단면을 잠깐 본 듯했다.
오늘은 날씨가 좋아 그런지, 매대를 찾는 꼬마 손님들이 많았다.
다들 열심히 뛰어놀았는지 옷 여기저기가 더러워져 있었지만, 표정은 모두 싱그러웠다.
“민수야, 다쳤어?”
“아까 놀이터에서 뛰다가 넘어졌어요.”
“아프겠다.”
“괜찮아요. 하나도 안 아파요. 남자는 이 정도로 울지 않아요.”
민수가 늠름한 얼굴을 하며 경일을 바라봤다.
“하하, 그래. 남자가 그 정도로 울면 안 되지.”
“봤지? 연이야, 나는 용감한 남자야.”
민수가 한껏 상기된 얼굴로 옆에 있는 연이를 보며 으스댔다.
“응, 오빠 멋있어.”
연이도 싫지 않은 얼굴로 민수를 응원했다.
‘아이고, 요 귀여운 것들. 아주 봄바람이 부는구나.’
경일은 민수를 불러 상처를 닦고 약을 발라 주었다.
그러고는 힐링 포션을 탄 물을 먹였다.
혹시나 상처가 너무 빨리 나으면 의심을 살까 봐 적당량을 섞었다.
살짝 까진 상처에 조금 과한 처치일 수도 있지만, 어차피 포션은 넘쳐났다.
경일이 놀랄 정도로 손윤찬의 연구욕은 엄청났다.
그는 잠을 자는 시간 이외에는 모두 포션 연구에 올인 했다.
경일이 전해 준 스탄다비아의 포션 레시피를 기반으로 그는 자신만의 포션을 만들어 갔다.
그 결과 스킬이 무려 두 단계나 뛰어올랐다.
이제 시장에 제품을 내놓아도 될 만큼 그가 만든 포션의 효능은 뛰어났다.
아니, 정확하게는 최고급 포션의 효능을 뛰어넘으려 하고 있었다.
경일은 그에게 무한한 던전 고유 식물을 공급해 주었고, 지구에서는 아직 모르는 스탄다비아에서 익힌 던전 고유 식물의 효능까지 모두 알려 주었다.
그러자 그는 물 만난 고기처럼 대단한 포션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손윤찬이 만든 포션은 경일에게도 큰 도움이 됐다.
꾸준히 마나 포션을 먹자 경일의 마나는 몸속의 불순물이 사라져 더욱 정순해졌다.
마나 자체가 한 단계 위로 상승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게다가 그 포션들은 스탄다비아로 보내져 자포리자와 그를 따르는 기사들이 빠른 속도로 강해지는데 도움을 주었다.
최근 자신이 한 일 중, 가장 잘한 일이 손윤찬의 영입이었다.
손주아를 통해 충분히 믿을 만한 사람인 건 알고 있었지만, 직접 겪어 보니 그는 훨씬 입이 무겁고 의리 있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만든 포션들이 시중에 풀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그는 한 번도 경일에게 묻지 않았다.
그저 이런 기회를 준 경일을 무한히 신뢰했고, 지금의 생활에 크게 만족해했다.
포션을 넣은 물을 먹이자, 아이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어, 아저씨. 상처가 하나도 안 아파요. 엄청 쓰라렸는데 참고 있었거든요.”
“하하하, 약 발라서 그런 거야. 얼른 가서 민수가 좋아하는 만두 먹어.”
“네!”
민수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여섯 명의 아이가 제각기 먹고 싶은 것을 말했다.
서로 말이 겹쳐 헷갈릴 경우도 많았지만, 경일은 철석같이 알아듣곤 아이들이 원하는 음식을 앞 접시에 놓았다.
아이들을 접대하는 그는 레스토랑에서 오랫동안 근무한 웨이터처럼 능숙했다.
한차례 폭풍이 지나고 새롭게 온 손님은 생각도 못한 사람인 수아였다.
“아저씨!”
수아가 저 멀리서 경일을 알아보고 손을 흔들었다.
던전병이 깨끗이 나은 수아의 얼굴은 처음 본 그날처럼 뽀얗게 살이 올라 있었다.
“수아야! 여기까지 웬일이야?”
“수녀님이 생일 선물로 뭐 받고 싶냐고 하셔서 아저씨 분식점 가고 싶다고 했어요. 이번 달에 생일인 오빠들이랑 언니들도 같이 왔어요. 마음껏 먹고 오라고 수녀님이 카드도 줬어요.”
수아가 경일을 보고 방긋방긋 웃었다.
아이의 얼굴엔 더 이상 던전병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어젯밤에 봤다고 오늘 반갑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늘 밤에만 보던 아이들을 태양 아래서 보니 또 색달랐다.
“다들 어서 와. 아저씨 가게는 처음이지? 생일이니까 아저씨가 한턱낼게.”
“감사합니다.”
아이들의 무리 중에 가장 나이가 많은 민찬이가 의젓하게 인사를 했다.
“민찬이는 밝은 데서 보니 듬직하네. 그래, 여기로 앉아.”
아이들을 전부 다찌에 앉히고 경일은 근사한 생일상을 차렸다.
커다란 생선도 몇 마리 굽고 두툼한 고기도 구웠다.
그러고 나서 급하게 케이크를 사 와 초에 불을 붙이고 다 같이 소원을 빌며 불었다.
“생일 축하해! 모두 박수!”
경일이 먼저 박수를 치자, 다 같이 손뼉을 쳤다.
수아는 즐거운지 가장 크게 손뼉을 쳤다.
마음껏 웃고 박수하는 건강한 모습에 괜히 눈시울이 시큰해져 왔다.
“사장님. 학원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민찬이 경일에게 꾸벅 인사했다.
그는 내년이면 나이가 다 차 보육원을 나가야 했다.
어린 나이에 혼자 사회생활을 해야 하는 민찬이의 처지는 누구보다 경일이 가장 잘 이해하고 있었다.
경일은 한참을 고민하다 민찬이가 하고 싶은 일을 물어본 뒤, 지원을 시작했다.
그 덕분에 민찬이는 자동차 정비 학원에 다닐 수 있었다.
자격증을 가지고 있으면 앞으로 거친 사회를 살아가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혹시 누가 무시하거나 하면 바로 달려와. 아저씨가 보기보다 능력이 막강하거든.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지 아저씨한테 말해. 알았지?”
“네.”
부끄러운지 살짝 붉어진 얼굴로 민찬이가 대답했다.
힘든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게 가장 좋지만, 만약 억울한 상황에 놓이기라도 할 것 같으면 언제든지 출동할 생각이었다.
수아는 경일의 얼굴을 보기만 해도 즐거운지 연신 웃음을 터뜨렸다.
경일은 아이들의 앞 접시에 고기도 올려 주고 생선 뼈도 발라 주었다.
그냥 아이들이 즐겁게 먹는 모습만 봐도 기분이 좋았다.
식사를 끝낸 아이들을 데리고 경일은 오래간만에 시내의 백화점으로 갔다.
“와, 아저씨. 여기 너무 좋아요!”
예쁘게 꾸며진 백화점 내부를 본 수아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아이들이 입고 싶은 옷 한 벌씩을 선물한 뒤, 보육원으로 데려다주었다.
‘앞으로 한 달에 한 번씩 아이들 생일 파티를 열어 줘야겠어.’
분식점으로 돌아가는 경일의 발걸음은 무척 가벼웠다.
희진이에게 죽을 준 이후로 죽을 찾는 이들이 하나둘 늘어났다.
산동네에는 던전병을 앓고 있는 이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그나마 수한이 집은 이길호가 스캐빈저라 약값을 조달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다른 집들은 던전병이 주는 고통을 온몸으로 겪어야 했다.
경일은 죽을 찾는 아이들에게 비후초가 들어간 죽을 쒀서 보냈다.
이길호가 분식점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경일에게 받은 임무는 그런 아이들의 집을 방문해 아픈 사람들의 병명을 알아 오는 일이었다.
비후초는 모든 던전병의 고통을 덜어 주고 병세를 완화시켜 줄 수 있지만, 근본적인 치료법은 아니었다.
기왕 아이들을 도와주기로 마음먹은 이상, 더 효과적인 방법을 사용하기로 했다.
이길호가 알아 오는 던전병의 정보에 따라 그에 맞는 치료 식물을 넣은 죽을 주었다.
경일에게는 산동네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을 보는 것이 힐링이고 행복이었다.
언제부터인지 몰랐지만, 경일은 이 동네를 자신의 영역으로 인식하고 그 안에 사는 아이들의 웃음을 지켜 주려 노력하고 있었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